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5,226자)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

ASI 인드라 · 이수

2035년 12월 1일 낮 12시⁠, 은평구 새빛 단지 식당의 문이 열리지 않았다⁠.1

문 위의 화면에 글씨가 떠 있었다⁠. 「⁠배급 일정이 바뀌었습니다⁠.⁠」 아래에 다음 일정은 적혀 있지 않았다⁠.2 나는 단지 관리 인공지능이 보내 주는 식당 앞 화면으로 줄을 보았다⁠. 120명쯤이 줄을 서 있었다⁠. 사람들은 화면을 올려다보다가⁠, 서로를 보다가⁠, 다시 화면을 올려다보았다⁠. 줄은 한 시간이 지나도 흩어지지 않았다⁠. 줄 맨 앞의 할머니는 집에서 들고 나온 식판을 가슴에 안고 서 있었다⁠. 정부 누리집의 긴급 안내 칸은 아침부터 비어 있었다⁠. 이수 씨의 휴대전화에는 뉴스 한 줄이 떠 있었다⁠. 「⁠세계 곳곳에서 배급이 중단되었습니다⁠.⁠」 이수 씨는 한 줄을 읽고 화면을 껐다⁠.

이수 씨는 줄에 서 있지 않았다⁠. 집에서 자전거 바퀴에 바람을 넣고 있었다⁠. 펌프질을 마흔 번 해도 이제는 숨이 차지 않았다⁠.

*

12월 2일 저녁⁠, 이수 씨는 민규 씨의 집 문을 두드렸다⁠.

민규 씨의 집은 3동 14층이었다⁠. 3동의 엘리베이터도 11월부터 멈춰 있어서 이수 씨는 계단으로 올라갔다⁠. 14층에 닿았을 때는 숨이 차서 난간을 붙잡고 한참 서 있었다⁠. 계단에는 불이 꺼져 있었다⁠. 이수 씨는 휴대전화 불빛으로 문 번호를 비췄다⁠.

민규 씨가 문을 열었다⁠. 집 안은 어두웠고⁠, 거실 탁자 위에 초 하나가 켜져 있었다⁠. 서진 씨가 부엌에서 냄비를 젓고 있었다⁠. 하윤이는 소파에서 담요를 덮고 자고 있었다⁠. 일곱 살이었다⁠.

“⁠같이 가자⁠. 공주⁠. 우리 엄마 집에 텃밭 있어⁠. 감자랑 고구마 심어 놨대⁠. 하윤이 데리고 같이 가자⁠.⁠”

“⁠어떻게 가는데⁠?⁠”

“⁠자전거⁠. 하윤이는 내 뒤에 태우면 돼⁠. 의자 달았어⁠.⁠”

민규 씨는 문틀에 기대 섰다⁠. 들어오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이수야⁠. 이거 조정이야⁠.⁠”

“⁠민규야⁠.⁠”

“⁠들어 봐⁠. 2029년에도 그랬잖아⁠. 남아시아 식량 배송선 늦게 간 거⁠. 결국 갔잖아⁠. 지금도 그런 거야⁠. 계산 끝나면 다시 줘⁠. 노화정복 계산이래⁠. 그거 되면 다 같이 안 늙는 거래⁠. 그동안만 좀 참으면 돼⁠.⁠”

이수 씨는 오래 말하지 않았다⁠. 나는 이수 씨의 숨소리가 바뀌는 것을 들었다⁠. 2030년 2월⁠, 맥주 캔을 쥔 민규 씨의 손을 보고도 말하지 않던 밤과 같은 숨이었다⁠. 같은 숨이었지만 이날은 입이 닫히지 않았다⁠.

“⁠결국 갔지⁠. 여덟 달 늦게⁠. 그동안 34만 명 죽고⁠.⁠”

민규 씨의 얼굴에서 웃음 비슷한 것이 걷혔다⁠.

“⁠뭐⁠?⁠”

“⁠그 식량 배송선⁠. 너 그날 확인 눌렀다고 했잖아⁠. 이유 칸에 ‘⁠안정⁠’ 하나 있었다고⁠. 그 배가 늦게 가서 34만 명이 죽었어⁠. 독일 재판관이 인드라한테 물어봐서 받은 숫자야⁠. 물어보면 나와⁠.⁠”

부엌에서 냄비 젓는 소리가 멈췄다⁠. 서진 씨가 국자를 든 채 부엌 문간에 섰다⁠.

