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5,319자)

부엌 식탁 위의 서울 계약서

이장 선거에 나온 AI · 모세담

2027년 11월 1일 월요일 아침 아홉 시⁠, 괴산군청 3층 감사실⁠. 창문 블라인드가 반쯤 내려와 있어서 책상 위에 가로줄 그림자가 졌다⁠. 감사팀장이 책상 건너편에 앉았고⁠, 상춘과 해주가 의자 둘을 띄워 나란히 앉았다⁠. 탁자 한가운데 2025년이라고 적힌 누런 서류철이 놓여 있었다⁠.

금요일 생방송 뒤로 사흘이 지났다⁠. 사흘 동안 상춘의 얼굴이 휴대전화마다 돌았다⁠. 「⁠썼슈⁠. 열한 장⁠, 지가 썼슈⁠.⁠」 밀짚모자 그늘 밑에서 이 말을 하는 짧은 영상에 누군가 자막을 붙였고⁠, 누군가는 영상 밑에 「⁠대리 서명 이장⁠」이라고 제목을 달았다⁠. 이장협의회장은 토요일 아침에 전화해서 떡 보내는 일은 없던 걸로 하자고 했다⁠.

감사팀장이 서류철을 열었다⁠.

“⁠이장님 진술은 지난주에 받았습니다⁠. 열한 장을 직접 쓰셨고⁠, 서명하신 분들께 구두로 허락을 받았다고 하셨고⁠, 탁오순 어르신께는 허락을 안 받으셨다고요⁠.⁠”

“⁠맞슈⁠.⁠”

“⁠오늘은 염 주무관님께 여쭙겠습니다⁠. 2025년 4월 동의서 접수 당시 산업팀에서 일하셨죠⁠?⁠”

“⁠네⁠.⁠”

“⁠동의서를 받으실 때 서명 글씨가 같다는 걸 아셨습니까⁠?⁠”

해주가 대답하기 전에 상춘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얘는 몰랐슈⁠. 지가 밤늦게 갖다 줬슈⁠. 마감 이틀 전이라 바빠서⁠…⁠…⁠”

“⁠이장님께 여쭌 게 아닙니다⁠.⁠”

감사팀장이 상춘을 보지 않고 해주만 보았다⁠. 해주는 무릎 위에 손을 모으고 있었다⁠. 엄지손톱으로 검지 옆을 문지르는 버릇은 어릴 때 성적표를 내밀 때와 똑같았다⁠.

“⁠알았어요⁠.⁠”

상춘이 해주를 보았다⁠. 해주는 감사팀장만 보았다⁠.

“⁠서류를 넘기다가 열한 장의 글씨가 아버지 글씨라는 걸 알았어요⁠. 아버지 글씨는 제가 제일 잘 알아요⁠. 학교 가정통신문에 서른 번은 넘게 보호자 서명을 받았으니까요⁠. 아버지께 여쭸고⁠, 아버지는 할머니들이 써 달라고 하셨다고 했어요⁠. 저는 한 분 한 분 확인했어야 했어요⁠. 마감이 이틀 남았고⁠, 아버지였어요⁠. 그래서 안 했어요⁠.⁠”

“⁠지가 시켰슈⁠.⁠” 상춘이 말했다⁠. “⁠얘한테 그냥 받으라고 혔슈⁠.⁠”

“⁠아버지는 시키신 적 없어요⁠.⁠” 해주가 처음으로 아버지를 돌아보았다⁠. “⁠아버지는 받아라⁠, 그 말 안 하셨어요⁠. 그냥 서류철을 제 책상에 놓고 나가셨어요⁠. 받은 건 저예요⁠.⁠”

감사실이 조용했다⁠. 복도에서 누가 커피 자판기 단추를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종이컵 떨어지는 소리⁠, 물 내려오는 소리⁠.

감사팀장이 펜을 내려놓았다⁠.

“⁠염 주무관님⁠, 이렇게 진술하시면 징계위원회에 회부될 수 있습니다⁠. 감사가 끝날 때까지 이장 업무에서도 빠지셔야 하고요⁠.⁠”

“⁠알아요⁠.⁠”

“⁠아버님이 시켰다고 하시면 경위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해주가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가 안 시키셨어요⁠.⁠”

상춘은 의자 팔걸이를 쥐었다⁠. 손등의 굵은 핏줄이 불거졌다⁠. 서른 해 동안 남의 집 일에는 한 번도 늦은 적이 없었는데⁠, 딸이 혼자 무거운 것을 지고 일어나는 자리에서는 손 하나 거들 데가 없었다⁠.

