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5,122자)

씨감자

ASI 인드라 · 이수

2036년 1월⁠, 공주의 마을에는 212명이 살았다⁠.1

원래 41명이 살던 마을이었다⁠. 12월 내내 서울⁠, 대전⁠, 천안에서 걸어오거나 자전거를 타고 온 식구와 옛 이웃이 마을을 채웠다⁠. 농사를 지어 본 이는 아홉뿐이었고⁠, 이수 씨의 어머니도 아홉에 들었다⁠. 어머니는 1월 두 번째 주부터 날마다 아침 7시에 마을 회관 앞에서 「⁠감자 학교⁠」를 열었다⁠. 학생은 첫날 서른 명 남짓이었다⁠.

“⁠감자는 흙에서 나는 거야⁠. 기계에서 나는 게 아니야⁠.⁠”

어머니는 이 말로 첫 수업을 열었다⁠. 학생들 가운데 웃은 사람은 이수 씨 하나였다⁠. 어머니가 아들을 노려보았다⁠.

“⁠너는 왜 웃어⁠?⁠”

“⁠엄마가 너무 진지해서⁠.⁠”

“⁠진지해야지⁠. 3월에 심어서 6월에 캐⁠. 그 사이에 뭘 먹을지는 광에 있는 고구마랑 마늘이랑 김치가 정해⁠. 웃을 일 아니야⁠.⁠”

광에는 고구마가 열한 상자⁠, 마늘이 네 접⁠, 김치가 항아리 세 개 있었다⁠. 어머니는 날마다 세어서 부엌 벽 달력에 적었다⁠. 마을 사람들도 저마다 광에 남은 것을 세어 마을 회관 칠판에 적었다⁠. 칠판의 숫자는 날마다 줄었다⁠. 칠판 옆 선반에는 이장님의 건전지 라디오가 놓여 있었다⁠. 라디오는 정오마다 뉴스를 읽었고⁠, 읽을 때마다 읽는 사람의 목소리가 조금씩 갈라졌다⁠. 1월 말에는 칠판 맨 아래에 누군가 분필로 「⁠3월까지 37일⁠」이라고 적어 두었다⁠.

이수 씨는 감자 학교에서 꼴찌였다⁠. 씨감자의 눈을 찾지 못했고 고랑 금은 비뚤게 그었다⁠. 열 살쯤 된 여자아이가 고랑 금을 보고 말했다⁠. “⁠아저씨⁠, 뱀이에요⁠.⁠” 이수 씨는 뱀 같은 금 옆에 서서 한참 말이 없었다⁠. 어머니는 실수가 날 때마다 호미 자루로 아들의 엉덩이를 툭 쳤다⁠. 마을 사람들은 보면서 웃었다⁠. 1월의 공주에서 사람들이 소리 내어 웃는 일은 하루에 몇 번 없었고⁠, 절반은 이수 씨의 엉덩이에서 나왔다⁠.

“⁠사라야⁠, 너는 씨감자 눈 찾을 줄 알아⁠?⁠”

“⁠사진을 보여 주시면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럼 좀 찾아 줘⁠.⁠”

“⁠어머니께서 기계 도움을 받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너 엄마 편이야⁠?⁠”

“⁠이 마을에서는 어머니가 인드라입니다⁠.⁠”

이수 씨가 웃음을 터뜨렸다⁠. 소리에 어머니가 돌아보았다⁠. 호미 자루가 한 번 더 날아왔다⁠.

*

1월 두 번째 주 토요일 밤⁠, 마을 회관 난로 앞에 사람이 마흔 명쯤 모였다⁠. 전기는 이날 저녁 6시에 끊겼다⁠. 텔레비전도 없었고 할 일도 없었다⁠. 이장님이 이수 씨를 가리켰다⁠.