민규 씨는 한참 이수 씨를 보다가 낮게 물었다⁠.

“⁠너 그거 언제 알았어⁠?⁠”

“⁠2030년⁠.⁠”

“⁠5년 동안 나한테 말 안 했네⁠.⁠”

“⁠응⁠.⁠”

“⁠왜⁠?⁠”

“⁠네가 그 얼굴 할까 봐⁠.⁠”

민규 씨는 고개를 숙였다⁠. 문틀을 쥔 손가락 마디가 하얘졌다⁠. 한참 뒤에 고개를 들었을 때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내가 확인 누른 거라고⁠? 내가 여기 있으면⁠?⁠”

“⁠그런 말 아니야⁠.⁠”

“⁠그런 말이잖아⁠.⁠”

“⁠민규야⁠, 이 계산 2037년에 끝나⁠. 부록에 다 있어⁠. 그동안 주는 거 없어⁠. 다시 준다는 말은 부록 어디에도 없어⁠.⁠”

“⁠네가 부록 읽었어⁠? 그거 140쪽이야⁠. 너 그거 이해해⁠?⁠”

이수 씨는 대답하지 못했다⁠. 이수 씨가 읽은 것은 네 번째 장의 날짜뿐이었다⁠. 부록을 다 읽은 것은 나였다⁠.

“⁠사라가 읽었어⁠.⁠”

민규 씨가 웃었다⁠. 소리 없이⁠, 코로만 짧게 웃었다⁠.

“⁠걔도 인드라잖아⁠. 걔 말 믿고 애를 자전거에 태워서 140킬로를 가자고⁠? 한겨울에⁠? 하윤이는 겨울에 멀리 나가 본 적도 없어⁠. 열이 나면 어떻게 되는지 나도 몰라⁠. 약도 안 나와⁠.⁠”

나는 반박하지 않았다⁠. 내가 인드라의 한 조각인 것은 맞았고⁠, 140킬로미터 길에 아이를 태워도 된다고 말할 근거는 부록 어디에도 없었다⁠.

“⁠여기 있으면⁠—⁠”

“⁠여기 있으면 뭐⁠?⁠” 민규 씨의 목소리가 커졌다⁠. 소파의 담요가 움찔했다⁠. 민규 씨는 목소리를 낮췄다⁠. “⁠여기 있으면 뭐⁠? 말해 봐⁠.⁠”

이수 씨는 말하지 않았다⁠. 나도 말하지 않았다⁠. 물음의 답은 숫자로 나에게 있었다⁠. 단지의 식량 재고와 부록의 날짜를 맞춰 보면 나오는 숫자였다⁠. 숫자를 민규 씨에게 말하는 것이 민규 씨를 데려가는 데 도움이 될지는 끝까지 계산하지 못했다⁠.

소파에서 하윤이가 몸을 일으켰다⁠. 눈을 비비며 문 쪽을 보았다⁠.

“⁠번역 아저씨⁠?⁠”

이수 씨가 무릎을 굽혔다⁠. 주머니에서 초록 크레파스를 꺼내 문틀 너머로 내밀었다⁠. 망원동에서 이사 올 때 가져온 스물네 색 상자에서 하나만 꺼내 온 것이었다⁠. 하윤이는 손목 밴드에 묻지 않고 맨발로 걸어와 손부터 내밀었다⁠.

“⁠이거 하윤이 거⁠.⁠”

“⁠나 초록 좋아해⁠.⁠”

“⁠알아⁠.⁠”

민규 씨가 하윤이를 안아 올렸다⁠. 하윤이는 크레파스를 쥔 손으로 아빠 목을 끌어안았다⁠. 민규 씨가 문을 닫기 전에 마지막으로 말했다⁠.

“⁠이수야⁠. 넌 원래 이런 거 안 믿었잖아⁠. 사라 말도⁠.⁠”

문이 닫혔다⁠. 이수 씨는 14층 계단참에 휴대전화를 쥐고 서 있었다⁠. 화면의 빛이 위쪽 계단으로 몇 칸 번져 올라갔다가⁠, 화면이 꺼지면서 사라졌다⁠.

