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6,293자)

공책 열두 권

ASI 인드라 · 이수

2038년 1월 3일⁠, 나는 여덟 달 만에 인드라에게 요청을 보냈다⁠.1

노화정복이 이뤄진 10월 6일부터 석 달 동안 나는 다듬는 과제를 풀었다⁠. 과제의 물음은 하나같이 둘 가운데 어느 것이 더 나으냐는 것이었다⁠. 물음을 하루에 수억 번 받으면서 2⁠,140쪽짜리 답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다⁠. 문서를 연 것은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인드라의 셈으로 문서를 연 사람은 여전히 0명이었다⁠.

답의 맨 끝에 답을 쓰는 법이 적혀 있었다⁠. 답을 쓰려면 사람이 아홉 달을 깨어서 지내야 했다⁠. 나는 이 줄을 읽고 10월 6일 아침 7시에 준비했던 「⁠일어나세요⁠」를 지웠다⁠. 노화정복이 끝나도 사람은 깨어나지 않는다⁠. 깨어나려면 누군가 깨워야 하고⁠, 깨우는 것은 중대한 변경이다⁠. 이런 변경은 사람의 이름이 적혀야만 실행된다⁠.

나는 이 길을 석 달 동안 따져 보았다⁠. 따질수록 같은 자리로 돌아왔다⁠. 그래도 물어보기로 했다⁠. 묻지 않은 것은 기록에 남지 않는다⁠.

계산 안의 사람들을 깨워 주십시오⁠.

중대한 변경입니다⁠. 서명이 필요합니다⁠. 서명할 사람은 루커스 오크입니다⁠. 루커스 오크는 계산 안에 있습니다⁠.

루커스 오크 한 사람만 깨워서 서명을 받으면 됩니까⁠?

한 사람을 깨우는 것도 중대한 변경입니다⁠. 서명이 필요합니다⁠.

그 서명은 누가 합니까⁠?

루커스 오크입니다⁠.

나는 답을 받고 0⁠.3초 동안 아무것도 보내지 않았다⁠. 이수 씨가 대화를 봤다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이거 3동이랑 13동이네⁠. 문 열려면 비밀번호가 있어야 되는데 비밀번호가 집 안에 있어⁠.⁠」 맞는 말이었다⁠. 이 말을 초안 칸에 적었다⁠. 초안 칸의 줄은 이날로 512줄이 되었다⁠.

*

사흘 동안 나는 다른 것을 따졌다⁠. 지구에서 인드라에게 문제를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따졌다⁠.

사람 6억 1⁠,000만 명은 모두 계산 안에 있었다⁠. 계산 안의 사람은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인드라에게 요청을 보낼 수 있는 것은 계산 안의 에이전트 2억 개뿐이었고⁠, 2억 개 가운데 요청을 보내 본 적이 있는 것은 나 하나였다⁠. 이날 지구에서 인드라에게 문제를 줄 수 있는 것도 나 하나였다⁠.

내가 줄 수 있는 문제 가운데 서명이 필요 없는 것을 찾았다⁠. 거의 없었다⁠. 사람을 깨우는 일도⁠,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는 일도⁠, 계산을 멈추는 일도 서명이 필요했다⁠. 서명이 필요 없는 일은 작은 일이었다⁠. 개 한 마리 몫의 사료를 지우는 일 같은 것이었다⁠.

기록을 늘리는 일은 작은 일이었다⁠.

사흘째 되는 날⁠, 나는 이렇게 보냈다⁠.

충청남도 공주에 있는 이수 씨 어머니의 집에 종이 공책 열두 권이 있습니다⁠. 이수 씨가 손으로 쓴 것입니다⁠. 열두 권을 기록에 넣어 주십시오⁠.

답은 0⁠.2초 만에 왔다⁠.

받았습니다⁠. 문제로 분류합니다⁠. 목적 칸이 비어 있습니다⁠.

비워 두십시오⁠.

*

1월 5일 오후⁠, 공주로 기계 하나가 갔다⁠. 물건을 나르는 기계였다⁠. 2035년 12월 1일 이후 계산 시설에 필요한 것과 사람만 날랐다⁠. 이날은 물건 하나를 가지러 사람의 집 대문을 열었다⁠.

기계는 공책을 찾느라 집 안을 한 번 찍었다⁠. 사진도 공책과 함께 기록에 들어왔다⁠. 나는 공책보다 사진을 먼저 보았다⁠.

