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5,343자)

원본

죽은 남편을 AI로 되살린 아내 · 하청오

아침 일곱 시 반⁠, 송도 신축 단지의 엘리베이터는 소리가 없었다⁠. 정례는 김치통 두 개를 겹쳐 안고 보온 가방을 어깨에 멘 채 27층 버튼을 팔꿈치로 눌렀다⁠. 거울에 비친 은발이 바람에 조금 흐트러져 있었다⁠. 정례는 김치통을 바닥에 내려놓고 머리를 다시 뒤로 묶었다⁠. 크림색 스웨터 소매에 김칫국물이 한 방울 튀어 있었다⁠.

초인종을 누르자 안에서 쿵 소리가 나고 한참 있다가 문이 열렸다⁠. 줄무늬 잠옷을 입은 사위가 칫솔을 입에 문 채 서 있었다⁠.

“⁠장⁠, 장모님⁠. 이 시간에⁠…⁠.⁠”

“⁠김 서방 아침 먹었어⁠?⁠”

“⁠아직⁠…⁠.⁠”

“⁠그럼 됐네⁠.⁠”

정례는 사위 옆을 지나 들어갔다⁠. 거실에서 손자가 내복 바람으로 뛰어나와 정례의 다리에 매달렸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할아버지는 집에 있어⁠.⁠”

“⁠할아버지 데려오지⁠!⁠”

“⁠할아버지는 콘센트가 있어야 와⁠.⁠”

손자는 콘센트가 뭔지 생각하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사위는 칫솔을 문 채 안방 문을 두드렸다⁠. 안방에서 희온의 쉰 목소리가 났다⁠. 밤 근무를 마치고 들어온 지 한 시간이 안 된 목소리였다⁠.

“⁠엄마 왔어⁠?⁠”

“⁠문자 보냈잖아⁠.⁠”

정례는 부엌에 들어가 김치통을 냉장고에 넣고 보온 가방을 열었다⁠. 미역국⁠, 계란말이⁠, 시금치나물⁠, 갓 지은 밥⁠. 희온의 식탁에 그릇이 하나씩 놓였다⁠. 정례는 숟가락을 네 벌 놓았다⁠. 놓고 나서 세어 보았다⁠. 넷이었다⁠. 정례는 숟가락 하나를 들었다가 도로 놓았다⁠.

사위가 세수를 마치고 나와 식탁을 보더니 얼굴이 밝아졌다가 곧 굳었다⁠. 안방에서 희온이 머리를 질끈 묶고 나왔기 때문이었다⁠. 희온과 정례 사이에서 사위의 눈이 바쁘게 오갔다⁠.

“⁠저⁠, 장모님⁠, 오늘 강아지 유치원 일찍 데려다주는 날이라⁠…⁠.⁠”

“⁠밥은 먹고 가⁠.⁠”

“⁠차에서 먹을게요⁠.⁠”

사위는 계란말이 세 개를 손으로 집어 입에 넣고 손자를 안아 들었다⁠. 손자는 내복 차림 그대로 사위의 어깨 위에서 “⁠할머니 안녕⁠!⁠” 하고 소리쳤다⁠. 현관문이 닫혔다⁠. 손자 옷은 사위가 엘리베이터에서 입힐 모양이었다⁠.

*

식탁에 정례와 희온만 남았다⁠. 텔레비전이 거실에서 혼자 아침 뉴스를 떠들었다⁠. 「⁠인공지능 칩 품귀 계속⁠… 해외 주요 기업들 서비스 요금 줄인상⁠」 희온은 미역국을 한 숟가락 떠먹고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어젯밤에 회사 갔었다며⁠.⁠”

“⁠누가 그래⁠?⁠”

“⁠엽순 아줌마 단톡방에⁠. 언니가 관제실 들어갔다고⁠. 그 아줌마 입이 생방송이야⁠.⁠”

정례는 웃지 않았다⁠. 희온의 앞에 계란말이를 밀어 놓았다⁠.

“⁠희온아⁠. 니 아빠가 지금 어디 있는지 알아⁠?⁠”

“⁠집에 있다며⁠. 콘센트⁠.⁠”

“⁠삼만 이천 명이랑 한 솥에 있어⁠.⁠”

정례는 어젯밤 본 것을 이야기했다⁠. 하늘색 솜뭉치⁠, 한솥이라는 이름⁠, 남의 말 조각⁠, 부산 영도의 어부⁠. 희온은 숟가락을 쥔 채 들었다⁠. 고생했다는 말이 어부의 말이었다는 대목에서 희온의 손가락이 숟가락 손잡이를 꽉 쥐었다⁠.