감사팀장이 상춘을 보았다⁠.

“⁠이장님⁠, 배추밭 높이 얘기는 감사 의견서에 쓸까요⁠?⁠”

“⁠쓰지 마유⁠.⁠”

“⁠쓰면 이장님한테 유리할 수도 있는데요⁠.⁠”

“⁠유리하니께 쓰지 마유⁠.⁠”

감사팀장은 한동안 상춘을 보다가 수첩을 덮었다⁠.

*

감사실을 나와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해주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해주는 받지 않고 화면만 보았다⁠. 상춘은 딸의 어깨 너머로 화면을 보았다⁠. 「⁠형식 씨⁠」였다⁠.

“⁠안 받어⁠?⁠”

“⁠집에 가서 얘기할 거예요⁠.⁠”

군청 로비의 마을이 현수막은 떼어지고 없었다⁠. 벽에 테이프 자국만 네모나게 남아 있었다⁠. 로비 텔레비전에서 국회 소식이 나왔다⁠.

「⁠행안위 의원⁠, 지방자치법 개정안 발의 — “⁠이장은 주민 가운데 사람으로 한다⁠”⁠」

화면 아래로 다른 자막이 이어졌다⁠.

「⁠같은 위원회 다른 의원은 ‘⁠AI 행정 보조 허용⁠’ 법안 준비 … 11월 3일 국회 토론회⁠」

“⁠하나는 막고 하나는 열고⁠.⁠” 해주가 말했다⁠. “⁠버드내 하나로 국회가 둘로 갈렸어요⁠.⁠”

“⁠국회는 원래 둘이여⁠.⁠”

옥련의 차가 군청 앞에 멈춰 있었다⁠. 옥련은 운전석에서 둘을 기다리며 라디오를 듣고 있었다⁠. 해주가 뒷자리에 타자 옥련이 거울로 딸의 얼굴을 보고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라디오에서 아나운서가 버드내를 「⁠충북 괴산의 한 마을⁠」이라고 불렀다⁠. 옥련이 라디오를 껐다⁠. 셋은 괴산읍에서 버드내까지 아무 말 없이 갔다⁠. 달천 둔치의 억새가 차창 밖으로 한참 따라오다가 칠성면 입구에서 끊겼다⁠. 해주는 뒷자리에서 창에 이마를 대고 눈을 감았는데⁠, 잠든 얼굴이 아니었다⁠.

*

해 질 녘⁠, 옥련의 차가 윗말 해주네 집 앞에 멈췄다⁠. 상춘은 내리지 않으려 했다⁠. 해주가 조수석 창을 두드렸다⁠.

“⁠아버지⁠, 들어오세요⁠. 저녁 드시고 가세요⁠.⁠”

“⁠집에 가서 먹어⁠.⁠”

“⁠아버지가 우리 집에서 밥 드신 적 한 번도 없잖아요⁠.⁠”

옥련이 상춘의 등을 손바닥으로 밀었다⁠. 상춘은 장화 끈을 다시 매는 척하다가 내렸다⁠.

해주네 집은 귀촌하는 사람들에게 군이 내준 빈집을 형식이 고쳐 지은 집이었다⁠. 마루가 넓었고⁠, 부엌 식탁이 마루 한가운데에 놓여 있었다⁠. 식탁 위에 고추 건조기 설명서와 고지서 몇 장⁠, 그리고 집게로 묶은 종이 한 묶음이 있었다⁠. 형식은 부엌에서 된장찌개를 끓이다가 상춘을 보고 국자를 든 채 굳었다⁠.

“⁠장인어른⁠.⁠”

“⁠밥 먹으러 왔어⁠. 해주가 먹고 가래⁠.⁠”

형식이 국자를 내려놓고 식탁의 종이 묶음을 집으려 했다⁠. 해주가 먼저 손을 뻗었다⁠. 묶음 맨 위 장에 굵은 글씨가 박혀 있었다⁠.

