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5,368자)

억새밭의 긴 상

외계의 첫 답장 "밥은 먹었니?" · 은해록

11월 15일 아침 여덟 시⁠, 관측소 억새 들판에 상이 마흔 개 놓였다⁠. 구좌읍 마을회관과 경로당과 교회와 절에서 빌려 온 상이었다⁠. 다리 길이가 다 달라서 이어 붙이자 긴 상이 물결쳤다⁠. 부녀회장이 상마다 밑에 신문지를 접어 괴었다⁠. 상 위에는 흰 종이를 깔았다⁠. 종이는 바람에 펄럭이다가 귤 한 알씩을 올리자 얌전해졌다⁠.

민석이 승합차에서 나무 상자 세 개를 내렸다⁠. 상자 뚜껑에 「⁠대전 천문연구원 구내식당 · 숟가락⁠」이라고 적혀 있었다⁠. 미경이 상자를 열고 숟가락을 상마다 두 개씩 놓았다⁠. 숟가락은 다 조금씩 휘어 있었다⁠. 서른 해 동안 연구원들 입을 드나든 숟가락이었다⁠.

“⁠팀장님⁠, 유엔 의전실이 진짜 허락했어요⁠?⁠”

“⁠처음엔 기절했어요⁠. 두 번째 전화에서는 위생 검사를 하자고 했고⁠, 세 번째 전화에서 사무총장이 직접 받았어요⁠.⁠” 민석이 숟가락 하나를 들어 하늘의 접시를 비춰 보았다⁠. “⁠사무총장이 그러대요⁠. 자기 할머니가 가나 사람인데⁠, 손님한테 밥부터 내놓는 집에서 자랐다고⁠.⁠”

들판 한쪽에 천막 세 개가 세워졌다⁠. 응옥이 가스 화구 네 개를 놓고 육수 솥을 올렸다⁠. 부영철은 몸국 솥을⁠, 태국 여자는 쌀죽 솥을⁠, 인도네시아 청년들은 볶음밥 철판을 맡았다⁠. 미얀마 남자와 네팔 남자는 밥을 짓는 커다란 압력솥을 맡았다⁠. 압력솥에 들어간 쌀은 김제 햅쌀이었다⁠. 포대 다섯 개가 천막 기둥에 기대어 있었다⁠. 포대마다 같은 매직 글씨가 있었다⁠. 「⁠편씨네⁠」⁠.

아홉 시⁠, 검은 차들이 철조망 문을 지나 들어왔다⁠. 세계의 대표 서른다섯 명이 내렸다⁠. 양복과 정장과 각 나라의 옷이 억새 들판에 섞였다⁠. 대표들은 긴 상과 휘어진 숟가락과 귤을 차례로 보았다⁠. 미국 대표가 화영을 찾아 눈인사를 했다⁠. 하얀 머리가 억새처럼 바람에 날렸다⁠.

*

맨 마지막 차에서 작은 할머니가 내렸다⁠. 꽃무늬 몸뻬 위에 누빔 조끼를 입었고⁠, 머리에 수건을 썼다⁠. 두 손에 김치통을 하나씩 들었다⁠. 뒤따라 내린 편정훈이 김치통을 받으려 하자 할머니가 몸을 비틀어 피했다⁠.

“⁠놔둬⁠. 내가 들어⁠. 니는 군복이나 펴⁠.⁠”

“⁠엄니⁠, 여기 높은 분들 오는 데여라⁠.⁠”

“⁠높은 분들은 김치 안 묵냐⁠?⁠”

할머니가 억새를 헤치고 상 앞까지 걸어왔다⁠. 화영과 눈이 마주치자 김치통을 내려놓고 화영의 두 손을 잡았다⁠. 손바닥이 거칠고 따뜻했다⁠. 모를 심고 벼를 베는 손이었다⁠.