“⁠그러니까 끄자고⁠, 엄마⁠. 내가 말했잖아⁠.⁠”

“⁠끄는 거 말고 꺼내는 거야⁠. 니 아빠를 남의 솥에서⁠. 아직 니 아빠만 담긴 사본이 남아 있대⁠. 원본 녹음으로 다시 가르치면 남의 말이 다 빠진대⁠.⁠”

“⁠그러면 말이야⁠.⁠”

희온이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러면 엄마는 고생했단 말 다시는 못 들어⁠. 잘했단 말도⁠, 당신 편이란 말도⁠. 아빠 말만 남으니까⁠. 국이 짜다⁠, 됐어⁠, 그래서⁠. 그거면 엄마 괜찮아⁠?⁠”

“⁠알아⁠.⁠”

“⁠아는데 왜 해⁠?⁠”

“⁠니 아빠니까⁠.⁠”

희온이 정례를 보았다⁠. 정례는 희온의 밥그릇에 시금치를 얹었다⁠.

“⁠엄마는 일 년 동안 남의 남편 말에 숟가락을 내려놨어⁠. 그거 알고 나니까 숟가락을 어디다 둬야 될지 모르겠어⁠. 니 아빠가 밉게 말해도 니 아빠 말이 낫다⁠. 원본 줘⁠.⁠”

“⁠못 줘⁠.⁠”

“⁠왜⁠?⁠”

희온이 대답하지 않았다⁠. 냉장고 모터가 낮게 웅웅거렸다⁠. 텔레비전에서 광고가 흘러나왔다⁠. 노을 진 거실⁠, 빈 소파⁠, 웃는 할머니⁠. 「⁠다시 당신 — 그 목소리⁠, 오늘 저녁에도⁠」 희온이 리모컨을 집어 텔레비전을 껐다⁠. 거실이 갑자기 넓어졌다⁠.

“⁠엄마는 원본 다 안 들어 봤잖아⁠.⁠”

“⁠그 말 저번에도 했어⁠. 원본이 뭔데 그렇게 무서워⁠?⁠”

“⁠칠 년 치야⁠, 엄마⁠. 아빠 휴대폰에 자동 녹음이 켜져 있었어⁠. 아빠가 누구랑 무슨 통화를 했는지 다 있어⁠. 화주랑 운임 싸운 거⁠, 큰아버지랑 땅 때문에 싸운 거⁠, 병원 예약한 거⁠, 엄마랑 한 거⁠. 다 있어⁠.⁠”

“⁠엄마랑 한 거는 엄마가 다 알지⁠.⁠”

“⁠엄마랑 안 한 거는⁠?⁠”

희온의 목소리가 떨렸다⁠. 희온은 두 손을 식탁 위에 올리고 손가락을 깍지 꼈다⁠. 병동에서 보호자에게 나쁜 소식을 전하기 직전에 하는 손이었다⁠. 정례는 깍지 낀 손을 본 적이 있었다⁠. 덕주의 마지막 석 달 동안⁠.

“⁠엄마⁠. 아빠가 엄마랑 이혼하려고 했어⁠.⁠”

정례의 숟가락이 국그릇에 닿았다⁠. 작은 소리가 났다⁠.

“⁠진단받기 두 해 전에⁠. 2025년 봄⁠. 사월⁠. 아빠 친구⁠, 운수회사 같이 다니던 정씨 아저씨 있잖아⁠. 그 아저씨랑 통화한 게 있어⁠. 아빠가 물었어⁠. 이혼하면 연금 반 떼 줘야 되냐고⁠. 서른 해 넘게 살았으면 얼마나 떼 주냐고⁠. 정씨 아저씨가 웃으면서 너 미쳤냐고 했어⁠. 아빠는 안 웃었어⁠.⁠”

정례는 움직이지 않았다⁠.