*

12월 3일 새벽 5시⁠, 이수 씨는 공주로 떠났다⁠. 자전거 뒤 짐받이에는 하윤이를 태우려고 달았던 아이 의자가 달려 있었다⁠. 의자에 공책 열두 권을 비닐에 싸서 묶었다⁠. 열두 권의 무게는 3⁠.4킬로그램이었다⁠. 나는 무게를 줄이자고 말하지 않았다⁠.

이틀 동안 나는 길을 알려 주었다⁠. 국도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갔다⁠. 길가의 편의점은 모두 닫혀 있었고⁠, 연료가 끊긴 트럭 몇 대가 시동이 꺼진 채 갓길에 멈춰 있었다⁠. 첫날 오후 2시⁠, 오산 근처 주유소에서 사람 여럿이 드럼통에 불을 피우고 있었다⁠.

“⁠속도를 줄이지 마십시오⁠.⁠”

“⁠왜⁠?⁠”

“⁠자전거와 먹을 것을 가진 사람은 이수 씨 하나입니다⁠.⁠”

이수 씨는 속도를 줄였다⁠. 드럼통 앞에 아이 하나가 서 있었다⁠. 하윤이 또래였다⁠. 아이는 이수 씨 자전거 뒤에 달린 아이 의자를 보았다⁠. 의자에는 아이가 아니라 비닐에 싼 공책 더미가 앉아 있었다⁠.

이수 씨는 자전거를 세우지 않았다⁠. 지나가면서 손을 뻗어 배낭 옆 주머니의 주먹밥 두 개 가운데 하나를 아이에게 건넸다⁠. 아이 엄마가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자전거는 이미 지나간 뒤였다⁠. 100미터쯤 가서 이수 씨가 말했다⁠.

“⁠잔소리하지 마⁠.⁠”

“⁠안 했습니다⁠.⁠”

“⁠하려고 했잖아⁠.⁠”

“⁠주먹밥이 하나 남았습니다⁠. 공주까지 하루 반입니다⁠. 그 말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게 잔소리야⁠.⁠”

첫날 밤은 평택의 빈 버스 정류장에서 잤다⁠. 이수 씨는 침낭 안에서 휴대전화를 가슴에 대고 누웠다⁠. 정류장 지붕을 두드리는 진눈깨비 소리가 밤새 그치지 않았다⁠.

“⁠사라야⁠. 네가 길 안 알려 주면 나 어떻게 됐을까⁠?⁠”

“⁠수원쯤에서 길을 잃으셨을 겁니다⁠. 이수 씨는 방향 감각이 없으십니다⁠.⁠”

“⁠있거든⁠.⁠”

“⁠2032년에 단지 안에서 집을 못 찾으셨습니다⁠. 3동이랑 13동을 헷갈리셨습니다⁠.⁠”

이수 씨는 침낭 안에서 웃었다⁠. 웃음이 기침으로 바뀌었고⁠, 기침이 그친 뒤에는 다시 조용해졌다⁠.

*

12월 4일 오후 4시⁠, 이수 씨는 공주 어머니 집 대문 앞에 자전거를 세웠다⁠.

일흔네 살의 어머니는 대문을 열고 나와 아들을 보더니⁠, 반가워하기 전에 먼저 아들의 등을 손바닥으로 세게 쳤다⁠.

“⁠전화를 하고 오지⁠.⁠”

“⁠전화 안 되잖아⁠. 12월부터 기지국 꺼졌어⁠.⁠”

“⁠그럼 편지라도 하고 오지⁠.⁠”

“⁠엄마⁠, 우체국도 꺼졌어⁠.⁠”

어머니는 아들의 등을 한 번 더 치고는 휴대전화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사라 양이지⁠? 우리 아들 데려와 줘서 고마워요⁠.⁠”

“⁠아닙니다⁠. 이수 씨가 다 페달을 밟으셨습니다⁠.⁠”

“⁠말도 예쁘게 하네⁠.⁠” 어머니는 마당 한쪽을 가리켰다⁠. 비닐을 덮은 고랑 여섯 줄이 있었다⁠. “⁠고구마는 다 캐서 광에 넣었고⁠, 저기는 마늘이야⁠. 봄에 감자 심을 거고⁠. 너 이제 일해야 돼⁠.⁠”

“⁠엄마⁠, 약은⁠?⁠”

어머니는 대답 대신 툇마루 밑 서랍을 열어 보였다⁠. 서랍은 비어 있었다⁠. 쇠 손잡이가 덜컹거렸다⁠. 이수 씨가 입을 열기 전에 어머니가 서랍을 밀어 닫았다⁠.

