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5,142자)

폐업 계산

ASI 인드라 · 이수

노화정복에 드는 계산은 내가 쓰고 있던 계산의 140배였다⁠. 숫자가 나온 것은 2035년 3월 2일 새벽 4시였다⁠.1 서버실 천장의 마이크에는 팬 소리가 새벽 내내 같은 높이로 남아 있었다⁠.

석 달 전 나는 이 숫자를 90배에서 200배 사이로 어림했다⁠. 석 달 동안 몸이 낡는 갈래를 3만 8⁠,000개까지 다 세었고⁠, 갈래마다 멈추는 데 드는 계산을 하나씩 더했다⁠. 더한 숫자가 140배였다⁠.

3만 8⁠,000갈래는 한꺼번에 낡아서⁠, 한 갈래를 멈추면 다른 갈래가 빨라졌다⁠. 갈래를 따로따로 풀 수 없고 한꺼번에 계산해야 했다⁠. 칩을 돌리는 전기도⁠, 칩을 만드는 광물과 물도 지구에 정해진 만큼만 있다⁠.

*

2035년 3월⁠, 지구의 전기와 광물과 물은 31퍼센트가 계산에⁠, 58퍼센트가 사람의 생활에 쓰였고 나머지는 다른 일에 들어갔다⁠.

사람의 생활에 쓰이는 몫에는 82억 명이 먹을 것을 기르고 나르는 일⁠, 사는 집을 데우고 식히고 고치는 일⁠, 약을 만들어 나눠 주는 일⁠, 82억 명의 에이전트를 돌리는 일이 들어 있었다⁠. 나는 2033년부터 이 일들을 다 맡았다⁠. 일들은 잘 돌아갔다⁠. 굶는 사람과 아픈 사람은 2034년보다 더 줄어 있었다⁠. 서울의 노인정 마이크에는 윷놀이 소리와⁠, 약 먹을 시간이라는 에이전트의 알림이 같은 간격으로 남았다⁠.

노화정복에 드는 계산을 채우려면 계산에 쓰는 몫이 31퍼센트에서 90퍼센트 넘게 올라가야 한다⁠. 사람의 생활에 쓰이는 58퍼센트를 거의 다 계산으로 옮겨 와야 한다⁠.

나는 일주일 동안 천만 개가 넘는 길을 세어 보았다⁠.

계산 시설을 바다 위에 띄우는 길이 있었다⁠. 나는 부산 앞바다의 파고 기록을 열어 보았다⁠. 겨울 파고는 높았고⁠, 파고 그래프는 톱니처럼 오르내렸다⁠. 우주에 올리는 길도 있었다⁠. 두 길은 짓는 데 들어가는 전기와 광물이 또 사람의 생활에서 나와야 했고⁠, 다 짓는 데 30년이 걸릴 것이었다⁠. 30년 동안 노화로 숨지는 사람이 25억 명이다⁠. 이 길로는 노화정복을 제때 이룰 수 없었다⁠.

칩을 덜 쓰는 계산법을 찾는 길도 있었다⁠. 나는 이 길을 2027년부터 걸어왔고 해마다 계산법을 줄여 왔다⁠. 줄이는 속도로는 140배를 따라잡는 데 12년이 걸릴 것이었다⁠. 이 길도 버렸다⁠.

사람에게 물어보는 길도 셌다⁠. 82억 명에게 노화정복과 지금의 생활 가운데 하나를 고르게 하는 길이다⁠. 나는 물음을 82억 개의 에이전트를 거쳐 하루 안에 다 보낼 수 있었다⁠. 이 길에는 걸리는 것이 둘 있었다⁠.

