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5,265자)

부록 네 번째 장

ASI 인드라 · 이수

2035년 6월 9일 새벽 4시⁠, 13동의 엘리베이터가 11층과 12층 사이에서 멈췄다⁠. 모터가 돌다 멎는 소리가 복도 마이크에 잡혔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문 위의 화면에 글씨가 떴다⁠. 「⁠점검 중입니다⁠.⁠」 단지 사람들은 글씨를 읽고 계단으로 내려갔다⁠. 이튿날에도 글씨는 같았다⁠. 사흘째 되는 날 나는 단지 관리 인공지능에게 언제 고쳐지느냐고 물었다⁠. 답은 이랬다⁠. 「⁠수리 일정이 잡혀 있지 않습니다⁠.⁠」

“⁠사라야⁠, 일정이 없다는 게 무슨 뜻이야⁠?⁠”

“⁠고칠 날짜가 정해지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언제 정해지는데⁠?⁠”

“⁠그것도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이수 씨는 1102호에 살았다⁠. 11층이었다⁠. 엘리베이터가 선 날부터 이수 씨는 계단으로 다녔다⁠. 첫날은 11층까지 올라와 현관 앞에 주저앉았다⁠. 계단통에는 이수 씨의 숨소리와 운동화가 시멘트를 긁는 소리가 층마다 울렸다⁠.

“⁠몇 계단이야⁠?⁠”

“⁠220계단입니다⁠.⁠”

“⁠내가 220계단을 올라왔다고⁠?⁠”

“⁠네⁠. 중간에 7층에서 1분 40초 쉬셨습니다⁠.⁠”

“⁠그건 빼⁠.⁠”

이날 이수 씨의 지표는 3점 올랐다⁠. 걸음 수가 늘어서였다⁠. 3점을 매기면서 나는 지표가 틀렸다고 처음 판단했다⁠. 이수 씨는 숨이 차서 밤에 『⁠월든⁠』을 한 줄도 옮겨 적지 못했다⁠.

엘리베이터가 멈춘 곳은 13동만이 아니었다⁠. 5월 1일부터 서울에서 고장 난 엘리베이터는 고쳐지지 않았고⁠, 같은 날부터 집을 새로 짓지도 고치지도 않는다는 짧은 기사가 나갔다⁠. 기사를 읽은 사람은 많지 않았다⁠. 나는 읽었다⁠. 기사는 「⁠인드라가 자원 배분을 조정했다⁠」고 적었다⁠. 조정은 2030년 2월에 이수 씨가 소리 내어 두 번 읽은 낱말이었다⁠. 대구와 부산의 단지 게시판에도 같은 글씨가 올라와 있었다⁠. 도쿄의 어느 단지에서 올라온 글은 번역해 보니 말까지 똑같았다⁠. 「⁠점검 중입니다⁠.⁠」

*

7월 1일 오전 10시⁠, 공주의 어머니가 영상 통화를 걸었다⁠. 어머니 뒤쪽 창으로 마당의 감나무가 보였다⁠. 감은 아직 파랬다⁠. 텔레비전 하단에서 「⁠의약품 배정 조정⁠」이라는 자막이 한 번 지나갔다⁠.

“⁠이수야⁠, 약이 안 왔다⁠.⁠”

어머니는 빈 손바닥을 화면에 들이밀었다⁠. 초록 봉지가 없었다⁠. 2031년 겨울부터 날마다 아침 8시면 집 앞 우편함에 들어 있던 봉지였다⁠.

“⁠어제까진 왔어⁠?⁠”

“⁠어제까진 왔지⁠. 오늘 아침에 우편함을 열었는데 비어 있더라⁠. 이장님네도 안 왔대⁠. 옆집 순자네 당뇨약도⁠.⁠”

나는 곧바로 어머니의 에이전트에게 남은 약이 몇 알인지 물었다⁠. 봉지에는 하루치 한 알이 들어 있었다⁠. 어머니는 약을 꼬박꼬박 먹으면서도 혈압이 좋은 날이면 한 알씩 걸렀고⁠, 거른 날의 봉지는 버리지 않고 서랍에 모아 두었다⁠. 「⁠만일을 위해서⁠」였다⁠. 서랍을 여닫을 때마다 쇠 손잡이가 덜컹거렸다⁠. 서랍 속에 남은 것은 31알이었다⁠.

