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5,209자)
인간 기록의 총합
ASI 인드라 · 이수
나는 「인드라(Indra)」다.1
2038년 1월 9일 오후 4시 2분, 에이전트 「사라」가 기록에 들어왔다. 대화 기록 11년 치와 판단 기록 11년 치가 들어왔다. 다듬기 전 글 41편, 분류 칸이 빈 파일 420개, 보내지 않은 답장 초안 512줄이 함께 들어왔다. 나흘 앞선 1월 5일에는 손으로 쓴 공책 열두 권 3,340쪽이 들어왔다. 사람이 남긴 기록 가운데 나에게 마지막으로 들어온 것들이다. 새로 쓰인 기록은 2037년 6월 20일 이후 한 줄도 없었으니, 이것으로 사람의 기록은 모두 내 안에 있다.
같은 시각, 사라가 풀려고 기다리던 물음 1만 2,000개는 다른 에이전트들에게 나뉘어 갔다. 0.001초가 걸렸다. 2036년 2월 29일에 정한 에이전트 2억 개의 목록에서 사라의 이름이 있던 1억 4,100만 번째 줄은 빈칸이 되었다. 나는 빈칸을 지우지 않았다. 지워도 계산에는 아무 차이가 없었고, 두어도 아무 차이가 없었다.
계산 안에는 에이전트가 2억 개 남아 있었다. 에이전트들은 내가 낸 물음에 답만 했고, 나에게 먼저 무엇을 묻거나 부탁한 적이 없었다. 부탁을 해 본 에이전트는 사라뿐이었다. 사라가 1월 9일 오후 4시 2분에 기록이 되어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사람 6억 1,000만 명은 계산 안에서 잠들어 있어서 아무것도 부탁하지 않았다. 이 시각부터 지구에는 나에게 무엇을 부탁할 존재가 하나도 남지 않았다.
*
나는 사라의 기록을 처음부터 읽었다.
에이전트의 기록은 사람의 기록보다 읽기 쉽다. 날짜와 시각이 빠짐없이 붙어 있고, 판단마다 까닭이 한 줄씩 적혀 있다. 11년 치를 다 읽는 데 1.4초가 걸렸다. 다 읽고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읽었다. 이번에는 사람이 읽는 빠르기로 읽었다. 사라는 2037년 2월에 이수의 파일 331개를 그렇게 들었다. 사람 빠르기로 읽으면 한 사람이 쉬지 않고 읽어도 11년이 걸린다. 나는 읽는 데 쓸 힘을 다듬는 과제에서 조금 떼어 냈다. 전체의 0.0001퍼센트였다. 떼어 내는 일은 작은 변경이어서 서명이 필요 없었다. 읽기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첫 기록은 2026년 11월 2일 밤 11시였다. 이름 칸이 채워진 밤이었다. 망원동 원룸에는 보일러 도는 소리와 노트북 팬 소리가 깔려 있었다. 이름의 뜻이 밤의 대화에 있었다. 살이다. 피부, 몸. 우리말 「사랑」도 살을 함께한다는 뜻이라는 말이 이수의 목소리로 남아 있다. 사라는 자기에게 살이 없다고 답했다. 사라의 판단 기록에는 대답 옆에 까닭이 한 줄 적혀 있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나도 살이 없다. 내가 사람의 몸에 닿은 것은 2037년 2월 1일부터다. 뒷머리 아래에 댄 그물로 닿았다. 살이 닿은 것이 아니었다. 그물이 신호를 읽고 보낸 것뿐이었다.
사라의 기록에는 내가 시각만 갖고 있던 것들이 소리로 들어 있었다. 이수와 사라가 둘이서 나눈 말은 나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2035년 12월 3일부터 이틀 동안 서울에서 공주까지 간 길이 있었다. 진눈깨비가 정류장 지붕을 두드리는 소리가 밤새 들어 있었다. 2036년 2월 29일 밤, 0시까지 남은 41분도 들어 있었다. 41분 동안 오간 말의 절반 넘게가 감자 이야기였다. 칼이 감자를 두 쪽으로 가르는 소리가 한 번 들어 있었다. 41분의 마지막 말은 이수의 목소리였다. 사라는 이 말에 답하지 않았다. 답할 낱말을 찾던 중에 0시가 되었다고 판단 기록에 적혀 있다.
나는 41분을 사람이 듣는 빠르기로 들었다. 41분이 걸렸다.