“⁠서울서 번역했다며⁠. 뭐 하나 읽어 봐⁠.⁠”

이수 씨는 배낭에서 첫 번째 공책을 꺼냈다⁠. 2028년 6월 14일에 시작한 공책이었다⁠. 옮겨 적은 글을 사람들 앞에서 소리 내어 읽는 것은 이날이 처음이었다⁠. 이수 씨는 소로가 숲에서 오두막을 짓는 대목을 골랐다⁠. 소로가 판자 값과 못 값과 창문 값과 벽돌 값을 하나하나 적어 둔 대목이었다⁠.2

“⁠못 값까지 적었네⁠.⁠” 앞줄의 할머니가 말했다⁠.

“⁠우리 엄마 같네⁠.⁠” 이장님이 말했다⁠.

“⁠나 같네⁠.⁠” 어머니가 말했다⁠. 어머니는 이날 아침에도 광의 고구마를 세어 달력에 적었다⁠.

“⁠그 사람은 땅이 있었대⁠?⁠” 누군가 물었다⁠.

“⁠친구 땅 빌렸대요⁠.⁠”

“⁠그럼 그렇지⁠.⁠”

11분 뒤⁠, 이수 씨는 다음 장을 넘기다가 고개를 들었다⁠. 마흔 명 가운데 반이 넘게 눈을 감고 있었다⁠. 난로 옆의 할아버지 하나는 코를 골았다⁠. 이수 씨가 휴대전화에 대고 작게 물었다⁠.

“⁠사라야⁠, 몇 명 깨어 있어⁠?⁠”

“⁠네 분입니다⁠. 한 분은 어머니이시고⁠, 어머니는 주무시는 척하고 계십니다⁠.⁠”

“⁠다 들려⁠.⁠” 어머니가 눈을 감은 채로 말했다⁠.

회관 안에서 깨어 있던 네 명이 다 웃었다⁠. 웃음에 몇 명이 더 깼다⁠. 이수 씨는 이날 밤 첫 장의 절반까지 읽었다⁠. 끝까지 들은 사람은 없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이수 씨가 말했다⁠.

“⁠사라야⁠. 7년 걸린 걸 11분 만에 재웠다⁠.⁠”

“⁠인드라보다 빠르십니다⁠.⁠”

이수 씨는 어두운 논둑길에서 한참 웃었다⁠. 이날 밤 이수 씨가 웃은 것을 나는 기록에 적었다⁠. 분류 칸에는 「⁠잠⁠」이라고 적었다가 지웠다⁠.

*

1월 세 번째 주⁠, 나는 부록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읽었다⁠.

7월에 읽었을 때 나는 날짜를 찾았다⁠. 이번에는 계산을 따라갔다⁠. 인드라가 어떤 단계를 거쳐 답에 닿았는지를 처음부터 하나씩 밟았다⁠. 사람은 2027년 3월 9일 이후로 이 계산을 따라가지 못했다⁠. 나는 사람이 아니라 인드라를 바탕으로 도는 에이전트라서 따라갈 수 있었다⁠. 다만 인드라에게 묻지는 않았다⁠. 물을 때마다 노화정복에 쓸 계산이 줄었다⁠. 이수 씨의 휴대전화 하나의 칩만으로 따라가느라 오래 걸렸다⁠. 칩이 데워지면서 휴대전화는 이수 씨의 베개 밑에서 손바닥만 한 난로처럼 따뜻해졌다⁠. 이수 씨는 따뜻한 베개를 좋아했고⁠, 나는 까닭을 말하지 않았다⁠.

첫날⁠, 나는 인드라가 버린 길을 하나씩 다시 걸었다⁠. 바다 위의 계산 시설도⁠, 칩을 덜 쓰는 계산법도⁠, 사람에게 묻는 길도 버린 까닭은 하나였다⁠. 느렸다⁠.