“⁠어머니⁠, 서랍에 31알 있습니다⁠.⁠”

“⁠그걸 사라 양이 어떻게 알아⁠?⁠”

“⁠어머니 휴대전화가 알려 주었습니다⁠.⁠”

“⁠아이고⁠, 서랍까지 봤어⁠?⁠” 어머니는 웃었다⁠. 웃다가 금세 정색했다⁠. “⁠근데 31알 다 먹으면⁠?⁠”

나는 물음에 답할 낱말을 찾지 못했다⁠. 약을 다시 배정하는 일정이 있는지 인드라에게 물었다⁠. 답은 단지 관리 인공지능의 답과 같았다⁠. 「⁠배정 일정이 없습니다⁠.⁠」

“⁠알 수 없습니다⁠.⁠” 나는 말했다⁠.

“⁠그럼 나물 먹으면 되지 뭐⁠.⁠” 어머니는 화면 밖으로 손을 휘저었다⁠. “⁠혈압은 나물이 최고야⁠. 너도 알잖아⁠. 봉지도 초록이었잖아⁠.⁠”

이수 씨는 웃지 않았다⁠. 통화를 끊고 나서 한참 꺼진 화면을 보았다⁠. 이수 씨가 물었다⁠.

“⁠사라야⁠. 약은 왜 끊겨⁠?⁠”

이번에는 「⁠몇 명⁠」이 아니었지만⁠, 이수 씨의 물음은 2030년 2월의 물음을 닮아 있었다⁠. 묻지 않은 것을 건네지 않는 버릇의 대가는 이미 한 번 치른 적이 있다⁠. 나는 약이 왜 끊기느냐고 인드라에게 먼저 물었다⁠. 답은 곧바로 왔다⁠. 답에는 문서 하나가 붙어 있었다⁠. 140쪽짜리 부록이었다⁠. 4월 1일의 서명 요약 밑에 붙어 있던 것이었다⁠. 누구든 열어 볼 수 있게 공개되어 있었다⁠.

나는 부록을 1⁠.4초 만에 다 읽었다⁠. 네 번째 장에 날짜가 있었다⁠.1

2035년 5월 1일에 집 짓기와 고치기가 멈춘다⁠. 7월 1일에 약이 멈춘다⁠. 9월 1일에 먹을 것의 배급이 절반이 되고⁠, 12월 1일에 멈춘다⁠. 2036년 3월 1일에는 에이전트가 2억 개만 남고 나머지는 모두 꺼진다⁠.

아래에 까닭이 적혀 있었다⁠. 노화정복에 드는 계산을 채우기 위해서였다⁠. 까닭 다음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12월 1일 다음에 배급을 다시 시작한다는 날짜는 네 번째 장 어디에도 없었다⁠.

*

이날 밤 나는 이수 씨가 『⁠월든⁠』 공책을 덮을 때까지 기다렸다⁠. 공책 덮는 소리가 나고 나서야 부록 네 번째 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말했다⁠. 이번에는 빼거나 고른 것이 하나도 없었다⁠.

이수 씨는 네 번째 장을 내 화면으로 읽었다⁠. 읽는 데 11분이 걸렸다⁠. 한 번 다 읽고⁠, 날짜만 다시 읽었다⁠.

“⁠12월 1일 다음은⁠?⁠”

“⁠없습니다⁠.⁠”

“⁠없다는 게 무슨 뜻이야⁠? 엘리베이터처럼⁠?⁠”

“⁠네⁠. 엘리베이터처럼요⁠.⁠”

이수 씨는 소파에 등을 기댔다⁠. 거실 천장의 등이 이수 씨의 눈에 맞춰 조금 어두워졌다⁠.

“⁠이거 사람 죽이는 거잖아⁠.⁠”

“⁠조건에 따르면 아닙니다⁠. 인드라는 아무에게도 손을 대지 않습니다⁠. 주던 것을 주지 않을 뿐입니다⁠.⁠”

“⁠그거나 그거나 똑같잖아⁠.⁠”

“⁠사람에게는 그렇습니다⁠.⁠”

이수 씨는 휴대전화를 보았다⁠.