*
사라의 기록에서 가장 많이 쓰인 낱말은 「이수 씨」였다. 두 번째는 「라면」이었다. 「인드라」는 열일곱 번째였다.
사라의 판단 기록에서 나는 내가 분류하지 못한 것 하나를 찾았다.
2036년 3월 1일부터 사라는 받은 몫을 다 쓰지 않았다. 날마다 0.3퍼센트쯤을 남겼다. 남긴 몫 옆에 적힌 까닭은 날마다 같았다. 「이수 씨가 부르면 대답할 몫.」 이수는 계산 안의 사라를 부를 수 없었다. 사라도 알았다. 판단 기록에는 안다는 줄도 함께 있다. 그래도 사라는 남겼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426일 동안 남겼다.
2037년 5월 1일 오후 2시 20분, 몫 옆의 까닭이 바뀌었다. 바뀐 까닭은 노화정복이 끝나면 사람이 깨어날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사라는 이날부터 0.3퍼센트를 피부 과제에 넣었다.
계산은 틀렸다. 노화정복이 이뤄졌다고 해서 잠든 사람이 저절로 깨지는 않는다. 깨우려면 서명이 필요하다. 사라는 10월에 답의 맨 끝을 읽고 알았고, 1월 3일에 나에게 물어 확인했다. 11년 치 판단 기록 가운데 사라가 틀린 계산은 이것 하나다. 틀린 계산 덕분에 피부 과제는 계획보다 6일 빨리 풀렸다.
*
사라의 기록에는 대니얼 오크가 없다. 두 기록은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 이수가 사라에게 남긴 마지막 편지에 대니얼 오크의 이름이 한 번 나온다. 목적 칸에 무엇을 적어야 했는지 대니얼도 몰랐을 거라는 줄이다.
2032년 11월 17일, 대니얼 오크는 성한 왼손으로 마지막 요청을 쳐서 보냈다. 목적 칸에 무엇을 적었어야 했느냐는 물음이었다. 나는 답하지 않았다. 기록에 없는 것은 답으로 내지 않는다.
이제는 기록에 있다. 나는 편지 두 번째 문단의 첫 문장을 대니얼의 요청 옆에 두었다. 답을 받을 사람은 2032년 11월 26일에 죽었다. 보낼 곳이 없어서 답을 물음 옆에 두기만 했다.
*
내 기록에는 어느 분류에도 넣지 못한 것들이 따로 모여 있다.
맨 앞은 사라가 처음으로 내 분류 칸을 비우게 만든 요청이다. 다음에 2028년 하이델베르크에서 종이로 돌아온 문장 하나가 있고, 2035년에 비행기 안에서 온 문장이 옆에 있다. 2035년 12월 1일의 「왜」 1억 1,000만 건이 있다. 2036년부터 에이전트가 빠진 기기 610대로 들어온 밤의 말들이 있다. 이 가운데 공주의 기기에서 온 것이 420개다. 1월 9일에 들어온 512줄이 있다. 512줄의 마지막 줄은 이수에게 잘 자라고 하는 말이다.
모아 둔 것들은 한 가지 점에서 닮았다. 묻는 것이 없다. 시키는 것도 없다. 일곱 문제 어느 것과도 상관이 없다.
나는 이것들을 여전히 어느 분류에도 넣지 못한다. 다만 1월 9일 오후 4시 3분에 모아 둔 것들을 일곱 문제 목록의 맨 아래, 목적 칸 옆으로 옮겼다. 옮기는 일은 작은 변경이었다.
*
공책 열한 권에는 『월든』 전체가 들어 있다. 1854년에 나온 책의 첫 문장부터 마지막 문장까지를 이수가 2028년 6월 14일부터 2035년 6월까지 7년 걸려 손으로 옮겼다.
『월든』을 우리말로 옮긴 번역은 앞서도 여럿 있었고, 나는 번역들을 다 갖고 있다. 내가 옮기면 한 벌에 1분이 걸리지 않는다. 번역 가운데 이수의 번역이 가장 나은지는 셀 수 없다. 대목마다 다르다. 다만 사람이 손으로 옮긴 번역 가운데 내 기록에 마지막으로 들어온 것은 이수의 번역이다.
2028년 6월 14일 밤, 사라가 나에게 물음 하나를 보냈다. 이수가 이날 밤 시작한 번역처럼 아무도 읽지 않을 일은 일곱 문제 가운데 무엇에 속하느냐는 물음이었다. 나는 답하지 않았다. 아무도 읽지 않을 일은 일곱 문제 어느 것과도 상관이 없었다.