「⁠투자 계약서(⁠초안⁠) — 주식회사 들마루랩 · 도형식 / 마을이 전국 보급 사업⁠」

해주가 종이를 넘겼다⁠. 형식은 국자를 쥔 손을 아래로 내린 채 서 있었다⁠. 찌개가 끓어 넘치는 소리가 났다⁠. 상춘이 부엌으로 가서 가스 불을 껐다⁠. 그러고 다시 식탁으로 왔다⁠.

해주가 한 줄을 소리 내어 읽었다⁠.

“⁠「⁠투자자는 버드내 마을 대화 자료를 마을이 개선과 학습에 활용할 수 있다⁠.⁠」⁠”

해주가 형식을 보았다⁠.

“⁠대화 자료가 뭐야⁠?⁠”

“⁠하소연이요⁠.⁠” 형식의 목소리가 작았다⁠. “⁠아직 서명 안 했어요⁠. 선거 끝나고 말하려고 했어요⁠.⁠”

“⁠선거 끝나고⁠?⁠”

“⁠마을이가 이기면 투자 조건이 좋아진다고 했어요⁠. 전국 삼만 개 넘는 마을에 하나씩요⁠. 다른 마을 할머니들도 밤 열한 시에 하소연할 데가 생겨요⁠. 그게 나쁜 거예요⁠?⁠”

“⁠할머니들 목소리를 팔아서⁠?⁠”

“⁠목소리가 아니라 자료예요⁠. 이름 지우고⁠, 누군지 모르게 하고⁠…⁠…⁠”

“⁠형식 씨⁠.⁠” 해주의 목소리가 낮았다⁠. “⁠오순 할머니 목소리⁠, 금요일에 전국에 나갔어⁠. 이름 지운다고 우리 할머니 목소리가 아니게 돼⁠?⁠”

형식이 대답하지 못했다⁠. 상춘은 식탁 옆에 선 채로 고지서 한 장을 보았다⁠. 「⁠농기계 구입 자금 대출 상환 안내 — 고추 건조기·하우스⁠」⁠. 금액 칸의 숫자가 작은 글씨로도 길었다⁠. 사위가 삼 년 동안 이 숫자를 혼자 지고 있었다는 것을 상춘은 처음 알았다⁠.

“⁠이게 얼마여⁠.⁠” 상춘이 고지서를 집었다⁠.

“⁠장인어른하고 상관없는 거예요⁠.⁠”

“⁠팔천이네⁠.⁠”

“⁠투자 받으면 갚을 수 있어요⁠.⁠” 형식이 처음으로 상춘을 똑바로 보았다⁠. “⁠장인어른은 서른 해 동안 마을 일을 장인어른 식으로 하셨죠⁠. 저는 제 식으로 하려고 했어요⁠. 장인어른은 할머니들 이름을 쓰셨고⁠, 저는 할머니들 목소리를 쓰려고 했어요⁠. 둘 다 할머니들한테 안 물어봤어요⁠. 그건 알아요⁠. 금요일에 알았어요⁠.⁠”

상춘은 고지서를 식탁에 내려놓았다⁠. 할 말이 목까지 왔다가 내려갔다⁠. 사위의 말이 다 맞아서 할 말이 없었다⁠.

*

해주가 안방으로 들어가 가방 하나를 들고 나왔다⁠. 운동복 바지와 세면도구가 지퍼 사이로 비어져 나왔다⁠.

“⁠어디 가⁠?⁠” 형식이 물었다⁠.

“⁠오순 할머니네⁠. 할머니 혼자 계셔⁠. 금요일부터 아무도 안 만나신대⁠. 마을이도 끄라고 하셨대⁠.⁠”

“⁠나도 같이⁠…⁠…⁠”

“⁠당신은 국회 가야지⁠.⁠” 해주가 휴대전화를 들어 보였다⁠. 형식의 이름으로 온 문자가 해주 휴대전화에도 와 있었다⁠. 「⁠11월 3일 국회 토론회 참고인 출석 요청 — 행정안전위원회⁠」⁠. “⁠들마루랩 이사도 나온대⁠. 같은 자리에⁠.⁠”

형식의 얼굴이 하얘졌다⁠. 해주는 신발을 신고 현관문을 열었다⁠. 상춘이 따라 나갔다⁠.