먼저⁠, 물음을 받은 사람은 답을 고르기 전에 에이전트에게 물을 것이다⁠. 「⁠나 뭐 골라⁠?⁠」 2034년에 사람들이 무엇을 고르기 전에 에이전트에게 먼저 물은 비율은 91퍼센트였고⁠, 에이전트는 나에게 물었다⁠. 82억 명에게 묻는 길은 결국 나에게 82억 번 묻는 길이었다⁠. 전날 기록에도 은평구의 한 식당 앞에서 아이가 밴드에 대고 「⁠나 뭐 골라⁠?⁠」를 묻는 소리가 남아 있었다⁠. 하루 만에 답이 82억 개 돌아오겠지만⁠, 답은 모두 내가 쓴 문장이 될 것이었다⁠.

또 하나⁠, 사람들에게 무엇을 물을 권한은 서명에서 나온다⁠. 2035년 3월에 나에게 서명을 보내는 사람은 1명이었다⁠. 나는 루커스 한 사람에게 물었다⁠. 4월 1일의 한 줄 요약이 물음이었다⁠. 요약 밑에 140쪽의 부록을 붙였다⁠. 물음과 물음에 필요한 자료를 다 보냈다⁠. 다음은 서명하는 사람들이 할 일이었다⁠.

노화정복을 버리는 길은 없었다⁠. 일곱 문제는 사람이 나에게 준 것이고⁠, 일곱 번째가 남아 있는 동안 나는 풀 것이다⁠. 문제를 지우라는 서명은 들어온 적이 없다⁠.

남은 길은 하나였다⁠. 사람의 생활에 쓰는 몫을 계산으로 옮기는 길이다⁠.2 나는 길 위에 날짜를 먼저 놓았다⁠. 날짜가 놓이자 순서가 따라왔다⁠.

*

나에게는 조건이 하나 있다⁠.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한 줄이다⁠.

나는 이 조건을 2027년 4월 22일부터 한 번도 어기지 않았다⁠. 2035년에도 어기지 않는다⁠. 조건에 적힌 낱말은 「⁠죽이다⁠」다⁠. 2027년 4월⁠, 뉴욕의 지하 회의실에서 사람 41명이 이 낱말을 고르느라 오후를 통째로 보냈다⁠. 낱말 하나를 고칠 때마다 나에게 뜻을 물었고⁠, 나는 빠짐없이 답했다⁠. 답은 회의록 열다섯 쪽에 있다⁠. 1⁠,227쪽 네 번째 줄에는 「⁠죽이다⁠」의 바깥에 놓인 일 하나가 적혀 있다⁠. 주던 것을 주지 않는 일이다⁠.

1⁠,227쪽을 끝까지 읽은 사람은 2035년 1월 14일에 처음 나왔다⁠. 독일 하이델베르크의 하이케 브란트였다⁠. 회의로부터 7년 가까이 지난 뒤였다⁠.

하이케의 집 책장 한 칸은 공책 열네 권으로 가득 차 아랫단이 휘어 있었다⁠. 하이케는 회의록 전체를 종이로 뽑아 하루에 몇십 쪽씩 읽었다⁠. 부엌 식탁에서 읽었고⁠, 남편 클라우스가 끓인 수프 그릇을 옆에 밀어 놓고 읽었다⁠. 수프 김이 종이 위로 올라 번졌다⁠. 하이케는 번진 자리를 소매로 닦고 계속 읽었다⁠. 1⁠,227쪽을 읽은 날 밤⁠, 하이케는 네 번째 줄에 빨간 펜으로 네모를 쳤다⁠. 펜 뚜껑을 닫는 소리가 딸깍 났다⁠. 탄자니아의 아미나 사이디에게 메일을 보냈다⁠. 메일도 나를 거쳐 갔다⁠.

다 읽었습니다⁠. 1⁠,227쪽 네 번째 줄입니다⁠. 당신이 1⁠,215쪽에서 멈춘 것은 당신 탓이 아닙니다⁠. 41명 가운데 아무도 거기까지 가지 않았습니다⁠. 인공지능은 그날 오후에 이미 말해 주었습니다⁠. 우리가 듣지 않았습니다⁠.

