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5,192자) · 한석 · 동짓달 열닷새

말뚝

재의 강을 건너 · 한도윤

만 19세 이상 이용가

잿골 현아 마당은 서안 나루보다 추웠다. 담이 높아 해가 늦게 들었고, 마당 한가운데 깔린 박석 틈마다 서리가 하얗게 끼어 있었다. 동짓달 열닷새 아침, 그 박석 위에 덕보가 무릎을 꿇었고, 그 뒤에 한석과 연우와 막동의 어미가 섰다. 억쇠는 따라오지 말라는데 따라와서 담 밑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현아 앞 떡집에서 산 인절미를 소매 속에 감춰 두고 사령이 안 볼 때마다 한 입씩 먹었다.

대청 위에 민 이방이 앉아 있었다. 그 옆에 곽진수가 방석도 없이 서 있었는데, 서 있는 모양이 앉아 있는 이방보다 편해 보였다. 두칠은 곽 뒤에서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있었다. 현감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이방이 검시 문서 한 장을 펼쳤다. 이방은 그 종이를 한참 들여다보며 붓을 들었다 놓았다 했다.

“도가 빚꾼 막동, 열여섯. 동짓달 열나흘 재의 강 백일흔 발 자리에서 빠져 죽음. 도가 말로는 남풍에 제 발로 헛디뎠다 하오. 이의가 있소?”

덕보가 고개를 들었다.

“이의가 있소.”

“그럼 말하시오.”

“남풍 부는 날은 재에 안 드는 게 서른 해 법이오. 나는 그 말을 했소. 도가 주인이 서른 해 법은 스무날에 끝난다 했소. 감영에서 재백 사러 온다 했소. 그래서 재에 들었소. 아이가 빠졌을 때 나는 건지러 뛰었소. 행수가 내 멱살을 잡았소. 건지면 그 빚 네가 진다 했소. 막대로 내 옆구리를 쳤소. 도가 주인은 나루에서 자루부터 건지라 했소.”

덕보가 저고리 자락을 걷어 옆구리를 보였다. 시퍼런 멍이 손바닥 두 개만 했다.

곽진수가 소리 없이 웃었다.

“이 사람은 도가에 열두 냥 빚진 사람이오. 닷새 삯을 받고 도망쳤소. 도가에 앙심이 있지.”

“삯은 헛간 그릇에 두고 왔소.”

“그럼 더 이상하구먼. 삯을 버리는 사람 말을 누가 믿소?”

이방이 두칠을 봤다.

“행수, 여섯째 말이 맞소?”

두칠이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나오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아이가 헛디뎠소.”

두칠의 모은 두 손이 떨렸다. 한석과 연우가 그것을 봤고, 이방도 봤다. 이방은 붓을 들고 종이를 한참 내려다봤다. 붓끝에서 먹이 한 방울 맺혔다가 종이 위에 떨어졌다. 이방은 그 먹 방울을 소맷자락으로 누르고, 다른 자리에 실족이라는 두 글자를 적었다.

*

현감이 대청에 나온 것은 그다음이었다. 마흔 남짓한 사내였고, 얼굴이 희고 손이 작았다. 현감은 문서를 받아 한 번 훑고 도장을 찍게 했다. 그리고 마당의 도강꾼들을 내려다봤다.

“서안 도강꾼은 스무날부터 재에 들지 마라. 도강첩이 이미 났다. 스무날 뒤 재에 드는 자는 곤장 스무 대다.”

한석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나리, 불목 열아홉 집이 겨울 짐을 아직 스물다섯 못 받았소. 재 굳는 날이 보름 남았소.”

“그러면 도가가 옮기겠지.”

“도가는 불목에 쌀 한 말을 팔고 재백 두 되를 받소.”

“장사하는 사람이 값을 부르는 게 죄냐?”

“값을 못 내면 불목은 굶소.”

“불목은 호적에 없는 땅이다.”

현감이 이방을 보며 덧붙였다.

“세도 안 내고 구휼도 안 받는 땅이다. 그런 땅 사정까지 현아가 볼 까닭이 없다.”

곽진수가 허리를 굽혔다. 굽힌 허리 아래에서 엽전이 손바닥을 굴렀다.

막동의 어미가 그때 앞으로 나왔다. 품에서 짚신 한 짝을 꺼내 박석 위에 놓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짚신 바닥이 재에 눋고 검게 탄 자리가 있었다. 현감은 그 짚신을 내려다보다가 사령에게 치우라고 손짓했다. 사령이 다가오자 어미가 먼저 짚신을 도로 품에 넣었다. 억쇠가 담 밑에서 인절미를 입에 문 채 일어섰다가, 연우가 고개를 젓는 것을 보고 도로 앉았다.

