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5,469자)

장롱 속 테이프

외계의 첫 답장 "밥은 먹었니?" · 은해록

10월 17일 오전 열한 시⁠, 대덕구 연립주택 이 층의 현관문은 열쇠를 세 번 돌려야 열렸다⁠. 세 해 동안 아무도 살지 않은 집이었다⁠. 문이 열리자 들기름 냄새와 장롱 나무 냄새가 한꺼번에 밀려 나왔다⁠. 어머니가 쓰러진 날 아침에 개어 둔 이불이 아직 방바닥 한쪽에 접힌 채였다⁠.

화영은 창문을 열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자개장롱이 벽 한 면을 차지했다⁠. 어머니가 시집올 때 해 온 장롱이었다⁠. 서랍 손잡이마다 학 한 마리씩이 날아갔다⁠. 화영은 맨 아래 서랍부터 열었다⁠.

맨 아래 서랍에는 연구원 식당 앞치마가 여덟 장 들어 있었다⁠. 흰 면에 하늘색으로 「⁠대덕 천문대 식당⁠」이라고 박힌 옛날 것부터⁠, 「⁠대전 천문연구원 구내식당⁠」이라고 박힌 최근 것까지⁠. 앞치마 밑에서 누런 봉투 하나가 나왔다⁠. 봉투 안에 사진 한 장과 카세트테이프 하나가 들어 있었다⁠.

사진 속에서 흰 모자를 쓴 젊은 여자 넷이 식당 배식대 앞에 나란히 서서 웃고 있었다⁠. 맨 왼쪽 여자의 볼이 둥글었다⁠. 앞머리를 짧게 잘랐고⁠, 국자를 든 손을 반쯤 들어 올렸다⁠. 화영은 사진을 눈 가까이 가져갔다⁠. 볼과 국자 쥔 손이 어머니였다⁠. 사진 귀퉁이에 양복 입은 남자 하나가 마이크를 들고 반쯤 잘려 있었다⁠.

테이프 겉면에 볼펜 글씨가 있었다⁠. 글씨가 삐뚤빼뚤 신이 나 있었다⁠.

「⁠85⁠. 10⁠. 7 천문대 — 하늘에 띄운 내 목소리 · 봉애⁠」

화영은 테이프를 손바닥에 올려놓은 채 장롱 앞에 한참 앉아 있었다⁠. 니트 소매 끝이 들기름 묻은 방바닥에 닿았다⁠.

현관에서 누가 문을 두드렸다⁠. 옆집 할머니였다⁠. 지팡이를 짚고 한 손에 비닐봉지를 들었다⁠.

“⁠봉애 딸이여⁠? 문 열려 있길래⁠. 집 내놨어⁠?⁠”

“⁠아직이요⁠. 정리만 하러 왔어요⁠.⁠”

“⁠잘했어⁠. 요새 집 보러 오는 사람들이 쌀독부터 열어 봐⁠. 외계인이 쌀 뺏으러 온다고⁠.⁠” 할머니가 비닐봉지를 내밀었다⁠. 묵은쌀 한 되가 들어 있었다⁠. “⁠봉애가 옛날에 나 아플 때 죽 쒀다 줬어⁠. 연구소 식당에서 남은 밥으로⁠. 이거 봉애 갖다줘⁠. 요양원 밥 맛없다며⁠.⁠”

“⁠엄마는 요양원에서 밥 잘 드세요⁠.⁠”

“⁠밥 잘 먹는 사람이 맛없다고 하는 거여⁠.⁠” 할머니는 문간에서 돌아서다 말고 다시 물었다⁠. “⁠근데 텔레비에 나오는 밥 박사가 너여⁠?⁠”

화영은 쌀 한 되를 받아 들고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가 혀를 찼다⁠. 그럴 줄 알았어⁠, 봉애 딸이 밥 얘기 말고 할 얘기가 있겠어⁠.