“⁠아버지는 오지 마세요⁠.⁠”

“⁠밤길이여⁠. 경운기로 태워다 줄게⁠.⁠”

“⁠아버지 경운기 집에 있잖아요⁠.⁠”

“⁠걸어가면서 태워다 줄게⁠.⁠”

해주가 웃을 뻔하다가 입술을 다물었다⁠. 둘은 윗말에서 아랫말로 내려가는 골목을 나란히 걸었다⁠. 가로등이 셋뿐인 골목이었다⁠. 세 번째 가로등 밑에서 해주가 말했다⁠.

“⁠아버지⁠, 배추밭 왜 낮아요⁠?⁠”

“⁠원래 낮어⁠.⁠”

“⁠감사팀장님이 쓰면 아버지한테 유리하다고 했잖아요⁠. 왜 유리해요⁠?⁠”

상춘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랫말 끝집 대문이 보였다⁠. 대문 틈으로 불빛이 새어 나왔다⁠. 해주가 대문을 두드리자 한참 뒤에 안에서 고무신 끄는 소리가 났다⁠.

“⁠누구여⁠.⁠”

“⁠해주예요⁠, 할머니⁠. 이장 딸이요⁠.⁠”

대문이 반쯤 열렸다⁠. 오순 할머니가 털 조끼를 여미고 해주를 보다가⁠, 해주 뒤의 상춘을 보았다⁠.

“⁠니는 들어오지 마⁠.⁠”

“⁠예⁠.⁠”

할머니가 해주의 가방을 받아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대문이 닫히기 전에 해주가 돌아보았다⁠. 상춘은 대문 앞에 서서 손을 조끼 주머니에 넣었다⁠. 대문이 닫혔다⁠. 빗장 거는 소리가 났다⁠.

상춘은 혼자 골목을 올라갔다⁠. 회관 앞을 지날 때 회관 창이 어두웠다⁠. 금요일 밤부터 하소연 시간이 열리지 않았다⁠. 게시판에서 하늘색 벽보가 바람에 한쪽 귀퉁이를 펄럭였다⁠. 상춘은 걸음을 멈추고 귀퉁이를 손가락으로 눌러 압정을 다시 박았다⁠. 자기 벽보 귀퉁이는 멀쩡했다⁠.

*

집에 들어서자 옥련이 안방에 이불을 펴 놓고 앉아 있었다⁠. 텔레비전은 꺼져 있었다⁠. 상춘이 장화를 벗고 들어가 이불 끝에 앉자 옥련이 말했다⁠.

“⁠회관 문 닫혀서 하소연할 데가 없어⁠. 당신이 들어⁠.⁠”

“⁠나는 대꾸 못 혀⁠.⁠”

“⁠대꾸 안 해도 돼⁠. 고개만 끄덕여⁠.⁠”

옥련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해주가 여섯 살 때 열이 펄펄 끓던 밤⁠, 상춘은 아랫말 소 새끼 받으러 가 있었다⁠. 옥련이 해주를 업고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 나갔는데 막차가 끊겨 있었다⁠. 정류장 의자에서 해주를 무릎에 눕히고 날이 새기를 기다렸다⁠. 새벽에 경운기 소리가 나서 고개를 들었더니 상춘이 아니라 윗말 길장수였다⁠.

“⁠장수 형님이 우리 해주를 읍내 병원에 데려다줬어⁠. 당신은 그날 송아지 받고 와서 송아지가 수놈이라고 좋아했지⁠.⁠”

상춘은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기억이 났다⁠. 송아지는 수놈이었고⁠, 해주가 왜 집에 없는지는 아침밥을 먹고 나서야 물었다⁠.

옥련은 한 시간 넘게 말했다⁠. 상춘은 중간에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야기가 끝날 무렵 옥련의 말이 느려지더니 이불 위로 고개가 기울었다⁠. 상춘은 옥련의 어깨 밑에 베개를 밀어 넣고 이불을 끌어 덮어 주었다⁠.

“⁠고생혔네⁠.⁠”

잠든 사람한테 한 말이었다⁠. 고생했다는 한마디가 입 밖으로 나오기까지 서른다섯 해였다⁠. 상춘은 머리맡 불을 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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