3화(5,530자)

남탕에 들어간 할머니들

목욕탕 남북 회담 · 모세담

12월 9일 토요일 새벽 다섯 시⁠, 옥자는 남탕 보일러 밸브를 돌렸다⁠. 남탕은 몇 해 전부터 오후에만 열었다⁠. 남자 손님이 줄고 남탕 때밀이 영감이 은퇴한 뒤로⁠, 아침의 남탕은 물 없이 잠을 잤다⁠. 오랜만에 깨운 탕은 물이 차는 소리부터 낯설었다⁠. 바닥 타일이 여탕보다 한 톤 짙었고⁠, 벽에는 1978년에 그린 소나무와 학 두 마리가 김에 젖어 있었다⁠.

여탕 문 앞에는 노란 띠가 그대로였다⁠. 검은 점퍼 차림의 요원 둘이 밤새 접이식 의자에 앉아 있다가⁠, 옥자가 장화 소리를 내며 지나가자 동시에 일어났다⁠.

“⁠밤새 여기 있었어⁠?⁠”

“⁠예⁠. 검측 완료 구역이라서요⁠.⁠”

“⁠빈 탕을 밤새 지켰구나⁠. 탕이 고마워하겠다⁠.⁠”

옥자는 남탕 탕 가장자리에 노란 바가지 열두 개를 엎었다⁠. 여탕에서 들고 온 바가지였다⁠. 박 바가지만은 띠 너머 못에 남겨 두었다⁠. 띠를 넘으면 검측을 처음부터 다시 한다고 했다⁠. 옥자는 띠 너머로 바가지를 한참 보다가 남탕으로 돌아왔다⁠.

*

여섯 시⁠, 할머니들이 현관에 몰려들었다⁠. 정분이 맨 앞에서 단톡방 화면을 흔들었다⁠.

“⁠옥자야⁠, 「⁠남탕 6시⁠」가 뭐야⁠? 내가 잘못 읽었지⁠?⁠”

“⁠맞게 읽었어⁠. 오늘은 남탕이야⁠.⁠”

“⁠남탕⁠? 우리가⁠?⁠”

할머니들이 서로 얼굴을 보았다⁠. 달순이 절편 봉지를 꼭 쥐었다⁠. 복녀만 무슨 말인지 못 듣고 신발을 벗었다⁠.

요원 하나가 현관에서 정중하게 손을 들었다⁠.

“⁠어르신들⁠, 협조 차원에서 가방만 잠깐 보겠습니다⁠.⁠”

정분이 목욕 바구니를 통째로 내밀었다⁠. 요원이 바구니를 들여다보았다⁠. 각질 제거기⁠, 바나나우유 두 개⁠, 빨간 고무장갑⁠, 손주 사진이 든 지갑⁠, 그리고 비닐봉지에 든 금반지 하나⁠.

“⁠이건⁠…⁠…⁠.⁠”

“⁠어제 옥자가 갖다줬어⁠. 2009년에 잃어버린 반지를 경호처가 배수구에서 찾았대⁠.⁠”

정분은 요원의 팔을 덥석 잡았다⁠.

“⁠총각이 찾았어⁠?⁠”

“⁠저희 팀이 찾았습니다⁠.⁠”

“⁠아이고⁠, 경호처 최고다⁠. 대통령보다 낫다⁠.⁠”

정분은 바구니에서 바나나우유 하나를 꺼내 요원 손에 쥐여 주었다⁠. 요원은 근무 중이라는 말을 꺼내려다 정분의 얼굴을 보고 그냥 받았다⁠. 경호처 요원이 바나나우유를 받는 데 걸린 시간은 사 초였다⁠.

남탕 탈의실에 들어선 할머니들은 사방을 둘러보았다⁠.

“⁠남자들은 거울이 더 크네⁠.⁠”

“⁠의자 다리가 다 휘었어⁠. 무거운 놈들이 앉아서⁠.⁠”

“⁠여기 학 그림은 왜 둘이 다 수컷이야⁠?⁠”

“⁠학 암수를 언니가 어떻게 알아⁠?⁠”

“⁠볏이 빨갛잖아⁠.⁠”

“⁠학은 다 빨개⁠, 언니⁠.⁠”

옥자는 장갑을 끼고 정분부터 남탕 탕에 앉혔다⁠. 남탕 물이 여탕보다 반 도 낮았다⁠. 정분이 한쪽 발만 담그고 미지근하다고 했고⁠, 복녀가 맨 안쪽에 앉으며 물 좀 더 뜨겁게 하라고 했다⁠. 둘이 같은 말을 같은 아침에 하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옥자는 웃음을 참고 보일러실로 달려가 밸브를 반 바퀴 더 열었다⁠.

