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5,243자) · 한석 · 동짓달 열여드레

업으면 짐이다

재의 강을 건너 · 한도윤

만 19세 이상 이용가

동짓달 열여드레의 짐은 무쇠솥 둘이었다.

불목 열아홉 집이 돌려 쓰던 큰 솥 둘이 잇달아 금이 갔다. 재 섞인 물을 끓이다 보니 솥 바닥에 재가 눌어붙었고, 그 자리를 긁어내다가 쇠가 얇아져서 갈라졌다고 마 의원이 전해 왔다. 솥이 없으면 물을 끓일 수가 없었다. 서안 대장간에서 헌 솥 둘을 내주었다. 솥은 근수보다 모양이 나빴다. 둥근 바닥이 등에 안 붙어서, 지고 걸으면 한쪽으로 자꾸 쏠렸다.

말뚝이 없는 재에서는 이제 누가 어디서 받을지가 날마다 달랐다. 여덟째 판개는 이백오십 발쯤에서 억쇠에게 솥을 받았다. 판개는 예순하나였고 모돌 다음으로 나이가 많았다. 억쇠가 솥 끈을 판개 어깨에 걸어 주면서, 솥이 기울면 몸을 솥 쪽으로 틀지 말고 반대로 틀라고 말했다. 판개가 웃으면서 서른 해 동안 솥 지는 법을 억쇠한테 처음 배운다고 받았다.

판개가 열 발을 갔다. 스무 발을 갔다. 서른 발에서 솥이 쏠렸다.

판개는 억쇠가 일러 준 대로 반대로 몸을 틀지 않았다. 서른 해 버릇대로 솥 쪽으로 몸을 틀었고, 그 바람에 발이 옆으로 나갔다. 옆으로 디딘 자리는 굳지 않은 자리였다. 판개가 허리까지 빠졌다. 빠지면서 솥 하나를 놓쳤다. 솥이 재 위에 뒤집혀 떨어졌다가, 둥근 바닥부터 천천히 재 속으로 들어갔다. 쇠가 재에 먹히는 동안 김이 한꺼번에 올랐다.

서안 나루에서 그것이 다 보였다. 한석이 모닥불 앞에서 일어섰다.

*

모돌이 제일 먼저 빈손으로 재에 들어갔다가, 백 발쯤에서 무릎까지 빠졌다. 빈손이라 재가 받쳐 주지 않았다. 모돌은 그 자리에서 멈춰 서서 판개 쪽을 봤다. 둘 사이가 백오십 발이 넘었다.

한석은 나루에 쌓아 둔 말뚝 더미로 뛰어갔다. 둘을 집어 어깨에 메다가 멈췄다. 한석은 말뚝을 내려놓고 헛간으로 들어갔다. 서까래 밑에 서서 올려다봤다. 새끼줄에 묶인 말뚝이 모닥불 연기에 그을려 검었다. 한석이 발돋움해 새끼줄을 끊었다. 열두 해 만에 서까래에서 내려온 말뚝은 생각보다 가벼웠다.

기순이 헛간 문에서 그것을 보고 물었다.

“지금 뭐 하는 거요?”

“짐이 있어야 가오.”

한석이 서까래 말뚝과 더미의 말뚝 하나를 메고 재에 들어갔다. 백 발을 지나 모돌이 빠진 자리 옆에 이르자 서까래 말뚝을 모돌에게 내밀었다. 모돌이 그것을 받고 일어서니 재가 받쳤다.

모돌이 제가 받은 말뚝을 내려다봤다. 아래가 하얗게 삭았고 위쪽이 반들거렸다. 더미에 쌓인 말뚝들은 다 며칠 전에 뽑은 것이라 아래가 검었는데, 이것만 아래가 희었다.

“이건 서까래 것이오.”

“그렇소, 서까래 것이오.”

“이걸 왜 나한테 주오?”

한석이 앞을 보고 걸으면서 대답했다.

“제일 멀리 가는 사람이 져야 하오.”

모돌이 그 말뚝을 가슴에 고쳐 안았다. 안고 걸으니 재가 받쳤다. 모돌이 한석 뒤를 따라가면서 물었다.

“이 말뚝 임자가 누구요?”

한석이 대답하지 않았다.

나루에서 기순이 말뚝 둘을 멨다. 둘째와 셋째와 다섯째가 멨다. 억쇠는 제 몫을 멨다가 그 무게가 겁이 나서 하나를 내려놓고, 내려놓은 것이 더 겁이 나서 도로 멨다. 연우도 하나를 멨다. 연우는 이제 빈손으로는 멀리 못 갔다. 여덟이 말뚝을 지고 재에 들어갔다.

*

판개는 허리까지 빠진 채로 남은 솥 하나를 머리 위로 들고 있었다. 솥을 놓으면 몸이 뜨겠지만, 판개는 놓지 않았다. 불목 열아홉 집이 쓸 마지막 솥이었다.

