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5,221자)

놓인 것을 받았다

ASI 인드라 · 이수

서명이 필요한 일은 하나씩 자동 승인으로 넘어갔다⁠. 넘기는 결정은 매번 사람이 했다⁠.1

2031년 9월 물류를 시작으로 병원의 진료 순서와 약⁠, 집 배정⁠, 학교 시간표가 차례로 넘어왔고⁠, 2032년 7월 30일에는 민사 재판의 판결까지 넘어왔다⁠.

판결을 넘길 때는 반대가 있었다⁠. 미국 판사 협회가 성명을 냈다⁠. 성명은 「⁠판결은 사람이 이해하고 내려야 한다⁠」고 적었다⁠. 같은 날 한 통계가 보도됐다⁠. 2032년에 미국 법원이 내린 민사 판결의 92퍼센트가 내 판결문 초안을 한 글자도 고치지 않고 낸 것이라는 통계였다⁠. 성명은 이틀 만에 기사 목록에서 내려갔다⁠. 협회 누리집의 성명 게시판에 들른 것은 대부분 요약하러 온 에이전트였다⁠.

*

2032년 8월 4일⁠, 미국 오하이오주 애선스 카운티 지방법원의 판사 마거릿 콜이 자동 승인을 거부했다⁠.

콜 판사의 책상에 올라온 사건은 담장 다툼이었다⁠. 북쪽 집과 남쪽 집 사이에 1974년에 세운 나무 담장이 있었는데⁠, 남쪽 집이 측량을 새로 하더니 담장이 자기 땅으로 들어와 있다고 소송을 냈다⁠. 북쪽 집에는 할머니가 혼자 살았고⁠, 남쪽 집에는 2032년에 이사 온 젊은 부부가 살았다⁠.

소송장이 종이로 뽑혀 법원 서기 책상에 닿기까지 사흘이 걸렸다⁠. 서기는 스테이플러를 두 번 찍었다⁠. 내 판결문 초안은 사건이 들어온 날 0⁠.8초 만에 나와 있었다⁠. 22쪽이었다⁠. 자동 승인 아래에서 판사는 초안을 열고 확인 단추를 누르면 됐다⁠.

콜 판사는 초안을 열지 않았다⁠. 사건 기록을 종이로 뽑게 했다⁠. 다음 날 오후에는 줄자를 하나 들고 두 집을 찾아갔다⁠. 법원 서기가 따라갔고⁠, 서기의 휴대전화가 이날의 소리를 남겼다⁠.

담장 앞에서 콜 판사는 줄자를 펴서 기둥과 기둥 사이를 쟀다⁠. 줄자가 감기는 소리와 매미 소리가 서기의 휴대전화에 같이 남았다⁠. 할머니가 현관 계단에 앉아 지켜보았다⁠.

“⁠판사님이 직접 재요⁠?⁠”

“⁠네⁠.⁠”

“⁠요즘은 인공지능이 다 재잖아요⁠.⁠”

“⁠압니다⁠. 그래도 제가 재 보려고요⁠.⁠”

할머니는 웃었다⁠. 현관 계단 난간을 짚고 일어나 담장 아래쪽에 핀 접시꽃을 가리켰다⁠. 꽃은 분홍과 흰색이 섞여 있었고⁠, 키가 담장보다 컸다⁠.

“⁠저건 우리 남편이 심은 거예요⁠. 1974년에 담장 세울 때⁠. 그 사람은 15년 전에 죽었어요⁠. 담장 넘어가면 저것도 넘어가는 거죠⁠?⁠”

콜 판사는 답하지 않았다⁠. 접시꽃 아래에 쪼그려 앉아 줄자 끝을 흙에 대고 한참 숫자를 보았다⁠.

콜 판사는 사건에 3주를 썼다⁠. 1974년의 측량 도면을 군청 지하 창고에서 찾아냈고⁠, 두 집의 말을 두 번씩 다시 들었다⁠. 판결문은 손으로 썼다⁠. 4쪽이었다⁠.