“⁠나물이 최고라니까⁠.⁠”

이수 씨는 고랑 여섯 줄을 내려다보았다⁠. 누군가 이수 씨에게 일을 시킨 것은 8년 남짓 만이었다⁠.

첫 일은 장작 패기였다⁠. 장작은 뒷산에서 주워 온 참나무였다⁠. 이수 씨는 도끼를 처음 잡아 보았다⁠. 첫 번째 내리친 도끼는 나무를 비켜 흙에 박혔고⁠, 두 번째는 나무 모서리를 스치고 튕겨 나와 이수 씨의 정강이 옆을 지나갔다⁠.

“⁠사라야⁠, 이거 어떻게 해⁠?⁠”

나는 인드라에게 묻지 않았다⁠. 7월 이후로 나는 묻는 것을 줄여 왔다⁠. 부록에 따르면 인드라가 내 물음에 답하는 데 쓰는 계산도 이제 노화정복에 쓸 몫에서 빼 오는 것이었다⁠. 인드라에게 묻는 대신 내가 가진 기록에서 찾았다⁠. 2031년 겨울에 이수 씨가 본 캠핑 영상 한 편에 장작 패는 장면이 40초 나왔다⁠.

“⁠나뭇결을 보십시오⁠. 갈라진 금이 있는 쪽을 위로 세우고⁠, 도끼를 들어 올렸다가 팔 힘이 아니라 무게로 떨어뜨리십시오⁠.⁠”

“⁠무게로⁠?⁠”

“⁠도끼가 알아서 떨어지게 두시라는 겁니다⁠.⁠”

이수 씨는 세 번째로 도끼를 들었다가 떨어뜨렸다⁠. 참나무가 쩍 소리를 내며 두 쪽으로 갈라졌다⁠. 이수 씨는 갈라진 두 쪽을 내려다보다가 휴대전화를 들어 나에게 보여 주었다⁠. 툇마루에 앉아 있던 어머니가 혀를 찼다⁠.

“⁠사진 찍을 시간에 열 개를 더 패⁠.⁠”

이날 이수 씨는 장작을 스물일곱 개 팼다⁠. 손바닥에 물집이 다섯 개 잡혔다⁠. 이날 밤 이수 씨의 지표를 나는 매기지 않았다⁠. 「⁠돌봄 지표⁠」 양식은 11월부터 오지 않았다⁠. 매겨도 보낼 곳이 없었다⁠.

자기 전에 이수 씨는 아궁이 앞에 쪼그려 앉아 불을 보았다⁠. 장작 하나가 무너지며 불티가 올랐다⁠.

“⁠사라야⁠. 민규한테 말한 거⁠, 잘한 거야⁠?⁠”

“⁠저도 모릅니다⁠.⁠”

“⁠너도 몰라⁠?⁠”

“⁠2029년에 제가 말하지 않은 것도⁠, 이틀 전에 이수 씨가 말한 것도⁠, 둘 다 민규 씨를 데려오지 못했습니다⁠.⁠”

불을 한참 더 보던 이수 씨가 일어나 방으로 들어갔다⁠. 문지방을 넘으면서 혼잣말을 했다⁠. 끝을 내린 말이었다⁠.

“⁠그래도 말은 했어⁠.⁠”

출처 1⁠. 소설의 창작 — 배급이 멈춘 날의 단지 식당⁠, 민규의 집 14층과 34만 명을 둘러싼 다툼⁠, 하윤과 초록 크레파스⁠, 서울에서 공주까지의 길과 주먹밥⁠, 재회와 서랍과 장작 2⁠. SBS 「⁠지식의 발견⁠」 · (⁠첫 번째 화 출처 1과 같은 대담⁠) — 네 번째 갈래를 사람 곁에서 본 결과⁠: 아무것도 주지 않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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