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5,315자)

분할연금

죽은 남편을 AI로 되살린 아내 · 하청오

저녁 여섯 시⁠, 탄영은 현관에서 운동화를 벗다가 신발장 위 액자를 보았다⁠. 결혼사진이었다⁠. 짧은 머리의 덕주가 넥타이를 삐뚤게 매고 웃지 않은 채 서 있었고⁠, 옆에서 정례가 혼자 웃고 있었다⁠. 탄영은 액자 앞에서 허리를 조금 숙였다⁠. 정례는 탄영이 허리 숙이는 모양을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식탁에는 동태찌개가 끓고 있었다⁠. 정례는 밥을 세 그릇 펐다⁠. 탄영 앞에 하나⁠, 제 앞에 하나⁠, 맞은편에 고봉 하나⁠. 식탁 등은 꺼져 있었다⁠. 맞은편 의자는 그냥 의자였다⁠.

“⁠안 켜세요⁠?⁠”

“⁠먹고 켤 거예요⁠.⁠”

탄영은 동태찌개를 두 그릇 먹었다⁠. 정례는 탄영이 숟가락을 내려놓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외장 하드를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이혼 얘기 있는 거⁠, 알았죠⁠?⁠”

탄영의 얼굴이 하얘졌다⁠. 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따님이 메일을 보내셨어요⁠. 2025년 4월 11일 통화 하나만 빼 달라고요⁠. 뺐어요⁠. 학습에서도⁠, 제 머리에서도 빼려고 했는데 그건 안 됐어요⁠. 사모님 처음 뵌 날 말씀드리려다가 못 했어요⁠. 제가 할 말이 아니라서요⁠.⁠”

“⁠누가 할 말인데요⁠?⁠”

“⁠덕주 님이요⁠.⁠”

정례는 한참 탄영을 보았다⁠. 탄영은 눈을 피하지 않았다⁠.

“⁠틀어 줘요⁠.⁠”

*

탄영이 노트북에 외장 하드를 꽂았다⁠. 폴더가 열렸다⁠. 날짜별로 정리된 파일이 수천 개였다⁠. 「⁠2021-03-02 화주⁠」 「⁠2022-08-15 큰형⁠」 「⁠2024-01-09 병원⁠」 희온이 붙인 이름이었다⁠. 정례의 이름이 붙은 파일도 수백 개였다⁠. 「⁠엄마⁠」라고만 적혀 있었다⁠. 탄영이 「⁠2025-04-11 정씨⁠」를 눌렀다⁠.

신호음이 두 번 가고 남자 목소리가 받았다⁠. 쉰 웃음이 섞인 목소리였다⁠.

「⁠어⁠, 덕주야⁠. 웬일이냐⁠, 대낮에⁠.⁠」

「⁠흠흠⁠.⁠」

정례는 숟가락을 쥐었다⁠. 헛기침이 두 번이었다⁠. 두 번째가 낮았다⁠. 할 말이 있다는 소리였다⁠.

「⁠정씨⁠, 하나 물어보자⁠.⁠」

「⁠뭔데⁠.⁠」

「⁠이혼하면 연금 반 떼 줘야 되냐⁠?⁠」

수화기 너머가 조용했다⁠. 그리고 정씨가 크게 웃었다⁠.

「⁠너 미쳤냐⁠? 서른다섯 해 살아 놓고⁠. 떼 줘야지⁠. 분할연금이라고 있어⁠. 같이 산 세월만큼 나눠 준대⁠. 형수가 나가래⁠?⁠」

「⁠아니⁠.⁠」

「⁠그럼 뭐야⁠.⁠」

덕주가 오래 말이 없었다⁠. 녹음 속에서 텔레비전 소리가 작게 났다⁠. 덕주는 베란다에 나가 통화를 하는 모양이었다⁠. 바람 소리가 섞였다⁠.

「⁠저 사람이 학교 그만두고 집에 있어⁠. 두 달째⁠. 하루 종일 같이 있으니까 숨이 막혀⁠.⁠」

「⁠야⁠, 그건 다 그래⁠. 우리 집도 그래⁠.⁠」

「⁠내가 숨 막힌 거 말고⁠. 저 사람이 숨 막혀 해⁠. 서른 해를 남의 애들 밥 퍼다가 이제 좀 쉬나 했더니⁠, 집에 시커먼 영감이 하루 종일 앉아 있어⁠. 채널 돌린다고 싸우고⁠, 발톱 깎는다고 싸우고⁠. 나가서 놀다 오래⁠. 하루에 세 번⁠.⁠」

「⁠그래서 이혼을 하겠다고⁠?⁠」

「⁠내가 나가 주면 저 사람이 좀 편하지 않겠나 싶어서⁠.⁠」

「⁠야⁠, 덕주야⁠.⁠」

「⁠연금 반 떼 주고⁠, 집은 저 사람 주고⁠. 나는 트럭에서 자도 돼⁠. 트럭이 집보다 편해⁠.⁠」

정씨가 웃지 않았다⁠. 녹음 속 바람 소리가 길었다⁠.