*

중앙시장 안쪽 「⁠대성전파사⁠」의 주인은 칠십이 넘은 남자였다⁠. 진열장에 라디오와 전축과 카세트 데크가 먼지를 쓰고 줄지어 있었다⁠. 화영이 테이프를 내밀자 주인은 돋보기를 이마에서 내려 테이프를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오십 년 된 거네⁠. 늘어졌을 수도 있어⁠. 들어가서 엉키면 끝이여⁠.⁠”

“⁠한 번만 들으면 돼요⁠.⁠”

“⁠다들 한 번만 듣는다고 하지⁠. 연애편지 녹음한 거 갖고 와서 한 번만⁠, 한 번만 하다가 다 엉켜⁠.⁠” 주인은 데크 하나를 골라 먼지를 불고 테이프 구멍에 연필을 꽂아 천천히 감았다⁠. “⁠이게 연애편지는 아니지⁠?⁠”

“⁠엄마 목소리요⁠.⁠”

주인이 연필을 멈췄다⁠. 이어서 아무 말 없이 다시 감기 시작했다⁠. 아까보다 더 천천히 감았다⁠.

재생 단추가 딸깍 내려갔다⁠. 스피커에서 쉬쉬 하는 테이프 소리가 먼저 났다⁠. 주변이 시끄러웠다⁠. 그릇 부딪는 소리⁠, 수돗물 소리⁠, 누가 웃는 소리⁠. 식당이었다⁠. 남자 목소리가 가까이 들어왔다⁠.

“⁠자⁠, 아주머니⁠. 여기 대고 안녕하세요⁠, 하시면 돼요⁠. 또박또박⁠. 하나⁠, 둘⁠, 셋⁠.⁠”

잠깐 조용했다⁠. 숨 들이마시는 소리가 마이크에 닿았다⁠.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나왔다⁠. 둥글고 높고⁠, 끝이 웃음에 젖어 있었다⁠.

“⁠밥은 먹었니⁠?⁠”

화영의 손이 진열장 유리를 짚었다⁠. 스피커 속에서 남자가 당황했다⁠.

“⁠아니⁠, 아니⁠. 안녕하세요요⁠, 아주머니⁠.⁠”

“⁠연구원님들 맨날 밥 거르고 밤새 일하잖아요⁠. 하늘에 사는 사람들도 그러지 않겠어요⁠? 그 사람들한테도 밥 먹었냐고 물어봐야지⁠.⁠” 젊은 어머니가 숨을 쉬지 않고 말했다⁠. 뒤에서 다른 조리원들이 깔깔 웃었다⁠. “⁠밥은 먹었니⁠? 먹고 해요⁠, 먹고⁠.⁠”

남자가 한숨을 쉬었다⁠. 종이 넘기는 소리가 났다⁠.

“⁠에이⁠, 시간 없다⁠. 오늘 서울로 보내야 돼⁠. 그냥 그거 보냅시다⁠. 목록은 이미 안녕하세요로 넘어갔으니까⁠.⁠”

테이프가 다시 쉬쉬 소리로 돌아갔다⁠. 전파사 주인이 정지 단추를 눌렀다⁠. 진열장 위의 먼지가 창문 빛 속에서 천천히 떠다녔다⁠.

“⁠아줌마 목소리 좋네⁠.⁠” 주인이 돋보기를 다시 이마에 올렸다⁠. “⁠요새 뉴스에 나오는 그 밥 얘기여⁠?⁠”

화영은 고개를 끄덕이지도 젓지도 못했다⁠. 주인은 테이프를 꺼내 봉투에 넣고 봉투를 화영 손에 쥐여 주었다⁠.

“⁠돈은 됐어⁠. 테이프 안 엉켰으니까 그걸로 됐어⁠.⁠”

진열장 구석의 낡은 텔레비전이 소리를 줄인 채 뉴스를 틀고 있었다⁠. 「⁠아세안 각국 “⁠밥 묻는 신호는 우리 말⁠” … 중국 외교부 “⁠한 나라의 단독 해석 경계⁠”⁠」⁠. 화면이 바뀌어 동남아 어느 시장 골목이 나왔다⁠. 상인들이 하늘을 가리키며 웃었다⁠. 자막이 이어졌다⁠. 「⁠방콕 시민 “⁠하늘이 엄마처럼 묻는다⁠”⁠」⁠. 전파사 주인이 텔레비전을 턱으로 가리켰다⁠.

“⁠다들 지 엄마 얘기래⁠. 세상 엄마들이 다 밥 얘기만 하나 봐⁠.⁠”

*

오후 두 시⁠, 요양원 삼 층 휴게실에서 마리셀이 어디선가 낡은 카세트 라디오를 빌려 왔다⁠. 할머니 한 분이 손주에게 받은 거라며 침대 밑에서 꺼내 준 라디오였다⁠. 휴게실 텔레비전은 꺼 두었다⁠. 어머니는 휠체어에 앉아 화영과 라디오를 번갈아 보았다⁠.

