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5,288자) · 덕보 · 동짓달 열나흘
건지지 마라
재의 강을 건너 · 한도윤
만 19세 이상 이용가
동짓달 열나흘은 아침부터 남풍이 불었다.
재의 강에서 남풍은 반갑지 않은 바람이었다. 불뫼 쪽에서 내려오는 북풍은 겉을 굳히지만, 남쪽 들판을 넘어오는 바람은 굳은 겉을 한나절 사이에 무르게 만들었다. 그런 날 재 가운데에 서면 발밑에서 김이 한 줄이 아니라 여러 줄로 올라오고, 김마다 유황 냄새가 짙게 배어 코끝이 따가웠다. 서른 해 동안 서안 도강꾼은 남풍 부는 날 재에 들지 않았다. 그날 아침에도 한석은 짐을 풀지 않고 모닥불만 지폈다.
억쇠는 그런 날을 제일 좋아했다. 재에 안 들어가도 밥은 나왔다. 억쇠가 모닥불에 감자를 묻으며 오늘은 강도 쉬는 날이라고 하자, 모돌이 강은 쉬는데 억쇠 입은 안 쉰다고 받았다. 억쇠가 감자 하나를 모돌 몫에서 빼겠다고 하자 기순이 감자를 세어 보고, 원래 열 개인데 억쇠가 이미 두 개를 먹었으니 모돌 몫을 빼면 억쇠가 셋을 먹은 셈이 된다고 했다. 억쇠는 감자를 세는 사람이 제일 무섭다고 투덜대며 감자를 도로 묻었다.
한석은 그 말을 들으며 웃지 않고 동안 쪽을 봤다. 강 한가운데 된장 두 독이 아직 거기 있었고, 벌써 사흘째였다. 남풍에 겉이 무르면 독이 기울 수도 있었다. 기울면 된장이 쏟아지고, 된장 먹은 재는 물 먹은 재처럼 안 굳을지도 몰랐다. 한석은 모닥불 연기가 북쪽으로 눕는 것을 보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반 마장 아래 도가 나루에는 붉은 깃발이 남쪽으로 눕지 않고 북쪽으로 누워 있었다.
*
덕보는 도가 나루에 나와서 바람부터 봤다. 깃발이 누운 쪽을 보고, 재 위에 오르는 김을 보고, 두칠에게 갔다.
“오늘은 안 들어가오.”
“누가 안 들어간다고 그러오?”
“남풍이 그러오. 서른 해 동안 지킨 법이오.”
두칠이 대답하기 전에 나루 뒤쪽에서 말이 섰고, 곽진수가 내렸다. 붉은 털 토시 위에 누비 두루마기를 걸쳤고, 손바닥에는 어김없이 엽전 한 닢이 굴러다녔다. 곽은 재 쪽을 한 번 보고, 덕보를 보고, 웃었다.
“서른 해 법은 스무날에 끝나오. 오늘 모레면 감영에서 재백 사러 사람이 오오. 창고에 자루가 모자라오.”
“한나절이면 재가 무르오. 가운데는 벌써 김이 여러 줄이오.”
“그래서 빚꾼을 쓰오. 받는 게 없으니 멀리 가지.”
곽이 엽전을 쥐었다.
“여섯째, 댁은 백마흔둘까지만 가면 되오. 그 너머는 댁 걱정이 아니오.”
덕보가 한 발 다가섰다. 두칠이 그 가슴에 막대를 댔다. 막대 끝이 덕보 저고리에 닿아 옷고름이 눌렸다. 덕보는 막대를 내려다봤고, 그 너머로 빚꾼 줄 끝에 선 막동을 봤다. 막동은 빈 자루를 어깨에 걸치고, 자루 끈의 매듭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덕보는 막대를 밀어내지 않았다. 엽전 한 닢이 떠올랐다. 안사람 손바닥 위의 한 닢이었다. 덕보는 쌀자루를 졌다.
*
한낮이 되기 전에 쌀 넉 짐이 불목으로 나갔고, 막동이 재백 자루를 지고 돌아오기 시작했다.
재백은 잿물을 걸러 말린 흰 가루였다. 자루 하나에 쉰 근쯤이었고, 흰 가루가 자루 올 사이로 새어 나와 막동의 등과 목덜미를 하얗게 물들였다. 막동은 불목 나루에서 받은 자루를 지고 재에 들어섰다. 곽의 창고로 가는 짐이었다. 받을 사람이 기다리는 짐이 아니었다. 백 발까지 오는 동안 두 번 빠졌다. 두 번 다 제 힘으로 뺐다.
덕보는 백마흔둘 자리에 서서 막동이 오기를 기다렸다. 거기서 자루를 받아 나루까지 가져가는 것이 덕보 몫이었다. 막동과 덕보 사이는 백 발이 넘었고, 그 사이에 아무도 없었다. 두칠이 짐꾼을 아껴 쓰느라 가운데 자리를 비워 두었다.
