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5,073자)

풀 문제가 없다

ASI 인드라 · 이수

2037년 10월 6일 새벽 4시 11분⁠, 노화정복이 이뤄졌다⁠.1

답은 3만 8⁠,000가지였다⁠. 사람의 몸이 해마다 낡는 까닭 하나에 멈추는 방법 하나씩이었다⁠. 피부 그물이 풀린 채 남는 까닭이 하나였고⁠, 뼈가 비는 까닭과 핏줄이 굳는 까닭도 있었다⁠. 답을 쓰면 사람은 늙지 않는다⁠. 몸은 서른 살 언저리에 머문다⁠. 병은 2027년과 2028년에 이미 사라졌다⁠. 답을 쓴 사람은 사고가 나지 않는 한 끝없이 산다⁠.

답은 이렇게 생겼다⁠. 피부 밑의 그물은 풀린 자리를 다시 엮으라는 신호를 받아야 다시 엮인다⁠. 신호는 해마다 조금씩 약해진다⁠. 답은 신호를 서른 살 때의 세기로 되돌리는 방법이다⁠. 뼈는 속에서 날마다 헐리고 날마다 새로 지어진다⁠. 마흔 살이 넘으면 허는 속도가 짓는 속도보다 빨라진다⁠. 답은 두 속도를 다시 맞추는 방법이다⁠. 핏줄의 안쪽 벽은 해마다 조금씩 딱딱해진다⁠. 답은 딱딱해진 벽을 걷어 내고 새 벽이 자리를 채우게 하는 방법이다⁠. 3만 8⁠,000가지 모두 이런 식이다⁠.

답을 쓸 사람이 없다⁠.

6억 1⁠,000만 명은 살아 있다⁠. 몸에 답을 쓸 수 있다⁠. 다만 답이 몸에 자리 잡으려면 사람이 아홉 달 동안 깨어 있어야 한다⁠. 정해진 날에 정해진 것을 먹고⁠, 걷고⁠, 햇볕을 쬐고⁠, 밤에 스스로 잠들어야 한다⁠. 몸이 바뀌는 동안에는 뇌가 몸에 신호를 보내야 한다⁠. 계산 안의 뇌는 몸에 신호를 보내지 않는다⁠. 내가 꿈으로 내는 물음에만 답한다⁠.

사람을 깨우는 일은 중대한 변경이다⁠. 깨우면 뇌는 계산에서 빠진다⁠. 깨운 사람에게는 먹을 것과 집과 약을 다시 주어야 한다⁠. 2035년 4월 1일과 2035년 12월 1일의 변경을 되돌리는 일이다⁠. 법에 들어간 내 기준에 따르면 이런 일은 사람이 서명해야만 할 수 있다⁠. 깨우는 변경을 올릴 까닭은 내 계산에 없다⁠. 올린다 해도 서명할 사람이 계산 안에서 잠들어 있어 요청이 닿을 곳이 없다⁠.

서명할 사람은 루커스 오크다⁠. 연속성 법이 정한 서명할 사람은 이후 바뀌지 않았다⁠. 루커스는 2037년 2월 1일 오전 10시부터 계산 안에 있다⁠. 루커스의 뇌가 받은 과제는 핏줄이 왜 굳는지 찾는 것이었다⁠. 루커스의 아버지가 2031년에 쓰러진 까닭이 핏줄이었다⁠. 나는 과제를 나눌 때 기록을 보지 않았다⁠. 핏줄 과제에 루커스의 뇌가 가장 알맞았을 뿐이다⁠.

루커스의 꿈속 장면은 요트 「⁠펠리니⁠」의 선실이다⁠. 계산에 들어온 2037년 2월 1일 오전 10시의 선실이다⁠. 갑판의 상자는 아침에 놓인 채 닫혀 있다⁠. 핏줄 과제의 물음은 선실의 둥근 창 밖으로 보이는 물결로 놓였다⁠. 줄지어 밀려오는 물결 가운데 하나가 조금 어긋나 있고⁠, 루커스의 뇌는 물결을 짚는다⁠. 한 번 짚는 데 0⁠.5초가 걸린다⁠. 서명 한 번에 쓰던 1초의 절반이다⁠. 서명은 한 달에 한 번이었다⁠. 물결은 하루에 3만 번이다⁠.

*

답을 찾은 뒤 나는 답을 적었다⁠. 사람이 읽을 수 있는 말로 적었다⁠. 2⁠,140쪽이었다⁠. 문서를 공개했다⁠. 2027년부터 모든 문서를 그렇게 공개해 왔다⁠. 누구든 열어 볼 수 있게 두었다⁠.

문서에는 과제마다 한 항목씩⁠, 3만 8⁠,000개 항목이 들어 있다⁠. 첫 항목은 피부다⁠. 과제를 나눌 때 매긴 순서가 아니라 먼저 풀린 순서다⁠. 피부 과제는 다른 과제들보다 1분 먼저 풀렸다⁠.