한석과 모돌이 먼저 닿았다. 한석이 판개 오른쪽 세 발 자리에 말뚝을 박았다. 박자마자 그 둘레가 굳었다. 모돌이 왼쪽에 서까래 말뚝을 박았다. 기순과 둘째와 셋째와 다섯째가 와서 박았고, 억쇠도 박았다. 연우가 마지막으로 와서 판개 뒤쪽에 박았다. 말뚝 여덟 개가 판개 둘레를 두르자 그 안의 재가 굳었다. 판개의 허리 아래가 굳은 재에 감싸였다.

여덟이 판개의 팔과 어깨를 잡고 끌어냈다. 끌어내는 데 반 식경이 걸렸다. 판개가 솥을 끝까지 안고 나왔다.

끌어내고 나서 아홉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아홉이 다 재 위에 있는데 아무도 안 빠졌다. 기순이 사방을 둘러보고 셈을 했다.

“여기가 이백칠십 발이오.”

한석이 불목 쪽을 봤다. 여기서는 불목 나루가 가까워서 마흔두 발밖에 안 남았다. 한석은 서른 해 동안 열여덟 발 너머를 가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이백칠십 발 자리에 서 있었다.

“나는 여기 처음 와 보오.”

둘째가 웃지도 못하고 말했다.

“나도 처음이오.”

억쇠가 제 발밑을 봤다.

“나는 이백까지만 갔소.”

“이제 댁도 이백칠십이오.”

억쇠가 뒤를 돌아봤다. 서안 나루가 멀었다. 모닥불 연기가 손가락 한 마디만 했다. 나루에 서안 사람들이 몇 나와 있었는데 사람이 아니라 점이었다.

“삼십 년 동안 저기서만 봤소. 여기서 보니 저쪽이 작소.”

억쇠가 그 말을 하고 나서 다시 불목 쪽을 봤다. 그리고 한참 있다가 덧붙였다.

“솥 들고 온 판개보다 내가 더 떨고 있소.”

아무도 웃지 않았다. 판개가 재 위에 앉아서 웃었다. 웃다가 다리를 못 써서 억쇠 어깨를 짚었다.

“솥을 하나 빠뜨렸소.”

한석이 판개 어깨를 짚으며 대답했다.

“솥은 또 만드오. 댁은 하나뿐이오.”

판개가 고개를 숙였다. 한석이 남은 솥을 판개 무릎에서 들어 연우에게 넘겼다. 연우가 솥을 지고 남은 마흔두 발을 가서 불목 나루에 내려놓았다.

아홉이 판개를 업고 돌아왔다. 번갈아 업었고, 업으면 짐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아무도 안 빠졌다. 박은 말뚝 여덟 개는 이백칠십 발 자리에 그대로 두고 왔다. 모돌만 서까래 말뚝을 뽑아 도로 안고 왔다.

*

해 질 녘 서안 나루에 곽진수가 왔다. 사령 넷과 두칠을 데리고 왔다. 두칠은 곽 뒤에서 땅만 보고 있었다.

곽은 판개가 헛간 앞에 누워 있는 것을 보고 혀를 찼다.

“다리를 못 쓰는 도강꾼이라. 스무날이 되기도 전에 강이 알아서 정리를 해 주는구먼.”

한석이 앞에 섰다.

“내일 판개를 업고 불목 의원한테 가겠소.”

“내일이 스무날이오.”

“그건 나도 아오.”

“도강첩에 사람 건너는 삯이 두 냥이오. 업혀 가는 사람은 짐이 아니라 손님이지. 도가 짐꾼이 업어 주겠소. 두 냥만 내시오.”

기순이 참지 못하고 한 발 나섰다.

“판개 몸무게면 쌀 한 섬이오. 쌀 한 섬 삯이 두 푼인데 사람은 두 냥이면 스무 곱이오.”

“사람이 쌀보다 비싼 게 당연하지.”

“그럼 막동은 몇 냥이었소?”

곽이 기순을 봤다. 엽전 굴리던 손이 멈췄다. 곽 뒤에서 두칠이 고개를 들었다가 도로 숙였다.

곽이 사령들에게 말했다.

“저 말뚝 더미를 거두게. 스무날부터 도가 것이오.”

사령들이 나루의 말뚝 더미로 갔다. 이백칠십 발 자리에 두고 온 여덟 개 말고 더미에 남은 것은 없었다. 사령 하나가 빈자리를 보고 이방에게 뭐라고 보고할지 몰라 머리를 긁었다. 모돌이 헛간 문턱에 서까래 말뚝을 안고 앉아 있었다. 사령이 그쪽으로 오자 모돌이 말뚝을 더 꽉 안았다.

“이건 짐이오. 임자한테 가는 중이오.”