막동이 이백 발 자리를 지나 백구십, 백여든으로 다가왔다.
백일흔쯤에서 막동이 멈췄다. 발밑에서 김이 한꺼번에 올라왔다. 막동이 한 발을 뺐고, 뺀 발로 디딘 자리가 또 들어가더니 무릎까지 빠졌다. 막동이 자루를 고쳐 메려고 몸을 틀다가 허리까지 들어갔다.
막동이 소리를 질렀다.
재 위에서는 아무도 소리를 지르지 않는다. 재 위의 소리는 멀리 간다. 막동의 소리는 서안 나루까지, 불목 언덕까지, 반 마장 위 도강꾼 헛간까지 갔다. 누구 이름도 아니었고 말도 아니었다.
덕보가 쌀자루를 내려놓고 뛰었다.
열 발을 가기 전에 뒤에서 멱살이 잡혔다. 두칠은 도가 나루에서부터 덕보를 따라 들어와 있었는데, 짐을 진 채였다.
“건지면 그 빚 네가 진다.”
두칠이 덕보 귀에 대고 낮게 말했다.
“저놈 빚이 스물두 냥이다. 빠진 놈은 안 건지는 게 도가 법이다. 건지러 들어간 놈이 그 빚을 이어 진다. 네 새끼 셋을 걸 테냐?”
덕보가 몸을 틀었다. 두칠의 막대가 덕보 옆구리를 쳤다. 덕보가 재 위에 무릎을 꿇자, 빈손인 무릎이 그대로 재에 들어갔다.
도가 나루에서 곽진수가 말했다. 소리가 크지 않았는데도 재 위에서는 잘 들렸다.
“자루부터 먼저 건지게.”
*
연우는 헛간 뒤에서 장작을 패다가 그 소리를 들었다.
도끼를 놓고 나루로 뛰어나가 보니 모닥불 앞의 아홉이 다 일어서 있었다. 반 마장 아래 재 위에 점이 셋 있었다. 하나는 허리 위만 남은 사람이었고, 하나는 무릎을 꿇은 사람이었고, 하나는 그 뒤에 선 사람이었다.
연우가 빈손으로 재에 뛰어들었다. 스무 발도 못 가서 발목이 들어갔다. 연우는 발을 뽑고 비스듬히 아래쪽으로 내달렸는데 곧 또 들어갔다.
한석이 나루 끝에서 소리쳤다. 서른 해 만에 처음으로 재를 향해 지른 소리였다.
“짐을 지고 가!”
한석이 모닥불 옆에 쌓여 있던 장작 한 짐을 연우에게 던졌다. 불목에 보낼 땔감이었다. 연우가 그것을 받아 등에 걸자 발밑이 단단해졌다. 한석과 기순과 억쇠가 무명 필과 소금 자루를 하나씩 들쳐 메고 뒤따라 들어왔다. 판개와 모돌이 된장 독을 가지러 가운데로 갔다.
연우가 막동에게 닿았을 때 막동은 목까지 들어가 있었다. 재백 자루가 그 옆에 떠 있었다. 자루 끈의 매듭이 재 위에 보였다. 연우가 막동의 두 팔을 잡았다. 한석이 오른쪽 세 발 자리에 서고, 기순이 왼쪽에 섰다. 억쇠가 뒤에 섰다. 넷이 둘레에 서자 막동의 어깨 둘레가 굳었다.
넷이 막동을 끌어냈다.
강 가운데서는 판개와 모돌이 된장 독 둘을 하나씩 안고 서 있었다. 독을 가지러 들어갔다가 막동 쪽을 보느라 둘 다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모돌이 먼저 독을 고쳐 안고 불목 쪽으로 걸음을 뗐다. 해야 할 일이 그것밖에 없다는 걸음이었다.
막동은 가벼웠고, 허리 아래가 재에 익어 있었다. 연우가 그 얼굴을 제 가슴에 댔는데 숨이 없었다. 연우는 막동을 안고 한참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 자리가 연우를 받쳐 주었다. 막동이 연우 품에서 짐이었다.
*
도가 나루로 막동을 안고 온 것은 연우였다.
두칠이 재백 자루를 끌고 먼저 와 있었다. 자루는 재에 젖어 잿빛이었고, 곽진수가 그 자루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곽은 자루 입을 풀어 안의 흰 가루를 손가락으로 찍어 보고, 혀끝에 댔다가 뱉었다.
“절반은 못 쓰겠구먼. 그래도 자루는 건졌소.”
연우가 막동을 널판 위에 눕혔다. 곽이 그제야 아이를 봤다.
“이건 실족이오. 남풍 부는 날 제 발로 헛디뎠소.”
“남풍 부는 날 내보낸 건 도가요.”
