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5,352자)

채널 삭제

알고리즘 추천 계정은 내 하루를 먼저 산다 · 윤솔채

08시 55분⁠, 일층 부엌은 햇빛으로 가득했다⁠. 창가 화분들의 잎이 식탁 위에 얼룩진 그림자를 깔았다⁠. 룸메이트는 식탁 앞 의자에 앉아 노트북을 열어 두고 있었다⁠. 화면에는 계약 관리 페이지가 떠 있었다⁠. 오른쪽 위에 파란 단추 「⁠계약 갱신⁠」⁠, 바로 아래 회색 글씨 「⁠계약 해지⁠」

새미는 룸메이트 옆에 의자를 붙이고 앉아 두 손으로 룸메이트의 오른손목을 감쌌다⁠. 연두색 카디건 소매가 룸메이트의 손등까지 덮였다⁠. 싱크대 앞에서 집주인이 국자를 들고 서 있었다⁠.

“⁠할머니⁠, 국자는 왜요⁠?⁠”

“⁠지난번에 잘 들었잖아⁠.⁠”

08시 59분⁠. 룸메이트의 오른손이 꿈틀거렸다⁠. 손목 안쪽 힘줄이 새미의 손바닥 밑에서 단단해졌다⁠. 손이 마우스 쪽으로 기울었다⁠.

“⁠새미야⁠, 꽉⁠.⁠”

“⁠꽉 잡고 있어⁠.⁠”

09시 00분⁠. 오른손이 앞으로 튀어 나갔다⁠. 새미는 의자째 뒤로 몸을 젖히며 손목을 끌어당겼다⁠. 룸메이트의 손끝이 마우스에서 한 뼘 떨어진 허공을 긁었다⁠. 손가락이 클릭하는 모양으로 두 번 접혔다 펴졌다⁠. 노트북 화면 속 화살표는 움직이지 않았다⁠.

룸메이트가 왼손을 들었다⁠. 왼손은 서툴게 마우스를 쥐었다⁠. 화살표가 화면 위를 비틀비틀 기어가 「⁠계약 갱신⁠」을 지나쳐 회색 「⁠계약 해지⁠」 위에서 멈췄다⁠.

「⁠해지하시겠습니까⁠? 계약서 제28장에 따라 위약금 12⁠,000⁠,000원이 청구됩니다⁠.⁠」

룸메이트가 왼손 검지로 「⁠확인⁠」을 눌렀다⁠. 딸깍⁠. 오른손에서 힘이 쑥 빠졌다⁠. 새미의 손바닥 안에서 룸메이트의 손목이 물렁해졌다⁠.

“⁠왼손으로 마우스 처음 써 봐⁠.⁠” 룸메이트가 말했다⁠. 목소리가 떨렸다⁠. “⁠생각보다 잘하네⁠.⁠”

“⁠잘했어⁠.⁠”

“⁠이번엔 진심 들어갔네⁠.⁠”

집주인이 국자를 싱크대에 내려놓았다⁠. “⁠국자 안 써도 됐네⁠. 아깝다⁠.⁠”

룸메이트는 은행 앱을 열어 정산금 3⁠,412⁠,000원을 플랫폼 계좌로 돌려보냈다⁠. 위약금 청구서가 메일로 왔다⁠. 「⁠분할 납부 신청 가능 · 최대 24개월⁠」 룸메이트는 신청 단추를 누르고 노트북을 덮었다⁠. 덮인 노트북 위에 두 손을 포개 올렸다⁠.

“⁠새미야⁠. 나 아직도 내일 영상 속 네가 더 좋아⁠. 그건 안 바뀌어⁠.⁠” 룸메이트가 새미를 보았다⁠. “⁠근데 방금 나 붙잡은 건 오늘 너였어⁠.⁠”

*

오전 열한 시⁠, 둘은 계약서 서른두 장을 식탁에 펼쳐 놓고 다시 읽었다⁠. 새미가 밑줄 그은 문장이 열네 번째 장에 있었다⁠.

「⁠원 채널이 존속하는 동안 출연자 얼굴의 학습 이용을 허락한다⁠.⁠」

룸메이트가 스물아홉 번째 장을 짚었다⁠. 해지 조항 밑에 작은 글씨가 있었다⁠.

