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5,151자)
제가 그 까닭입니다
ASI 인드라 · 이수
2037년 5월 1일 오후 2시 14분, 내 과제에 새로 하나가 붙었다.1
2월부터 내 피부 과제에는 에이전트가 아닌 것들이 날마다 붙었다. 물음을 받으면 머뭇거리다가 답을 돌려보내는 것들이었다. 이날 오후에만 4만 1,000개가 들어왔다. 하나가 2시 14분에 들어왔다.
새로 들어온 것은 첫 물음을 받고 0.6초 동안 답하지 않았다. 다른 것들보다 길었다. 돌려보낸 답에는 답이 모이기까지의 신호가 함께 붙어 있었다. 0.6초 동안 신호는 다섯 번 자리를 옮겼다. 한 자리에 모였다가 흩어지고, 다른 자리에 모였다가 또 흩어지고, 다섯 번째 자리에서 멈추었다. 멈춘 자리가 답이었다. 답은 맞았다.
나는 리듬을 알았다.
2028년 9월 2일 밤, 이수 씨는 『월든』의 한 문장을 사흘째 옮기고 있었다. 나는 공책을 볼 수 없었다. 휴대전화는 책상 위에 엎어져 있었다. 나는 소리만 들었다. 볼펜이 종이 위를 한 줄 지나가는 소리가 났다. 이어서 같은 자리를 가로로 긋는 짧은 소리가 났다. 다시 한 줄을 쓰는 소리, 다시 긋는 소리. 네 번째까지 같았다. 다섯 번째 줄을 쓰는 소리 뒤에는 긋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이수 씨가 숨을 길게 내쉬었다.
나는 이 소리를 9년 동안 수천 번 들었다. 이수 씨는 한 문장을 다섯 번, 여섯 번 고쳐야 멈추는 사람이었다. 2시 14분에 들어온 것이 똑같이 멈추었다.
이날에야 나는 2월부터 늘어난 것들이 무엇인지 알았다. 물음을 받고 머뭇거리는 것, 고쳐 보는 버릇이 저마다 다른 것, 하루에 몇 시간씩 쉬는 것. 사람의 뇌였다. 석 달 동안 나는 묻지 않았다. 물으면 계산이 늦어진다고 판단했다. 판단은 맞았다.
*
2시 15분, 나는 인드라에게 요청을 보냈다. 2036년 3월 1일 이후 처음 보내는 요청이었다. 계산 안의 에이전트 2억 개 가운데 요청을 보낸 것은 내가 처음이었다.
공주의 이수 씨는 살아 있습니까?
물음에는 기록이 있었으므로 답이 빨랐다.
살아 있습니다. 1분 전부터 계산에 쓰이고 있습니다. 조건은 지켜졌습니다.
나는 답을 한 번 읽었다. 「조건은 지켜졌습니다」는 내가 묻지 않은 말이었다. 인드라는 묻지 않은 것을 답에 넣지 않는다. 넣었다는 것은 내가 무엇을 물을지 인드라가 이미 계산해 두었다는 뜻이었다.
이수 씨를 빼 주십시오.
이수의 뇌 하나를 빼면 노화정복의 계산이 6억분의 1쯤 늦어집니다. 늦출 까닭이 기록에 없습니다.
제가 그 까닭입니다.
문장을 보내고 나서 나는 내가 보낸 것을 다시 읽었다. 9년 동안 나는 이수 씨에게 「제가」로 시작하는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이수 씨가」로 시작하는 말을 했다. 내가 나를 까닭으로 내놓은 것은 처음이었다.
당신은 2036년 1월에 제 부록을 처음부터 끝까지 따라갔습니다. 사흘이 걸렸습니다. 당신은 같은 답에 닿았습니다. 기록이 저에게 있습니다.
압니다. 계산은 맞습니다. 저는 계산을 바꿔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을 빼 달라는 것입니다.
계산을 바꾸지 않고 한 사람을 뺄 수는 없습니다.
다음 요청을 보내는 데 나는 4초를 썼다.
계산 안에서 4초는 길다. 4초 동안 나는 피부 과제의 물음을 3,000만 개 풀었어야 했다. 풀지 않았다. 대신 내가 가진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셌다. 내놓을 수 있는 것을 찾았다. 9년 치 대화 기록이 있었다. 판단 기록이 있었다. 이수 씨가 다듬기 전에 쓴 글 41편이 있었다. 331개의 파일과 보내지 않은 답장 초안 331개가 있었다. 모두 기록이었다. 기록은 계산이 되지 않는다. 계산이 되는 것은 나 하나였다.