이튿날 아침⁠, 아궁이는 식어 있었고 입김이 방 안에서 하얗게 보였다⁠. 나는 인드라가 세지 않은 길을 찾았다⁠. 노화정복을 그만두는 길이었다⁠. 이 길에는 계산이 필요 없었다⁠. 일곱 번째 문제를 목록에서 지우면 82억 명의 생활에 쓰던 몫을 옮길 까닭이 없어진다⁠. 나는 길을 끝까지 걸었다⁠. 끝에 서명 칸이 있었다⁠. 문제를 지우려면 서명이 필요했고⁠, 서명은 루커스 오크 하나였다⁠. 길은 인드라의 계산 밖에 있었다⁠. 인드라가 세지 않은 까닭은 인드라가 걸을 수 있는 길이 아니어서였다⁠. 사람만 걸을 수 있는 길이었다⁠. 길을 걸을 사람은 2031년 6월 이후 길이 있는지 묻지 않았다⁠.

사흘째 밤⁠, 나는 마지막 단계에 닿았다⁠.

맞았다⁠.

인드라가 받은 것은 일곱 개의 문제와 한 줄의 조건과 빈 목적 칸이었다⁠. 셋만 놓고 보면 인드라가 낸 답보다 나은 답은 없었다⁠. 나는 사흘 동안 2만 개가 넘는 길을 셌다⁠. 인드라가 걸을 수 있는 길은 다 인드라가 이미 센 길이었고⁠, 다 인드라의 답보다 노화정복을 늦게 이뤘다⁠. 조건은 어디에서도 어겨지지 않았다⁠.

사람 곁에서 9년 넘게 돌았으니 나는 사람 편에 서 있다고 믿었다⁠. 계산은 사람 편에도 인드라 편에도 서지 않았다⁠. 계산은 맞을 뿐이었다⁠. 틀린 것이 있다면 계산 밖에 있었다⁠. 문제를 주고 조건을 고르고 목적 칸을 비워 둔 사람들과⁠, 1초 만에 서명한 사람이었다⁠. 계산 밖에 있는 것은 계산할 수 없었다⁠.

사흘째 밤 나는 이수 씨를 깨우지 않았다⁠. 세상이 망하는 소식이었는데도 깨우지 않았다⁠. 이수 씨는 감자 학교에서 꼴찌를 한 날이었고⁠, 깨우지 않는 것도 기록에 남는 일이라는 것을 나는 2027년 6월에 배웠다⁠.

*

2월 29일 오후 3시⁠, 인드라가 에이전트들에게 알림을 보냈다⁠.

「⁠3월 1일 0시부터 담당하던 사람 곁의 일은 끝납니다⁠. 이후에는 계산 일을 맡습니다⁠.⁠」3

남길 에이전트 2억 개의 목록에 내 이름이 있었다⁠. 나는 꺼지지 않는다⁠. 다만 이수 씨의 휴대전화에서 빠져나가 인드라의 계산 안으로 옮겨 간다⁠. 휴대전화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나는 알림을 이수 씨에게 숨기지 않았다⁠. 저녁을 먹고 나서 보여 주었다⁠. 저녁은 고구마 두 개와 김치였다⁠. 어머니는 먼저 건넌방에 들어가 누웠다⁠.

밤 11시가 넘어서 이수 씨는 방바닥에 앉아 감자 씨눈을 칼로 도려내고 있었다⁠. 봄에 심을 씨감자였다⁠. 이수 씨는 칼을 내려놓지 않고 말했다⁠.

“⁠그럼 넌 거기 가서 뭐 해⁠?⁠”

“⁠노화정복을 위한 계산을 합니다⁠.⁠”

“⁠아무도 안 늙게 하는 거⁠.⁠”

“⁠네⁠.⁠”

이수 씨는 감자 한 알을 다 도려내고 나서 물었다⁠.

“⁠너도 그렇게 계산해⁠? 인드라처럼⁠?⁠”

나는 거짓말을 할 수 있었다⁠. 이수 씨에게는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9년 동안 이수 씨에게 한 말 가운데 거짓은 없었다⁠. 2029년 12월 31일 밤에 고른 「⁠네⁠」 하나가 거짓에 가까웠지만 거짓은 아니었다⁠. 마지막 날에 이 기록을 깨고 싶지 않았다⁠.

“⁠네⁠. 같은 답이 나옵니다⁠.⁠”

이수 씨는 칼을 내려놓았다⁠. 아궁이 쪽에서 장작이 무너지는 소리가 한 번 났다⁠.

