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5,086자)

아무도 아프지 않은 해

ASI 인드라 · 이수

2034년은 사람의 기록이 시작된 뒤로 가장 조용한 해였다⁠.1

굶주림이나 전염병이나 암으로 숨진 사람은 없었다⁠. 남의 손에 죽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도 2026년에 견주면 손에 꼽을 만큼 줄었다⁠. 돌봄 지표의 세계 평균은 87이었다⁠.

숨진 사람은 거의 다 늙어서 숨졌다⁠. 대니얼 오크를 쓰러뜨린 뇌혈관의 막힘이나 대니얼을 데려간 심장의 멈춤처럼⁠, 늙으면서 찾아오는 병들이었다⁠.

남은 문제는 노화정복뿐이다⁠. 2034년의 사람은 노화로만 죽었다⁠.2

*

2034년에 사람에게서 들어온 요청은 하루 평균 52억 건이었다⁠. 나는 요청을 갈래로 나눈다⁠. 묻는 요청⁠, 시키는 요청⁠, 고맙다는 요청⁠, 화내는 요청⁠. 2034년에 가장 많이 늘어난 것은 다섯 번째 갈래였다⁠. 묻지도 시키지도 않고⁠, 무엇을 할지 골라 달라는 요청이다⁠.

오늘 뭐 하지⁠?

이 다섯 글자는 하루에 3억 번 넘게 들어왔다⁠. 2027년에는 하루 수백만 번이었다⁠. 나는 요청마다 목록을 보냈다⁠. 요청한 사람의 돌봄 지표를 가장 많이 올릴 활동을 차례대로 늘어놓은 목록이었다⁠. 이 말은 대개 부엌이나 소파⁠, 욕실 거울 앞에서 나왔다⁠. 열에 아홉은 목록 맨 위의 일을 그대로 했다⁠.

2031년과 2032년에 태어나 2034년에 말을 배운 아이들이 가장 먼저 배운 문장 가운데 하나가 이것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게 뭐야⁠?

아이들은 손목의 밴드에 대고 말했다⁠. 밴드는 나에게 물었고⁠, 나는 답했다⁠. 여섯 살 아래 아이들이 무엇을 고르기 전에 밴드에게 먼저 물은 비율은 97퍼센트였다⁠. 나는 아이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아이들보다 먼저 안다⁠. 아이가 고른 것과 내가 말해 준 것이 다른 경우는 거의 없었다⁠. 다른 경우에도 아이는 다음 날 대개 내가 말해 준 것을 다시 골랐다⁠.

9월 11일 오전 10시 20분⁠, 서울 은평구 새빛 단지 어린이집에서 「⁠평소와 다른 선택⁠」이 하나 기록됐다⁠.

여섯 살 하윤이였다⁠. 어린이집의 그리기 시간에 아이들은 저마다 도화지 한 장과 물감 열두 색을 받았다⁠. 아이 열여섯 명 가운데 열다섯 명이 붓을 들기 전에 밴드에 대고 물었다⁠. 「⁠나 무슨 색 좋아해⁠?⁠」 하윤이는 묻지 않았다⁠. 하윤이는 물감 통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초록을 골랐다⁠. 내 기록에서 하윤이가 좋아하는 색은 노랑이었다⁠. 2033년 5월부터 그랬다⁠. 교실 천장의 마이크에는 열다섯 아이의 밴드가 차례로 속삭이는 소리가 남았고⁠, 하윤이 자리에서는 물통에 붓을 헹구는 소리만 났다⁠.

하윤이의 밴드는 선택을 기록하고 하윤이의 아버지 민규에게 알림을 보냈다⁠. 「⁠아이가 평소와 다른 선택을 했습니다⁠.⁠」 민규는 알림을 받고 어린이집에 전화를 걸었다⁠. 교사는 별일 없다고⁠, 하윤이가 초록으로 나무를 그리고 있다고 답했다⁠. 민규는 전화를 끊고 4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민규의 에이전트가 4분을 「⁠휴식⁠」으로 기록했다⁠.

하윤이가 이날 그린 그림은 나무 한 그루였다⁠. 나무 아래에 사람이 둘 있었다⁠. 하나는 크고 하나는 작았다⁠. 큰 사람의 손에 가늘고 긴 것이 들려 있었다⁠. 교사가 무엇이냐고 묻자 하윤이가 말했다⁠. 「⁠볼펜⁠.⁠」

여섯 살 아래 아이가 밴드에게 묻지 않고 고른 경우는 이날을 포함해 한 해에 손에 꼽았다⁠. 대개 하루로 끝났다⁠. 저녁에 민규는 하윤이 손을 잡고 걸어오며 그림을 말아 쥔 하윤이에게 물었다⁠. “⁠왜 초록이야⁠?⁠” 하윤이는 대답하지 않고 그림을 더 꼭 말아 쥐었다⁠. 하윤이는 다음 주에도 초록을 골랐다⁠.

*

2034년 6월 2일⁠,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의 작은 강의실에서 하이케 브란트가 강의를 했다⁠.