「⁠원 채널이 삭제된 경우⁠, 플랫폼은 해당 출연자의 얼굴로 만든 파생 계정을 정리한다⁠.⁠」

“⁠원 채널이 「⁠새미의하루⁠」야⁠.⁠” 룸메이트가 말했다⁠. “⁠이걸 지우면 네 얼굴은 더 못 써⁠. 파생 계정도 정리해야 돼⁠.⁠”

“⁠「⁠새미의내일⁠」이 파생 계정이야⁠?⁠”

“⁠그건 모르겠어⁠. 계약서엔 파생 계정이 뭔지 안 나와⁠.⁠”

새미는 신고 담당자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계약서 두 장을 찍어 붙였다⁠. 답은 사십 분 뒤에 왔다⁠.

「⁠내부 규정 4조 맞아요⁠. 원 채널이 삭제되면 파생 계정은 정리 대상이에요⁠. 근데 솔직히 말할게요⁠. 내일 계정이 파생 계정으로 분류돼 있는지는 저도 몰라요⁠. 분류표에 내일 계정이 아예 없어요⁠. 처음 생긴 거라서요⁠.⁠」

이어서 한 줄이 더 왔다⁠. 「⁠지우면 못 되돌려요⁠. 두 해 치잖아요⁠.⁠」

새미는 「⁠새미의하루⁠」를 열었다⁠. 영상 731개⁠. 맨 아래로 내렸다⁠. 두 해 전 3월⁠, 빈 방바닥에서 컵라면을 먹는 영상⁠. 첫 영상이었다⁠. 조회수 57⁠. 댓글은 하나였다⁠. 「⁠컵라면 맛있어 보여요⁠」 단 사람은 룸메이트였다⁠.

“⁠이거 언니가 단 거야⁠?⁠”

“⁠응⁠. 아무도 안 달 것 같아서⁠.⁠”

새미는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화면이 꺼지자 부엌 창으로 매미 소리가 들어왔다⁠.

“⁠지울게⁠.⁠”

룸메이트는 오래 말이 없었다⁠. 「⁠새미의하루⁠」 수익의 반은 룸메이트 몫이었다⁠. 채널을 지우면 위약금을 갚을 돈이 나올 곳도 함께 사라졌다⁠.

“⁠라이브로 해⁠.⁠” 룸메이트가 말했다⁠. “⁠지우는 거⁠. 마지막 영상이니까 내가 찍을게⁠. 손으로⁠.⁠”

*

오후 세 시⁠, 옥상⁠. 하늘이 낮게 내려와 있었다⁠. 남쪽에서 구름이 빠르게 몰려왔고⁠, 고추 잎이 바람에 뒤집혀 허연 뒷면을 보였다⁠. 난간 앞에는 집주인이 박아 둔 고추장 단지 울타리가 줄지어 있었다⁠. 오늘 아침 집주인은 단지마다 흙을 채웠다⁠.

룸메이트가 휴대전화를 손에 들고 렌즈를 새미에게 맞췄다⁠. 삼각대는 창고방 구석에 접혀 있었다⁠. 새미는 링라이트를 켜지 않았다⁠. 흐린 하늘빛이 안경알에 희미하게 비쳤다⁠.

“⁠안녕하세요⁠. 새미의하루예요⁠.⁠”

동시 시청자 숫자가 오른쪽 위에서 올라갔다⁠. 삼천⁠, 만⁠, 사만⁠. 「⁠무슨 일⁠?⁠」「⁠오늘 새미 라이브 오랜만⁠」「⁠태풍 라이브 리허설⁠?⁠」 공시생의 계정도 들어와 있었다⁠. 「⁠합격 고추 아저씨 : 병원에서 기본서 덮고 봅니다⁠」

“⁠오늘 이 채널을 지울 거예요⁠.⁠”

댓글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왜 지움⁠」「⁠내일 새미 있으니까 상관없음ㅋㅋ⁠」「⁠본계 지우면 내일계는⁠?⁠」「⁠지우지 마요 처음부터 봤어요⁠」

“⁠이 채널이 있는 동안에는 제 얼굴을 쓸 수 있대요⁠. 그래서 지워요⁠. 내일 새미한테 제 얼굴을 그만 빌려주려고요⁠.⁠”

휴대전화가 울렸다⁠. 라이브 화면 위로 전화 알림이 덮였다⁠. 「⁠추천팀장 제두항⁠」 새미는 라이브를 켠 채로 스피커를 눌렀다⁠. 옥상 바람 소리 사이로 두항의 목소리가 들렸다⁠.