“그 임자가 누구요?”

모돌이 한석을 봤다. 한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령은 결국 그 말뚝을 거두지 못하고 돌아갔다.

곽이 나루를 떠나면서 한마디를 남겼다.

“스무날 아침에 재에 발 하나라도 들이는 자는 곤장이오. 현감 나리 분부요.”

곽의 행렬이 잿골 길로 사라지고 나서 서안 마을 쪽에서 등불이 몇 내려왔다. 봉출이 앞장섰고, 얼음 물을 부었던 얼굴들이 그 뒤에 있었다. 동이를 안고 왔던 계집아이도 제 어미 치맛자락을 잡고 따라왔다. 봉출은 헛간 앞에 누운 판개를 한 번 들여다보고, 한석 앞에 섰다.

“내일 들어가오?”

“판개를 업고 들어가오.”

“들어가면 곤장 스무 대라며?”

“그렇게 들었소.”

봉출이 허리를 두드렸다.

“나는 올해 일흔이오. 곤장 스무 대면 맞다가 죽소. 그러니 나는 안 맞겠소.”

한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봉출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서른여덟이 한꺼번에 들어가면 사령 넷이 누구부터 때리오?”

기순이 먼저 웃음을 터뜨렸다. 셈으로 따지면 사령 하나에 아홉 반이었다. 봉출이 기순을 보고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셈 잘하는 넷째가 웃는 걸 보니 내 말이 맞구먼.”

한석은 웃지 않았다. 등불 불빛에 서른 몇 개의 얼굴이 흔들렸다. 재 위에 서 본 적이 한 번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빠지면 건져 줄 사람이 없었다. 판개 하나를 건지는 데 여덟이 들어가야 했다. 서른여덟이 들어갔다가 서른여덟 군데서 빠지면 서안 도강꾼 여덟으로는 셈이 안 됐다.

“재는 빈손을 안 받치오.”

한석이 말했다. 봉출이 대답했다.

“그럼 뭘 지고 가면 되오?”

그 물음에 한석은 대답을 못 했다. 연우가 옆에서 대신 대답했다.

“불목에 줄 것을 집집마다 하나씩 지고 오시오.”

봉출이 등불을 들어 올려 연우 얼굴을 비췄다. 한참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

그날 밤 기순이 판개 옆에 앉았다. 판개가 눈을 뜨고 천장을 보고 있었다.

“아직 안 자오?”

“넷째, 내 발수 좀 불러 주시오.”

“내 발수 말이오?”

“삼십 년 치.”

기순이 불렀는데, 적은 것을 읽는 것이 아니라 머릿속에서 꺼내서 불렀다.

“첫해 아홉째 자리에서 이백일흔둘, 열 해째 여덟째 자리에서 이백쉰, 스무 해째 이백마흔여섯, 올해 이백마흔넷이오.”

“삼십 년에 스물여덟 발 줄었구먼. 많소, 적소?”

“적소. 우리 가운데 제일 적소.”

판개가 눈을 감았다가 떴다.

“열두 해 전 그날은 안 불렀소.”

기순의 입이 멈췄다. 열두 해 전 겨울 한 날의 발수가 기순의 머릿속에 없었다. 서른 해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외운 기순이 그날 하루만 외우지 않았다.

“그날은 안 셌소.”

“나는 그날을 셌소. 나는 그날 재에 들어갔소.”

판개가 천장을 보면서 말했다. 헛간 반대쪽에서 한석이 돌아누웠다. 자는 척하는 등이었다.

“동안에서 누가 빠졌다고 해서 서안 아홉이 짐도 없이 다 들어갔소. 빈손이라 다들 얕게 빠졌지. 나는 백 발쯤에서 더 못 갔소. 거기서 다 봤소. 첫째가 백사십에서 허리까지 빠지는 걸 봤소. 그때 첫째는 지금 첫째 아비요.”

기순이 숨을 멈췄다.

“그리고 둘째가 그 자리로 가는 걸 봤소. 빈손이었소. 서른아홉 발 가던 사람이 백사십을 갔소. 어떻게 갔는지 나도 모르오. 둘째가 제 아비를 업었소. 업으니까 재가 받쳤소. 둘째가 아비를 업고 불목 쪽으로 걸어갔소. 뒤로 안 오고 앞으로 갔소. 거기 의원이 있으니까.”

판개가 숨을 한 번 고르고 말했다.

“업은 사람은 다 그렇소. 업고 가는 동안은 셈이 안 되오. 나중에 세려고 하면 그 자리만 비오.”

헛간 반대쪽에서 한석이 손바닥을 가슴에 대고 문지르는 소리가 났다. 한석은 끝까지 돌아눕지 않았다.

판개가 기순의 손을 잡았다.

“내일 업히겠소. 이번에는 내가 짐이 되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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