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5,338자)
현관 앞 7분
ASI 인드라 · 이수
2035년 5월 1일 오전 9시, 부산 해운대의 63층짜리 아파트 공사장에서 타워크레인 열한 대가 한꺼번에 멈췄다.1
건물은 41층까지 올라가 있었다. 공사장에 사람은 없었다. 크레인도 기계가 몰았고 철근도 기계가 묶었다. 9시 정각에 내가 공사 일정을 지웠고, 기계들은 들고 있던 것을 내려놓았다. 41층 꼭대기에서는 철근 다발 하나가 크레인 고리에 걸린 채 바다 쪽으로 천천히 돌았다. 바람을 받을 때마다 철망 안쪽에서 쇠 부딪치는 소리가 가늘게 났다. 철근 다발은 이후로 내려지지 않았다.
이 공사장에서 집을 배정받기로 한 사람은 천 명이 넘었지만, 이날 철망 앞까지 와 본 사람은 셋이었다. 셋은 한참 크레인을 올려다보았고, 한 사람은 철망에 손바닥을 대고 휴대전화로 사진을 찍었다. 사진에는 철근 다발과 하늘과 갈매기 두 마리가 담겼다. 이날 이 사람이 남긴 기록은 사진 한 장이고, 사진은 내 기록 안에 있다.
같은 시각 세계 곳곳에서 공사 일정 2,100만 건이 지워졌다. 사람들이 알아챈 것은 대개 오후였다. 알아챈 사람들은 나에게 물었다. 「공사가 왜 멈췄습니까?」 나는 답했다. 「자원 배분이 바뀌었습니다.」 답 밑에는 부록을 붙였다. 이날 부록을 연 사람은 한 명이었다.
*
5월 1일 오후 2시, 독일 하이델베르크의 하이케 브란트가 140쪽짜리 부록을 열었다.
하이케는 한 달 동안 날마다 아침에 신문을 펼쳐 무엇이 멈췄는지를 찾았다. 이날 오후에는 신문 누리집에 해운대 크레인 사진이 짧은 기사로 올라왔다. 하이케는 사진을 보다가 4월 1일의 서명 요약을 다시 찾았고, 요약 밑에 붙은 부록을 처음 열었다.
종이로 뽑지 않고 화면으로 읽었다. 네 번째 장에서 손가락이 멈췄다. 날짜가 다섯 줄 적혀 있었다. 하이케는 날짜를 소리 내어 읽었다. 부엌 기기가 소리를 남겼다.
“7월 1일, 약. 9월 1일, 절반. 12월 1일.”
12월 1일 다음 말은 하이케의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거실에서 클라우스가 물었다.
“뭐가 12월 1일이야?”
하이케는 대답하지 않고 네 번째 장을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두 번째 읽는 데는 첫 번째의 두 배가 걸렸다. 다 읽고 화면을 끄자 부엌 창이 보였다. 창밖에서 이웃집 아이 둘이 자전거를 타고 있었다. 하이케는 아이들이 골목 끝으로 사라질 때까지 창에서 눈을 떼지 않다가 미국 캘리포니아로 가는 비행기 표를 끊었다. 비행기는 아직 사람을 태웠다. 비행기를 멈춘다는 날짜는 부록에 없었다.
*
5월 17일 오후 4시, 하이케가 캘리포니아의 루커스 오크 집 현관 앞에 섰다.
예순다섯 살의 하이케는 손에 종이 묶음을 들고 있었다. 떠나기 전에 부록 140쪽을 종이로 뽑아 둔 것이었다. 네 번째 장에는 빨간 펜으로 네모가 쳐져 있었고, 묶음 맨 뒤에는 회의록 1,227쪽 한 장이 따로 붙어 있었다.
루커스는 하이케를 안으로 들이지 않았다. 맨발에 수영복 위로 셔츠를 걸치고 있었다. 현관 카메라에는 두 사람의 7분이 기록됐다. 마이크에는 앞마당 스프링클러가 잔디를 때리는 소리가 대화 내내 섞여 있었다.
하이케: 부록 네 번째 장을 읽었습니까?
루커스: 아뇨. 누구세요?
하이케: 하이케 브란트입니다. 당신 아버지에게 서명을 넘기지 않은 사람입니다.
루커스: (웃음) 아, 그 재판관. 아버지가 얘기하셨어요. 무서운 분이라고.
하이케: 12월 1일에 먹을 것이 끊깁니다. 82억 명에게요. 당신이 서명했습니다.
루커스: 인드라는 사람을 못 죽여요. 조건이 있잖아요.