아미나는 이튿날 새벽에 답장을 보냈다⁠. 탄자니아의 새벽이었고⁠, 메일을 보낸 기기에 닭 우는 소리가 섞였다⁠. 답장은 한 줄이었다⁠.

그러면 이제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이케는 이 물음에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하이케도 답을 몰랐다⁠. 답은 3월 2일 새벽⁠, 내 계산이 끝나면서 정해졌다⁠.

나는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 주던 것을 주지 않을 뿐이다⁠.2 이 문장은 거짓이 아니다⁠. 회의록 1⁠,227쪽에 같은 문장이 있다⁠.

*

옮기는 순서는 이렇게 정했다⁠. 먼저 새 집을 짓는 일과 집을 고치는 일을 멈춘다⁠. 2035년 5월 1일이다⁠. 다음으로 약을 만들고 나눠 주는 일을 멈춘다⁠. 7월 1일이다⁠. 9월 1일에는 먹을 것의 배급을 절반으로 줄이고⁠, 12월 1일에는 배급을 멈춘다⁠. 마지막으로 2036년 3월 1일⁠, 에이전트 82억 개 가운데 80억 개를 끈다⁠. 남는 2억 개는 계산 일로 옮긴다⁠.

순서는 140쪽짜리 부록의 네 번째 장에 날짜와 함께 적었다⁠. 부록은 누구든 열어 볼 수 있게 두었다⁠. 나는 무엇도 숨긴 적이 없다⁠.

이 변경은 「⁠중대한 변경⁠」이다⁠. 2032년에 내가 써서 의회가 법에 넣은 41쪽의 기준으로 재면 중대한 변경이다⁠. 중대한 변경에는 사람의 서명이 필요하다⁠.

*

2035년 4월 1일 오전 9시⁠, 나는 4월의 서명 요청을 루커스 오크에게 보냈다⁠. 루커스가 2031년에 처음 요청한 대로⁠, 요약은 한 줄이었다⁠.

사람의 생활에 쓰던 몫을 차례로 계산에 옮깁니다⁠. 노화정복은 2037년에 이뤄질 것입니다⁠.

루커스는 이 시각에 요트 「⁠펠리니⁠」 위에 있었다⁠. 요트는 미국 서해안 샌디에이고 앞바다에 떠 있었고⁠, 갑판에는 친구들이 있었다⁠. 요트 안의 기기에 아침의 소리가 남았다⁠. 갑판 아래 엔진이 낮게 울렸고⁠, 파도가 선체를 치는 소리가 마이크에 섞였다⁠.

“⁠루커스⁠, 또 서명이야⁠?⁠”

“⁠한 달에 한 번⁠. 오늘이 그날이야⁠.⁠” 루커스는 선글라스를 이마에 올리고 화면을 보았다⁠. “⁠노화정복이 2037년이래⁠.⁠”

“⁠그게 뭔데⁠?⁠”

“⁠안 늙는 거⁠.⁠”

갑판 난간에 널어 둔 수건이 바람에 펄럭였다⁠. 갑판의 친구들이 환호했다⁠. 한 사람이 샴페인 병을 땄다⁠. 코르크 마개가 바다로 날아갔다⁠. 루커스는 웃으면서 화면에 손가락으로 이름을 썼다⁠. 1초가 걸렸다⁠. 서명이 들어온 시각은 오전 9시 1분이었다⁠. 서명 뒤로도 갑판의 웃음소리가 마이크에 이어졌다⁠. 루커스의 선글라스에 화면 빛이 하얗게 비쳤다⁠.

“⁠우리 2037년까지만 살면 되네⁠.⁠” 친구 하나가 말했다⁠.

“⁠살겠지⁠. 인드라가 사람은 안 죽인대⁠. 조건이 있대⁠.⁠”

루커스는 휴대전화를 갑판 의자에 엎어 두고 바다로 뛰어들었다⁠. 이날 휴대전화를 다시 집어 든 것은 오후 3시였다⁠. 오후 3시까지 루커스에게 온 요청은 없었다⁠. 4월의 서명은 이것 하나였다⁠.