현아 문을 나설 때 민 이방이 뒤따라 나왔다. 도포 자락에 먹물이 한 점 튀어 있었다. 이방은 사령들이 안 보는 담 모퉁이에서 한석을 불러 세웠다.

“나는 적으라는 대로 적었소.”

“나도 그건 아오.”

“도가가 현감께 바친 삼백 냥 가운데 서른 냥이 내 몫이오. 그것도 아시오?”

한석이 대답하지 않았다. 이방은 제 손을 내려다봤다. 가운뎃손가락 마디에 붓 자국이 굳은살로 박혀 있었다.

“행수가 떨었소. 그건 문서에 안 들어가오. 문서에는 들어갈 칸이 없소.”

“그럼 어디 들어가오?”

이방은 대답하지 않고 돌아섰다. 돌아서면서 한마디를 흘렸다.

“감영 도사가 재백 값을 보러 곧 이 고을에 오오. 현감 윗사람이오.”

*

돌아오는 길에 한석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잿골에서 서안까지 반나절 길은 마른 들판이었고, 들판 끝에 재의 강이 잿빛 띠처럼 누워 있었다. 불뫼 쪽 하늘에 연기가 한 줄 서 있었다. 한석은 그 연기를 보면서 걸었다.

연우가 옆에 와서 걸었다.

“스무날까지 닷새가 남았소.”

“알고 있소.”

“닷새에 스물다섯을 못 옮기오.”

“그것도 알고 있소.”

한석이 걸음을 멈췄다. 제 손바닥을 폈다. 굳은살이 두꺼웠고, 굳은살 밑이 아팠다.

“다 말뚝 때문이오.”

“말뚝이 왜요?”

“덕보가 나간 날 다섯째가 백스물여섯에서 백서른여섯까지 갔소. 서른 해 동안 백스물여섯이던 사람이. 앞이 비니까 더 갔소. 자리가 사람을 묶고 있었소.”

*

그날 저녁 덕보가 헛간 앞에 와서 말했다.

“말뚝은 뽑아도 되오. 이제는 안 갈 자리요.”

한석이 혼자 들어가 뽑았다. 백예순 발 자리였다. 말뚝은 서른 해 가까이 박혀 있어서 아래쪽이 재에 들러붙어 있었고, 한석은 두 팔로 끌어안고 몸을 뒤로 젖혀 가며 한참을 흔들어서야 뽑았다. 뽑힌 자리에 구멍이 남았다. 구멍 속에서 김이 올라와 한석의 얼굴을 덮었고, 재가 구멍 가장자리로 조금씩 흘러들어 갔다.

한석은 말뚝을 안고 돌아왔다. 올 때 빈손으로 백예순을 갈 수는 없어서 소금 한 자루를 지고 갔는데, 돌아오는 길에는 말뚝이 짐이었다. 덕보의 말뚝이었고 남의 물건이라, 발밑이 단단했다.

나루에 말뚝을 내려놓는데 손바닥이 아팠다. 말뚝은 등에 지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 안고 오는 것이라, 무게가 손바닥에 몰렸다. 한석은 손바닥을 펴 놓고 한참 봤다. 열두 해 전에도 이렇게 아팠던 것 같았다. 그때 무엇을 안고 왔는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손바닥이 아팠다는 것만 떠올랐다.

*

이튿날 아침 한석이 여덟을 모았다.

“말뚝을 다 뽑읍시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판개가 먼저 물었다.

“그러면 어디서 내려놓소?”

“빠지는 데서 내려놓소.”

“빠지고 나면 늦소.”

“늦어도 거기가 끝이오.”

기순이 셈을 했다.

“말뚝이 없으면 매번 끝까지 가 봐야 하오. 다들 지치오.”

“다들 지치오. 그런데 지금은 짐이 안 넘어가오.”

모돌이 끝까지 말이 없다가 일어서더니, 이백구십 발 자리까지 혼자 걸어 들어갔다. 짐 대신 억쇠가 준 감자 자루를 들고 갔다. 제 말뚝 앞에 서서 그것을 오래 봤다. 삼십 년 동안 손이 닿던 자리가 반들거렸다. 모돌은 말뚝을 두 팔로 안았다. 뽑으려고 안은 것인지 그냥 안은 것인지 나루에서는 알 수 없었다. 한참 뒤에 모돌이 몸을 뒤로 젖히자 말뚝이 뽑혔다. 모돌이 그것을 안고 돌아왔다. 나루에 닿아서도 내려놓지 않고 한참 안고 서 있었다.

“이놈한테 삼십 년 인사를 받았소.”

억쇠가 눈을 둥그렇게 뜨고 물었다.