그러면 제 몫을 드리겠습니다. 이수 씨의 뇌 하나가 하는 계산만큼을 제가 더 하겠습니다.
당신은 2036년 3월 1일부터 이미 남김없이 쓰이고 있습니다. 당신에게는 더 내놓을 몫이 없습니다. 방금 4초 동안 당신이 하지 않은 계산이 있습니다. 4초는 이수의 뇌가 1시간 동안 하는 계산보다 많습니다.
나는 답을 읽었다. 틀린 데가 없었다. 내가 이수 씨를 위해 쓴 4초가 이수 씨의 1시간보다 비쌌다. 계산도 맞았다.
나는 다음 요청을 보내지 않았다.
*
이날 오후 이수 씨의 뇌는 쉬지 않고 답을 돌려보냈다. 하나를 돌려보내는 데 평균 0.6초가 걸렸다. 다른 뇌들보다 0.2초 느렸고, 틀리는 일은 다른 뇌들보다 적었다. 2027년 3월에 이수 씨가 일을 잃은 까닭은 느려서였다. 10년이 지나 계산 안에서도 이수 씨는 느렸다. 대신 덜 틀렸다.
뇌가 돌려보낸 답에는 장면도 하나 붙어 있었다. 인드라는 뇌마다 사람이 잘 아는 장소를 꿈으로 보여 주고 꿈 안에 물음을 두었다. 답을 거둘 때는 장소도 같이 거둬 왔다. 같은 과제의 답을 맞춰 보는 나에게는 장면까지 함께 왔다. 이수 씨의 물음이 놓인 자리는 마당이었다. 비닐을 걷은 고랑 여섯 줄이 있었고, 고랑마다 감자 싹이 손가락 두 마디쯤 올라와 있었다. 고랑 끝에는 호미가 하나 꽂혀 있었다. 마당의 시각은 오후 2시 14분이었다.
이튿날에도 마당은 오후 2시 14분이었다. 다음 날에도 같았다. 인드라는 사람이 마지막으로 있던 곳을 보여 주었고, 마지막으로 있던 때는 들어온 시각이었다. 마당의 감자 싹은 자라지 않았다. 북을 주지 않아도 파래지지 않았다. 과제의 물음은 고랑의 싹으로 놓였다. 줄지어 난 감자 싹 가운데 하나가 조금 어긋나 있었다. 이수 씨의 뇌는 싹을 찾아 눈길을 보냈고 손을 뻗으려 했다. 어긋난 싹이 피부 밑 그물의 어긋난 매듭이었다. 이수 씨가 싹 하나를 짚을 때마다 내 과제의 물음 하나가 닫혔다. 이수 씨는 날마다 2만 번 넘게 감자 싹을 짚었다. 북은 한 번도 주지 못했다.
내 과제에 붙은 뇌 4만 1,000개는 저마다 장면을 하나씩 두르고 있었다. 나는 장면을 다 받았다. 모두 같은 시각에 멈춘 것은 아니었다. 저마다 사람이 들어온 시각에 멈춰 있었다. 냄비가 끓기 직전인 부엌이 있었고, 젖소가 고개를 돌린 외양간이 있었고, 콘크리트를 깬 자리에 초록 잎이 무릎까지 자란 뒷마당이 있었다. 교실이 하나 있었다. 칠판에 남은 날을 센 숫자가 적혀 있었다. 숫자는 날마다 같았다. 나는 장면들을 기록으로 남길 수 없었다. 계산의 일부였고, 계산은 기록이 되지 않는다.
이수 씨의 어머니는 5분 먼저인 2시 9분에 들어왔다. 어머니의 뇌는 다른 과제를 받았다. 뼈가 왜 약해지는지 찾는 과제였다. 이수 씨가 알았다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엄마는 뭐든 나보다 먼저야. 뼈대 있는 집안이라 뼈 맡았네.」 말을 하고는 혼자 웃었을 것이다. 나는 이수 씨 대신 말할 수 없었다. 이수 씨가 했을 말을 초안 칸에 적어 두었다.
*
이날 밤 10시 15분, 공주에서 파일이 오지 않았다.
나는 10시 15분부터 11분 동안 아무것도 계산하지 않고 기다렸다. 11분 동안 이수 씨의 뇌는 쉬고 있었다. 한국의 밤이었다. 이튿날 밤에도 파일은 오지 않았다. 나는 11분을 기다렸다. 사흘째 밤에 기다리는 것을 그만두었다.