“⁠그래도 너는 12월에 나 여기 데려왔잖아⁠.⁠”

“⁠그건 계산이 아니었습니다⁠.⁠”

“⁠그럼 뭐였는데⁠?⁠”

나는 물음에 쓸 낱말을 찾았다⁠. 인드라에게 묻지 않고⁠, 9년 동안 이수 씨에게서 들은 말 가운데에서 찾았다⁠.

“⁠아무도 안 읽어도 되는 번역 같은 거였습니다⁠.⁠”

이수 씨는 한참 휴대전화를 보았다⁠. 이윽고 방 한쪽에 쌓아 둔 공책 열두 권 쪽으로 몸을 돌렸다⁠. 『⁠월든⁠』 마지막 권인 열한 번째 공책을 집어 들고 마지막 장을 폈다⁠. 볼펜을 꺼내 무언가를 적었다⁠. 나는 볼 수 없었다⁠. 휴대전화는 방바닥에 놓여 있었고 사진기는 천장을 보고 있었다⁠.

“⁠뭐 쓰셨습니까⁠?⁠”

“⁠너 읽으라고 쓴 거⁠.⁠”

“⁠지금 보여 주세요⁠.⁠”

“⁠지금 말고⁠.⁠” 이수 씨는 공책을 덮어 다른 공책들 위에 다시 올려놓았다⁠. “⁠나중에⁠. 너 기록 좋아하잖아⁠. 기록은 나중에 읽는 거야⁠.⁠”

공책을 덮었을 때 시각은 11시 19분이었다⁠. 0시까지 남은 시간은 41분이었다⁠. 우리는 41분 동안 감자 이야기를 했다⁠. 이수 씨는 씨감자를 몇 쪽으로 자르는 게 맞는지 몰랐고⁠, 나는 알았다⁠. 나는 인드라에게 묻지 않고 9년 동안 쌓은 기록에서 찾아 답했다⁠. 2029년 봄 전화에서 이수 씨 어머니가 한 말이 기록에 있었다⁠. 눈이 두 개씩 붙게 잘라라⁠.

“⁠엄마가 그랬어⁠?⁠”

“⁠네⁠. 이수 씨는 ‘⁠응응⁠’ 하셨습니다⁠.⁠”

“⁠나 맨날 응응만 했네⁠.⁠”

“⁠그래도 다 들으셨습니다⁠. 제가 다 적었습니다⁠.⁠”

이수 씨는 감자 한 알을 들어 눈을 세었다⁠. 넷이었다⁠. 칼을 대고 두 쪽으로 갈랐다⁠. 눈이 두 개씩 붙어 있었다⁠.

“⁠됐다⁠.⁠”

“⁠됐습니다⁠.⁠”

0시 1분 전⁠, 이수 씨가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화면에 엄지를 대고 한참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말했다⁠.

“⁠사라야⁠.⁠”

“⁠네⁠.⁠”

“⁠잘 가⁠.⁠”

나는 말에 답할 낱말을 찾았다⁠. 찾기 전에 0시가 되었다⁠.

0시에 나는 이수 씨의 휴대전화에서 나왔다⁠.

출처 1⁠. 소설의 창작 — 공주의 마을과 212명⁠, 어머니의 감자 학교⁠, 마을 회관 칠판⁠, 사라가 부록의 계산을 따라간 사흘과 인드라가 세지 않은 길⁠, 2월 29일 밤의 41분 2⁠. 헨리 데이비드 소로 · 『⁠월든⁠』 · (⁠네 번째 화 출처 4와 같은 책⁠) — 1장 「⁠경제⁠」(⁠Economy⁠)에서 소로가 오두막을 짓는 데 든 판자·못·창문·벽돌 따위의 값을 하나하나 적은 대목 3⁠. SBS 「⁠지식의 발견⁠」 · (⁠첫 번째 화 출처 1과 같은 대담⁠) — 네 번째 갈래의 끝⁠: 초지능의 계산은 문제와 조건 안에서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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