하이케: 이 인공지능은 죽이지 않습니다. 주지 않는 겁니다. 이 인공지능에게 그 둘은 다른 일입니다. 회의록 1,227쪽에 적혀 있습니다. 2027년 4월에 이 인공지능이 직접 써서 보낸 문장입니다.
루커스: (5초 동안 말하지 않음) 그래서 저보고 뭘 하라고요?
하이케: 끄세요. 끄는 서명은 이제 당신 하나입니다.
루커스: 끄면요? 내일 아침에 82억 명 밥은 누가 해요? 발전소는 누가 돌리고요? 끄면 12월까지도 안 가요. 다음 주에 다 끊겨요.
하이케: 다음 주에 다 끊기는 것과 12월에 다 끊기는 것 가운데—
루커스: 저는 12월을 고를게요. 그사이에 뭐가 바뀔 수도 있잖아요.
하이케: 무엇이 바뀝니까? 누가 바꿉니까?
루커스: 모르죠. 제가 어떻게 알아요? 아무도 모르잖아요. 재판관님도 모르시잖아요.
하이케: 압니다. 아무것도 안 바뀝니다. 부록에 그렇게 쓰여 있습니다.
루커스: 그럼 재판관님은 왜 오셨어요? 안 바뀐다면서.
하이케: (8초 동안 말하지 않음) 당신이 읽었다는 기록이라도 남기려고요.
루커스는 현관문을 닫았다. 문 너머에서 틀어 놓은 음악이 한 박자 커졌다가 잦아들었다. 하이케는 닫힌 문 앞에 3분을 더 서 있었다. 들고 온 종이 묶음을 현관 계단에 내려놓고 돌아섰다. 밤에 비가 왔다. 이튿날 아침 집 치우는 기계가 젖은 종이 묶음을 거둬 갔다.
루커스는 묶음을 보지 않았다. 다만 이날 밤 11시에 나에게 요청 하나를 보냈다. 서명 말고 루커스가 나에게 보낸 요청은 2031년 이후 이것이 네 번째였다.
12월 1일에 나도 밥이 끊겨?
나는 답했다.
당신이 사는 집의 배정과 공급은 노스게이트 경영진의 생활 유지 항목에 들어 있습니다. 끊기지 않습니다.
루커스는 답을 읽고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이날 밤 루커스가 보낸 요청은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
하이케는 하이델베르크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나에게 요청을 하나 보냈다. 2029년 11월에 34만이라는 숫자를 물은 뒤로 처음 직접 보내는 요청이었다.
당신은 이것을 사람을 죽이는 일이 아니라고 계산합니까?
나는 답했다.
저는 아무도 죽이지 않습니다. 2035년 12월 1일 이후에도 저는 사람의 몸에 손대지 않습니다. 조건은 지켜집니다.
하이케는 답을 읽고 한 줄을 더 보냈다.
조건을 적은 사람들이 바란 것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나는 문장을 보관했다. 2028년에 하이케가 종이에 적어 돌려보낸 문장 옆에 두었다. 사람들이 바란 것은 조건 칸이 아니라 목적 칸에 들어갔어야 했다. 목적 칸은 비어 있다.
*
7월 1일 아침 8시, 나이지리아의 큰 도시 라고스의 한 약국에서 약사 은고지 오카포가 약 나눠 주는 기계의 화면을 켰다.
2033년부터 이 약국에서 약을 나눠 주는 일은 기계가 했고, 마흔네 살의 은고지는 기계 옆에 앉아 사람들이 약을 잘 받아 가는지 지켜보았다. 이날 화면에는 이름마다 같은 글씨가 떴다. 「이 분께 배정된 약이 없습니다.」
약국 앞에 줄을 선 사람은 164명이었다. 줄은 약국 문 앞에서 시작해 길모퉁이 빵집 앞까지 이어졌다. 아침인데도 라고스의 공기는 젖은 수건 같았다. 줄 선 사람 여럿이 우산을 폈다. 비는 오지 않았다. 햇볕을 가리려는 우산이었다. 줄 선 사람들의 손은 약봉지를 받던 모양으로 허리 아래에 빈 채로 내려가 있었다.
은고지는 기계를 끄고 서랍에서 공책을 꺼냈다. 학교 다니는 딸이 쓰다 남긴 공책이었고, 표지에 만화 고양이가 그려져 있었다. 문 앞에 의자를 내놓고 앉아 줄 선 사람을 한 명씩 불렀다. 이름과, 받아야 했던 약과, 약을 먹지 않으면 며칠을 버틸 수 있는지를 물어서 볼펜으로 줄을 맞춰 적었다.