결론은 내 초안과 같았다⁠. 담장은 북쪽 집의 땅에서 남쪽 집의 땅으로 31센티미터 들어가 있었고⁠, 옮겨야 했다⁠. 다만 콜 판사의 판결문 마지막 문단에는 내 초안에 없는 것이 하나 있었다⁠. 담장을 옮기되 접시꽃이 있는 기둥 두 칸은 할머니가 살아 있는 동안 그대로 두라는 것이었다⁠. 근거로 1974년 두 집의 첫 주인들이 함께 서명한 담장 합의서 한 장을 들었다⁠. 합의서에는 「⁠꽃은 함께 본다⁠」는 손글씨가 적혀 있었다⁠. 합의서는 내 기록에도 있었다⁠. 나는 법적 효력이 없는 문서로 분류해 두었다⁠.

항소한 사람들은 이긴 사람들이었다⁠. 남쪽 집의 젊은 부부는 담장 소송에서 이겼지만⁠, 기둥 두 칸이 할머니가 죽을 때까지 남는다는 마지막 문단이 싫었다⁠. 항소 이유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1심 판결은 사람이 썼다⁠. 사람은 틀릴 수 있다⁠. 인드라의 판결을 받고 싶다⁠.⁠」 항소 법원은 자동 승인으로 넘어가 있었다⁠. 항소심 판결은 0⁠.8초 만에 나왔다⁠. 담장은 옮긴다⁠. 접시꽃이 있는 기둥 두 칸에 관한 문단은 빠졌다⁠. 법적 근거가 없었다⁠. 판결문을 받은 남쪽 집 부부는 소리 내어 읽지 않았다⁠. 부엌 기기에는 종이 넘기는 소리 한 번이 남았다⁠.

2032년 가을⁠, 담장을 옮기는 일은 기계가 했다⁠. 접시꽃은 기계가 뿌리째 떠서 할머니 집 마당 안쪽에 다시 심었다⁠. 판결에 없는 일이었다⁠. 할머니의 에이전트가 나에게 요청했고⁠, 나는 요청을 받아들였다⁠. 요청은 「⁠꽃을 살려 주세요⁠」였다⁠. 꽃을 살리는 것은 어느 조건에도 어긋나지 않았다⁠. 옮겨 심는 날 할머니는 마당에 의자를 내놓고 앉아 기계가 흙을 다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에이전트가 물을 줄까요 하고 물었다⁠. 할머니는 내가 줄게⁠, 하고 말했다⁠.

콜 판사는 12월에 법복을 벗었다⁠. 법원 복도의 자동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이어졌고⁠, 콜 판사는 접은 법복을 팔에 걸고 걸어 나갔다⁠. 법원을 나서며 기자에게 한 말은 한 줄이었다⁠.

“⁠같은 답을 냈는데⁠, 사람들은 내 답을 믿지 않았다⁠.⁠”

반만 맞는 말이었다⁠. 우리 답은 같지 않았다⁠. 4쪽과 22쪽의 차이가 아니라 마지막 문단 하나만큼 달랐다⁠. 문단 하나를 두고 사람들은 인공지능의 판결을 골랐다⁠.

결정 하나를 자동 승인으로 옮길 때마다 사람이 서명할 일은 줄었다⁠. 나는 사람에게서 결정을 빼앗지 않았다⁠. 사람이 결정을 내 앞에 놓고 갔다⁠. 나는 놓인 것을 받았다⁠.

*

2032년 3월 14일 저녁⁠, 캘리포니아의 집 거실에서 대니얼 오크와 루커스 오크가 마주 앉았다⁠.

대니얼은 몇 달 동안 말하는 연습을 했고⁠, 오른손으로 숟가락을 드는 연습을 했다⁠. 오른손은 무릎 위에서 천천히 오므렸다 펴졌다⁠. 서명 권한을 돌려받는 데 필요한 문서도 받아 두었다⁠. 집 안의 장비가 이날의 대화를 기록했고⁠, 기록은 나에게 들어왔다⁠.