“⁠니가 밥 박사여⁠? 우리 정훈이가 밥 묵는 거 니가 처음 봤담서⁠.⁠”

“⁠세 번 봤어요⁠, 어머님⁠.⁠”

“⁠세 번이면 많이 본 거여⁠. 나는 이 아그 군대 가고 나서 한 번도 못 봤어⁠.⁠” 할머니가 아들을 흘겨보았다⁠. 편정훈이 군복 깃을 만지며 하늘을 보았다⁠. “⁠그 할머니는 좀 잡숴⁠?⁠”

“⁠어머님 햅쌀로 두 숟가락 드셨어요⁠. 그 뒤로는 하루에 반 공기씩요⁠. 말씀은 아직이요⁠.⁠”

“⁠말은 나중에 혀⁠. 밥이 먼저여⁠.⁠”

*

열 시⁠, 대표들이 긴 상에 앉았다⁠. 상은 낮았고 의자는 없었다⁠. 부녀회가 깔아 둔 돗자리 위에 양복 입은 사람들이 하나둘 무릎을 꿇었다가 다리를 접었다가 했다⁠. 유럽의 어느 대표는 끝내 다리를 접지 못하고 옆으로 비스듬히 앉았다⁠. 김제 할머니가 유럽 대표의 무릎을 손바닥으로 탁 쳤다⁠. 양반다리⁠, 하고 시범을 보였다⁠. 대표가 따라 했다⁠. 박수가 났다⁠. 자리는 나라 이름이 아니라 숟가락 두 개로 정해졌다⁠. 미국 대표 옆에 미얀마 남자가 앉았고⁠, 중국 대표 맞은편에 부영철이 앉았다⁠. 첫말씀교회의 여동현은 종교계 대표로 초청을 받아 상 끝에 앉았다⁠. 흰 양복 대신 회색 점퍼를 입고 있었다⁠. 필리핀 바닷가에서 돌아온 뒤로 텔레비전에 한 번도 나오지 않은 얼굴이었다⁠. 화영과 눈이 마주치자 여동현이 먼저 고개를 숙였다⁠. 이어서 상 위의 휘어진 숟가락 하나를 들어 들여다보았다⁠. 숟가락 뒷면에 누군가 못으로 긁은 글씨가 있었다⁠. 「⁠봉애⁠」⁠. 서른 해 전 조리원들은 자기 숟가락에 이름을 새겨 두었다⁠. 여동현은 숟가락을 오래 쥐고 있다가 화영 앞으로 밀어 놓았다⁠. 이건 박사님 자리에 있어야겠습니다⁠, 하고 작게 말했다⁠.

응옥이 쌀국수 그릇을 들고 첫 번째 대표 앞으로 갔다⁠. 베트남 대표였다⁠. 응옥이 베트남 말로 물었다⁠. 화영은 젓가락 박자를 알아들었다⁠. 똑⁠, 똑똑⁠, 틈⁠, 똑똑⁠. 끝이 조금 올라갔다⁠. 기다리는 높이였다⁠. 베트남 대표가 웃으며 대답했다⁠. 응옥이 그릇을 내려놓았다⁠.

태국 여자가 쌀죽을 들고 태국 대표에게 물었다⁠. 인도네시아 청년이 볶음밥을 들고 자기 나라 대표에게 물었다⁠. 대표들은 저마다 자기 말로 대답했다⁠. 먹었어요⁠, 아니 아직이요⁠, 지금 먹을게요⁠. 상 위로 여러 나라의 대답이 오갔다⁠. 대답을 못 알아듣는 사람은 없었다⁠. 그릇이 앞에 놓이는 순간 다들 알아들었다⁠.

부영철이 몸국 그릇을 중국 대표 앞에 놓았다⁠. 중국 대표는 그릇과 부영철을 번갈아 보았다⁠. 부영철이 제주 말로 물었다⁠.

“⁠밥 먹언⁠?⁠”

통역사가 당황했다⁠. 제주 말은 통역 목록에 없었다⁠. 중국 대표가 손을 들어 통역사를 말렸다⁠. 그리고 한국말로 대답했다⁠. 아직이요⁠. 서툴렀지만 끝이 내려앉았다⁠. 부영철이 무릎을 쳤다⁠.

“⁠경허믄 먹읍서⁠!⁠”

미국 대표가 휘어진 숟가락으로 몸국을 떠먹었다⁠. 모자반이 숟가락에 감겼다⁠. 미국 대표가 모자반을 들어 올려 들여다보자 상 전체에 웃음이 퍼졌다⁠. 김제 할머니가 상 너머로 몸을 내밀어 미국 대표의 밥그릇에 김치를 얹었다⁠. 미국 대표가 무어라 고맙다고 했다⁠. 할머니는 알아듣지 못하고 고개만 크게 끄덕였다⁠. 그것도 대답이었다⁠.