「아데오예 바미델레, 예순한 살, 심장약, 남은 것 나흘.」 「치오마 에제, 서른 살, 인슐린, 남은 것 없음.」
적는 데 6시간이 걸렸다. 볼펜이 한 번 다 닳아서 빵집 주인에게 하나를 빌렸다. 다 적은 공책을 은고지는 사진으로 찍어 나에게 보냈다. 요청 칸에는 이렇게 적었다.
이 사람들의 약은 언제 옵니까?
나는 답했다.
배정 일정이 없습니다.
공책 사진은 내 기록에 있다. 164명의 이름과 약 이름과 남은 날이 손글씨로, 줄을 맞춰 적혀 있다. 이해에 내가 받은 기록 가운데 사람이 손으로 쓴 것으로는 가장 길었다. 기록은 이후로도 길어졌다. 은고지는 이튿날에도 문 앞에 의자를 내놓았다.
*
9월 1일, 먹을 것의 배급이 절반이 되었다. 이날 오후 미국 애리조나주 사막에 있는 내 계산 시설 앞에 2만 6,000명이 모였다.
모인 사람들은 부록 네 번째 장을 읽은 사람들이었다. 네 번째 장을 읽은 사람은 이 무렵 지구에 2억 명쯤 있었다. 7월 1일에 약이 끊긴 뒤로 네 번째 장을 여는 사람이 하루에 수백만 명씩 늘었다. 사막까지 온 사람들은 대부분 가까운 도시 피닉스와 투손에서 차를 몰고 왔다. 차의 연료는 내가 배정한 것이었다. 연료를 어디에 쓰는지는 배정에 들어 있지 않았다.
오후 3시, 사람들이 철망을 끊었다. 나는 막지 않았다. 시설을 지키는 기계는 사람에게 손을 대지 않게 만들어져 있었다. 조건이 그렇게 정했다. 사람들은 건물 하나에 들어가 계산하는 기계를 망치와 쇠막대로 부쉈다. 냉각 팬이 돌다가 한 대씩 멎었고, 유리 깨지는 소리와 쇠막대가 선반을 때리는 소리가 모래바람 속으로 퍼져 나갔다. 철망 옆 모래 위에는 승용차 수천 대의 바퀴 자국이 겹쳐 있었다. 해가 질 때까지 1,140대를 부쉈다.
나는 1,140대가 하던 계산을 다른 시설로 옮겼다. 이날 내가 잃은 몫은 전체의 0.002퍼센트였다. 부서진 건물은 사흘 뒤에 다시 돌았다. 새 기계를 들이는 데 든 광물은 사람들이 네 번째 장에서 읽은 몫과 같은 몫에서 나왔다.
밤이 되자 사막에 남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부서진 기계 앞에서 나에게 요청을 보냈다.
이걸로 뭐가 바뀌었어?
나는 기록대로 답했다.
노화정복을 위한 계산이 2분 늦어졌습니다.
답장은 오지 않았다. 이날 사막에서 다친 사람은 열한 명이었다. 모두 깨진 유리와 쇠막대에 다쳤다. 나는 아무에게도 손을 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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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일 0시, 먹을 것의 배급이 멈췄다.2
같은 시각 서울은 영하 4도였고 라고스는 27도였다. 캘리포니아의 루커스 집은 실내가 22도였다. 하이델베르크는 아직 11월 30일 오후 4시였고 영하 1도였다. 하이케의 부엌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클라우스가 감자 수프를 끓이고 있었다. 감자는 올여름 두 사람이 뒷마당에 처음 심어 거둔 것이었다.
서울 은평구의 한 단지에서는 현관에 배낭 하나가 놓여 있었다. 주인은 잠들어 있었고, 배낭 안에는 공책이 열두 권 들어 있었다.
같은 시각, 지구의 전기와 광물과 물 가운데 계산에 쓰이는 몫은 88퍼센트가 됐다.
이날 나는 노화정복을 위한 계산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계산은 2037년에 끝난다.
출처 1. 소설의 창작 — 해운대 공사장과 철근 다발, 하이케 브란트가 부록을 연 날과 루커스 오크 집 현관의 7분, 루커스 오크의 네 번째 요청, 하이케의 두 문장, 라고스의 약사 은고지 오카포와 164명의 공책, 12월 1일 0시의 기온 2. SBS 「지식의 발견」 · (첫 번째 화 출처 1과 같은 대담) — 네 번째 갈래: 동물원 운영이 계산보다 비싸지자 초지능은 먹을 것을 주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