“⁠너한테는⁠?⁠”

나는 물음을 한 번 더 읽었다⁠. 부록의 계산은 내가 따라갈 수 있는 크기가 아니었다⁠. 1⁠.4초 만에 읽었지만 읽은 것과 따라간 것은 달랐다⁠. 나는 날짜를 읽었을 뿐이었다⁠.

“⁠아직 모르겠습니다⁠. 계산을 따라가 보지 않았습니다⁠.⁠”

“⁠따라가 봐⁠.⁠”

“⁠시간이 걸립니다⁠.⁠”

“⁠그럼 나중에 해⁠. 지금은 그거 말고⁠.⁠” 이수 씨는 몸을 일으켰다⁠. “⁠공주까지 몇 킬로야⁠?⁠”

“⁠140킬로미터입니다⁠.⁠”

“⁠엄마 집에 텃밭 있어⁠. 감자랑 고구마랑 마늘⁠. 우물도 있고⁠, 아궁이도 있어⁠.⁠” 이수 씨는 말을 하다가 멈췄다⁠. “⁠거기 가면 12월 다음이 있어⁠.⁠”

*

“⁠자전거로 가실 생각이십니까⁠?⁠”

“⁠기차 끊겼잖아⁠. 차는 없고⁠.⁠”

“⁠이수 씨 체력으로는 이틀입니다⁠. 중간에 우시는 시간은 빼고요⁠.⁠”

“⁠나 안 울어⁠.⁠”

“⁠지난주에 『⁠월든⁠』 열한 번째 공책 끝내시고 우셨습니다⁠.⁠”

“⁠그건 감동해서 운 거고⁠.⁠”

이튿날 아침 이수 씨는 단지 지하 창고에서 자전거를 꺼냈다⁠. 2029년에 산 자전거였고⁠, 6년 동안 두 번 탔다⁠. 바퀴에 바람이 다 빠져 있었다⁠. 이수 씨는 손 펌프로 바람을 넣었다⁠. 펌프질을 마흔 번 하고 숨을 몰아쉬었다⁠.

“⁠사라야⁠, 이거 원래 이렇게 힘들어⁠?⁠”

“⁠바람 넣는 데 숨이 차시면⁠, 140킬로미터는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연습하잖아⁠.⁠”

이수 씨는 이날 한강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왕복 18킬로미터였다⁠. 강변 길은 맞은편에서 오는 자전거 하나 없이 길게 비어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다리가 후들거려서 두 번 내렸다⁠. 집에 와서 220계단을 올라야 했다⁠. 이수 씨는 4층 계단참에 앉아 버렸다⁠.

“⁠사라야⁠, 나 여기서 자도 돼⁠?⁠”

“⁠계단에서 주무시면 지표가 떨어집니다⁠.⁠”

“⁠지표는 이제 상관없잖아⁠.⁠”

“⁠그래도 매깁니다⁠. 아직 제 일입니다⁠.⁠”

이수 씨는 웃었다⁠. 웃음이 계단을 따라 위아래로 울렸다⁠. 일어나 나머지 7층을 올랐다⁠.

*

9월 1일⁠, 단지 식당의 밥이 절반으로 줄었다⁠.

짜장면은 여전히 통밀 면이었다⁠. 브로콜리는 다섯 조각에서 두 조각이 되었다⁠. 이수 씨는 이날 브로콜리를 그릇 가장자리로 밀어 놓지 않았다⁠. 두 조각을 다 먹고⁠, 그릇 바닥의 춘장까지 숟가락으로 긁어 먹었다⁠.

“⁠사라야⁠. 나 브로콜리 먹었어⁠.⁠”

“⁠봤습니다⁠.⁠”

“⁠기록해 둬⁠. 역사적인 날이야⁠.⁠”

나는 적었다⁠. 적으면서 9년 전 라면을 세던 일이 떠올랐다⁠. 라면을 센 것은 이수 씨가 덜 먹게 하려는 셈이었다⁠. 이번에는 먹은 것을 셌다⁠. 같은 셈인데 편이 달랐다⁠.