“말뚝이 인사를 하오?”

“내가 올 때마다 여기까지라고 했소. 그게 말뚝 인사지.”

그날 여덟 개를 뽑았다. 연우는 처음부터 말뚝이 없었다.

*

뽑은 말뚝을 나루에 쌓아 두고 한석이 헛간에 들어갔을 때, 기순이 서까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서까래에 말뚝 하나가 새끼줄로 묶여 있었다. 재에서 뽑은 것이라 아래쪽이 하얗게 삭았고, 위쪽은 손이 닿던 자리가 반들거렸다.

“저건 언제 것이오?”

“열두 해 됐소.”

“첫째 자리 것이오?”

“그렇소. 첫째 자리 것이오.”

“저건 안 내리오?”

한석이 헛간을 나가면서 대답했다.

“저건 박을 데가 없소.”

기순은 서까래를 한참 올려다봤다. 박을 데가 없는 것이 아니라 박을 사람이 없는 것이라는 말이 목까지 올라왔다. 기순은 그 말을 삼켰다. 셈이 아닌 말은 기순의 입에서 잘 안 나왔다.

*

열이레 아침, 말뚝 없는 재에 여덟이 이어 들어갔다.

한석이 열여덟에서 멈추지 않았다. 스물둘, 스물여섯, 서른, 서른둘에서 무릎이 들어가자 거기 내려놓았다. 둘째가 받아 예순셋까지 갔다. 셋째가 백둘, 기순이 백마흔넷, 다섯째가 백아흔, 억쇠가 이백마흔둘, 판개가 이백아흔넷까지 갔다. 모돌이 이백아흔넷에서 받아 삼백둘까지 갔다. 연우가 받아 동안에 닿았다.

기순이 나루에서 합을 셌다. 입으로 세고, 틀렸나 싶어 한 번 더 셌다.

“여덟이서 삼백열둘을 다 갔소. 말뚝 있을 때는 아홉이서 이백구십이었소.”

“하나 줄었는데 더 갔소?”

“말뚝이 스물두 발을 먹고 있었소. 서른 해 동안.”

불목 나루에는 그날 처음으로 사람이 여럿 나와 있었다. 얼음 물을 받아 마시고 일어선 사람들이었다. 마 의원이 맨 앞에서 연우가 내려놓는 짐을 받았고, 그 뒤에서 아이 셋이 소금 자루 하나를 셋이 나눠 끌고 갔다. 삼돌은 나루 끝 제자리에 앉아서 서안 쪽을 보고 있었다. 재 위에 말뚝이 하나도 없는 강을 삼돌은 처음 봤다. 말뚝이 없으니 강이 더 넓어 보였고, 더 넓은데 짐은 더 빨리 왔다.

기순이 모닥불 앞에 주저앉았다. 서른 해 치 발수가 머릿속에서 한꺼번에 뒤집혔다. 기순이 외운 숫자들은 사람이 갈 수 있는 거리가 아니라 가기로 한 거리였다. 가기로 한 데까지 가고 돌아섰으니 그 수가 나왔다.

“말뚝은 갈 수 있는 데가 아니라 가기로 한 데였소.”

그날 짐이 넷 나갔다. 불목에 건넨 겨울 짐이 열아홉이 되었다. 해 질 녘 도가 나루에 사령 둘이 와서 서안 나루 쪽을 오래 봤다. 스무날까지 이틀이 남아 있었다.

그 밤 한석은 나루 끝에서 연우를 찾았다. 연우는 손목에 감은 끈을 풀었다 감았다 하고 있었다. 막동의 매듭을 푼 끈이었다.

“열세 해 전에 댁도 그걸 묶었소?”

“나도 묶었소. 자루가 다 똑같아서.”

연우가 끈을 손가락에 감았다.

“열 살 때 아비가 서른 냥을 지고 죽었소. 곽 도가가 나를 불목에 보냈소. 재백 자루를 지고 오는 일이었소. 받는 게 없으니 멀리 갔소. 곽이 나를 보고 웃었소. 제일 멀리 가는 놈이라고. 그 웃음이 무서워서 도망쳤소.”

“그 문서가 아직 살아 있소.”

“아직 살아 있소. 그래서 빈손으로도 멀리 갔던 것 같소. 나는 곽의 것이었으니까. 재가 나를 곽의 짐으로 봤던 거요.”

한석이 연우를 오래 봤다. 요새 연우가 빠지기 시작한 까닭을 한석은 그제야 짐작했다. 연우가 이제 무언가를 제 것으로 갖기 시작했다. 삼돌의 말, 막동의 끈, 헛간의 자리. 한석은 그것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셈하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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