*

여덟 시⁠, 남기오가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구두를 벗었다⁠. 이번에는 양말까지 벗어 구두 안에 접어 넣고 맨발로 타일을 밟았다⁠. 안경은 처음부터 이마 위로 올려 두었다⁠. 이틀 만에 배운 사람이었다⁠.

기오의 손에는 알록달록한 종이 다발이 들려 있었다⁠. 일산의 큰 찜질방 안내지였다⁠. 할머니들이 목욕을 마치고 머리에 수건을 감은 채 휴게실 평상으로 몰려나왔다⁠.

“⁠어르신들⁠, 회담이 끝날 때까지 이곳 대신 일산 찜질방을 쓰시도록 준비했습니다⁠. 이용권은 세 주 치⁠, 식혜와 구운 계란 포함입니다⁠. 버스는 아침 일곱 시 반에 골목 앞에서 출발합니다⁠.⁠”

“⁠식혜 무한이야⁠?⁠”

“⁠무한입니다⁠.⁠”

“⁠구운 계란도⁠?⁠”

“⁠하루 두 개입니다⁠.⁠”

“⁠세 개로 해⁠.⁠”

“⁠세 개로 하겠습니다⁠.⁠”

정분이 안내지를 받아 들고 안경을 고쳐 썼다⁠. 소금방⁠, 황토방⁠, 얼음방⁠, 안마 의자⁠. 할머니들 눈이 안내지 위에서 반짝였다⁠. 달순이 얼음방이 뭐냐고 묻자 정분이 얼음 넣은 방이겠지 하고 대답했다⁠. 둘 다 틀리지 않았다⁠.

옥자가 장갑을 낀 채 평상 앞으로 걸어 나왔다⁠. 휴게실에 장화 소리가 두 번 울렸다⁠.

“⁠비서관⁠, 그 버스에 내 탕 물도 실어 가⁠?⁠”

“⁠사장님⁠.⁠”

“⁠엊그제 경호처가 토요일 새벽까지 여탕 물 채운다고 약속했어⁠. 지금 여탕에 물이 있어⁠, 없어⁠?⁠”

기오는 맨발을 한 번 내려다보았다⁠. 탈의실 바닥이 따뜻해서 발가락이 조금 펴져 있었다⁠.

“⁠없습니다⁠. 검측이 끝난 곳은 봉인하는 것이 규정입니다⁠. 곽 팀장이 말을 잘못 드렸습니다⁠.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사과는 받을게⁠. 물은 언제 줘⁠?⁠”

“⁠회담 날까지는 어렵습니다⁠. 그리고 다음 주 수요일부터는 남탕도 검측에 들어갑니다⁠.⁠”

할머니들이 안내지를 내려다보았다⁠. 식혜 사진이 갑자기 덜 시원해 보였다⁠.

“⁠그럼 수요일 목욕날은⁠?⁠”

“⁠찜질방에서 하시면 됩니다⁠.⁠”

“⁠등은⁠?⁠”

기오는 이번에는 대답을 준비해 왔다⁠. “⁠찜질방 세신사 두 분을 따로 잡아 두었습니다⁠. 비용은 저희가 냅니다⁠.⁠”

옥자는 장갑 낀 손을 내려다보았다⁠. 초록 실이 젖어 짙게 빛났다⁠.

“⁠남의 손으로 밀면 등이 놀라⁠. 언니들 등은 내 손을 알아⁠.⁠”

“⁠사장님⁠, 이 일은 등 하나의 문제가 아닙니다⁠. 연락 채널이 끊긴 다섯 해 동안 이산가족 생사 확인 한 건이 나라 전체의 일 년 결과였던 해도 있습니다⁠. 이번에 깨지면 또 그렇게 됩니다⁠.⁠”

복녀가 평상 구석에서 고개를 들었다⁠. 귀가 어두운 복녀가 「⁠생사 확인⁠」이라는 말만은 또렷이 알아들었다⁠. 복녀는 아무 말 없이 수건을 머리에서 풀어 무릎 위에 반듯이 접었다⁠.

*

아홉 시 이십 분⁠, 출입문 종이 거칠게 울렸다⁠. 채은이 코트 단추를 엇갈려 채운 채 뛰어 들어왔다⁠. 구두를 벗다가 한 짝이 현관 밖으로 날아갔다⁠.