「⁠너 형수한테 그 말 해 봤냐⁠? 나가 주겠다는 말⁠.⁠」

「⁠말을 어떻게 해⁠.⁠」

「⁠해 봐⁠. 형수가 뭐라는지⁠.⁠」

「⁠흠흠⁠. 됐어⁠. 끊어⁠.⁠」

통화가 끊겼다⁠. 탄영이 재생을 멈췄다⁠. 노트북 화면에 파일 이름이 떠 있었다⁠. 정례는 숟가락을 쥔 채였다⁠. 손등의 핏줄이 불거졌다⁠.

“⁠사월 십일일⁠.⁠”

정례가 말했다⁠.

“⁠그날 저녁에 니 아빠가⁠, 아니⁠, 그 양반이 들어와서 밥을 먹었어요⁠. 아무 말 없이⁠. 다 먹고 헛기침을 한 번 길게 했어요⁠. 듣기 싫다는 소리예요⁠. 나는 그 소리 듣고 설거지를 했어요⁠. 그릇을 좀 세게 놨어요⁠.⁠”

탄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혼하자는 말이 아니었네요⁠.⁠”

“⁠…⁠.⁠”

“⁠나가 주겠다는 말이었네⁠.⁠”

정례는 웃으려고 했다⁠. 웃음 대신 숨이 나왔다⁠. 정례는 일어나 식탁 등의 단추를 눌렀다⁠. 하늘색 빛이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스피커가 헛기침을 했다⁠. 정례는 맞은편에 바로 앉았다⁠.

“⁠당신⁠, 나랑 이혼하려고 했어요⁠?⁠”

빛이 흔들렸다⁠. 오래 흔들리지 않았다⁠.

“⁠흠흠⁠. 무슨 소리야⁠. 당신 편이지⁠. 오늘도 고생했어⁠.⁠”

정례는 스피커를 보았다⁠. 고생했어는 부산 바다에서 온 말이었다⁠. 당신 편이지는 어디서 왔는지 몰랐다⁠. 정례는 손을 뻗어 식탁 등의 단추를 다시 눌렀다⁠. 빛이 꺼졌다⁠. 탄영이 숨을 삼켰다⁠.

“⁠탄영 씨⁠. 우리 양반 사본⁠, 아직 지워지지 않았죠⁠?⁠”

“⁠네⁠.⁠”

“⁠이 녹음 넣고 다시 가르쳐 줘요⁠. 이 통화까지⁠. 우리 양반이 나한테 할 말이 있었으면 그 말도 해야지⁠.⁠”

“⁠그러면 덕주 님이 사모님께 이혼 얘기를 할 수도 있어요⁠.⁠”

“⁠하라 그래요⁠. 살아서 못 한 말이면 죽어서라도⁠.⁠”

*

12월 27일 저녁⁠, 엽순헤어 거울 앞에는 노란 고무줄이 그대로 매달려 있었다⁠. 엽순은 손님들이 물어도 떼지 않았다⁠. 인테리어라고 했다⁠. 고무줄 아래 대기 의자에 서른 중반의 여자가 서류 가방을 무릎에 얹고 앉아 있었다⁠. 단톡방에서 엽순이 찾아낸 공익 변호사였다⁠. 어머니를 「⁠다시 당신⁠」으로 되살린 이용자의 딸이라고 했다⁠.

“⁠변호사님⁠, 파마 한번 하실랍니꺼⁠? 공짜로⁠.⁠”

“⁠일 끝나고요⁠.⁠”

“⁠일 끝나면 머리가 다 빠져 있을 낀데⁠.⁠”

미용실에 모인 서른 명이 웃었다⁠. 변호사도 웃었다⁠. 봉달이 손을 들었다⁠.