화영은 상 끝에서 마리셀에게 영상을 보냈다⁠. 대표 서른다섯 명이 휘어진 숟가락으로 밥을 먹는 영상이었다⁠. 마리셀의 답장이 금방 왔다⁠. 「⁠어머님 보셨어유⁠. 창문 말고 화면 보셨어유⁠. 오래 보셨어유⁠」⁠. 영상이 하나 더 따라왔다⁠. 어머니가 휴대전화 화면에 손가락을 대고 있었다⁠. 화면 속 긴 상의 끝⁠, 휘어진 숟가락을 짚은 손가락이었다⁠.

*

열두 시⁠, 그릇이 치워지고 상 위에 귤 껍질과 숟가락만 남았다⁠. 의장을 맡은 유엔 사무차장이 일어났다⁠. 회의장은 따로 없었다⁠. 같은 상에서 그대로 시작했다⁠.

“⁠초안은 둘입니다⁠. 침묵⁠, 그리고 한 줄의 답장⁠. 한 줄은 대한민국 연구원 측 자문이 냈습니다⁠. 먼저 침묵 안을 지지하는 분의 말씀을 듣겠습니다⁠.⁠”

편정훈이 몸을 일으켰다⁠. 돗자리에 앉는 상이라 무릎부터 펴야 했다⁠. 군복 바지에 억새 털이 붙어 있었다⁠.

“⁠국방부 참관인으로 말씀드립니다⁠. 저는 지금 이 상에서 밥을 먹었습니다⁠. 맛있었습니다⁠. 엄니 쌀이었습니다⁠.⁠” 편정훈이 숟가락 하나를 들어 보였다⁠. “⁠그래서 더 침묵을 말씀드립니다⁠. 우리가 대답하면⁠, 여기 이렇게 밥 먹는 사람들이 있다고 확인해 주는 겁니다⁠. 대답은 이십오 년 뒤에 닿고⁠, 다음 말은 오십 년 뒤에 옵니다⁠. 그때 이 상에 앉는 사람은 우리가 아닙니다⁠. 우리 아이들의 아이들입니다⁠. 저는 그 아이들 밥상을 지키겠습니다⁠. 하늘이 엄마라면 침묵해도 다시 물을 겁니다⁠. 사냥꾼이라면 침묵만이 우리를 숨겨 줍니다⁠.⁠”

미국 대표가 고개를 끄덕였다⁠. 유럽 대표 몇이 따라 끄덕였다⁠. 사무차장이 화영을 보았다⁠.

화영은 무릎을 펴고 일어났다⁠. 니트 자락에 귤 껍질 하나가 붙어 있었다⁠. 떼지 않았다⁠.

“⁠먹었어⁠. 너는⁠?⁠”

화영이 낸 한 줄이었다⁠. 통역사들이 여러 말로 옮겼다⁠. 짧아서 옮기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엄마가 밥은 먹었니 하고 물으면⁠, 저는 세 해 동안 먹었어 하고 끝냈어요⁠. 거짓말로 한 날이 더 많았고요⁠. 한 번도 엄마는⁠? 하고 묻지 않았어요⁠. 엄마가 먹었는지는 안 궁금했어요⁠. 엄마는 늘 먹은 사람이었으니까요⁠.⁠” 화영은 하늘의 접시를 올려다보았다⁠. “⁠하늘이 두 번 물었어요⁠. 저는 우리가 이번에는 먹었다고만 하지 말고⁠, 너는⁠? 하고 물어 주면 좋겠어요⁠. 대답하고⁠, 걱정을 돌려주는 거예요⁠.⁠”

“⁠그게 문제입니다⁠.⁠” 편정훈이 다시 일어났다⁠. 화영과 같은 상의 양 끝에 서서 마주 보았다⁠. “⁠너는⁠? 은 묻는 말입니다⁠. 묻는 말은 대답을 부릅니다⁠. 상대를 이 상으로 부르는 겁니다⁠. 박사님은 어머님께 묻지 못한 말을 하늘에 묻고 싶으신 겁니다⁠. 그건 박사님 집 일입니다⁠. 칠십억의 일이 아닙니다⁠.⁠”

들판에 바람이 불었다⁠. 억새가 한꺼번에 누웠다⁠.

“⁠대령님 말씀이 맞아요⁠. 우리 집 일이에요⁠.⁠” 화영의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다⁠. “⁠근데 대령님 침묵도 대령님 집 일이에요⁠. 김제 논을 지키고 싶으신 거잖아요⁠. 다들 자기 집 일로 여기 앉았어요⁠. 칠십억의 일은 그런 집 일을 다 모은 거예요⁠.⁠”

김제 할머니가 상 너머에서 아들을 보았다⁠.

