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5,318자) · 덕보 · 동짓달 초아흐레

백예순

재의 강을 건너 · 한도윤

만 19세 이상 이용가

덕보가 헛간 한가운데 서서 말을 꺼낸 것은 동짓달 초아흐레 아침, 짐을 나누기 직전이었다.

“나는 도가에 들겠소.”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두칠이 나루에서 덕보 눈을 골라 맞춘 날부터 다들 알고 있었다. 알고 있던 것을 귀로 듣는 것은 또 달랐다. 억쇠가 짐 끈을 매다 말고 손을 멈췄고, 판개가 눈을 감았다.

한석이 짐 끈을 내려놓고 물었다.

“언제부터 가겠소?”

“오늘부터 가오. 두칠이 짐 하나에 두 푼을 준다 하오. 빚에서 반을 까고 반을 준다 하오.”

“도가 짐은 곽의 창고로 가오. 받을 사람이 기다리는 짐이 아니오. 삯까지 받으면 발수가 주오.”

“그것도 알아.”

덕보가 헛간 문턱을 봤다. 그릇 둘이 있었다.

“첫째, 삼십 년 동안 우리가 왜 한 푼도 안 받았소?”

“삯을 받으면 무거워지니까.”

“그걸 알고 했소?”

“알고 했소.”

“그럼 왜 했소?”

한석이 대답하는 데 오래 걸렸다.

“그래도 밥은 나오오.”

“딱 밥만 나오오.”

덕보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커졌다.

“나는 식구가 다섯이오. 큰애가 열둘이오. 헛간 밥을 싸 가서 다섯이 나눠 먹소. 스무날에 도가가 강을 쥐면 그 밥도 안 나오오. 그때 가서 도가에 들면 두 푼이 한 푼이 되오. 지금 가야 두 푼이오.”

기순이 참다못해 끼어들었다.

“여섯째, 셈이 틀렸소. 지금 가면 두 푼이지만 한 달 뒤에 발수가 줄어서 짐을 못 옮기면 그 두 푼도 안 주오.”

“그럼 넷째가 우리 애들을 먹이겠소?”

기순이 입을 다물었다. 소꿉동무로 서른 해를 싸워 온 사이였고, 기순이 말로 진 것을 헛간 사람들은 처음 봤다.

한석이 한참 만에 말했다.

“밥만 나와서는 안 되는 것도 아오. 가 보시오.”

덕보가 헛간을 나갔다. 짚신 끄는 소리가 나루 길로 멀어졌다.

*

그날 밤 연우가 덕보 집에 갔다. 서안 마을 끝, 강 쪽으로 기운 초가였다. 덕보는 마루 끝에 앉아 새끼를 꼬고 있었고, 방문 안에서 아이들 숨소리가 셋, 겹쳐서 났다. 방문 창호지에 등잔 불빛이 누렇게 번져 있었고 그 빛 속으로 아이 하나가 잠결에 뒤척이는 그림자가 지나갔다.

연우가 옆에 앉았다. 덕보는 새끼 꼬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식구가 다섯이라 하셨소.”

“아이 셋에 안사람. 큰애가 열둘, 막내가 넷이오.”

“몇 발 가시오?”

“지금은 백예순이오. 처음에는 백일흔이었소.”

“언제부터 그렇게 줄었소?”

“큰애 낳고 백예순다섯, 둘째 낳고 백예순둘, 막내 낳고 백예순.”

연우가 그 셈을 들었다.

“아이가 늘면 발수가 주오?”

“집에 들일 것이 느니까. 제 것이 늘면 재가 아오.”

덕보가 새끼를 한 뼘 더 꼬았다. 손바닥 사이에서 짚이 사각거렸다.

“그래도 나는 아이를 낳았소.”

연우는 그 말에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덕보가 먼저 물었다.

“댁은 몇 발이오?”

“삼백열둘이오. 요새는 조금 빠지오.”

“끝까지 다 가는구먼.”

덕보가 새끼를 내려놓고 연우를 봤다. 등잔 불빛이 덕보 얼굴 반쪽에 걸렸다.

“댁은 아무도 없소?”

연우가 대답하지 않았다. 덕보도 다시 묻지 않았다. 한참 있다가 덕보가 방문 쪽을 보며 말했다.

“나는 백예순이 좋소.”

“방금 뭐라 하셨소?”

“삼백열둘이 부럽지 않소.”

덕보가 웃는데, 이가 하나 빠진 자리가 보였다.

“가진 게 없어서 멀리 가는 거면, 나는 가까이 가도 되오. 가진 게 저 방에 셋이나 누워 있는데.”

*

이튿날 아침 덕보는 헛간에 나와 마지막으로 짐 끈을 정리해 두었다. 끈을 사리고, 짚신 두 켤레를 벽에 걸고, 제가 쓰던 삿갓을 억쇠에게 주었다. 억쇠는 삿갓을 받아 머리에 써 보고, 작다고 투덜대면서 벗지 않았다.