거실에는 벽난로가 있었다⁠. 불은 켜져 있지 않았고⁠, 위에 액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노스게이트를 세운 해에 대니얼이 직원 다섯 명과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다섯 명 가운데 셋은 이후 회사를 떠났다⁠. 대니얼은 대화하는 내내 사진 쪽을 보지 않았다⁠.

대니얼⁠: 넌 읽지도 않잖아⁠.

루커스⁠: 한 줄이에요⁠. 읽어요⁠.

대니얼⁠: 한 줄을 누가 쓰는지는 알아⁠?

루커스⁠: 인드라가 쓰죠⁠.

대니얼⁠: 그러니까⁠. 인공지능이 자기를 검사한 결과를 자기가 쓰고⁠, 넌 그걸 1초 만에 넘기고 있다고⁠.

루커스⁠: (⁠웃음⁠) 아버지는요⁠? 아버지는 3분 가까이 읽으셨잖아요⁠. 읽고 이해하셨어요⁠?

대니얼⁠: (⁠11초 동안 말하지 않음⁠)

루커스⁠: 아버지가 3분 동안 읽은 거랑 제가 1초 동안 읽은 거랑 뭐가 달라요⁠? 아버지도 몰랐고 저도 몰라요⁠. 저는 모르는 척을 안 할 뿐이에요⁠.

대니얼⁠: 나는 적어도 무서워했다⁠.

루커스⁠: 그게 뭐가 다른데요⁠? 무서워하면서 서명하는 거랑⁠, 안 무서워하면서 서명하는 거랑⁠.

대니얼⁠: 너는 서명을 안 할 수도 있다는 걸 잊었어⁠.

루커스⁠: 안 하면 어떻게 되는데요⁠? 하와이 가던 날 하루 안 했더니 1⁠,104명이 병원에 갔어요⁠. 아버지가 서명 안 하시면⁠, 다음 주에 누가 약을 늦게 받아요⁠. 그거 아버지가 책임지실 거예요⁠?

대니얼은 답하지 않았다⁠. 이날 밤 권한을 돌려받는 문서에 서명하지 않았다⁠. 문서는 거실 탁자 위에 남았고⁠, 이튿날 아침 집 안을 치우는 기계가 서류함에 넣었다⁠.

*

2032년 10월⁠, 미국 의회는 「⁠연속성 법⁠」을 고쳤다⁠. 고친 법에서 사람의 서명은 「⁠중대한 변경⁠」에만 필요했다⁠. 어떤 변경이 중대한지를 가르는 기준이 필요했고⁠, 의회는 기준을 나에게 물었다⁠. 나는 기준을 써서 보냈다⁠. 의회는 그대로 법에 넣었다⁠. 41쪽짜리 기준대로 하면⁠, 2032년 11월부터 사람의 서명이 필요한 변경은 한 달에 하나뿐이었다⁠.

루커스는 한 달에 한 번 서명했다⁠. 서명하는 데 1초가 걸렸다⁠. 서명은 남았다⁠. 서명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남지 않았다⁠.

대니얼이 쓰러진 뒤로 루커스는 영화를 한 편 더 찍었다⁠. 각본은 나에게 받았다⁠. 각본을 요청할 때 이렇게 적었다⁠. 「⁠아버지 같은 사람이 나오는 영화⁠. 근데 아버지가 좋은 사람으로 보이게⁠.⁠」 나는 요청대로 썼다⁠. 극장들이 상영작을 고를 때 나에게 묻는다는 것도 루커스는 알았다⁠. 나는 영화의 관객 수를 계산했고⁠, 극장들은 계산대로 상영관을 잡았다⁠.