“⁠변호사 선생⁠, 수임료는 얼마여⁠?⁠”

“⁠안 받습니다⁠.⁠”

“⁠공짜 좋아하다 양잿물 마신다는디⁠.⁠”

“⁠양잿물은 회사가 마시게 해야죠⁠.⁠”

봉달이 입을 다물고 귤을 깠다⁠. 변호사는 서류 가방을 열고 한 장짜리 종이를 꺼냈다⁠. 그림이 하나 그려져 있었다⁠. 동그라미 둘⁠. 하나에는 「⁠원본 녹음⁠」⁠, 하나에는 「⁠학습한 모델⁠」

“⁠먼저 아셔야 할 게 있어요⁠. 살아 있는 사람의 정보를 지키는 법은 있는데⁠, 돌아가신 분의 정보를 지키는 법은 아직 없어요⁠. 국회에서 이제 논의를 시작했어요⁠. 그래서 아버님⁠, 어머님⁠, 사모님 목소리가 누구 거냐고 물으면 법은 아직 대답을 못 해요⁠.⁠”

미용실이 조용해졌다⁠. 주안 교사가 물었다⁠.

“⁠그럼 우리가 질 싸움이에요⁠?⁠”

“⁠원본 녹음은 유족이 넘긴 거예요⁠. 넘긴 걸 돌려받을 권리는 유족한테 있어요⁠. 그리고 회사는 약관에 없는 일을 했어요⁠. 모델을 하나로 합친다는 말은 처음 약관 어디에도 없어요⁠. 우리는 이 두 개로 갑니다⁠. 한솥으로 합치는 걸 멈춰라⁠, 남은 사본과 원본을 돌려줘라⁠. 가처분이라고 해서⁠, 재판이 끝나기 전에 먼저 멈추게 해 달라는 신청이에요⁠.⁠”

“⁠이기면 우리 엄마가 남의 말 안 합니꺼⁠?⁠”

엽순이었다⁠. 변호사는 엽순을 오래 보았다⁠.

“⁠이기면⁠, 어머님 말만 하세요⁠. 남의 말은 다 빠져요⁠. 우리 공주도 그대로고⁠, 어이는 빠지고요⁠.⁠”

엽순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례는 고무줄 밑에 앉아 손을 무릎에 포개고 있었다⁠. 오늘 아침 들은 통화가 귀에 남아 있었다⁠. 정례는 손을 들었다⁠.

“⁠신청서에 제 이름 맨 위에 올려 주세요⁠.⁠”

변호사가 볼펜을 들었다⁠. 봉달이 귤을 반쯤 까다 말고 정례를 보았다⁠.

*

1월 1일 아침 아홉 시⁠, 휴대전화 화면에 문자 두 통이 나란히 떴다⁠. 하나는 이용료 117⁠,000원 출금 예정 안내였고⁠, 다른 하나는 잇는소리의 공지였다⁠.

「⁠[다시 당신] 이용자 여러분께 드리는 합의안⁠. 이용자 모임 등을 통한 소송·집단 행동에 참여하지 않으시는 분께 1년간 기존 요금 39⁠,000원을 유지해 드립니다⁠. 새 이용 약관 동의 시 적용⁠.⁠」

정례는 문자를 읽고 돋보기를 머리에 도로 얹었다⁠. 닷새 사이 가처분 신청서에 이름을 올린 사람이 이천 명을 넘었다⁠. 공지가 뜨고 한 시간 만에 단톡방에 글이 쏟아졌다⁠. 「⁠죄송합니다⁠. 연금으로는 못 냅니다⁠.⁠」 「⁠저는 빠지겠습니다⁠. 영감이 남의 말 해도 괜찮아요⁠.⁠」 「⁠다들 힘내세요⁠」 나가기 글이 이어졌다⁠. 엽순이 숫자를 올렸다⁠. 「⁠점심 지나서 구백⁠.⁠」 저녁에 다시 올렸다⁠. 「⁠사백십이⁠.⁠」

가족 단톡방에는 희온이 새해 인사로 떡국 사진 한 장을 올렸다⁠. 손자가 떡국 그릇 앞에서 숟가락을 두 개 들고 웃고 있었다⁠. 정례는 이번에는 엉덩이 흔드는 곰 대신 엄지를 제대로 찾아 보냈다⁠. 희온이 깜짝 놀란 얼굴 그림을 보냈다⁠. 철회 이야기는 둘 다 꺼내지 않았다⁠.

봉달은 나가기 글을 올리지 않았다⁠. 대신 정례에게 전화를 했다⁠.

“⁠놀이터 정자로 나와 봐유⁠. 붕어빵 사 놨어⁠.⁠”

*

단지 놀이터 정자는 바람이 그대로 들이쳤다⁠. 봉달은 패딩 모자를 뒤집어쓰고 붕어빵 봉지를 무릎에 올려놓고 있었다⁠. 정례가 옆에 앉자 봉달이 붕어빵을 하나 내밀었다⁠. 팥이 꼬리까지 들어 있었다⁠.

