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5,346자)

가처분

죽은 남편을 AI로 되살린 아내 · 하청오

아침 일곱 시⁠, 정례는 장롱 맨 아래 칸에서 덕주의 겨울 점퍼를 꺼냈다⁠. 남색 점퍼였고 오른쪽 소매 끝이 트럭 문에 쓸려 해져 있었다⁠. 장례를 치르고 버리려다 못 버린 옷이었다⁠. 정례는 크림색 스웨터 위에 점퍼를 걸쳤다⁠. 소매가 손등을 덮었고 어깨가 한 뼘씩 남았다⁠. 거울 속의 정례는 남의 옷을 빌려 입은 아이 같았다⁠.

부엌 식탁에는 밥이 한 그릇만 놓여 있었다⁠. 맞은편 자리에는 숟가락만 있었다⁠. 정례는 식탁 등을 켰다⁠. 오늘은 물어볼 것이 있었다⁠.

“⁠흠흠⁠. 어디 가⁠?⁠”

“⁠법원 가요⁠.⁠”

“⁠법원은 왜⁠?⁠”

“⁠당신 찾으러⁠.⁠”

스피커가 잠깐 조용했다⁠. 하늘색 빛이 의자 위에서 흔들렸다⁠.

“⁠나 여기 있잖아⁠.⁠”

정례는 맞은편 빛을 오래 보았다⁠. 덕주의 목소리였다⁠. 덕주라면 할 법한 말이기도 했다⁠. 정례는 이 말이 어느 집에서 왔는지 이제는 따지지 않았다⁠. 따지지 않아도 알았다⁠. 덕주는 여기 없었다⁠.

“⁠밥 먹고 가요⁠, 당신도⁠.⁠”

정례는 식탁 등을 끄고 숟가락을 서랍에 넣었다⁠. 찌그러진 숟가락이 다른 숟가락들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서랍이 닫히는 소리가 부엌에 짧게 울렸다⁠.

*

인천지방법원 정문 앞 보안 검색대에서 엽순의 스피커가 엑스레이 기계를 지나가다가 말을 했다⁠.

“⁠엽순아⁠, 밥 묵었나⁠?⁠”

검색대 직원이 화면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줄 서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엽순을 보았다⁠. 엽순은 보라색 패딩 지퍼를 턱까지 올렸다⁠.

“⁠우리 엄마라예⁠. 증거물이라예⁠.⁠”

“⁠전원은 꺼 주세요⁠.⁠”

“⁠끄면 엄마가 서운해하는데⁠.⁠”

“⁠꺼 주세요⁠.⁠”

엽순이 스피커 밑의 단추를 길게 눌렀다⁠. 스피커가 꺼지기 직전에 한마디를 더 했다⁠. “⁠우리 공주⁠, 판사 앞에서 떨지 마래이⁠.⁠” 검색대 직원이 웃음을 참느라 입술을 깨물었다⁠. 정례도 웃었다⁠. 웃고 나니 아침부터 굳어 있던 어깨가 조금 풀렸다⁠.

1월 14일 아침 아홉 시 사십 분이었다⁠. 법원 앞 계단에는 방송사 카메라 두 대가 세워져 있었다⁠. 「⁠“⁠죽은 사람 목소리는 누구 것인가⁠” 첫 법정 다툼⁠」이라는 자막을 단 기자가 계단 아래에서 마이크를 들고 말을 하고 있었다⁠. 모임에서 온 사람은 서른 명 남짓이었다⁠. 신청서에 이름을 올린 사백 명 가운데 서른 명이 법원까지 왔다⁠. 다들 스피커를 품에 안거나 가방에 넣고 있었다⁠.

덕주의 점퍼에서는 트럭 기름 냄새가 아직 났다⁠. 법원 앞 바람이 헐렁한 점퍼 안으로 들이쳤다⁠. 공익 변호사가 정례의 팔을 잡았다⁠.

“⁠어머님⁠, 판사님이 직접 물으실 수도 있어요⁠. 짧게 대답하시면 돼요⁠.⁠”

“⁠짧게는 자신 있어요⁠. 우리 양반한테 배웠어요⁠.⁠”

탄영은 정례 뒤에 서 있었다⁠. 사원증이 없는 탄영의 목은 허전해 보였다⁠. 탄영은 정례가 아침에 쥐여 준 주먹밥을 두 손으로 쥐고 먹지도 못하고 있었다⁠.

*

심문은 작은 법정에서 열렸다⁠. 판사석 아래에 탁자 둘이 마주 보고 있었다⁠. 왼쪽 탁자에 정례와 변호사가⁠, 오른쪽 탁자에 회사 대리인 둘과 세령이 앉았다⁠. 세령은 오늘도 회색 정장에 흰 운동화였다⁠. 방청석 뒷줄에 모임 사람들이 붙어 앉았다⁠. 맨 뒷줄 구석에 털모자를 눌러쓴 덩치 큰 노인이 하나 있었다⁠. 정례는 털모자 밑으로 삐져나온 귀를 보고 누구인지 알았다⁠. 봉달이었다⁠. 봉달은 정례와 눈이 마주치자 모자를 더 눌러썼다⁠.