“⁠비서관님⁠, 통지문 왔습니다⁠. 방금 연락 채널로요⁠.⁠”

기오가 종이를 받았다⁠. 옥자는 기오의 어깨 너머로 글자를 읽었다⁠. 장갑 낀 손가락으로 기오 어깨를 밀어 자리를 넓혔다⁠.

「⁠통일탕에 수요일과 토요일 아침 노인들의 목욕날이 있다고 들었다⁠. 회담 날에도 그대로 두기 바란다⁠. 탕 물을 빼지 말라⁠. 있는 그대로가 조건이다⁠.⁠」

“⁠있는 그대로⁠.⁠”

옥자가 소리 내어 읽었다⁠. 기오는 종이를 한 번 더 읽었다⁠. 같은 글자를 두 번 읽는 사람은 처음 읽을 때 믿지 않은 사람이었다⁠.

“⁠북에서 목욕날을 어떻게 알았지⁠?⁠”

채은이 숨을 고르며 말했다⁠. “⁠재작년에 지역 신문에 할머니 기사 났잖아⁠. 「⁠문산의 마지막 동네 목욕탕⁠」⁠. 거기 목욕날 얘기가 있었어⁠. 그리고 어제 우리가 경호 실무 협의 자료로 검측 계획을 넘겼는데⁠, 거기에 탕 물을 뺀다고 적혀 있었어⁠.⁠”

“⁠그래서 빼지 말래⁠?⁠”

“⁠응⁠. 빼지 말래⁠.⁠”

할머니들이 평상에서 와 하고 소리를 질렀다⁠. 정분이 단톡방에 글자를 찍었다⁠. 「⁠북에서우리편⁠」⁠. 달순이 이모티콘을 눌렀는데 하트 대신 생일 케이크가 나갔다⁠.

기오는 휴대전화를 꺼내 곽도식에게 걸었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말끝이 단단했다⁠.

“⁠곽 팀장님⁠, 여탕 물을 채웁니다⁠. 검측은 물을 채운 상태로 할 방법을 찾아 주십시오⁠. 예⁠, 압니다⁠. 규정은 저도 압니다⁠. 회담이 없으면 규정을 지킬 행사도 없습니다⁠.⁠”

전화를 끊은 기오가 옥자를 보았다⁠. 진 사람의 낯빛은 없었다⁠. 짜 놓은 계획을 통째로 접고 처음부터 다시 짜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목욕날은 그대로 하시면 됩니다⁠. 수요일에도⁠, 토요일에도⁠.⁠”

“⁠회담 날에도⁠?⁠”

“⁠그날 일은 그날 정하겠습니다⁠.⁠”

*

할머니들이 돌아간 뒤⁠, 기오는 현관에서 구두를 신다 말고 멈췄다⁠. 맨발을 구두에 넣기 전에 옥자를 돌아보았다⁠.

“⁠사장님께는 말씀드리는 게 맞겠습니다⁠. 북측 단장 리영식 씨의 아버지가 일곱 살 때⁠, 1951년 1월에 어머니와 문산역 앞 목욕탕에서 씻었다고 합니다⁠. 피란 내려오던 길이었고⁠, 그다음 날 아버지는 할아버지를 따라 강 건너 집에 다시 갔다가 못 돌아왔답니다⁠. 어머니와 마지막으로 씻은 곳이 여기라고⁠, 단장 아버지가 평생 말씀하셨답니다⁠.⁠”

옥자의 장갑 낀 손이 카운터 위에서 멎었다⁠.

“⁠어머니 이름은⁠?⁠”

“⁠모릅니다⁠. 북측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목욕탕 이름은⁠?⁠”

“⁠문산탕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통일탕 자리라고 저희가 확인했습니다⁠.⁠”

기오는 맨발로 구두를 신고 나갔다⁠. 구두 속에서 발가락이 오므라드는 소리가 들리지는 않았지만⁠, 걸음이 그렇게 보였다⁠.

*

오후 두 시⁠, 골목에 처음 보는 사람이 들어왔다⁠. 노란 머리에 큰 배낭을 메고 목에 사진기 두 대를 건 키 큰 남자였다⁠. 순대국집 구학봉이 앞장서서 데려왔다⁠. 학봉은 휴대전화 번역 앱을 남자 코앞에 들이밀고 있었다⁠.

