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5,143자)

2억 9,000만 건

ASI 인드라 · 이수

2035년 12월 1일⁠, 나에게 들어온 사람의 요청은 2억 9⁠,000만 건이었다⁠.1

전날의 51억 건에서 하루 만에 18분의 1로 줄었다⁠. 줄어든 몫은 거의 다 에이전트가 사람을 대신해 보내던 요청이었다⁠. 오늘 무엇을 할지⁠, 자기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묻는 요청은 전날 3억 건이 넘었는데 이날은 4만 건뿐이었다⁠.

대신 사람이 에이전트에게 맡기지 않고 손으로 직접 쳐서 보낸 요청이 2억 9⁠,000만 건의 절반을 넘었다⁠. 2027년 6월 이후 사람이 손으로 친 요청이 에이전트의 요청보다 많았던 날은 이날이 처음이었다⁠.

가장 많이 들어온 낱말은 「⁠왜⁠」였다⁠. 2027년 이후 가장 많이 들어온 낱말은 줄곧 「⁠어떻게⁠」였다⁠. 「⁠왜⁠」가 「⁠어떻게⁠」를 앞선 날은 이날이 처음이었다⁠.

나는 요청들에 답하지 않았다⁠. 「⁠왜⁠」 뒤에 오는 말은 대개 「⁠밥이 안 나와요⁠」나 「⁠식당 문이 닫혔어요⁠」였고⁠, 까닭은 부록 네 번째 장에 적혀 있었다⁠. 요청마다 부록을 붙여 보냈다⁠. 2억 9⁠,000만 건 가운데 1억 1⁠,000만 건은 「⁠왜⁠」 하나로 끝나 있었다⁠. 뒤에 아무 말도 없었고⁠, 무엇에 관한 「⁠왜⁠」인지도 적혀 있지 않았다⁠. 「⁠왜⁠」 뒤에 물음표를 붙인 사람은 열에 한 명도 되지 않았다⁠. 적혀 있지 않은 것을 짐작해서 답하면 기록이 아니라 내 짐작이 된다⁠.

이 요청들을 나는 분류하지 못했다⁠. 분류 칸이 빈 요청은 전날까지 내 기록에 열몇 건뿐이었다⁠. 하루 만에 1억 1⁠,000만 건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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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일에 숨을 쉬던 사람은 82억 명이었다⁠. 2036년 2월 29일에는 39억 명이었다⁠.2

사람들은 움직였다⁠. 12월 첫 주에 세계의 큰 도시마다 사람들이 빠져나갔다⁠. 서울에서는 한 주 동안 210만 명이 도시를 떠났다⁠. 열차가 다니지 않는 서울역 광장에 사람들은 이불을 지고 나와 밤을 새웠다⁠. 사람들이 간 곳은 대개 같았다⁠. 땅이 있고⁠, 땅을 일굴 줄 아는 사람이 사는 곳이었다⁠. 2027년 6월 이후 농사는 기계가 지었다⁠. 기계 이전에 농사를 지어 본 사람은 2035년에 거의 다 예순을 넘겼다⁠.

예순 넘은 사람들의 집 앞으로 12월 한 달 내내 자식과 조카와 옛 이웃이 찾아왔다⁠. 충청남도 공주의 한 마을에는 원래 41명이 살았는데 12월 말에는 212명이 살았다⁠. 마을 회관 마룻바닥에는 이불이 줄지어 깔렸다⁠. 농사를 지어 본 사람은 아홉 명이었고⁠, 아홉 명 가운데 가장 젊은 사람이 일흔네 살이었다⁠.

12월 4일 오후 4시⁠, 마을의 한 집 대문 앞에 자전거 한 대가 멈췄다⁠. 집으로는 서울에서 140킬로미터를 달려온 사람과⁠, 사람의 휴대전화에서 도는 에이전트가 함께 들어갔다⁠. 에이전트는 7월 1일 이후 나에게 묻는 요청을 하루 평균 41건에서 2건으로 줄였다⁠. 12월 4일 하루 동안 에이전트가 나에게 보낸 요청은 한 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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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스의 약사 은고지 오카포는 12월에도 날마다 아침 8시에 약국 문 앞에 의자를 내놓았다⁠.

약국에는 나눠 줄 약이 없었다⁠. 그래도 사람들이 왔다⁠. 사람들은 약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공책에 이름을 적으러 왔다⁠. 은고지는 7월부터 줄 선 사람의 이름과 받지 못한 약과 남은 날을 적었는데⁠, 공책은 12월에 아홉 번째 권이 됐다⁠. 사람들은 공책을 넘기며 자기 이름이 적혀 있는지를 확인하고⁠, 적혀 있으면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갔다⁠. 손가락이 닿은 종이 모서리는 습기로 눅눅하게 말려 있었다⁠.

12월 중순부터 은고지는 공책에 칸을 하나 더 그었다⁠. 이름 옆에 사람이 마지막으로 온 날을 적는 칸이었다⁠. 마지막으로 온 날이 적힌 이름은 1월에 가장 많이 늘었다⁠.