“내보낸 게 아니라 제가 간 거요. 빚꾼이 짐을 안 지면 빚이 줄지 않소. 제 빚 제가 갚으러 간 거요.”
곽이 엽전을 굴렸다.
“빚 문서에 적힌 대로 하오. 빠지면 빚은 식구에게 가오. 스물두 냥은 저 아이 어미가 갚을 거요.”
연우가 곽 앞에 섰다. 곽보다 머리 하나가 작았다. 연우 저고리에 막동의 몸에서 묻은 재가 허옇게 번져 있었다.
“이 아이 이름을 아시오?”
곽이 두칠을 봤다. 두칠이 대답하지 못했다.
“이 아이는 막동이오. 자루 끈에 이름 대신 매듭을 묶어 두었소. 자루가 다 똑같아서.”
연우가 재백 자루 끈에서 매듭을 풀었다. 매듭은 공들여 지은 것이라 쉽게 풀리지 않았다. 연우는 끝까지 풀었다. 풀린 끈을 제 손목에 감았다.
곽이 웃었는데, 이번에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열세 해 전에 그 끈을 묶던 아이가 하나 더 있었지.”
해가 기울 무렵 잿골 길에서 여자 하나가 뛰어왔다. 치마 앞자락을 한 손에 모아 쥐고, 짚신 한 짝이 벗겨진 줄도 모르고 왔다. 막동의 어미라고 했다. 곽 도가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는 여자라고 두칠이 누군가에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여자는 널판 위의 아이를 보고 멈춰 섰지만 울지 않았다. 다가가서 아이 옆에 앉아 아이의 발부터 봤다. 짚신이 한 짝만 남아 있었다. 여자는 그 짚신을 벗겨 제 품에 넣었다. 그러고 나서 아이 얼굴의 재를 소매로 닦았다. 한 번 닦고, 소매를 뒤집어 깨끗한 쪽으로 다시 닦았다.
“이 아이는 엿을 좋아했소.”
여자가 누구에게랄 것 없이 말했다.
“설에 한 가락씩 사 줬소. 그걸 한 달을 두고 핥아 먹었소. 아비가 빚을 지고 죽어서 열둘에 도가에 들어갔소. 짐을 지면 빚이 준다고 해서 날마다 졌소. 스물두 냥이 남았다고 했소. 나는 셈을 모르오.”
곽진수가 말에 오르며 두칠에게 일렀다.
“어미한테 문서를 보여 주게. 갚는 건 이달 그믐부터요.”
두칠이 품에서 종이를 꺼냈다가, 여자가 고개도 들지 않는 것을 보고 도로 넣었다. 두칠의 손이 떨렸다. 연우는 그것을 봤다. 두칠이 떠나는 곽의 말 뒤를 따라가다가 한 번 돌아봤고, 널판 위의 아이가 아니라 제 손바닥을 봤다.
*
그날 밤 덕보가 헛간에 왔다. 들어오지 않고 문턱에 앉았다. 그릇 둘 옆이었다. 옆구리를 한 손으로 누르고 있었다.
“나는 다 봤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두칠이 나를 잡았소. 건지면 빚을 진다고 했소. 곽이 자루부터 건지라 했소. 나는 빈손으로 무릎을 꿇었소.”
덕보의 목소리가 거기서 끊겼다. 덕보는 문턱에 앉은 채로 한참 제 무릎을 내려다봤다. 바지 무릎에 재에 그을린 자국이 두 개 있었다.
한석이 덕보 옆에 가서 앉았다.
“현아에 가서 그 말을 하겠소?”
“가서 하겠소.”
“그러면 도가 삯도 끝이오. 빚 열두 냥도 그대로요.”
“그것도 알아.”
덕보가 품에서 엽전 네 닢을 꺼냈다. 도가에서 닷새 동안 받은 삯이었다. 두칠이 반을 가져가고 남은 것을 안사람에게 주지 않고 모아 둔 모양이었다. 덕보는 그 네 닢을 문턱의 빈 그릇에 떨어뜨렸다. 놋그릇 바닥에 엽전이 부딪치는 소리가 네 번 났다.
“이건 집에 못 가져가겠소. 가져가면 애들 먹는 밥이 무거워질 것 같소.”
한석은 그 그릇을 치우지 않았다.
기순이 모닥불 앞에서 입을 열었다. 목이 잠겨 있었다.
“그 아이 이름이 뭐였소?”
연우가 손목의 끈을 쥐고 대답했다.
“막동이었소.”
기순은 그 이름을 입속으로 두 번 되뇌었다. 서른 해 치 발수와 서안 서른여덟 집 이름 사이에, 한 번도 재를 끝까지 건너 본 적 없는 아이 이름 하나가 들어갔다. 기순은 그 이름을 다시는 입 밖에 내지 않았지만 잊지도 않았다.
연우는 손목에 감은 끈을 풀지 않고 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