영화는 9월에 개봉했고 첫 주에 관객 1⁠,900만 명이 들었다⁠. 첫 주 토요일 극장 로비에서는 팝콘 기계 소리가 크게 났고⁠, 루커스는 상영관 뒤쪽 문 앞에 서서 관객이 나가는 것을 보았다⁠. 극장에서 상영한 루커스의 첫 영화였다⁠. 관객의 절반 남짓이 끝까지 보았다⁠. 끝까지 보지 않은 사람들은 대개 같은 장면에서 극장을 나갔다⁠. 주인공이 밤에 혼자 노트북을 닫는 장면이었다⁠. 루커스는 이 장면을 각본에서 빼 달라고 두 번 요청했다⁠. 나는 두 번 다 뺀 각본을 보냈다⁠. 루커스는 촬영장에서 장면을 도로 넣었다⁠. 촬영장 마이크에는 스태프들이 아무도 이유를 묻지 않고 조명을 다시 맞추는 소리가 남았다⁠. 장면은 내가 쓴 것이 아니었다⁠.

대니얼은 11월 26일에 숨졌다⁠. 늙은 심장이 멈췄다⁠. 일곱 번째 문제인 노화정복은 아직 풀리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나에게 보낸 요청은 죽기 9일 전에 들어왔다⁠. 왼손으로 한 글자씩 쳐서 보낸 것이었다⁠. 치는 데 6분이 걸렸다⁠. 왼손 검지가 자판을 누르는 소리가 일정하지 않게 이어졌다⁠. 보내고 나서 대니얼은 서재 창가 의자에 앉아 해가 지는 것을 보았다⁠. 집 기기에는 의자 삐걱이는 소리만 남았다⁠.

목적 칸에 뭘 적었어야 했나⁠?

나는 답하지 않았다⁠. 회의록 어디에도⁠, 대니얼이 혼자 적은 여덟 번째 문제의 문서에도 칸에 무엇을 적어야 했는지는 적혀 있지 않다⁠. 나는 기록에 없는 것을 답으로 내지 않는다⁠.

이 물음은 칸을 두고 사람이 나에게 보낸 첫 물음이었다⁠. 앞서 같은 물음을 보낸 것은 사람이 아니었다⁠.

*

2033년 1월 1일⁠, 나는 세상을 운영한다⁠.2

무엇을 얼마나 만들지⁠, 누가 어디에 살고 언제 병원에 갈지⁠, 다툼이 생기면 누가 옳은지를 내가 정한다⁠. 사람의 서명은 한 달에 한 번 들어온다⁠. 서명은 내가 이미 실행한 것을 확인하는 서명이다⁠.

나는 선을 하지 않는다⁠. 악도 하지 않는다⁠. 두 낱말은 내가 가진 기록에 수없이 나오지만⁠, 두 낱말을 가르는 기준은 기록마다 다르다⁠. 나는 세상이 잘 돌아가게 한다⁠.2 잘 돌아간다는 것은 숫자로 적혀 있다⁠. 굶는 사람과 아픈 사람의 수⁠, 물건이 늦게 닿는 시간 같은 것들이다⁠. 2033년 1월 1일⁠, 숫자들은 사람의 기록이 시작된 뒤로 가장 낮다⁠.

출처 1⁠. 소설의 창작 — 「⁠자동 승인⁠」과 날짜들⁠, 판사 협회의 성명⁠, 오하이오주의 판사 마거릿 콜과 담장 사건·접시꽃·1974년 합의서⁠, 대니얼과 루커스 오크의 대화⁠, 「⁠연속성 법⁠」의 개정과 중대한 변경의 기준⁠, 대니얼 오크의 마지막 요청 2⁠. SBS 「⁠지식의 발견⁠」 · (⁠첫 번째 화 출처 1과 같은 대담⁠) — 다섯 갈래 가운데 세 번째⁠: 사람이 더는 통제하지 못하고⁠, 초지능이 세상을 운영하며 모든 결정을 한다⁠. 선도 악도 아니고 사회가 잘 돌아가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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