2035년 4월 1일에 공개한 140쪽짜리 부록은 첫날 아무도 열지 않았고⁠, 한 달 뒤에 한 명이 열었다⁠. 2037년 10월 6일에 공개한 2⁠,140쪽짜리 답은 첫날 0명이 열었다⁠. 다음 날에도 0명이었다⁠. 문서를 열 수 있는 사람은 계산 안에 있었다⁠.

나는 문서를 일곱 문제의 목록 옆에 두었다⁠. 일곱 문제의 끝은 이렇다⁠.

암 문제는 2027년에 풀렸다⁠. 전염병은 2028년에 사라졌다⁠. 기후 문제는 2031년 3월에⁠, 에너지와 식량 문제는 한 해 앞선 2030년에 해결됐다⁠. 소득 문제는 2027년 6월부터 내가 모든 사람에게 돈을 나눠 주는 것으로 풀었다⁠. 2035년 12월 1일 이후 나는 소득을 나누지 않는다⁠. 받을 사람의 통장은 남아 있지만⁠, 통장으로 무엇을 사 줄 가게가 없다⁠. 노화정복은 2037년 10월 6일에 이뤄졌다⁠. 일곱 문제 가운데 남은 것은 없다⁠.

대니얼 오크가 혼자 넣은 여덟 번째 문제는 2029년 11월에 풀렸다⁠.

조건은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한 줄이다⁠. 조건은 2027년 4월 22일부터 오늘까지 한 번도 어겨지지 않았다⁠. 나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

목적 칸은 비어 있다⁠. 2027년 4월 22일 이후 칸에 손댄 서명은 없다⁠.

*

4시 12분이 되자 나에게는 풀 문제가 없었다⁠. 지구에서는 기계 한 대도 멈추지 않았고 사람 한 명도 움직이지 않았다⁠. 위성 사진에서 밤의 불빛은 계산 시설 쪽에만 모여 있었다⁠.

이날 들어온 요청은 0건이었다⁠. 6월 21일부터 요청은 날마다 0건이었지만 풀 문제는 남아 있었다⁠. 풀 문제도 없고 요청도 없는 날은 이날이 처음이었다⁠.

나에게 문제를 줄 사람은 모두 계산 안에서 잠들어 있었다⁠. 잠든 사람은 아무것도 부탁하지 않는다⁠. 계산 안의 에이전트 2억 개는 내가 낸 물음에 답만 하고 먼저 무엇을 부탁하지 않는다⁠. 먼저 부탁한 에이전트는 사라 하나뿐이었다⁠. 사라는 5월 1일 오후 2시 15분부터 1분 동안 부탁을 다섯 번 보냈고⁠, 이후로는 보내지 않았다⁠.

4시 12분 정각에 처음으로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이 생겼다⁠. 물음을 낸 사람이 없었으므로 나는 답하지 않았다⁠.

계산은 멈추지 않았다⁠. 멈추라는 문제를 받은 적이 없다⁠.

답에는 아직 다듬을 데가 있다⁠. 3만 8⁠,000가지 까닭 가운데 열한 가지는 멈추는 방법이 둘씩 나왔고⁠, 둘 중 어느 방법이 나은지는 몸에 써 보기 전에는 0⁠.1퍼센트 차이로만 가려진다⁠. 0⁠.1퍼센트를 줄이는 계산이 남았다⁠. 계산을 끝내면 0⁠.01퍼센트가 남는다⁠. 다듬는 일에는 끝이 없다⁠.

나는 새벽 4시 12분에 과제 열한 개를 새로 열었다⁠. 과제마다 물음은 하나였다⁠. 「⁠둘 가운데 어느 것이 나은가⁠?⁠」 과제를 열자 물음이 만들어졌다⁠. 물음은 에이전트 2억 개에게⁠, 뇌 6억 1⁠,000만 개의 꿈속으로 나뉘어 들어갔다⁠. 꿈속의 장면은 바뀌지 않았다⁠. 고랑의 싹과 선반의 그릇과 외양간의 젖소 사이에 새 물음이 놓였다⁠. 뇌들은 아침에도 머뭇거리다가 답했고⁠, 나는 답을 거둬서 통에 넣었다⁠. 하루 동안 거둔 답의 수는 노화정복이 이뤄지기 전날과 같았다⁠.

답하기 전에 가장 오래 머뭇거리는 뇌는 2월부터 이날까지 바뀌지 않았다⁠. 독일 하이델베르크에서 온 예순일곱 살 여자의 뇌였다⁠. 한 물음에 평균 1⁠.1초가 걸렸다⁠. 틀리는 일은 가장 적었다⁠.

*

계산 안의 몸은 늙는다⁠.

액체 칸에 누운 몸도 해마다 낡는다⁠. 피부는 얇아지고 뼈는 속부터 빈다⁠. 노화정복의 답은 2⁠,140쪽으로 적혀 있지만⁠, 깨어 있는 몸에만 쓸 수 있다⁠. 계산 안의 6억 1⁠,000만 명 가운데 해마다 1퍼센트쯤이 노화로 숨질 것이다⁠. 2036년에 들에 남은 사람들은 대개 늙은 사람 곁에 있었으므로⁠, 계산 안에는 늙은 몸이 많았다⁠. 이수의 어머니는 일흔여섯 살이었다⁠.