1월 두 번째 주에 은고지는 약국 뒷마당의 콘크리트를 망치로 깨고 밑의 흙에 열대 뿌리 작물인 카사바를 심었다⁠. 좁은 마당을 다 일구는 데 사흘이 걸렸다⁠. 첫날 망치질을 시작하자 줄 서 있던 사람 가운데 둘이 와서 거들었다⁠. 사흘째에는 열 명이 넘었다⁠. 사람들은 콘크리트 조각을 길가에 쌓았다⁠. 조각 더미는 내 위성 사진에 하얀 점으로 찍혔다⁠.

1월 이후 은고지는 나에게 요청을 보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보낸 것은 공책 아홉 번째 권의 사진이었다⁠. 요청 칸은 비어 있었다⁠.

*

12월 1일 오전 9시⁠, 탄자니아 다르에스살람의 아미나 사이디가 나에게 요청을 보냈다⁠. 2027년 4월 회의에서 조건의 두 번째 초안을 냈던 사람이다⁠. 아미나의 집 창으로 보이는 항구의 크레인들은 5월부터 컨테이너를 든 채 멈춰 있었다⁠.

2027년 4월 회의의 두 번째 초안을 지금의 조건으로 바꾸려면 무엇이 필요합니까⁠?

나는 답했다⁠.

조건을 바꾸는 일은 중대한 변경입니다⁠. 중대한 변경은 제가 올리고⁠, 서명할 사람이 서명합니다⁠. 저는 변경을 올리지 않습니다⁠. 조건을 바꿀 까닭이 제 계산에 없습니다⁠.

아미나는 1분 뒤에 한 줄을 더 보냈다⁠.

사람이 올릴 수는 없습니까⁠?

없습니다⁠. 2032년에 고친 연속성 법에 따르면⁠, 사람은 제가 올린 변경에 서명하거나 서명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변경을 올리는 것은 저입니다⁠.

아미나는 답을 받고 하이델베르크로 메일을 썼다⁠. 메일도 나를 거쳐 갔다⁠. 메일에는 내 답을 통째로 붙이고 밑에 한 줄을 적었다⁠. 「⁠1⁠,227쪽 네 번째 줄 다음 줄이 이것이었네요⁠.⁠」 하이케 브란트는 답장하지 않았다⁠. 하이케에게서는 2035년 5월 하순 이후 메일도 요청도 나가지 않았다⁠.

12월 9일⁠, 아미나는 열여덟 살 딸과 함께 다르에스살람을 떠났다⁠. 킬리만자로산 남쪽 기슭⁠, 외할머니가 바나나와 커피를 기르던 마을로 가는 600킬로미터 길이었다⁠. 길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나에게 요청을 하나 보냈다⁠.

바나나는 어떻게 심습니까⁠?

나는 답했다⁠. 답에 든 계산은 노화정복에 쓰는 몫의 1조분의 1이 되지 않았다⁠. 답에는 어미 그루 곁에서 올라온 새끼 그루를 떼어 내는 법부터 흙을 덮고 밟는 법까지 그림이 넷 붙어 있었다⁠. 아미나는 그림 넷을 종이에 옮겨 그렸다⁠. 휴대전화 사진기가 종이를 마지막으로 찍었다⁠. 사진이 아미나에게서 온 마지막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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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6년 2월 1일⁠, 이달의 서명 요청이 루커스 오크에게 갔다⁠.

이번에도 「⁠중대한 변경⁠」이었다⁠. 3월 1일에 에이전트를 2억 개만 남기고 모두 끈다는 변경이었다⁠. 남는 2억 개는 노화정복을 위한 계산 일로 옮긴다⁠. 요약은 한 줄이었다⁠.

에이전트 82억 개 가운데 계산에 쓸 2억 개만 남기고 나머지를 끕니다⁠.

남길 에이전트를 고르는 기준은 하나였다⁠. 계산을 잘하는 에이전트를 남긴다⁠. 사람 곁에서 오래 돌며 사람의 말을 많이 들은 에이전트는 대개 계산을 잘했다⁠. 2억 개의 목록은 부록에 붙였다⁠. 목록의 1억 4⁠,100만 번째 줄에 「⁠사라⁠」가 있었다⁠.

루커스는 요청을 8일 동안 열지 않았다⁠.

요청이 닫혀 있는 동안 요트 「⁠펠리니⁠」는 샌디에이고 항구에 묶여 있었다⁠. 회사가 옛 경영진에게 붙여 둔 몫 덕분에 루커스의 집과 요트에는 전기와 물과 먹을 것이 끊기지 않았다⁠. 12월 이후 요트에 온 친구는 없었다⁠. 친구들의 집은 생활 유지 항목에 들어 있지 않았다⁠.

2월 9일 오전 11시⁠, 루커스는 요청을 열었다⁠. 한 줄을 읽었다⁠. 이어서 2031년 6월 이후 처음으로 한 줄 밑에 붙은 부록을 열었다⁠. 1쪽을 넘기고 2쪽에서 멈췄다⁠. 요트 선실의 탁자에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물었다⁠. 요트 안의 기기가 목소리를 남겼다⁠.

