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5,045자) · 테이크 파이브
안 치기로 한 날
박수 유도 등 · 오세림
경로당 벽에 붙어 있던 연습 일정표를 나는 찍어 두었다. 김 주임의 손글씨. 구월 십구일 토요일, 오후 네 시 사십사 분, 태식문구 앞 교차로, 웃음, 서포터즈 열둘, 촬영 본편.
본편. 연습이 아니라 진짜 찍는 날. 실사단에 보낼 홍보 영상의 한 장면.
“그날 거기 서자.”
내가 말했다. 문구점 계산대 앞. 아저씨, 현우, 주희 언니, 보라 할매. 보라 할매는 봉투를 안 받은 할머니 둘을 데리고 왔다. 경숙 할머니와 옥자 할머니. 둘 다 보라 할매 옆에서 귤을 까고 있었다. 문구점에 귤 냄새가 가득했다.
“서서 뭐 해.” 현우가 물었다.
“안 웃어.”
“그게 계획이야?”
“응.”
“그게 계획이면 나도 할 수 있겠다.”
아저씨가 계산대를 두 번 두드렸다.
“열두 명이 웃는데 여섯 명이 안 웃으면 영상을 못 써. 본편이니까. 저쪽은 다시 찍으려고 할 거다. 사인을 또 켜고.”
“몇 번이나요?”
“기체 배터리가 다 될 때까지. 삼십 분쯤.”
주희 언니가 액션캠을 흔들었다.
“그럼 나는 삼십 분 동안 저쪽이 다시 찍는 걸 찍으면 되네. 제목은 가온 사람들은 이렇게 웃지 않습니다.”
토요일 오후 네 시 이십 분. 태식문구 앞 교차로에 사람이 모이기 시작했다. 서포터즈 할머니들이 한 명씩, 두 명씩. 조끼는 안 입었다. 본편에는 조끼가 나오면 안 된다. 동네 사람처럼 장바구니를 들고, 지팡이를 짚고. 그 가운데 현우 할머니. 검은 털신. 현우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가, 못 본 척했다.
교차로 네 귀퉁이에 우리가 섰다. 아저씨는 문구점 앞. 현우는 할머니가 선 모퉁이 건너편. 보라 할매와 두 할머니는 세탁소 앞. 주희 언니는 동생네 치킨집 이 층 창가. 동생 사장님이 창문을 활짝 열어 줬다. 「형네 옥상 드론 찍는 거지? 잘 찍어.」 나는 신호등 기둥 옆.
그리고 은행 앞에 엄마가 있었다.
무전기를 들고. 시청 점퍼를 입고. 칠 년 전 그 자리에. 엄마가 나를 봤다. 나도 엄마를 봤다. 교차로를 사이에 두고. 엄마의 무전기에서 지직거리는 소리가 났다. 방성철의 목소리였다. 교차로 반대편에 세워진 흰 승합차 안에서.
“강 주무관, 위치 확인. 네 시 사십사 분 정각. 기체 삼 번 이륙.”
형네 치킨집 옥상에서 드론이 떠올랐다. 날개 소리가 치킨 튀기는 소리에 묻혔다. 드론 스무 대가 남서쪽 하늘로 모였다. 점들이 격자를 만들었다.
네 시 사십사 분. 하늘에 글씨가 켜졌다.
웃음.
서포터즈 열두 명이 동시에 웃었다. 하, 하, 하. 세 번. 입을 크게 벌리고. 웃음소리가 열두 개인데 하나처럼 들렸다. 박자가 맞으면 사람 소리는 사람 소리 같지 않다.
우리 여섯은 안 웃었다. 아저씨는 팔짱을 꼈다. 보라 할매는 귤을 깠다. 현우는 할머니를 봤다. 나는 하늘을 봤다. 칠 년 만에 처음으로 고개를 들고.
삼 초. 글씨가 꺼졌다. 웃음이 멈췄다.
엄마의 무전기가 지직거렸다.
“컷. 교차로 네 귀퉁이에 안 웃는 사람들 뭐야. 강 주무관, 저 사람들 좀 빼 봐요. 문구점 그 양반 또 나왔네.”
엄마는 무전기를 입에 대지 않았다. 교차로를 보고 서 있었다.
김 주임이 승합차에서 뛰어나왔다. 공무원 점퍼를 벗고 동네 사람처럼 등산복을 입고 있었다. 나한테 먼저 왔다.
“학생, 저쪽으로 좀 가 줘요. 촬영 중이에요.”
“인도예요. 신호 기다려요.”
“다음 신호에 건너요.”