“⁠새미 씨⁠. 지우지 마세요⁠.⁠”

“⁠라이브 중이에요⁠, 팀장님⁠.⁠”

“⁠압니다⁠. 보고 있어요⁠.⁠” 두항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빨랐다⁠. “⁠지워도 「⁠새미의내일⁠」은 안 없어집니다⁠. 모델이 만든 계정이라 원 채널에 묶여 있지 않아요⁠. 법무팀 해석이 그래요⁠. 새미 씨만 두 해를 잃어요⁠.⁠”

“⁠계약서에는 묶여 있어요⁠. 스물아홉 번째 장에요⁠.⁠”

“⁠계약서는 파생 계정이라고만 했어요⁠. 내일 계정은 파생 계정이 아니라는 게 저희 해석입니다⁠.⁠”

“⁠그럼 법무팀이 저 대신 내일 살아 보래요⁠.⁠”

두항은 대답하지 않았다⁠. 수화기 너머에서 키보드 소리가 멈췄다⁠. 댓글창이 웃음으로 뒤덮였다⁠. 「⁠ㅋㅋㅋ팀장 털림⁠」「⁠법무팀 내일 계정 만들어 주세요⁠」

“⁠새미 씨⁠. 시청자 사만 명이 보고 있어요⁠. 그분들은 새미 씨 두 해를 같이 본 분들이에요⁠.⁠”

“⁠그래서 같이 보시라고 켰어요⁠.⁠”

새미는 전화를 끊었다⁠. 설정⁠, 계정⁠, 계정 삭제⁠. 화면이 세 번 물었다⁠.

「⁠정말 삭제하시겠습니까⁠?⁠」 새미는 눌렀다⁠.

「⁠영상 731개와 구독자 17⁠,240명이 모두 사라집니다⁠.⁠」 새미는 눌렀다⁠.

「⁠삭제 후에는 되돌릴 수 없습니다⁠.⁠」

엄지가 단추 위에서 멈췄다⁠. 이번에는 아무것도 새미의 엄지를 끌지 않았다⁠. 내일 영상에 없는 일이었다⁠. 엄지를 누를지 말지는 새미만 알았다⁠.

룸메이트의 휴대전화 렌즈가 새미의 손을 크게 잡았다⁠. 화면 너머 사만 명이 엄지 하나를 보았다⁠. 바람이 고추 잎을 한 번 뒤집었다⁠.

새미는 눌렀다⁠.

화면이 하얗게 비었다가⁠, 앱 첫 화면으로 돌아갔다⁠. 라이브는 저절로 끊겼다⁠. 룸메이트가 들고 있던 휴대전화를 천천히 내렸다⁠. 옥상에 바람 소리만 남았다⁠.

“⁠끝났어⁠.⁠” 룸메이트가 말했다⁠.

새미는 고추장 단지 울타리 앞에 쪼그려 앉았다⁠. 단지 하나를 손바닥으로 쓸었다⁠. 흙을 채운 단지는 묵직했다⁠.

옥상 문이 열리고 집주인이 수박 반 통을 쟁반에 받쳐 들고 올라왔다⁠. 칼이 수박 한가운데 꽂혀 있었다⁠.

“⁠다 지웠어⁠?⁠”

“⁠다 지웠어요⁠.⁠”

“⁠잘했다⁠. 수박 먹어⁠. 지운 날은 수박이야⁠.⁠”

“⁠그런 날이 있어요⁠?⁠”

“⁠오늘부터 있어⁠.⁠” 집주인은 수박을 쩍 갈랐다⁠. 빨간 속이 흐린 하늘 아래 유난히 빨갰다⁠. “⁠할머니도 시장 접던 날 수박 먹었어⁠. 혼자 반 통⁠.⁠”

*

오후 네 시 반⁠, 초록 대문 앞이 시끄러웠다⁠. 새미는 수박 껍질을 쟁반에 모아 들고 계단을 내려갔다⁠. 담벼락 앞 구경꾼이 아침보다 많았다⁠. 몇은 우비를 입고 있었고⁠, 몇은 「⁠따라 살기 모임⁠」 전단을 나눠 주고 있었다⁠.

전단을 돌리던 남자가 대문 철창 너머로 새미를 불렀다⁠. 스물대여섯쯤⁠, 목에 링라이트를 걸고 있었다⁠.