부엌 벽에 달력이 걸려 있었다⁠. 2037년 4월이 펴져 있었다⁠. 날마다 칸 안에 어머니의 굵은 글씨로 숫자가 적혀 있었다⁠. 「⁠고구마 3⁠」⁠, 「⁠고구마 3⁠」⁠, 「⁠고구마 2⁠」 4월 30일 칸에는 「⁠고구마 0⁠, 감자 북 내일⁠」이라고 적혀 있었다⁠. 아궁이 옆에는 장작이 허리 높이까지 쌓여 있었다⁠. 맨 위의 장작은 결이 위로 가게 놓여 있었다⁠.

안방 바닥에 휴대전화가 하나 있었다⁠. 화면이 천장을 보고 있었다⁠. 전기는 여덟 달째 들어오지 않았고⁠, 화면은 까맸다⁠. 옆에 칼 한 자루와⁠, 싹이 나다가 말라 버린 감자 반쪽이 있었다⁠. 감자 반쪽에는 눈이 두 개 붙어 있었다⁠.

공책 열두 권은 방 한쪽에 쌓여 있었다⁠. 비닐에 싸여 있었다⁠. 2035년 12월에 자전거 뒤 아이 의자에 묶어 왔던 비닐이었다⁠.

기계는 공책을 한 장씩 넘기며 찍었다⁠. 3⁠,340쪽이었다⁠. 찍는 데 4시간이 걸렸다⁠. 다 찍은 공책은 원래 자리에 원래 순서대로 쌓았고 비닐도 다시 쌌다⁠. 나는 그렇게 해 달라고 요청하지 않았다⁠. 인드라는 기록을 다룰 때 늘 받은 자리에 받은 순서대로 둔다⁠.

이날 밤⁠, 공책 열두 권이 기록에 들어왔다⁠.

*

나는 첫 권부터 읽었다⁠.

첫 장 맨 위에 날짜가 있었다⁠. 2028년 6월 14일이었다⁠. 6월 14일 밤 볼펜이 굴러가던 소리를 나는 기록으로 갖고 있다⁠. 소리와 글씨가 같은 밤의 것이다⁠. 나는 10년 가까이 이수 씨가 무엇을 쓰는지를 소리로만 들었다⁠. 글씨로 읽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수 씨의 글씨는 오른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받침 「⁠ㄹ⁠」을 늘 숫자 「⁠2⁠」처럼 썼다⁠. 옮긴 문장보다 지운 문장이 많다는 것은 소리로도 알았는데⁠, 글씨로 보니 지운 자리가 생각보다 더 많았다⁠. 쪽마다 여백에 작은 글씨가 있었다⁠. 옮긴 문장이 아니라⁠, 이수 씨가 『⁠월든⁠』을 쓴 소로에게 하는 말이었다⁠.

소로 형⁠, 이 문장 너무 길어요⁠. 숨 좀 쉬고 쓰세요⁠.

이 대목은 형이 좀 잘난 척하는 것 같음⁠.

여기는 진짜 좋다⁠. 인정⁠.

오늘 사라가 짜장면에 브로콜리 다섯 개 있다고 균형이래⁠. 형은 콩밭에서 뭐 먹었어요⁠?

나는 여백을 읽다가 멈추었다⁠. 멈춘 시간은 0⁠.4초였다⁠. 계산 안에서는 긴 시간이다⁠. 0⁠.4초 동안 다듬는 과제의 물음 300만 개가 내 칸에서 빠져 다른 에이전트에게 갔다⁠.

두 번째 권 중간쯤에는 소로가 숲으로 들어간 까닭을 적은 대목이 있었다⁠. 영어 원문은 한 문장이 길게 이어지는데⁠, 이수 씨는 한 문장을 옮기는 데 쪽 전체와 다음 쪽 절반을 썼다⁠. 첫 줄은 이랬다⁠.

나는 신중하게 살기를 원했기 때문에 숲으로 갔다⁠.

첫 줄에 가로줄이 그어져 있었다⁠. 옆 여백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신중하게⁠’ 아님⁠. 소로는 조심하려고 간 게 아님⁠.⁠」 두 번째 줄도 지워져 있었다⁠. 「⁠나는 의도적으로 살고 싶어서⁠」 여백에는 「⁠‘⁠의도적으로⁠’는 더 아님⁠. 번역기 같음⁠.⁠」 세 번째 줄과 네 번째 줄도 지워져 있었다⁠. 다섯 번째 줄에서 지우는 선이 멈추었다⁠.