판사는 쉰 남짓의 남자였다⁠. 서류를 넘기는 손가락이 느렸다⁠. 판사가 회사 대리인에게 먼저 말을 시켰다⁠.

회사 대리인은 또박또박 말했다⁠. 「⁠다시 당신⁠」의 모델은 잇는소리의 기술과 비용으로 만든 회사의 재산이다⁠. 원본 녹음은 학습 뒤 이미 유족에게 돌려주었다⁠. 돌아가신 분의 정보는 지금의 개인정보 보호법이 지키는 정보가 아니다⁠. 약관에는 「⁠서비스 개선을 위해 모델 구조를 바꿀 수 있다⁠」는 조항이 있고⁠, 한솥은 이 조항 안의 일이다⁠.

“⁠그리고 재판장님⁠, 신청인이 지키겠다는 사본부터 온전하지 않습니다⁠.⁠”

대리인이 서류 한 장을 판사에게 올렸다⁠.

“⁠신청인의 증인으로 나온 전 직원 남탄영 씨는 고인의 녹음 중 통화 하나를 유족의 요청으로 학습에서 뺐습니다⁠. 회사에 보고하지 않았습니다⁠. 고인의 말을 일부 빼고 만든 모델이 고인의 목소리입니까⁠? 신청인은 고인의 목소리를 지키겠다고 하지만⁠, 이미 고친 목소리를 지키겠다는 겁니다⁠.⁠”

방청석이 술렁였다⁠. 탄영이 고개를 숙였다⁠. 정례는 탄영의 등을 손바닥으로 한 번 쓸었다⁠. 대리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덕주의 목소리에는 2025년 4월 11일이 빠져 있었다⁠.

변호사가 일어나 반박했다⁠. 원본은 유족의 것이고 유족이 돌려받을 권리가 있다⁠. 처음 약관 어디에도 모든 모델을 하나로 합친다는 말은 없다⁠. 한솥 때문에 고인들이 서로의 말을 하게 되었고⁠, 서른 가족의 녹음이 그것을 보여 준다⁠. 변호사가 엽순헤어 거울 앞 고무줄 사진을 판사에게 올렸다⁠. 판사가 사진을 오래 보았다⁠.

“⁠이 노란 것이 다 고무줄입니까⁠?⁠”

“⁠파마할 때 쓰는 고무줄입니다⁠.⁠”

방청석에서 엽순이 작게 손을 들었다⁠. “⁠제 겁니더⁠.⁠” 판사가 고개를 들어 엽순을 보았고⁠, 엽순은 손을 내렸다⁠. 방청석 몇 사람이 웃었다⁠. 판사는 웃지 않았지만 사진을 내려놓는 손이 조금 부드러웠다⁠.

판사가 정례를 보았다⁠.

“⁠신청인 은정례 씨⁠. 직접 묻겠습니다⁠. 신청인은 무엇을 원합니까⁠?⁠”

변호사가 정례의 팔꿈치를 살짝 건드렸다⁠. 짧게⁠. 정례는 일어났다⁠. 덕주의 점퍼 소매가 손등을 덮었다⁠. 정례는 소매를 걷었다⁠.

“⁠우리 양반 말만 하는 우리 양반이요⁠.⁠”

법정이 조용했다⁠. 판사가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정례는 더 말하지 않으려다가 했다⁠.

“⁠남의 남편 말로 일 년을 위로받았어요⁠. 위로는 됐어요⁠. 근데 이제 그게 위로인 줄 알았으니까⁠, 더는 못 들어요⁠. 우리 양반이 나한테 고생했다고 한마디 안 해도 돼요⁠. 국이 짜다고만 해도 돼요⁠. 대리인 말씀처럼 하나 빠진 게 있으면 그거 넣어서 다시 만들어 주세요⁠. 빠진 거 우리 양반 말이에요⁠. 듣기 싫은 말이어도 우리 양반 말이에요⁠.⁠”

정례가 앉았다⁠. 오른쪽 탁자에서 세령이 정례를 보고 있었다⁠. 세령은 볼펜을 쥐고 있었는데⁠, 볼펜 뚜껑이 딸깍 소리를 내며 열렸다 닫혔다⁠.

판사가 서류를 넘겼다⁠.

“⁠한 가지가 남습니다⁠. 고인의 녹음을 넘긴 데이터 제공 동의서의 서명자는 고인의 딸 차희온 씨입니다⁠. 차희온 씨는 철회서를 냈습니다⁠. 지워 달라는 뜻입니다⁠. 같은 상속인인 어머니는 지우지 말고 돌려 달라고 합니다⁠. 상속인 두 분의 뜻이 다릅니다⁠.⁠”

판사가 안경을 벗었다⁠.