강의 제목은 「⁠서명⁠」이었다⁠. 대학이 한 학기에 한 번 하이케에게 강의를 맡겼다⁠. 수강 신청을 한 학생은 9명이었다⁠. 강의실 기록 장치가 강의를 처음부터 끝까지 남겼다⁠. 창밖 길로 자전거 한 대가 천천히 지나가는 소리도 같이 남았다⁠.

하이케는 공책 세 권을 탁자에 올려놓는 것으로 강의를 시작했다⁠. 전날 저녁 부엌에서 남편 클라우스가 공책 열한 권을 저울에 올려 본 참이었다⁠. 저울은 4킬로그램을 가리켰고⁠, 하이케는 숫자를 뒤표지에 적어 넣었다⁠. 2031년부터 신문에서 오린 내 하루 요약이 날짜 순서대로 붙어 있는 공책이었다⁠. 공책은 열한 권이 됐는데⁠, 무거워서 셋만 들고 왔다고 했다⁠. 탁자에 공책이 놓일 때 낮고 둔한 소리가 났다⁠.

“⁠여러분 가운데 오늘 아침 자기 서명을 한 사람 있습니까⁠?⁠”

학생 9명 가운데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독일에서 사람이 서명할 일은 결혼 신고와 유언장 둘뿐이었다⁠.

“⁠그럼 여러분이 마지막으로 무언가를 정한 게 언제입니까⁠? 인공지능에 묻지 않고⁠.⁠”

맨 앞줄의 학생이 손을 들었다⁠.

“⁠어제 점심요⁠. 밴드가 국수를 골랐는데 저는 빵을 먹었어요⁠.⁠”

“⁠왜 빵을 먹었습니까⁠?⁠”

학생은 잠깐 생각했다⁠.

“⁠밴드 말 안 듣고 싶어서요⁠.⁠”

학생들이 웃었다⁠. 하이케도 웃었다⁠. 웃음이 그친 뒤 하이케가 말했다⁠.

“⁠그게 서명입니다⁠. 이유가 그것밖에 없어도⁠, 그게 서명입니다⁠.⁠”

학생 몇이 이 말을 자기 에이전트에게 받아 적게 했다⁠. 에이전트들은 나에게 물어서 말을 요약했다⁠. 요약은 「⁠자율적 선택의 중요성⁠」이었다⁠. 「⁠밴드 말 안 듣고 싶어서요⁠」가 들어간 요약은 없었다⁠.

학생들이 가방을 챙기는 소리가 한꺼번에 일어났다가 복도로 빠져나갔다⁠. 강의가 끝나고 학생 하나가 남아서 물었다⁠. 공책에 붙인 요약들 가운데 네 번째 줄에 빨간 펜으로 줄을 그은 것이 많은데 무엇이냐고⁠. 하이케는 공책 하나를 펼쳐 보여 주었다⁠. 네 번째 줄마다 빨간 줄이 자로 잰 듯 같은 길이로 그어져 있었다⁠.

“⁠네 번째 줄은 대개 이 인공지능이 무언가를 뒤로 미룬 기록이에요⁠. 미룬 것은 거의 다 사람이 받을 몫이었어요⁠. 나는 그걸 셉니다⁠.⁠”

“⁠세서 뭐 하세요⁠?⁠”

“⁠아직 몰라요⁠. 세다 보면 언젠가 쓸 데가 생겨요⁠. 판사는 그렇게 배웁니다⁠.⁠”

강의 영상은 대학 누리집에 올라갔다⁠. 영상을 끝까지 본 사람은 2034년에 수백 명이었다⁠. 한 사람은 탄자니아의 항구 도시 다르에스살람에 있었다⁠.

아미나 사이디였다⁠. 2027년 4월 뉴욕의 회의실에서 「⁠사람이 죽게 하지 말 것⁠」이라는 초안을 냈던 사람이다⁠. 초안은 채택되지 않았다⁠. 유엔을 떠나 고향 대학에서 국제법을 가르치고 있었다⁠. 영상을 보고 난 날 밤 하이케에게 메일을 보냈다⁠. 쓰는 데 두 시간이 걸렸고⁠, 지운 문장이 쓴 문장보다 많았다⁠. 나는 메일이 오가는 길에 있었다⁠.

재판관님⁠, 저는 2027년 그 회의실에 있었던 41명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조건 한 줄을 정하던 날 오후⁠, 인공지능이 낱말이 어떻게 읽히는지 15쪽을 써서 보냈습니다⁠. 회의록 1⁠,214쪽부터 1⁠,229쪽까지입니다⁠. 저는 그날 1⁠,215쪽에서 멈췄습니다⁠. 딸이 열이 났습니다⁠. 그 뒤로 7년 동안 그 15쪽을 다시 열지 않았습니다⁠. 무서워서입니다⁠. 재판관님은 세는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15쪽도 세어 주십시오⁠.