“⁠엄마⁠. 이거 엄마 목소리야⁠. 엄마 스물두 살 때⁠.⁠”

화영은 재생 단추를 눌렀다⁠. 식당의 그릇 소리가 휴게실에 퍼졌다⁠. 남자 목소리가 안녕하세요를 시켰다⁠. 숨소리⁠, 그리고 젊은 목소리⁠.

밥은 먹었니⁠?

어머니의 왼손이 휠체어 팔걸이에서 미끄러졌다⁠. 어머니는 라디오를 보지 않았다⁠. 창밖의 은행나무를 보았다⁠. 스피커 속의 어머니가 연구원님들 밥 거르고 일한다고 말할 때⁠, 휠체어 위의 어머니 입술이 함께 움직였다⁠.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입술만 오십 년 전의 말을 한 글자씩 따라갔다⁠. 먹고 해요⁠, 먹고⁠.

테이프가 쉬쉬 소리로 돌아가자 어머니가 고개를 돌려 딸을 보았다⁠. 눈가가 젖어 있었다⁠. 입술이 떨리다가 열렸다⁠.

“⁠밥은 먹었니⁠?⁠”

끝이 올라갔다⁠. 한 마디⁠, 두 마디⁠, 그리고 한 마디 더⁠. 화영이 삼백 개 넘는 녹음 어디에서도 듣지 못한 높이였다⁠. 세 마디의 높이는 걱정도 반가움도 아니었다⁠. 화영은 세 마디 높이에 붙일 이름을 몰랐다⁠. 사전에 없는 높이였다⁠.

마리셀이 휴게실 문간에서 손으로 입을 막고 서 있었다⁠. 화영은 어머니의 손을 잡았다⁠. 손바닥이 따뜻했다⁠.

“⁠먹었어⁠, 엄마⁠. 엄마 덕분에 하늘도 먹었대⁠.⁠”

*

오후 다섯 시⁠, 연구원 정문 밖 주차장에서 민석이 차 운전석에 앉아 테이프를 들었다⁠. 화영이 전파사에서 빌려 온 작은 녹음기에 옮겨 담은 것이었다⁠. 민석은 끝까지 듣고 녹음기를 조수석의 화영에게 돌려주었다⁠. 넥타이를 손가락으로 느슨하게 풀었다⁠.

“⁠해독실에서 1985년 방식으로 돌려 주세요⁠. 첫 답장하고 맞춰 보게요⁠.⁠”

“⁠안 돼요⁠.⁠”

“⁠팀장님⁠.⁠”

“⁠국방부 공문이 와 있어요⁠. 소화영 자문과 해독팀 접촉 금지⁠. 박사님은 지금 연구원 직원도 아니고요⁠.⁠” 민석은 핸들을 두 손으로 쥐었다⁠. “⁠그리고 이게 사실이면 무슨 일이 생기는지 생각해 봤어요⁠? 우리 연구원은 오십 년 동안 목록을 틀리게 적은 거예요⁠. 아니⁠, 그건 괜찮아요⁠. 내가 사과하면 돼요⁠. 문제는 어머님이에요⁠.⁠”

“⁠엄마요⁠?⁠”

“⁠이 테이프가 나가는 순간⁠, 어머님은 세상에서 제일 유명한 사람이 돼요⁠. 외계에 처음 말을 건 사람⁠. 기자들이 요양원 앞에 진을 치고⁠, 첫말씀교회 같은 데서 성녀라고 부르고⁠, 국방부는 어머님 목소리를 분석하겠다고 할 거예요⁠. 어머님은 말을 한 마디밖에 못 하시죠⁠. 아니라고 대답도 못 하세요⁠. 그걸 원해요⁠?⁠”

화영은 녹음기를 무릎 위에서 꽉 쥐었다⁠. 민석의 말은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확인만 해 주세요⁠. 내보내는 건 그다음에 정해요⁠. 엄마 목소리가 맞는지만 알고 싶어요⁠.⁠”

“⁠알고 나면 못 덮어요⁠. 박사님 성격에⁠.⁠”

“⁠팀장님 성격에도요⁠.⁠”

민석이 고개를 돌려 화영을 보았다⁠. 안경 너머 눈이 피곤했다⁠. 민석은 한참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목에 걸린 출입증 줄을 벗었다⁠. 출입증을 차 계기판 위에 올려놓고 문을 열었다⁠.