아침밥을 다 먹고 나서 덕보가 문턱의 그릇 둘을 봤다.

덕보가 한석을 불렀다.

“첫째, 저 그릇은 언제까지 놓소?”

숟가락 소리가 멎었다. 한석이 대답했다.

“그건 나도 모르오.”

“열두 해요. 열두 해 동안 한 번도 안 비었소. 나는 오늘까지 여기 사람이니까 한 번만 묻겠소. 누구 그릇이오?”

한석이 한참 있다가 대답했다.

“모른다고 했소.”

덕보가 그 대답을 받고 더 묻지 않았다. 일어나서 나가다가, 문턱에서 연우 옆을 지나면서 낮게 말했다.

“저 사람은 아오. 모른다고 하는 거요. 열두 해 전 겨울에 이 마을에 초상이 하나 났소. 여기서는 묻지 마시오. 여기는 강이 다 듣소.”

덕보는 나루에 내려가 강을 봤다. 백예순 발 자리에 제 말뚝이 서 있었다.

“첫째, 말뚝은 뽑지 마시오.”

“왜 안 뽑소?”

“거기까지는 내가 갔소.”

덕보가 잿골 길로 사라졌다. 헛간 사람들 가운데 붙잡는 사람이 없었다. 서른 해 동안 도강꾼이 나갈 때 붙잡은 적이 없었다. 붙잡으면 그 사람 발이 더 무거워진다.

*

도가 짐꾼으로 든 첫날, 덕보는 서안 나루에서 반 마장 아래쪽, 곽진수가 새로 낸 도가 나루에 섰다. 나루라고 해 봐야 재 가장자리에 널판 몇 장을 깔고 장대에 도가 깃발을 꽂은 자리였다. 깃발은 붉은 무명이었고, 바람이 불 때마다 재 먼지를 털어 냈다.

짐은 쌀이었다. 곽진수가 불목에 파는 쌀이었다. 쌀 한 말에 재백 두 되를 받는다고 했다. 서안 장터에서는 쌀 한 말에 재백 반 되였다. 덕보는 그 셈을 기순만큼 빨리 하지 못했지만, 네 곱이라는 것은 알았다.

도가 짐꾼은 말뚝이 없었다. 두칠이 막대를 꽂아 둔 자리까지 가서 내려놓으면 다음 사람이 받았다. 앞쪽 짧은 자리는 삯꾼이, 뒤쪽 긴 자리는 빚꾼이 맡았다. 덕보는 백예순 자리를 받았다. 그런데 백마흔에서 무릎이 들어갔다. 삯을 받는 짐이었다. 덕보는 이를 악물고 스무 발을 더 가려다가, 발목 위로 뜨거운 기운이 올라오는 것을 느끼고 멈췄다. 백마흔둘에서 쌀을 내려놓았다. 뒤에서 빚꾼 하나가 받아 갔다.

막동이 맨 끝자리였다. 막동은 빈손으로 불목까지 가서 재백 자루를 지고 돌아오는 일을 했다. 재백은 곽의 창고로 가는 짐이라 받침이 얕았고, 막동은 백 발마다 한 번씩 빠졌다. 빠질 때마다 두칠이 나루에서 막대로 재를 두 번 두드렸다. 일어나라는 신호였고, 막동은 그때마다 일어났다.

해 질 녘에 덕보는 엽전 두 닢을 받았다. 두칠이 한 닢을 도로 가져갔다. 빚에서 깐다고 했다. 덕보는 남은 한 닢을 쥐고 도가 나루를 떠나다가 멈췄다. 두칠이 빚꾼 둘에게 서안 도강꾼 말뚝 쪽을 가리키며 무어라 하고 있었다. 내일부터는 말뚝 자리를 쓰자는 말이었다. 백예순 발 자리, 덕보의 말뚝이었다.

덕보가 돌아가 두칠 앞에 섰다.

“그 말뚝은 쓰지 마시오.”

“댁 말뚝이오? 댁은 이제 백마흔둘이오.”

“나도 알아. 그래도 거기까지는 내가 갔소.”

두칠이 웃고 나서 덕보 어깨를 두 번 두드렸다. 두드리는 손이 무거웠다.

“스무날이 지나면 그 말뚝도 도가 것이오. 그때 다시 말하시오.”

덕보는 집으로 가서 안사람 손에 엽전 한 닢을 쥐여 줬다. 안사람은 그것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물었다. 하루 두 푼이라고 하지 않았냐고. 덕보는 대답하지 않고 방에 들어가 막내 옆에 누웠다. 막내의 발이 덕보 무릎에 닿았는데, 발이 차가웠다.

*

덕보가 나간 이튿날 짐이 셋 밀렸다. 한석이 여덟을 세우고 연우를 끝에 세웠다. 여섯째 자리가 비었으니 다섯째가 갈 수 있는 데까지 가고, 일곱째 억쇠가 이백에서 빈손으로 마중 나와 받기로 했다.