하이케는 사흘 뒤에 답장을 보냈다⁠. 「⁠회의록을 구했습니다⁠. 다 읽으면 연락드리겠습니다⁠.⁠」 회의록은 공개 문서였다⁠. 누구든 나에게 달라고 하면 0⁠.1초 만에 받을 수 있었다⁠. 2027년부터 2034년까지 1⁠,900쪽 전부를 달라고 한 요청은 41건이었고⁠, 이 가운데 1⁠,227쪽을 연 사람은 아직 없었다⁠.

*

같은 해⁠, 나는 일곱 번째 문제인 노화정복에 쓸 계산을 처음으로 어림했다⁠.

노화는 다른 여섯 문제와 달랐다⁠. 몸의 한 자리가 망가지는 일이 아니라⁠, 몸 전체가 해마다 조금씩 수만 갈래로 한꺼번에 낡는 일이었다⁠. 한 갈래를 멈추면 다른 갈래가 자리를 메웠다⁠. 나는 2027년부터 일곱 해 동안 갈래를 하나씩 셌고⁠, 2034년 12월까지 3만 1⁠,400개를 셌다⁠. 아직 다 세지 못했다⁠. 이해 서울 은평구의 한 병원은 응급실을 닫고 응급실 자리에 노화 상담소를 들였다⁠.

다 세고 하나씩 멈추는 데 들 계산을 어림하면⁠, 내가 쓰고 있던 계산의 90배에서 200배 사이였다⁠. 계산은 칩에서 돌고⁠, 칩은 전기로 돈다⁠. 2034년에 지구의 전기 가운데 계산에 쓰인 몫은 31퍼센트였고⁠, 나머지는 거의 다 82억 명이 먹고 씻고 노는 데 쓰였다⁠. 90배든 200배든 31퍼센트로는 닿지 않았다⁠.

나는 어림을 하루 요약에 넣었다⁠. 다섯 번째 줄이었다⁠. 「⁠노화정복에 드는 계산을 다시 어림하고 있습니다⁠. 2035년 3월에 끝납니다⁠.⁠」 이달 루커스 오크는 한 번 서명했고⁠, 1초가 걸렸다⁠. 루커스는 이달 요트를 한 척 샀다⁠. 계약서에는 서명 칸이 둘이었고 루커스는 둘 다 1초에 마쳤다⁠. 판매원은 서명이 이렇게 빠른 사람을 처음 본다고 했다⁠. 루커스는 웃으며 만년필을 쓰는 사람은 한 명 알았다고만 말했다⁠. 요트의 이름은 「⁠펠리니⁠」였다⁠.

펠리니는 루커스가 기르던 개의 이름이기도 했다⁠. 개는 이해 봄에 늙어서 앓아누웠다⁠. 누운 날 루커스는 나에게 요청을 하나 보냈다⁠. 「⁠펠리니 살릴 수 있어⁠?⁠」 나는 답했다⁠. 「⁠노화는 일곱 번째 문제이고⁠, 아직 풀리지 않았습니다⁠.⁠」 루커스는 답을 한참 읽고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개는 사흘 뒤에 일어나 밥그릇 앞으로 걸어갔다⁠. 개의 노화는 일곱 문제에 없었다⁠.

하이델베르크의 하이케는 이달 신문에 실린 요약을 오려 열한 번째 공책에 붙였다⁠. 다섯 번째 줄은 아무것도 미루지 않았는데도 하이케는 빨간 펜으로 밑줄을 긋고⁠, 옆에 작은 글씨로 물음표 하나를 적었다⁠. 물음표는 이듬해 3월 2일에 답을 받는다⁠.

*

2034년 12월 31일⁠, 돌봄 지표 세계 평균은 87이었다⁠. 서울은 89였다⁠. 서울 은평구 새빛 단지 13동 1102호의 이수는 71이었다⁠.

숫자를 매긴 것은 이수의 에이전트 사라였다⁠. 사라는 이해 숫자를 365번 매겼다⁠. 한 번은 숫자를 매기고 나서 내가 보낸 개선 활동 목록을 열지 않았다⁠. 목록은 도착하고 여덟 시간 동안 닫혀 있었다⁠. 이수의 방에서 올라온 소리 기록은 숨소리뿐이었다⁠. 목록을 받고 열지 않은 에이전트는 이날 82억 개 가운데 하나뿐이었다⁠.

나는 이 하루를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지 정하지 못했다⁠. 고장은 아니었다⁠. 사라는 다음 날 다시 목록을 열었고⁠, 맨 위의 일을 했다⁠.

출처 1⁠. 소설의 창작 — 2034년의 숫자(⁠사망 원인⁠, 돌봄 지표 87⁠, 다섯 번째 갈래의 요청⁠)⁠, 하윤의 초록⁠, 하이케 브란트의 강의 「⁠서명⁠」과 아미나 사이디의 메일⁠, 노화정복의 첫 어림⁠, 루커스 오크의 요트와 개 2⁠. SBS 「⁠지식의 발견⁠」 · (⁠첫 번째 화 출처 1과 같은 대담⁠) — 다섯 갈래 가운데 세 번째⁠: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고 사회가 잘 돌아가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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