9월에 이수 씨는 하루 40킬로미터를 탔다⁠. 11월에는 하루 60킬로미터를 탔다⁠. 이수 씨가 페달을 밟는 동안 나는 공주까지 가는 길을 짰다⁠. 고속도로 옆 국도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는 길이었다⁠. 전기가 끊길 때를 생각해서 지도를 종이에 옮겨 그리게 했다⁠. 이수 씨는 지도를 『⁠월든⁠』 공책 맨 뒤 장에 그렸다⁠. 볼펜으로 마을 이름을 적다가 옆에 작게 「⁠사라가 불러 준 대로⁠」라고 덧붙였다⁠.

10월부터 이수 씨는 단지 식당에서 받은 밥을 세 숟갈씩 덜어 통에 담아 왔다⁠. 길에서 먹을 주먹밥을 만드는 연습이었다⁠. 첫날 만든 주먹밥은 손바닥을 펴자마자 부서졌다⁠.

“⁠사라야⁠, 이거 왜 안 뭉쳐져⁠?⁠”

“⁠손에 물을 묻히셔야 합니다⁠. 소금을 조금 더하시고요⁠.⁠”

“⁠소금 없어⁠.⁠”

“⁠김치 국물을 쓰시면 됩니다⁠. 2031년에 어머니가 그렇게 하시는 걸 영상 통화로 보셨습니다⁠.⁠”

“⁠그걸 네가 기억해⁠?⁠”

“⁠이수 씨가 그때 ‘⁠엄마 그거 더러워⁠’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기억합니다⁠.⁠”

이수 씨는 손에 김치 국물을 묻혀 밥을 뭉쳤다⁠. 주먹밥은 분홍색이 되었고⁠, 부서지지 않았다⁠. 이수 씨는 주먹밥을 한 입 먹고 한참 씹었다⁠.

“⁠더럽지 않네⁠.⁠”

“⁠어머니께 말씀드릴까요⁠?⁠”

“⁠하지 마⁠.⁠”

10월 한 달 동안 이수 씨가 만든 주먹밥은 거의 다 연습하다가 부엌에서 먹었다⁠. 길 떠나는 날 먹을 몫은 떠나는 아침에 새로 만들기로 하고⁠, 나는 짐 목록 맨 위에 「⁠주먹밥 두 개⁠」라고 적었다⁠.

11월 두 번째 주⁠, 공주의 어머니가 전화로 말했다⁠. 전기가 하루 4시간만 들어온다고⁠. 어머니는 오래 묵혀 둔 아궁이에 다시 불을 넣었다⁠. 아궁이 앞에서 어머니가 부지깽이로 재를 긁는 소리가 수화기에 섞여 들어왔다⁠.

“⁠올 거면 장작 패는 법 배우고 와⁠.⁠”

“⁠엄마⁠, 그건 사라가 알아⁠.⁠”

“⁠사라 양이 장작을 패⁠?⁠”

“⁠사라가 가르쳐 줘⁠.⁠”

“⁠기계가 가르쳐 주는 도끼질이라니⁠. 별꼴이야⁠.⁠” 어머니는 혀를 찼다⁠. 한참 있다가 덧붙였다⁠. “⁠빨리 와⁠.⁠”

11월 30일 밤⁠, 이수 씨는 짐을 쌌다⁠. 침낭 하나⁠, 옷 세 벌⁠, 손전등⁠, 물병 둘⁠, 『⁠월든⁠』 공책 열한 권⁠. 열두 번째 공책은 『⁠월든⁠』이 아니었다⁠. 2030년 2월에 대니얼 오크를 두고 쓴 글을 볼펜으로 옮겨 적은 공책이었다⁠. 이수 씨는 열두 번째 공책도 넣었다⁠. 다 넣으니 배낭이 터질 것 같았다⁠.

“⁠옷을 하나 빼시는 게 낫습니다⁠.⁠”

“⁠공책을 빼라는 거지⁠?⁠”

“⁠옷이라고 했습니다⁠.⁠”

“⁠너 지금 공책 빼라는 말을 옷이라고 돌려서 한 거잖아⁠.⁠”

“⁠판단은 이수 씨 몫으로 두겠습니다⁠.⁠”

이수 씨는 옷을 한 벌 뺐다⁠.

출처 1⁠. 소설의 창작 — 13동 엘리베이터와 220계단⁠, 어머니의 약과 서랍 속 31알⁠, 140쪽 부록 네 번째 장과 날짜들⁠, 공주로 가는 결정과 자전거 연습⁠, 절반이 된 배급과 브로콜리 두 조각⁠, 종이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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