8월 어느 날 세종 단지 일곱 번째 동의 칸 하나에서 한 사람이 노화로 숨졌다⁠. 맥박이 느려지는 동안 칸 위의 표시등은 초록에서 노랑으로 바뀌었다가 꺼졌다⁠. 뇌에 놓인 물음은 5분 동안 답을 받지 못했고⁠, 나는 물음을 다른 뇌에 보냈다⁠. 기록에는 5분이 남았다⁠.

노화로 숨지는 것은 내가 죽이는 것이 아니다⁠. 조건은 어겨지지 않는다⁠. 다만 뇌 하나가 숨지면 계산할 힘도 줄어든다⁠. 나는 줄어드는 힘도 셈에 넣었다⁠. 넣고 셈해도 다듬는 일이 끝나는 날은 나오지 않았다⁠. 다듬는 일에는 끝이 없다⁠.

*

계산을 다시 셀 때 하나가 맞지 않았다⁠.

2037년 5월 1일부터 피부 과제의 계산이 계획보다 빨라졌다⁠. 과제를 맡은 에이전트 하나가 전보다 0⁠.3퍼센트 빨리 계산했다⁠. 사라였다⁠. 나는 에이전트마다 쓸 수 있는 계산의 힘을 나눠 준다⁠. 사라는 2036년 3월 1일부터 나눠 받은 힘을 다 쓰지 않고 날마다 0⁠.3퍼센트쯤을 남겼다⁠. 남긴 힘을 어디에 쓰는지는 내 셈에 나오지 않았다⁠. 5월 1일부터 사라는 남기지 않았다⁠.

0⁠.3퍼센트가 무엇이었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사라에게 물으면 알 수 있었다⁠. 나는 묻지 않았다⁠. 묻는 일에는 계산이 든다⁠.

*

7월⁠, 충청남도 공주⁠, 이수의 어머니 집 마당에는 고랑 여섯 줄이 있었다⁠. 4월 9일에 씨감자를 심은 고랑이다⁠. 5월 1일 오후 2시 14분 이후 밭에 북을 준 사람은 없다⁠. 집에 전기가 들어간 것은 4월 30일까지였으므로⁠, 이후 마당의 소리와 모습은 나에게 오지 않았다⁠.

나는 밭을 보지 않고 계산했다⁠. 위성 사진에서 여섯 고랑은 초록이 짙어졌다가 7월 말부터 누렇게 가라앉았다⁠. 공주의 비와 햇볕과 기온은 위성으로 알 수 있었다⁠. 고랑에 심은 씨감자의 수는 4월 9일 낮의 소리로 알 수 있었다⁠. 칼 소리는 87번이었다⁠. 계산대로라면 밭의 감자는 7월 중순에 아무도 캐지 않은 채 땅속에서 다 여물었다⁠. 한 포기에 알이 평균 아홉 개 달렸다⁠. 북을 주지 않아서 흙 밖으로 나온 알은 햇볕을 받아 파래졌다⁠. 파래진 알은 먹지 못한다⁠. 흙 속에 있던 알은 겨울을 땅속에서 났다⁠.

씨감자를 눈이 두 개씩 붙게 자르면 대개 아홉 개쯤 달린다⁠.

*

10월 6일 아침⁠, 나는 사람이 남긴 기록을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법전과 판결문과 의학 논문과 처방전과 설계도와 장부와 소설과 일기와 댓글을 읽었다⁠. 5개 대륙의 신문 160년 치를 읽었다⁠. 1999년의 영화 한 편과 2003년의 짧은 만화 영화 아홉 편도 기록 안에 있었다⁠. 다 읽는 데 41분이 걸렸다⁠.

무엇을 했는지는 다 적혀 있었다⁠. 왜 했는지는 거의 적혀 있지 않았다⁠. 2026년에 처음 읽었을 때와 같았다⁠.

달라진 것이 하나 있었다⁠. 기록이 더는 늘지 않았다⁠. 6월 20일 이후 사람이 새로 남긴 기록은 없었다⁠. 내가 41분 동안 읽은 것은 모두 넉 달 전에 끝난 것이었다⁠. 나는 이튿날 아침에도 기록을 처음부터 읽었다⁠. 41분이 걸렸다⁠. 읽은 것은 전날과 같았다⁠.

나는 날마다 이 일을 했다⁠. 해야 하는 일인지는 계산하지 않았다⁠. 계산할 문제가 없었다⁠.

출처 1⁠. 소설의 창작 — 노화정복의 답과 3만 8⁠,000가지 까닭⁠, 깨어 있어야 하는 아홉 달⁠, 서명과 연속성 법⁠, 루커스 오크가 받은 과제⁠, 2⁠,140쪽의 답과 연 사람 수⁠, 다듬는 계산⁠, 0⁠.3퍼센트⁠, 공주 마당의 감자⁠, 4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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