“⁠새미 씨⁠, 채널 왜 지웠어요⁠? 저희 내일 밤 모임 다 새미 씨 보러 오는 건데⁠.⁠”

“⁠내일 밤에 옥상 안 올라가요⁠. 오지 마세요⁠.⁠”

“⁠새미 씨가 안 올라가도 내일 새미는 올라가요⁠. 저희는 그거 보러 와요⁠.⁠” 남자는 전단을 철창 사이로 밀어 넣었다⁠. 「⁠내일 밤 열 시 · 같이 봅시다 · 같이 따라갑시다⁠」 “⁠저도 내일 계정 있어요⁠. 저 내일 이 골목에서 처음으로 사람들 앞에서 노래해요⁠. 사 년 동안 방에서만 불렀거든요⁠. 새미 씨 덕분이에요⁠.⁠”

새미는 전단을 받지 않았다⁠. 전단이 철창 사이에서 바람에 펄럭이다 마당으로 날아 들어갔다⁠.

휴대전화가 떨었다⁠. 모르는 계정의 DM이었다⁠. 「⁠팩트만씀 : 채널 지운 거 봤어요⁠. 컵라면 기억나요⁠? 나도 내 내일 계정 신고했어요⁠. 웃는 얼굴 세 개 달린 답장 받았어요⁠. 새미 씨 그거 받는 기분 이제 알겠네요⁠.⁠」

새미는 짧게 답했다⁠. 「⁠셋이면 큰일이래요⁠.⁠」

「⁠큰일 맞아요⁠. 나 새 편의점 구했어요⁠. 야간이에요⁠. 내일 밤 태풍인데 문 열어요⁠.⁠」

*

저녁 여섯 시⁠, 「⁠새미의내일⁠」은 그대로 있었다⁠. 조회수 숫자도 그대로 올라가고 있었다⁠. 새미와 룸메이트는 창고방 매트에 나란히 앉아 자정을 기다렸다⁠. 바람이 창고방 문을 덜컹덜컹 흔들었다⁠. 뉴스 앱 알림이 쉬지 않고 떴다⁠. 「⁠태풍 특보 발효⁠… 21일 밤 서울 최대 순간 풍속 초속 30미터 예상⁠」「⁠국회 상임위⁠, 내일 오후 ‘⁠내일 계정⁠’ 간담회 예정대로⁠」「⁠피해 크리에이터 첫 증언 나선다⁠」

새미의 휴대전화에 국회 상임위원회 사무실이라는 곳에서 메일이 와 있었다⁠. 내일 오후 두 시 간담회에 피해 크리에이터로 나와 달라는 메일이었다⁠. 새미는 「⁠참석하겠습니다⁠」라고 답했다⁠.

“⁠안 무서워⁠?⁠” 룸메이트가 물었다⁠.

“⁠내일 영상이 더 무서워⁠.⁠”

*

00⁠:00⁠. 알림 두 개가 동시에 떴다⁠.

「⁠새미의하루 구독자 17⁠,240명이 새미의내일로 이어졌습니다 · 원 채널 구독자 보호 정책⁠」

「⁠새미의내일 · 8월 21일⁠」

새미는 두 번째 알림을 눌렀다⁠. 구독자 숫자가 먼저 보였다⁠. 340만에서 17⁠,240명이 늘어 있었다⁠. 지운 채널의 구독자가 한 명도 빠짐없이 옮겨 가 있었다⁠. 이제 플랫폼 어디에도 「⁠새미의하루⁠」는 없었고⁠, 새미의 얼굴을 한 계정은 「⁠새미의내일⁠」 하나뿐이었다⁠.

영상이 재생되었다⁠.

밤⁠, 비⁠, 바람⁠. 이 옥상이었다⁠. 화면 속 새미는 렌즈를 끼고 있었다⁠. 안경도 카디건도 없이 흰 티 하나만 입고 있었다⁠. 젖은 단발이 뺨에 붙었다⁠. 화면 오른쪽 위에 라이브 표시와 숫자가 떠 있었다⁠. 「⁠동시 시청 1⁠,200만⁠」 화면 속 새미가 흙 채운 고추장 단지 울타리를 한 발로 넘었다⁠. 단지 하나가 쓰러져 흙을 쏟았다⁠. 새미의 손이 난간을 잡았다⁠. 젖은 쇠 위로 손가락이 미끄러졌다⁠. 화면 속 새미가 웃으며 무릎 하나를 난간 위로 올렸다⁠.

화면 아래 시각이 22⁠:12였다⁠. 영상은 무릎이 난간 위에 올라간 순간 끊겼다⁠.

룸메이트가 새미의 카디건 소매를 쥐었다⁠.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창고방 문틈으로 첫 빗방울이 들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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