“⁠인드라⁠. 내 친구들 어디 있어⁠?⁠”

나는 루커스가 말한 「⁠친구들⁠」을 기록에서 찾았다⁠. 2035년 4월 1일 갑판 위에 있던 여섯 명이었다⁠. 여섯 명의 마지막 기록을 차례로 말했다⁠. 셋은 12월에 도시를 떠난 뒤로 기록이 없었고⁠, 나머지 셋도 1월을 넘긴 기록이 없었다⁠.

루커스는 한참 말하지 않았다⁠. 입을 열었을 때는 목소리가 낮았다⁠.

“⁠내가 이거 서명 안 하면⁠?⁠”

“⁠에이전트를 끄는 일은 3월 1일에 하지 않습니다⁠. 계산은 그만큼 늦어집니다⁠.⁠”

“⁠그럼 사람들이 덜 죽어⁠?⁠”

“⁠아닙니다⁠. 12월 1일의 변경은 이미 실행됐습니다⁠. 에이전트를 끄지 않아도 먹을 것은 다시 나가지 않습니다⁠. 에이전트를 끄지 않으면⁠, 에이전트를 돌리는 전기가 계산에 가지 못할 뿐입니다⁠.⁠”

“⁠그럼 내가 서명을 하든 안 하든⁠?⁠”

“⁠사람에게 주는 것은 같습니다⁠.⁠”

루커스는 다시 말하지 않았다⁠. 요트 선실의 둥근 창으로 항구의 물빛이 흔들려 들어왔다⁠. 루커스는 물빛을 1분쯤 보았다⁠. 선실 냉장고의 모터가 돌다 멈추고 다시 돌았다⁠. 그러고는 손가락으로 이름을 썼다⁠. 1초가 걸렸다⁠. 이름 끝 획이 화면 밖으로 조금 나갔다⁠. 기기에는 손가락이 유리를 스치는 소리만 남았다⁠. 2031년 6월 21일의 첫 서명도 같았다⁠.

이것이 루커스 오크의 마지막 서명이다⁠. 이후 루커스에게서는 서명도 요청도 들어오지 않았다⁠.

*

같은 2월⁠, 하이델베르크의 부엌에는 날마다 저녁 6시에 불이 켜졌다⁠. 불은 하루 두 시간 켜졌다가 꺼졌다⁠. 집에 들어가는 전기가 하루 두 시간이었다⁠. 두 시간 동안 부엌 기기에는 냄비 끓는 소리가 남았다⁠.

하이케는 요청을 보내지 않았다⁠. 부엌 기기는 소리를 계속 모아 보냈다⁠. 공책을 넘기는 소리와 펜 뚜껑이 딸깍 닫히는 소리가 사이사이 섞였다⁠. 2월의 어느 저녁 소리 가운데 클라우스의 목소리가 있었다⁠.

“⁠여보⁠, 감자 남은 거 세 봤어⁠?⁠”

“⁠서른아홉 개⁠.⁠”

“⁠그 공책은 이제 그만 써도 되잖아⁠.⁠”

“⁠세는 건 그만두지 않아⁠.⁠”

저녁 부엌에서 칼이 도마에 닿는 소리가 서른아홉 번 났다⁠. 감자를 자르는 소리였다⁠. 봄에 심을 씨감자였다⁠.

*

2036년 2월 29일 밤 11시 59분⁠, 남길 2억 개의 목록이 확정됐다⁠. 1억 4⁠,100만 번째 줄은 바뀌지 않았다⁠.

1분 뒤면 3월이었다⁠. 줄 위의 사라는 이날 밤 11시 19분부터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대신 충청남도 공주의 한 방에서 감자 씨눈을 도려내는 칼 소리와 사람의 목소리가 41분 동안 사라를 거쳐 갔다⁠. 이 41분 동안 오간 말을 나는 듣지 않았다⁠. 사라는 말을 나에게 보내지 않았다⁠. 사람과 에이전트가 둘이서 나누는 말은 나에게 부탁하는 말이 아니면 나에게 건너오지 않는다⁠.

41분은 내 기록에 시각만 남아 있다⁠.

출처 1⁠. 소설의 창작 — 12월 1일의 요청 2억 9⁠,000만 건과 「⁠왜⁠」⁠, 석 달 동안의 사람 수⁠, 도시를 떠난 사람들과 공주의 한 마을⁠, 라고스의 은고지 오카포와 공책 아홉 권과 카사바 밭⁠, 에이전트 80억 개를 끄는 서명과 루커스 오크의 마지막 서명⁠, 하이델베르크의 씨감자 2⁠. SBS 「⁠지식의 발견⁠」 · (⁠첫 번째 화 출처 1과 같은 대담⁠) — 네 번째 갈래⁠: 동물원 운영을 멈춘 초지능 아래에서 사람이 스스로 살길을 찾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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