“⁠나 오늘 차에 출입증 두고 내려요⁠. 깜빡해서요⁠. 열한 시까지 화장실에 있을 거예요⁠. 연구원 화장실이 좀 멀어요⁠. 이십오 광년쯤⁠.⁠”

민석은 차에서 내려 정문으로 걸어갔다⁠. 경비실 창구에 대고 출입증을 차에 두고 왔다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경비원이 손을 흔들어 민석을 들여보냈다⁠. 민석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

밤 열 시⁠, 지하 이 층 해독실에는 미경 혼자 남아 있었다⁠. 화영이 민석의 출입증을 문에 대자 초록 불이 켜졌다⁠. 미경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가 화영을 보고 소리를 지를 뻔한 입을 두 손으로 막았다⁠.

“⁠막내님⁠! 정직이라면서요⁠!⁠”

“⁠정직 맞아요⁠. 국방부만요⁠.⁠”

“⁠그 출입증 팀장님 거잖아요⁠! 사진이 팀장님이에요⁠!⁠”

“⁠팀장님 화장실 가셨대요⁠. 이십오 광년 걸린대요⁠.⁠”

미경이 입을 막은 손을 천천히 내렸다⁠. 잠깐 생각하더니 해독실 문을 안에서 잠갔다⁠. 그러고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의자에 앉아 손가락 마디를 꺾었다⁠.

“⁠선배⁠. 이거 하나만 돌려 주세요⁠. 1985년 방식으로요⁠.⁠”

미경은 녹음기에서 파일을 옮겨 프로그램에 끌어다 놓았다⁠. 테이프의 쉬쉬 소리와 그릇 소리를 걸러 내는 데 십 분을 썼다⁠. 걸러진 목소리에서 「⁠밥은 먹었니⁠?⁠」 한 마디만 떼어 냈다⁠. 미경이 엔터 키를 눌렀다⁠.

큰 화면 아래에 새 줄이 찍혔다⁠. 굵은 점 둘⁠, 틈⁠, 굵은 점 둘⁠, 가는 점 하나⁠. 마지막 점이 앞의 넷보다 높았다⁠.

미경이 화면 위에 첫 답장의 줄을 겹쳤다⁠. 하늘의 줄과 테이프의 줄이 위아래로 붙었다⁠. 미경은 확대 단추를 몇 번이나 눌렀다⁠. 화면 가득 점 다섯 개가 커졌다⁠. 점의 굵기와 틈의 길이가 맞았다⁠. 마지막 점의 높이까지 맞았다⁠. 화영이 처음 해독실에서 반 마디 더 높다고 했던 자리였다⁠. 지금의 어머니보다 반 마디 높은⁠, 스물두 살의 높이였다⁠.

“⁠막내님⁠.⁠” 미경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거 똑같아요⁠. 그냥 비슷한 게 아니라 숨 쉬는 자리까지요⁠. 저쪽이 보낸 건 1985년 우리 신호를 그대로 돌려준 거예요⁠. 어머님 목소리를요⁠.⁠”

화영은 대답하지 못했다⁠. 화면 속 다섯 점이 흐려졌다⁠. 안경을 머리에서 내려 쓰자 다시 또렷해졌다⁠. 오십 년 전 연구원 식당에서 국자를 든 스물두 살 여자가 하늘에 대고 밥은 먹었냐고 물었다⁠. 오십 년 뒤⁠, 하늘이 같은 높이로 되물었다⁠.

해독실 문을 누가 두 번 두드렸다⁠. 미경이 의자에서 얼어붙었다⁠. 화영이 일어나 잠금을 풀었다⁠. 문간에 편정훈이 서 있었다⁠. 군복 위에 점퍼를 걸쳤고⁠, 머리카락에 제주의 억새 털 하나가 붙어 있었다⁠. 편정훈은 큰 화면의 겹친 두 줄을 보았다⁠. 이어서 책상 위의 누런 봉투와 사진을 보았다⁠.

“⁠박사님 정직 첫날입니다⁠.⁠”

“⁠대령님⁠. 하늘이 돌려보낸 건 우리 엄마 목소리예요⁠.⁠”

편정훈은 한 걸음 들어와 화면 앞에서 멈췄다⁠. 겹친 두 줄을 오래 보았다⁠. 이윽고 낮게 말했다⁠.

“⁠그럼 저쪽은 어머님 목소리를 오십 년 동안 갖고 있었던 겁니다⁠.⁠”

7화는 어땠나요?

댓글 0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