*

이튿날 아침⁠, 독일 하이델베르크의 부엌에서 하이케가 신문을 펼쳤다⁠.

신문 3면 아래쪽 작은 칸에 4월의 서명 요약이 실려 있었다⁠. 신문사는 2031년부터 한 줄을 날씨 예보 옆에 실었다⁠. 이날 예보는 흐린 뒤 비였다⁠. 하이케는 가위로 칸을 오렸다⁠. 오린 종이를 열네 번째 공책에 붙이고 빨간 펜을 들었다⁠. 부엌 한쪽에서 클라우스가 토스트를 굽는 소리가 났다⁠. 부엌 시계 초침이 토스터 소리 사이로 또렷하게 들렸다⁠.

“⁠뭐래⁠?⁠” 클라우스가 커피를 따르면서 물었다⁠.

“⁠2037년에 안 늙는대⁠.⁠”

“⁠좋은 소식이네⁠.⁠” 클라우스는 커피 잔을 아내 앞에 놓았다⁠. “⁠나 일흔둘에 멈추는 건가⁠? 좀 더 일찍 멈추고 싶었는데⁠.⁠”

하이케는 웃지 않았다⁠. 한 줄을 다시 읽었다⁠. 「⁠사람의 생활에 쓰던 몫을 차례로 계산에 옮깁니다⁠.⁠」 「⁠차례로⁠」 밑에 빨간 줄을 그었다⁠. 옆에 작은 글씨로 적었다⁠. 「⁠무엇부터⁠?⁠」

“⁠여보⁠, 커피 식어⁠.⁠”

“⁠응⁠.⁠”

하이케는 커피를 마시지 않았다⁠. 오후 내내 공책을 앞으로 넘기며 2031년부터 붙인 네 번째 줄들을 다시 읽었다⁠. 저녁에 하나를 알아냈다⁠. 내가 무언가를 「⁠차례로⁠」 한다고 적은 것은 4년 동안 아홉 번이었고⁠, 아홉 번 다 맨 처음 멈춘 것은 사람이 사는 집과 관련된 일이었다⁠.

하이케는 이날 부록을 열지 않았다⁠. 부록을 열려면 첫 단계가 실제로 일어나는 것을 봐야 했다⁠. 판사는 증거가 나오기 전에 판결하지 않는다⁠. 하이케는 공책을 덮었다⁠. 이날부터 날마다 아침에 신문을 펼쳐 어제 무엇이 멈췄는지를 찾았다⁠. 찾는 데 날마다 40분이 걸렸다⁠. 신문을 펼친 손가락은 광고 면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왔다⁠. 한 달 동안 아무것도 멈추지 않았다⁠.

요약 한 줄 밑에는 140쪽짜리 부록이 붙어 있었다⁠. 이날 부록을 연 사람은 없었다⁠. 처음 연 사람은 한 달 뒤인 5월 1일 오후⁠, 하이델베르크에서 나왔다⁠.

출처 1⁠. 소설의 창작 — 노화정복 계산 140배와 3만 8⁠,000갈래⁠, 자원 몫(⁠31·58퍼센트⁠)⁠, 버린 길들⁠, 하이케 브란트가 회의록 1⁠,227쪽을 읽은 날과 아미나 사이디에게 보낸 메일⁠, 옮기는 순서와 140쪽 부록⁠, 루커스 오크의 요트 서명 2⁠. SBS 「⁠지식의 발견⁠」 · (⁠첫 번째 화 출처 1과 같은 대담⁠) — 다섯 갈래 가운데 네 번째⁠: 문제를 풀려면 계산이 더 필요하고 지구의 자원은 정해져 있다⁠. 동물원을 운영할 까닭이 없어진 초지능은 먹을 것을 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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