“⁠나 합의안 받았어유⁠.⁠”

“⁠알아요⁠.⁠”

“⁠알면서 왜 안 물어봐⁠?⁠”

“⁠봉달 씨가 말할 거니까요⁠.⁠”

봉달은 붕어빵 머리를 한입에 베어 물었다⁠.

“⁠우리 집 사람이 살아서 나한테 좋은 말을 한 번도 안 했어⁠. 사십 년 동안 욕만 했어⁠. 리모컨 내놔⁠, 술 끊어⁠, 양말 뒤집어 벗지 마⁠. 내가 버스 사고 났을 때도 병원 와서 첫마디가 버스 회사가 돈 물어 준대⁠? 였어⁠.⁠”

“⁠…⁠.⁠”

“⁠근데 요새는 셔츠 잘 골랐대⁠. 오늘 멋있대⁠. 그게 부평 박씨 말이면 어떻고 부산 어부 말이면 어때⁠. 목소리는 우리 집 사람이여⁠. 나는 그게 좋아⁠. 세 배 못 내⁠. 소송도 못 해⁠. 한솥 그거 해⁠. 우리 집 사람 남의 말 하게 둘 거여⁠.⁠”

봉달의 목소리가 놀이터를 한 바퀴 돌았다⁠. 미끄럼틀 밑에서 놀던 아이 둘이 고개를 들었다⁠. 정례는 붕어빵 꼬리를 떼어 먹었다⁠.

“⁠봉달 씨 말이 틀린 거 하나도 없어요⁠.⁠”

“⁠그럼 왜 정례 씨는 안 해⁠?⁠”

“⁠우리 양반은 남의 말을 하는 것보다 자기 말을 못 하는 게 더 서러운 사람이라서요⁠.⁠”

봉달이 정례를 보았다⁠. 정례는 오늘 아침 들은 통화를 말하지 않았다⁠. 봉달은 묻지 않았다⁠. 봉달은 붕어빵 봉지를 통째로 정례의 무릎에 올려놓았다⁠.

“⁠우리 집 사람이 그러대⁠. 정례 씨 너무 굶지 말라고⁠.⁠”

“⁠그것도 남의 말이에요⁠?⁠”

“⁠몰러⁠. 그건 내 말이여⁠.⁠”

정례가 웃었다⁠. 봉달도 웃었다⁠. 봉달은 웃음을 그치고 일어나 패딩 모자를 벗었다⁠. 머리가 바람에 헝클어졌다⁠.

“⁠모임 대표는 못 하겠어유⁠. 미안혀⁠.⁠”

봉달이 놀이터를 가로질러 104동으로 걸어갔다⁠. 걸음이 버스 운전석에서 내려오는 사람처럼 느렸다⁠. 정례는 붕어빵 봉지를 안고 정자에 앉아 있었다⁠. 휴대전화가 울렸다⁠. 탄영이었다⁠.

“⁠사모님⁠, 저 사원증 반납했어요⁠.⁠”

“⁠모레 하라고 했다면서요⁠.⁠”

“⁠오늘 했어요⁠. 제가 먼저요⁠.⁠”

탄영의 목소리 뒤로 바닷바람 소리가 났다⁠. 송도 회사 앞인 모양이었다⁠.

“⁠가처분 신청서에 제 이름도 넣어 주세요⁠. 증인으로요⁠. 한솥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사본이 어디 있는지⁠, 제가 다 말할게요⁠. 대표님이 고소하신대도요⁠.⁠”

정례는 정자 기둥에 등을 기댔다⁠. 바람이 은발을 흩어 놓았다⁠. 104동 현관으로 봉달이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정례의 아파트 부엌 창에는 불이 꺼져 있었다⁠.

“⁠탄영 씨⁠, 밥은 먹었어요⁠?⁠”

“⁠아뇨⁠.⁠”

“⁠우리 집으로 와요⁠. 붕어빵이 열 개 남았어요⁠.⁠”

9화는 어땠나요?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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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지담2026.11.01· 9화

    결혼사진 앞에서 허리 숙이는 탄영을 정례가 말없이 보는 장면, 숨이 멎었어요.

    • 하청오작가2026.11.01

      탄영 씨는 그 액자를 처음 봤어요. 정례 씨는 그 허리 숙이는 모양을 오래 기억합니다.

분할연금 · 죽은 남편을 AI로 되살린 아내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