“건너면 돌아올 거예요.”
김 주임은 현우한테 갔다. 현우는 키가 백팔십이었다. 김 주임은 현우를 올려다보다가 그냥 갔다. 보라 할매한테 갔다.
“어르신, 명단에서 빠지신 분이 여기 왜 계세요.”
“장 보러 왔어. 귤 사러.”
“귤은 벌써 드시고 계시잖아요.”
“더 사러.”
김 주임이 승합차로 뛰어갔다. 무전기에서 방성철 목소리.
“다시 간다. 테이크 투. 기체 재정렬.”
드론 점들이 흩어졌다가 다시 모였다. 웃음. 서포터즈 열두 명이 다시 웃었다. 하, 하, 하. 우리 여섯은 안 웃었다. 컷.
테이크 스리. 웃음. 하, 하, 하. 컷.
테이크 포. 이번에는 서포터즈 할머니들 박자가 조금 어긋났다. 다리가 아픈 할머니가 지팡이에 기대며 한 박자 늦게 웃었다. 하, 하, 하. 옆 할머니가 그걸 보고 풋 하고 웃었다. 박자 밖에서.
테이크 파이브. 웃음. 서포터즈 열두 명이 웃으려는 순간, 현우 할머니가 먼저 터졌다. 하하하가 아니었다. 깔깔깔. 무릎을 치면서. 옆 할머니 틀니가 빠질 뻔한 걸 본 것이다. 틀니 할머니가 입을 막고 웃었다. 그걸 보고 다른 할머니들이 웃었다. 박자가 다 어긋났다. 열두 개의 웃음이 열두 개로 들렸다. 사람 소리 같았다.
글씨가 꺼져도 웃음이 안 멈췄다.
세탁소 앞 보라 할매가 귤을 떨어뜨리고 웃었다. 경숙 할머니, 옥자 할머니도. 치킨집 이 층 창가에서 동생 사장님이 웃었다. 형네 가게 문이 열리고 형 사장님이 튀김망을 든 채로 나와서 웃었다. 뭐가 웃긴지도 모르고. 아저씨가 팔짱을 풀었다. 입꼬리가 올라갔다. 십오 년 만에 이 교차로에서 웃는 것 같았다.
나도 웃었다. 박자 안 맞게.
무전기가 소리를 질렀다.
“뭐야 저거! 컷! 컷! 저건 못 써! 왜 다 웃어! 사인 꺼졌잖아!”
승합차 문이 벌컥 열렸다. 방성철이 내렸다. 무스 머리가 바람에 흐트러져 있었다. 그는 교차로 한가운데로 걸어 나왔다. 신호가 빨간불이었다. 차 한 대가 경적을 울렸다.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어르신들! 박자요, 박자! 삼 초! 하, 하, 하!”
할머니들이 그를 보고 더 크게 웃었다. 현우 할머니가 손바닥으로 무릎을 치며 말했다. 「아이고 기획관님, 머리가 다 날리셨네.」
방성철은 엄마를 향해 손가락을 흔들었다.
“강 주무관! 테이크 식스 가요! 기체 배터리 얼마 남았어요?”
엄마가 무전기를 입에 댔다. 교차로 너머로 나를 한 번 봤다. 그리고 말했다.
“기획관님. 기체 전부 배터리 경고입니다. 복귀시켜야 합니다.”
드론 점들이 하나씩 형네 옥상으로 내려앉았다. 사실인지 아닌지 나는 모른다. 나중에 동생 사장님이 말해 준 바로는, 드론들 불빛이 초록색이었다고 했다. 배터리 경고면 빨간색이라고. 동생 사장님은 그런 걸 이상하게 잘 안다.
방성철은 교차로 한가운데 서서 하늘을 봤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엄마를 봤다. 한참.
“강 주무관. 월요일에 봅시다.”
그는 승합차로 돌아갔다. 김 주임이 따라갔다. 승합차가 떠났다.
교차로에 웃음이 조금 남아 있었다. 서포터즈 할머니들이 눈물을 닦으며 서로 등을 두드렸다. 현우 할머니가 현우한테 걸어왔다. 검은 털신으로.
“현우야. 할머니가 망쳤다. 오만 원 날아갔다.”
“할머니가 제일 크게 웃었어.”
“그러니까. 오만 원짜리 웃음보다 훨씬 컸지.”
엄마는 은행 앞에 그대로 서 있었다. 무전기를 내리고. 나는 신호를 기다렸다가 건너갔다. 엄마 앞에 섰다. 엄마가 먼저 말했다.
“배터리 경고 아니었어.”
“알아. 동생 사장님이 초록불이래.”