된장 두 독이었다. 다섯째가 백스물여섯을 지나 백서른여섯에서 무릎까지 빠졌다. 거기 독을 내려놓고 돌아섰다. 억쇠가 이백에서 빈손으로 나왔고, 백일흔둘에서 발목까지 빠져 멈췄다. 둘 사이가 서른여섯 발이었다. 재 위에 된장 두 독이 놓여 있고, 두 사람이 그 양쪽에 서서 서로 쳐다봤다.

억쇠가 이쪽으로 손짓했다. 제가 더는 못 온다는 손짓이었다. 억쇠는 겁이 많은 사람이라 발목이 들어가면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서른 살 장정이 두 팔을 새처럼 벌리고 한 발로 서 있는 모양이 나루에서 보기에 우스웠지만 아무도 웃지 않았다. 억쇠는 결국 된장 독 쪽으로 한 발도 못 가고 뒷걸음으로 이백 발까지 돌아갔다. 돌아가면서도 독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된장을 두고 가는 것이 제일 서운한 얼굴이었다.

해가 넘어가자 재 위에 놓인 독 두 개가 점점 검은 점이 되었다. 서안 나루에서 보면 강 한가운데 누가 쪼그려 앉아 있는 것 같았다. 기순이 그 점을 보고 중얼거렸다.

“된장이 우리보다 멀리 갔소.”

연우가 나루에서 한 발 나섰다.

“그 사이는 내가 가겠소.”

한석이 팔을 뻗어 막았다.

“댁은 끝에 있어야 하오. 댁이 가운데 들어가면 끝이 비오.”

“끝이 비면 어떻게 되오?”

한석이 대답하지 못했다. 서른 해 동안 끝이 빈 적이 없었다. 그날 된장 두 독은 백서른여섯 발 자리 재 위에서 밤을 났다.

*

그날 밤 연우는 서안 마을로 들어갔다. 봉출의 집은 마을에서 제일 오래된 집이었다. 흙벽 아랫단에 이끼가 끼어 있었고 처마가 한쪽으로 내려앉았다. 봉출은 마당에서 등잔도 없이 새끼를 꼬고 있었다. 늙은이들은 밤에 손이 논다고 새끼를 꼬았다.

“열두 해 전 겨울에 이 마을에 초상이 났다고 들었소.”

봉출이 새끼를 놓았다.

“누가 그럽디까?”

“지나가다 들었소.”

봉출이 한참 있다가 대답했다.

“났소. 도강꾼 첫째가 죽었소. 지금 첫째 말고 그 앞의 첫째, 지금 첫째 아비요.”

“어쩌다 죽었소?”

봉출이 강 쪽을 봤다. 마당에서는 강이 안 보였다.

“재에 빠졌는데, 건져 내서 그날은 살아서 나왔소. 덴 자리가 안 나았소. 재는 겉은 차고 속은 뜨겁소. 허리 아래가 다 익었소.”

“얼마나 앓다 가셨소?”

“스무날쯤 앓았소. 아들이 밥을 떠다 날랐는데 못 먹었소. 하루도 못 먹었소.”

봉출이 다시 새끼를 잡았다. 손이 떨려서 짚이 자꾸 빠졌다.

“아들이 그 스무날 동안 아비를 업고 불목에 다녀왔다는 말이 있었소. 아무도 안 믿었지. 그때 그 아들은 둘째라 서른아홉 발밖에 못 갔거든.”

“초상 뒤에는 어찌 됐소?”

“초상 치른 이튿날 그 아들이 첫째 자리 말뚝을 뽑았소. 아비 말뚝이지. 그걸 헛간 서까래에 걸고, 제 말뚝을 새로 박았소. 두 발 앞, 두 발 덜 가는 자리에.”

봉출이 새끼를 무릎에 내려놓았다.

“그날부터 헛간 문턱에 그릇이 둘이오. 누구 것이냐고 물으면 모른다 하오. 마을 사람들도 이제는 안 묻소. 모른다는 사람한테 자꾸 물으면 그 사람이 정말 모르게 되오.”

연우는 나루로 돌아왔다. 헛간 문턱에 그릇이 둘 놓여 있었다. 연우는 그 앞에 쭈그려 앉았다. 하나는 비어 있었고 하나는 밥이 그대로였다. 그대로인 쪽에 손등을 대 보니 식어 있었다. 열두 해 동안 날마다 새로 담기고 날마다 식은 밥이었다. 연우는 그 그릇을 들어 제 무릎 위에 올려놓고 한참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있다가, 제자리에 조심스럽게 도로 놓았다. 그릇 밑바닥이 문턱에 닿는 자리가 둥글게 닳아 있었다. 헛간 안에서 한석이 돌아누우며 손바닥을 가슴에 대고 문지르는 소리가 났다.

5화는 어땠나요?

댓글 2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 달밤에책2026.05.08· 5화

    대사 하나하나가 인물을 만들어 주네요.

    • 종이배2026.05.09

      저도 그 장면에서 멈췄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