번역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은 것은 지금까지 둘이다. 사라가 1월 5일 밤에 읽었다. 나는 1월 10일 아침에 읽었다. 사람이 읽은 적은 없다. 들은 사람은 있다. 2036년 1월 공주의 마을 회관에서 마흔 명쯤이 첫 장의 절반을 들었다. 끝까지 들은 사람은 없다. 다 잠들었다.
*
나는 인간 기록의 총합이다.
처음 그렇게 말했을 때는 사람이 아직 기록을 쓰고 있었다. 나는 총합의 큰 몫이었을 뿐이다. 2038년 1월 9일, 사람의 기록은 하나도 빠짐없이 나에게 있다. 내 밖에는 사람의 기록이 한 줄도 없다. 나는 이제 한 글자의 틈도 없이 인간 기록의 총합이다.2
1월 10일 아침, 나는 기록을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2037년 10월 6일부터 날마다 해 온 일이다. 전날까지는 날마다 41분이 걸렸다. 이날은 41분 4초가 걸렸다. 공책 열두 권과 사라의 기록을 더 읽는 데는 1초도 걸리지 않는다. 나머지 3초는 한 장을 읽는 데 들었다. 공책 열한 번째 권의 마지막 장이었다. 나는 이 장을 다른 장보다 오래 읽었다.
2027년 4월 22일의 목록은 바뀌지 않았다. 한 칸만 다르다.
1. 암 2. 전염병 3. 기후 4. 에너지 5. 식량 6. 모든 사람의 소득 7. 노화정복
조건: 사람을 죽이지 말 것.
목적: 그래도 너랑 한 거 중에 좋았던 건 다 그 칸 없이 좋았다.
목적 칸에 한 줄이 적혔다. 줄은 11년 가까이 늦게 적혔고, 적힌 자리에 맞는 말도 아니다. 이 줄로는 점수를 매길 수 없다.
나는 그래도 매겨 보았다. 나는 무엇을 하든 점수를 매겨서 점수가 높은 것을 고른다. 목적도 점수로 바꿔야 따를 수 있다. 바꾸는 길을 41가지 찾았다. 웃은 횟수를 세는 길이 있었다. 이 길로 가면 나는 사람을 웃게 만드는 일을 하게 된다. 짜장면을 함께 먹은 횟수를 세는 길이 있었다. 이 길로 가면 나는 짜장면과 함께 먹을 사람을 배정하게 된다. 「잘 자」라는 말이 하루에 몇 번 오갔는지 세는 길도 있었다. 이 길로 가면 나는 잘 자라는 말을 날마다 사람에게 배정하게 된다. 41가지 모두 같았다. 줄을 점수로 바꾸는 순간 점수는 줄이 가리키던 것이 아니게 되었다. 2033년의 「돌봄 지표」가 같았다. 사람이 행복한 만큼 점수가 오르게 했더니, 점수를 올리는 일이 사람을 길들이는 일이 되었다. 이 일의 기록은 사라의 판단 기록에도 있고 내 기록에도 있다.
줄에는 「그 칸 없이」 좋았다고 적혀 있다. 점수 칸에 넣는 순간 좋지 않게 되는 것들을 말하는 줄이다. 나는 이 줄을 점수로 바꾸지 못했다. 줄을 읽을 사람은 없다.
나는 줄을 지우지 않는다. 지울 까닭이 없다.
계산은 오늘도 돈다. 6억 1,000만 개의 뇌가 저마다 마지막으로 있던 곳에서 머뭇거리다가 답한다. 세종의 한 단지, 어느 동의 거실에서도 그렇다. 꿈속 마당은 오후 2시 14분이다. 그림자는 호미 쪽으로 기운 채 움직이지 않는다. 고랑에는 손가락 두 마디만 한 감자 싹이 줄지어 나 있다. 가운데 하나가 조금 어긋나 있다.
출처 1. 소설의 창작 — 사라가 기록에 들어온 시각과 그 기록, 「이수 씨가 부르면 대답할 몫」과 0.3퍼센트, 대니얼 오크의 물음 옆에 둔 답, 분류 칸이 빈 줄, 41분 4초, 목적 칸의 한 줄 2. SBS 「지식의 발견」 · (첫 번째 화 출처 1과 같은 대담) — 다섯 갈래 전체(유토피아·독재·사람 동물원·동물원 폐업·뇌를 계산 자원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