엄마가 웃었다. 박자가 안 맞았다. 칠 년 만에 본 엄마의 진짜 웃음이었다. 그리고 곧 멈췄다. 월요일이 떠오른 얼굴이었다.
저녁에 문구점 계산대 위에 주희 언니 노트북을 펼쳤다. 액션캠 영상 사십일 분. 우리 여섯과 아저씨와 주희 언니, 그리고 동생 사장님이 계산대 앞에 몰려 섰다. 문구점이 그렇게 꽉 찬 건 처음이라고 아저씨가 말했다.
화면 속에서 드론 스무 대가 형네 옥상에서 떠올랐다. 점들이 웃음을 만들었다. 서포터즈들이 하, 하, 하. 컷. 테이크 투, 스리, 포. 주희 언니는 드론이 다시 모일 때마다 줌을 당겨 날개 번호까지 찍어 두었다. 테이크 파이브에서 할머니들이 터졌다. 그리고 교차로 한가운데 방성철. 무스 머리가 날리며 소리쳤다. 박자요, 박자! 삼 초! 사인 꺼졌잖아! 그 목소리가 치킨집 이 층 창문까지 또렷하게 들어가 있었다.
현우가 말했다. 「사인 꺼졌잖아. 저게 다 말해 주네. 사인이 켜져야 웃는 거라고.」
아저씨가 계산대 아래에서 외장 하드를 꺼냈다. 이천십일 년 사월 십이일. 노트북에 꽂았다. 옛날 영상이 떴다. 화질이 거칠었다. 같은 교차로. 문구점은 아직 없고 그 자리에 철물점. 전광판 글씨가 하늘 쪽으로 붉게 번졌다. 웃음. 서포터즈들이 웃었다. 그 사이로 여섯 살쯤 된 여자아이 하나가 엄마 손을 놓고 깔깔거렸다. 박자 없이. 제일 크게.
주희 언니가 화면을 멈췄다. 두 영상을 나란히 띄웠다. 십오 년 전 여섯 살 아이의 웃음과 오늘 현우 할머니의 웃음. 둘 다 박자가 안 맞았다. 둘 다 제일 컸다.
“내 졸업 작품 제목 바꿀래. 가온 사람들은 박자 안 맞게 웃습니다.”
문구점을 나서는데 현우 휴대폰이 울렸다. 할머니였다. 현우가 스피커로 틀었다. 할머니 목소리가 문구점 앞 골목에 쩌렁쩌렁 울렸다.
“현우야! 김 주임이 방금 전화 왔다! 나 명단에서 뺀대! 다음 달 앞줄도 없대!”
“할머니 괜찮아?”
“괜찮냐고? 속이 다 시원하다! 김 주임이 전화로 막 뭐라 하는데 내가 그랬어. 민재야, 너 초등학교 때 우리 밭에서 참외 서리한 거 내가 다 알아! 그랬더니 전화를 끊더라!”
현우가 전화기를 귀에서 떼고 웃었다. 할머니 목소리가 이어졌다.
“근데 현우야. 무릎 주사는 어떡하냐.”
현우의 웃음이 멈췄다. 현우는 전화기를 한참 들고 있다가 말했다.
“할머니, 내가 알바할게. 동생네 치킨집. 사장님이 배달 사람 구한대.”
“너 공부는.”
“공부는 할머니처럼 박자 안 맞게 할게.”
할머니가 전화기 너머에서 깔깔 웃었다. 그 소리가 박자 없이 골목을 채웠다.
그날 밤 우리 집 저녁 식탁에 아빠가 먼저 앉아 있었다. 드물게. 엄마가 들어와 가방을 내려놓자 아빠가 숟가락을 들고 말했다.
“당신 오늘 교차로에 있었다며. 사업소 사람들이 단톡에서 난리야. 할머니들이 떼로 웃는 영상.”
엄마가 대답하지 않고 앉았다. 아빠는 국을 한 숟가락 떠먹고 말했다.
“당신 그만둬도 돼.”
엄마가 숟가락을 멈췄다.
“대출은.”
“내가 야간 당직 더 설게. 배관은 밤에 더 잘 터져.”
아빠는 그 말을 하고 다시 국을 먹었다. 엄마는 한참 아빠를 보다가 웃었다. 오늘 두 번째로. 이번에도 박자가 안 맞았다.
“당신은 무슨 말을 해도 배관이야.”
“배관이 제일 정직해. 새면 샌다.”
나는 밥을 먹다가 사레가 들렸다. 엄마가 내 등을 두드렸다. 두드리는 박자가 엉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