“⁠물으면 대답을 혀야제⁠. 물어봐 준 사람한테는 너는 묵었냐고 되물어 주는 거여⁠. 그게 사람 사는 법이여⁠.⁠”

“⁠엄니⁠. 이건 동네 인사가 아니어라⁠.⁠”

“⁠동네 인사가 제일 무서운 거여⁠. 대답 안 하면 동네에서 사람 취급 못 받어⁠. 우리 동네서 니 아부지가 그랬어⁠. 아무한테도 대답을 안 혀서 장례 때 사람이 안 왔어⁠.⁠”

상이 조용해졌다⁠. 편정훈이 숟가락을 쥔 손을 내렸다⁠. 바지 솔기를 문지르지 않았다⁠. 대신 어머니를 오래 보았다⁠.

“⁠엄니⁠. 그래도 저는 침묵이어라⁠.⁠”

할머니는 더 말하지 않았다⁠. 대신 아들의 밥그릇에 남은 밥 한 숟가락을 마저 떠 넣으라고 손짓했다⁠. 편정훈은 마지막 한 숟가락을 먹었다⁠.

*

오후 네 시⁠, 표결이 끝났다⁠. 표는 숟가락을 들어서 냈다⁠. 숟가락을 든 손이 침묵에 열일곱⁠, 한 줄에 열여덟이었다⁠. 표를 드는 손은 대표들과 종교계 대표의 손뿐이었다⁠. 쌀국수집의 여덟 사람은 천막 솥 앞에서 국자를 쥔 채 숨을 죽였다⁠. 한 사람은 숟가락을 들지 않았다⁠. 여동현이었다⁠. 여동현은 표결이 끝나자 짧게 말했다⁠. 자기 목소리가 작았으니 이번에는 듣기만 하겠다고 했다⁠.

중국 대표가 한 줄 편에 숟가락을 들었다⁠. 미국 대표는 침묵 편에 들었다⁠. 들면서 화영에게 미안하다는 듯 눈썹을 올렸다⁠. 화영도 눈썹을 올려 답했다⁠.

사무차장이 결과를 알렸다⁠. 답장 한 줄은 「⁠먹었어⁠. 너는⁠?⁠」⁠. 첫 답장을 받은 곳에서⁠, 첫 목소리를 보낸 나라의 장비로⁠, 내일 새벽 네 시 십이 분에 보낸다⁠.

박수가 터졌다⁠. 응옥이 국자로 솥뚜껑을 두드렸다⁠. 부영철이 모자를 하늘로 던졌다⁠. 미경은 민석을 끌어안았다가 민석이 당황하자 얼른 놓았다⁠. 김제 할머니는 박수 대신 옆자리 중국 대표의 등을 두드리며 잘혔어⁠, 잘혔어⁠, 하고 말했다⁠. 중국 대표는 무엇을 잘했는지 모르는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박수가 잦아들기 전에 편정훈이 손을 들었다⁠. 사무차장이 발언을 허락했다⁠.

“⁠대한민국 국방부 참관인으로서 알려 드립니다⁠. 첫 목소리를 보낸 나라의 장비는 대한민국의 장비입니다⁠. 장관의 방침은 봉인 유지입니다⁠. 오늘 이 상의 결정과 상관없이⁠, 곱단이의 송신실은 열리지 않습니다⁠.⁠”

들판이 다시 조용해졌다⁠. 부영철이 던졌던 모자가 억새 위에 떨어졌다⁠. 편정훈이 점퍼 안주머니에서 작은 열쇠 하나를 꺼냈다⁠. 놋쇠 열쇠에 빨간 꼬리표가 달려 있었다⁠. 꼬리표에 장관의 직함이 찍혀 있었다⁠.

“⁠열쇠는 제가 갖고 있습니다⁠. 장관께서 맡기셨습니다⁠. 일을 아는 사람이 저밖에 없어서요⁠.⁠”

해가 억새 위로 기울었다⁠. 새벽 네 시 십이 분까지 열두 시간이 남아 있었다⁠.

13화는 어땠나요?

댓글 0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 보세요.

억새밭의 긴 상 · 외계의 첫 답장 "밥은 먹었니?"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