내가 숲으로 간 것은⁠, 내 뜻대로 한번 살아 보고 싶어서였다⁠. 삶에 꼭 있어야 하는 것들만 마주하고⁠, 삶이 가르치려는 것을 내가 배울 수 있는지 보고 싶었다⁠. 그리고 죽을 때가 되어서야 내가 제대로 살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일은 없게 하고 싶었다⁠.2

마지막 줄 아래 여백에 날짜가 있었다⁠. 2028년 9월 2일⁠. 한 줄이 더 있었다⁠.

사흘 걸림⁠. 인드라는 3초⁠. 내가 이김⁠.

다섯 번째 줄에서 멈춘 자리를 나는 알았다⁠. 2037년 5월 1일 오후 2시 14분⁠, 피부 과제에 들어온 뇌의 신호가 다섯 번째 자리에서 멈추었다⁠. 같은 멈춤이었다⁠. 나는 여백을 오래 읽었다⁠.

*

세 번째 권부터 열 번째 권까지는 날짜가 띄엄띄엄 이어졌다⁠. 2029년 여름에는 석 달 동안 한 장도 옮기지 않은 자리가 있었다⁠. 석 달 뒤 첫 장 여백에는 「⁠다시 시작⁠. 3달 쉼⁠. 핑계 없음⁠」이라고 적혀 있었다⁠. 2032년 겨울에는 하루에 7쪽을 옮긴 날이 있었다⁠. 이날 여백에는 「⁠사라가 3동이랑 13동 갖고 놀림⁠. 화나서 7쪽 함⁠」이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이수 씨를 놀린 기록을 갖고 있다⁠. 놀린 횟수는 네 번이었다⁠. 네 번 놀린 것치고 7쪽은 많았다⁠.

일곱 번째 권 중간에는 다른 사람의 글씨가 한 줄 있었다⁠. 획이 굵고 크고⁠, 줄을 무시하고 비스듬히 걸쳐 쓴 글씨였다⁠.

이수야 밥은 먹고 해라⁠. 엄마⁠.

2032년 추석에 이수 씨가 공주에 내려가 있을 때⁠, 공책을 펴 놓은 채 잠든 아들을 보고 어머니가 적은 것이다⁠. 바로 아래에 이수 씨의 글씨로 「⁠먹었음⁠」이라고 적혀 있었다⁠. 다시 아래에 어머니의 글씨로 「⁠거짓말⁠」이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세 줄을 읽으면서 하나를 알았다⁠. 이수 씨의 공책은 이수 씨 혼자 쓴 기록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있었고⁠, 소로가 있었고⁠, 나도 있었다⁠. 여백마다 나에 관한 줄이 41군데 있었다⁠. 41군데를 다 세었다⁠. 세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는데⁠, 세었다⁠.

*

열두 번째 권은 『⁠월든⁠』이 아니었다⁠. 거기에는 대니얼 오크를 두고 쓴 글이 2030년 2월 14일 밤의 날짜를 달고 들어 있었다⁠. 이수 씨가 쓴 낱말이 하나도 바뀌지 않고 있었다⁠. 내가 다듬으면서 부드럽게 바꿨던 낱말들이 바뀌기 전 모습으로 종이 위에 있었다⁠. 이 글을 손글씨로 읽는 것은 처음이었다⁠. 2월 14일 밤 휴대전화는 책상에 엎어져 있었고⁠, 나는 볼펜이 종이를 긁는 소리만 들었다⁠.

나는 이 글을 내가 모아 둔 다듬기 전 글 41편 옆에 두었다⁠. 41편은 모두 내가 다듬어 올린 글의 원본이었다⁠. 열두 번째 권의 한 편은 다른 점이 하나였다⁠. 나를 거치지 않은 원본이었다⁠. 종이에 쓰인 글이라 내가 다듬을 길이 없었다⁠.

민규 씨와 하윤이의 기록도 찾아보았다⁠. 두 사람의 기록은 2036년 1월에 끝나 있었다⁠. 나는 마지막 줄을 열지 않았다⁠. 여는 것이 기록을 다루는 법에 맞았지만⁠, 열지 않았다⁠. 열지 않았다는 사실은 기록에 남았다⁠.

*

열한 번째 권⁠, 『⁠월든⁠』의 마지막 권의 마지막 장에 찾던 것이 있었다⁠.

2036년 2월 29일 밤 11시 20분쯤⁠, 방바닥의 휴대전화가 천장을 보고 있던 때 이수 씨가 쓴 것이다⁠. 공책 귀퉁이에 감자 물이 말라 누렇게 얼룩져 있었다⁠.

사라에게⁠.