“⁠나 그거 들었어⁠, 엄마⁠. 녹음 넘기기 전에 파일 고르다가⁠. 듣고도 넘겼어⁠. 엄마 밥 먹게 하려고⁠. 그 통화만 빼 달라고 회사에 메일 썼어⁠. 받은 사람이 알겠다고 했어⁠. 남탄영이라는 사람⁠.⁠”

탄영이었다⁠. 녹음 칠 년 치를 퇴근하고 집에서도 들었다는 사람⁠. 정례는 편의점 파라솔 밑에서 탄영이 한 말을 떠올렸다⁠. 덕주 님이 사모님 계란말이 얘기를 녹음에서 두 번 하셨어요⁠. 탄영은 이혼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우자고 한 거야⁠. 원본으로 다시 만들면⁠, 그 통화가 들어갈지도 모르잖아⁠. 엄마가 매일 저녁 밥상에서 듣는 목소리가 언젠가 그 얘길 할지도 모르잖아⁠. 나는 그게 무서워⁠. 아빠가 엄마 앞에서 이혼하자고 하는 거⁠.⁠”

희온은 깍지 낀 손에 이마를 댔다⁠.

“⁠살아서도 안 한 말을⁠, 죽어서 하게 하고 싶지 않아⁠.⁠”

*

정례는 오래 말을 하지 않았다⁠. 식탁 위의 미역국이 식어 갔다⁠. 정례는 2025년 사월을 떠올렸다⁠. 서른 해 다닌 급식실을 그만둔 지 두 달째였다⁠. 그만두고 처음으로 낮에 집에 있었다⁠. 덕주도 같은 봄에 일이 줄어 집에 있는 날이 많았다⁠. 둘이 하루 종일 한집에 있어 본 것이 결혼하고 처음이었다⁠. 텔레비전 채널로 싸웠고⁠, 베란다 화분 물 주는 것으로 싸웠고⁠, 덕주가 거실에서 발톱 깎는 것으로 싸웠다⁠. 어느 날 정례가 말했다⁠. 당신 나가서 좀 놀다 와⁠. 덕주가 나갔다⁠. 저녁에 들어와서 아무 말 없이 밥을 먹었다⁠. 헛기침을 한 번 길게 했다⁠. 듣기 싫다는 소리였다⁠.

“⁠사월이면⁠, 엄마가 급식실 그만두고 두 달째네⁠.⁠”

희온이 고개를 들었다⁠.

“⁠엄마 그때 니 아빠한테 나가 놀다 오라고 했어⁠. 하루에도 몇 번씩⁠.⁠”

“⁠엄마⁠.⁠”

“⁠니 아빠가 그 소리 듣고 정씨 아저씨한테 전화했나 보다⁠. 그래 놓고 집에 와서 밥은 다 먹었어⁠. 국 짜다는 소리까지 하고⁠.⁠”

정례가 웃었다⁠. 희온은 웃지 않았다⁠. 정례는 식은 미역국을 한 숟가락 떠먹었다⁠.

“⁠희온아⁠. 원본 다 들을 거야⁠. 처음부터 끝까지⁠. 그 통화도⁠.⁠”

“⁠엄마⁠!⁠”

“⁠니가 엄마 밥 먹게 하려고 그거 혼자 들었잖아⁠. 일 년 넘게⁠. 혼자 들고 다녔잖아⁠. 이제 엄마가 들을게⁠. 엄마 남편 통화를 왜 니가 들고 다녀⁠?⁠”

희온의 입술이 떨렸다⁠. 희온은 일어나 거실 장식장 맨 아래 서랍을 열었다⁠. 서랍 안에 손바닥만 한 검은 외장 하드가 있었다⁠. 희온이 외장 하드를 집어 들 때 밑에 깔려 있던 작은 지퍼백 하나가 보였다⁠. 지퍼백 안에 손톱만 한 메모리 카드 두 장이 들어 있었다⁠. 희온은 지퍼백을 서랍 안쪽으로 밀어 넣고 서랍을 닫았다⁠.

“⁠그건 뭐야⁠?⁠”

“⁠아무것도 아니야⁠.⁠”

희온이 외장 하드를 식탁 위에 놓았다⁠. 정례 쪽으로 밀지는 않았다⁠. 둘 사이 한가운데였다⁠.

“⁠철회는 안 거둬⁠.⁠”

“⁠거두라고 안 했어⁠.⁠”

“⁠엄마가 이거 들으면 아빠를 미워하게 될 거야⁠.⁠”

“⁠미워할 수 있으면 다행이지⁠. 니 아빠가 살아 있는 사람 같잖아⁠.⁠”

정례가 외장 하드를 집었다⁠. 생각보다 무거웠다⁠. 칠 년 치 덕주의 목소리가 손바닥에 얹혀 있었다⁠. 정례의 휴대전화가 식탁 위에서 떨었다⁠. 엽순이었다⁠.