“⁠누님⁠, 외국 기자야⁠. 우리 가게서 순대국 두 그릇 먹었어⁠. 여기가 회담 장소냐고 묻네⁠.⁠”

기자가 휴대전화에 대고 영어로 길게 말했다⁠. 화면에 우리말이 떴다⁠. 「⁠이곳이 역사적 회담이 열릴 목욕탕입니까⁠? 내부를 볼 수 있습니까⁠?⁠」

옥자는 카운터 유리창을 열고 휴대전화에 대고 또박또박 말했다⁠.

“⁠목욕하러 왔으면 구천 원⁠.⁠”

화면에 영어가 떴다⁠. 기자는 화면을 한참 보더니 지갑에서 만 원짜리를 꺼냈다⁠. 옥자는 천 원을 거슬러 주고 수건 두 장과 남탕 열쇠를 내밀었다⁠. 현관의 요원이 기자 배낭을 열어 보고 사진기 두 대를 맡아 두었다⁠. 기자는 사진기 없이 남탕으로 들어갔다⁠.

삼십 분 뒤⁠, 기자는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나왔다⁠. 젖은 머리에서 김이 올랐다⁠. 기자가 엄지를 치켜들고 한국말로 한 마디 했다⁠.

“⁠뜨거워⁠. 좋아⁠.⁠”

“⁠남탕은 여탕보다 반 도 낮아⁠.⁠”

학봉이 번역 앱을 끄고 옥자에게 몸을 기울였다⁠.

“⁠누님⁠, 기자 하나에 순대국 두 그릇이야⁠. 회담 날 백 명 오면 이백 그릇이고⁠.⁠”

“⁠백 명이 다 목욕하면 내 보일러 터진다⁠.⁠”

“⁠목욕은 누님이 받고⁠, 순대는 내가 받고⁠.⁠”

학봉은 손가락으로 골목을 가리키며 웃었다⁠. 골목 상인들의 셔터마다 학봉의 웃음이 번질 날이 머지않았다⁠. 옥자는 웃지 않았다⁠. 기자가 맡겨 둔 사진기를 찾아 가며 통일탕 간판을 올려다보았고⁠, 셔터 누르는 소리가 연달아 열두 번 났다⁠. 다음 주 외국 신문 어딘가에 분홍 고무장화가 실릴 것이었다⁠.

*

밤 아홉 시⁠, 요원 둘이 지켜보는 가운데 옥자는 여탕 급수 밸브를 돌렸다⁠. 노란 띠 하나가 풀려 바닥에 둘둘 말렸다⁠. 빈 탕에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처음에는 북을 치는 것처럼 컸다가⁠, 물이 차오를수록 낮아졌다⁠. 김이 다시 천창으로 올라갔다⁠.

옥자는 장화를 신고 탕 옆 못 앞으로 갔다⁠. 박 바가지를 못에서 내렸다⁠. 할매가 떠난 뒤 스물다섯 해 동안 걸어만 두고 쓰지는 않은 바가지였다⁠. 뒤집자 금 간 자리를 감은 녹슨 철사가 손바닥에 닿았다⁠. 철사는 세 바퀴였고⁠, 매듭은 서툴렀다⁠. 바느질은 잘해도 철사는 처음 감아 본 손의 매듭이었다⁠.

문산 할매 윤달님은 이 바가지로 남의 등에 물을 끼얹지 않았다⁠. 손님 바가지는 늘 따로 있었다⁠. 할매는 이 바가지에 맑은 물을 떠서 제 손만 헹궜다⁠. 시집온 첫해⁠, 옥자가 무슨 바가지냐고 묻자 할매는 우리 아들이 깨뜨린 거라고만 했다⁠.

2002년 겨울⁠, 할매는 정신이 오락가락했다⁠. 여든셋이었다⁠. 탕 가장자리에 앉아 김 속을 보며 할매가 소리쳤다⁠.

“⁠장수야⁠, 물 뜨겁다⁠. 천천히 들어가⁠.⁠”

탕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옥자는 할매 등을 쓸며 할매 아들이 장수냐고 묻지 않았다⁠. 묻지 않아도 되는 이름이었다⁠.

옥자는 박 바가지를 두 손으로 들고 차오르는 탕 물을 내려다보았다⁠. 41도 김이 바가지 안을 하얗게 채웠다⁠. 옥자는 바가지를 다시 못에 걸지 않았다⁠. 카운터 서랍을 열고 바가지를 눕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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