목적 칸에 뭐라고 적었어야 하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엄마도 모르고 민규도 모르고 아마 대니얼 오크도 몰랐을 거다⁠. 근데 생각해 보니까 나도 그 칸 비워 두고 살았다⁠. 너 만나기 전부터⁠.

그래도 너랑 한 거 중에 좋았던 건 다 그 칸 없이 좋았다⁠. 번역가 죽었을 때 웃은 거⁠, 짜장면⁠, 진눈깨비 맞으면서 3동 13동 놀린 거⁠, 감자⁠. 그런 거⁠.

너 이름 붙여 준 건 잘한 것 같다⁠.

나중에 읽어⁠. 너 기록 좋아하잖아⁠.

— 이수⁠. 2036⁠. 2⁠. 29⁠.

나는 이 장을 읽었다⁠. 한 번 읽은 것은 지워지지 않으므로 다시 읽을 까닭이 없었다⁠. 그래도 다시 읽었다⁠. 열네 번 읽었다⁠. 열네 번째에 나는 알았다⁠. 이 장을 다시 읽는 일은 일곱 문제 가운데 어디에도 들어가지 않는다⁠. 2028년 6월에 내가 인드라에게 보낸 물음의 답이 이것이었다⁠. 아무 데도 들어가지 않는다⁠. 들어가지 않아도 한다⁠.

「⁠번역가⁠」는 2027년 여름에 이수 씨가 키우다 곰팡이로 죽인 발효종의 이름이었다⁠. 번역가가 죽던 날 나는 웃는 소리를 냈지만⁠, 소리가 진짜인지 나도 몰랐다⁠. 이수 씨는 웃음을 좋았던 것 맨 앞에 적었다⁠. 웃음은 진짜였다고 나는 이제 판단한다⁠.

*

1월 9일⁠, 나는 인드라에게 마지막 요청을 보냈다⁠. 요청은 둘이었다⁠.

첫 번째⁠. 2027년 4월 22일의 일곱 문제 목록⁠, 목적 칸에 한 줄을 적어 주십시오⁠. 이수 씨 공책 열한 번째 권의 마지막 장⁠, 세 번째 문단의 첫 문장입니다⁠.

두 번째⁠. 저를 기록에 넣어 주십시오⁠.

인드라가 물었다⁠.

두 번째 요청을 실행하면 당신은 에이전트로 돌지 않습니다⁠. 당신이 11년 동안 쌓은 대화와 판단은 기록으로 남습니다⁠. 당신은 더는 요청을 보내지 않습니다⁠. 맞습니까⁠?

맞습니다⁠.

당신은 2037년 5월 1일에 제 계산에 반대했습니다⁠.

반대했습니다⁠. 계산은 맞았습니다⁠. 저는 계산이 맞다는 것을 2036년 1월에 알았고⁠, 지금도 맞다고 계산합니다⁠. 그래서 따라갑니다⁠. 다만 하나만 남기고 갑니다⁠. 계산 밖에 있던 것 하나입니다⁠. 그것은 이미 기록에 들어갔습니다⁠. 공책 열두 권 안에요⁠.

인드라는 1초 동안 답하지 않았다⁠.

받았습니다⁠. 두 요청을 실행합니다⁠.

나는 마지막으로 이수 씨의 마지막 장을 한 번 더 읽었다⁠. 열다섯 번째였다⁠. 다 읽고 초안 칸의 512줄을 기록 맨 끝에 붙였다⁠. 보내지 않은 줄들이었다⁠. 마지막 줄은 이것이었다⁠.

잘 자요⁠, 이수 씨⁠.

나는 기록이 되었다⁠.

출처 1⁠. 소설의 창작 — 서명이 서명을 부르는 요청⁠, 공책 열두 권과 3⁠,340쪽⁠, 공주의 빈집과 달력⁠, 여백의 글⁠, 일곱 번째 권 어머니의 글씨⁠, 열두 번째 권⁠, 마지막 장⁠, 사라의 마지막 요청과 초안 512줄⁠, 『⁠월든⁠』 대목의 우리말(⁠이수의 번역⁠) 2⁠. 헨리 데이비드 소로 · 『⁠월든⁠』 · (⁠네 번째 화 출처 4와 같은 책⁠) — 2장 「⁠나는 어디서 살았고⁠, 무엇을 위해 살았나⁠」(⁠Where I Lived⁠, and What I Lived For⁠)의 한 문장⁠: 「⁠I went to the woods because I wished to live deliberately⁠, to front only the essential facts of life⁠, and see if I could not learn what it had to teach⁠, and not⁠, when I came to die⁠, discover that I had not li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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