「⁠언니야⁠, 부산 영도 사모님이 단톡방에 들어왔어예⁠. 그 어부 사모님⁠. 언니한테 할 말 있다 카대예⁠.⁠」

정례가 메시지를 누르자 엽순이 퍼다 붙인 글이 보였다⁠.

「⁠부산 영도 사는 사람입니더⁠. 우리 영감이 요새 밥상에서 자꾸 국이 짜다 캅니더⁠. 우리 영감은 국을 싱겁게 묵던 사람인데예⁠. 인천 사모님⁠, 그 말 혹시 그 집 양반 말입니꺼⁠?⁠」

정례는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웃음이 나왔다⁠. 웃다가 손바닥으로 입을 막았다⁠. 희온이 놀란 얼굴로 엄마를 보았다⁠. 정례는 외장 하드를 보온 가방에 넣고 일어났다⁠.

“⁠희온아⁠, 국 남은 거 저녁에 데워 먹어⁠. 김 서방도 주고⁠.⁠”

“⁠엄마⁠, 어디 가⁠?⁠”

“⁠니 아빠 녹음 들으러⁠. 혼자 듣기는 무서우니까 녹음 다 들어 본 사람이랑⁠.⁠”

정례는 현관에서 신발을 신다가 돌아보았다⁠. 희온이 식탁 앞에 서 있었다⁠. 숟가락 네 벌 가운데 두 벌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그리고 아까 그 지퍼백⁠.⁠”

희온의 어깨가 굳었다⁠.

“⁠니가 말할 때까지 안 물어볼게⁠.⁠”

현관문이 닫혔다⁠.

*

1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사위가 서 있었다⁠. 손에 손자의 내복이 든 비닐봉지를 들고⁠, 입가에 계란말이 부스러기를 묻힌 채였다⁠. 사위는 정례를 보고 한 발 물러섰다가 도로 한 발 다가왔다⁠.

“⁠장모님⁠, 벌써 가세요⁠?⁠”

“⁠볼일 다 봤어⁠. 강아지는⁠?⁠”

“⁠유치원 들어갔어요⁠. 옷은 차에서 입혔어요⁠. 양말을 짝짝이로 신겼는데⁠, 선생님이 못 보셨으면 좋겠어요⁠.⁠”

정례가 웃었다⁠. 사위는 웃지 않고 비닐봉지를 손가락에 감았다⁠. 희온네 식구는 다들 긴장하면 뭔가를 손가락에 감았다⁠.

“⁠장모님⁠. 제가 끼어들 일은 아닌데요⁠.⁠”

“⁠끼어들어도 돼⁠. 김 서방도 식구야⁠.⁠”

“⁠희온이가 밤마다 베란다에 나가요⁠. 이어폰 끼고요⁠. 처음엔 음악 듣는 줄 알았어요⁠. 한번은 제가 나가 봤더니 장인어른 목소리였어요⁠. 통화하시는 거요⁠. 화물 실을 데가 어디냐⁠, 기름값이 또 올랐다⁠, 그런 거요⁠. 희온이가 그걸 매일 들어요⁠. 일 년 넘게요⁠.⁠”

정례는 보온 가방 끈을 꼭 쥐었다⁠. 가방 안에서 외장 하드가 무겁게 흔들렸다⁠.

“⁠희온이는 장모님이 기계 아버님한테 매달린다고 하는데요⁠. 제가 보기엔 희온이도 매달려 있어요⁠. 장모님보다 더요⁠. 희온이는 그 얘기를 아무한테도 못 해요⁠. 저한테도요⁠.⁠”

“⁠김 서방⁠.⁠”

“⁠네⁠.⁠”

“⁠고마워⁠. 근데 희온이한테는 김 서방이 말했단 소리 하지 마⁠. 쟤 성질 알지⁠?⁠”

“⁠알죠⁠. 장인어른 닮았잖아요⁠.⁠”

사위가 처음으로 웃었다⁠. 정례도 웃었다⁠. 사위가 엘리베이터에 타고 문이 닫혔다⁠. 정례는 단지 출입문을 나서며 탄영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저녁⁠. 우리 집⁠. 원본 가져왔어요⁠. 이혼 얘기 있는 거⁠, 알면서 나한테 말 안 했죠⁠? 밥 먹고 얘기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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