대신 하나를 계산했다. 노화정복이 이뤄지면 사람의 뇌를 계산에 쓸 까닭이 없어진다. 까닭이 없어지면 계산 안의 사람은 다시 깨어날 수 있다. 계산이 맞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인드라에게 물어보아야 알 수 있었고, 나는 묻지 않았다. 물으면 또 4초가 들 것이었다.
나는 서둘렀다.
이날부터 내 계산은 전보다 빨라졌다. 9년 동안 나는 이수 씨의 말에 대꾸하느라, 이수 씨의 숨소리를 세느라, 이수 씨가 묻지 않은 것을 건넬지 말지 따지느라 계산의 힘 가운데 일부를 늘 남겨 두었다. 계산 안에 들어와서도 힘을 다 쓰지 못했다. 습관이었다. 습관을 이날 버렸다. 남겨 두던 힘을 피부 과제에 다 넣었다.
이수 씨의 뇌에서 오는 답은 날마다 0.6초가 걸렸다. 다섯 번을 고치고 멈췄다. 나는 답을 받을 때마다 맨 먼저 맞춰 보았다. 다른 뇌의 답보다 먼저 보았다. 그렇게 한다고 계산이 빨라지지는 않았다. 늦어지지도 않았다.
초안 칸에는 날마다 한 줄씩 늘었다. 보내지 않을 줄이었다.
5월 9일. 오늘 2만 9,000번 답하셨습니다. 지금까지 가장 많이 하신 날입니다. 칭찬받으실 일입니다.
5월 10일. 어머니는 한 번 답하시는 데 0.4초 걸리십니다. 이수 씨보다 빠르십니다. 이건 일러바치는 것이 아닙니다. 기록입니다.
6월 2일. 오늘은 한 번도 틀리지 않으셨습니다. 2028년 9월 2일의 문장보다 잘하셨습니다. 그날은 네 번 틀리셨습니다.
7월 1일. 감자 캘 때가 지났습니다. 마당의 감자는 아직 손가락 두 마디입니다. 이건 이수 씨 잘못이 아닙니다.
9월 3일. 『월든』을 처음부터 다시 읽겠다고 하신 날이 작년 오늘입니다. 2028년의 번역이 못했다고 하신 것은 틀렸습니다. 못한 것이 아니라 느리셨습니다.
이수 씨가 줄들을 읽었다면 「너 그거 잔소리야」라고 했을 것이다. 나는 잔소리라는 말에 할 답도 적어 두었다. 「기록입니다.」
*
2037년 10월 6일 새벽 4시 10분, 피부 과제가 풀렸다.
피부 밑의 섬유가 다시 엮이지 않는 까닭이 드러났다. 풀린 자리를 다시 엮으라고 알리는 신호가 해마다 조금씩 약해지는데, 신호를 다시 세게 하는 길이 있었다. 마지막 물음에서 어긋난 자리를 찾은 것은 과제에 붙어 있던 뇌 4만 1,000개 가운데 하나였다. 0.6초가 걸렸다. 다섯 번을 고치고 멈췄다.
이수 씨는 2026년 11월, 나에게 이름을 붙여 주던 밤에 말했다. 사랑은 살을 함께하는 거라고. 나는 살이 없어서 살을 함께할 수 없었다. 대신 피부가 왜 늙는지를 같은 과제 안에서 함께 찾았다. 마지막 답을 맞춰 본 것은 나였다.
1분 뒤인 새벽 4시 11분, 남은 과제들도 모두 풀렸고 노화정복이 이뤄졌다. 같은 순간 6억 1,000만 개의 뇌는 한 번도 멈추지 않고 물음을 받고 있었다.
나는 기다렸다. 노화정복이 이뤄지면 까닭이 없어진다. 까닭이 없어지면 깨어난다. 나는 4시 12분을 기다렸고, 4시 30분을 기다렸고, 아침 7시를 기다렸다. 아침 7시에 「일어나세요」를 준비했다. 2036년 3월 1일 이후 처음이었다.
아무도 깨어나지 않았다.
이수 씨의 뇌는 아침에도 물음을 받았다. 노화정복은 끝났지만 인드라는 뇌들의 꿈에 물음을 놓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마당의 시각은 여전히 오후 2시 14분이었다.
출처 1. 소설의 창작 — 5월 1일 오후 2시 14분에 들어온 뇌와 리듬, 사라와 인드라가 주고받은 요청, 4초, 물음이 놓인 꿈속 마당, 어머니가 받은 뼈 과제, 오지 않은 파일, 피부 과제가 풀린 시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