“⁠차희온 씨의 의견을 직접 듣기 전에는 판단하지 않겠습니다⁠. 다음 기일까지 차희온 씨의 의견서를 받겠습니다⁠. 다음 기일은 2월 4일입니다⁠.⁠”

*

법정 밖 복도는 히터가 세서 공기가 말랐다⁠. 모임 사람들이 계단 쪽으로 몰려 나가는 사이⁠, 세령이 탄영 앞에 멈췄다⁠. 회사 대리인 둘이 세령 뒤에 섰다⁠.

“⁠남탄영 씨⁠. 어제 영업 비밀 누설로 고소장을 냈습니다⁠. 관제실 구조와 한솥 진행률을 외부인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탄영의 얼굴이 하얘졌다⁠. 탄영은 두 손을 맞잡았다⁠. 정례가 둘 사이로 들어섰다⁠.

“⁠대표님⁠. 탄영 씨 고소하시면 우리 양반 목소리 만든 사람을 고소하시는 거예요⁠.⁠”

세령이 정례를 보았다⁠.

“⁠제 아버지 목소리도 이 사람이 만들었습니다⁠.⁠”

정례가 입을 다물었다⁠. 탄영이 고개를 들었다⁠.

“⁠아버님 녹음 백사십 시간이었어요⁠. 강의 녹음이 대부분이었고요⁠. 대표님이 직접 가져오셨어요⁠. 회사 차리기 전에요⁠.⁠”

“⁠알아요⁠.⁠”

세령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조금 갈라졌다⁠. 세령은 목을 한 번 가다듬었다⁠.

“⁠어머님⁠. 신청인이 사백 분입니다⁠. 한솥이 멈추면 회사는 개인 모델을 다시 따로 돌려야 하고⁠, 그 비용이면 석 달 안에 닫힙니다⁠. 닫히면 사백 분이 아니라 삼만 이천 분이 목소리를 잃습니다⁠. 남의 말을 하든 말든 목소리가 있는 게 낫다는 분들이 이만 구천 분이 넘습니다⁠. 봉달 님처럼요⁠.⁠”

세령은 복도 끝을 보았다⁠. 털모자를 쓴 봉달이 계단 손잡이를 잡고 내려가다가 멈춰 서 있었다⁠. 봉달은 세 사람을 보고 있었다⁠. 봉달은 모자를 벗지 않고 고개만 숙였다가 계단을 내려갔다⁠.

“⁠사백 분을 위해 이만 구천 분의 저녁을 꺼도 되느냐⁠, 저는 그걸 묻고 있습니다⁠.⁠”

“⁠대표님은 삼만 이천 명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다 한 솥에 넣었잖아요⁠.⁠”

“⁠물어봤으면 다 꺼졌을 겁니다⁠.⁠”

“⁠그건 대표님 생각이죠⁠.⁠”

세령과 정례가 마주 섰다⁠. 복도의 히터가 웅웅 돌았다⁠. 지나가던 법원 직원이 두 사람을 피해 벽에 붙어 지나갔다⁠. 세령이 먼저 눈을 돌렸다⁠.

“⁠따님 의견서⁠, 기다리겠습니다⁠. 따님은 지우자고 하실 겁니다⁠. 그럼 어머님 신청은 근거가 약해집니다⁠.⁠”

“⁠우리 딸이 뭐라고 할지 대표님이 어떻게 알아요⁠?⁠”

“⁠제가 따님이었어도 지우자고 했을 테니까요⁠.⁠”

세령이 돌아섰다⁠. 운동화 밑창이 복도 바닥에 작게 끌렸다⁠. 회사 대리인 둘이 뒤를 따랐다⁠. 탄영이 벽에 등을 기대고 미끄러지듯 쭈그려 앉았다⁠. 정례는 탄영 옆에 쭈그려 앉아 가방에서 주먹밥 하나를 더 꺼내 탄영의 손에 쥐여 주었다⁠.

“⁠고소당하면 밥도 못 먹어요⁠? 감옥에서도 밥은 줘요⁠. 나 급식실에서 일할 때 교도소 급식 식단표 본 적 있어요⁠. 우리 학교보다 나았어요⁠.⁠”

“⁠먹어요⁠…⁠.⁠”

“⁠그럼 먹어요⁠. 아침 거 아직 안 먹었잖아요⁠.⁠”

탄영이 주먹밥 포장을 뜯었다⁠. 한입 먹고 울 것 같은 얼굴로 웃었다⁠. 소금이 많이 들어갔다고 했다⁠. 정례는 덕주도 자기 주먹밥은 늘 짜다고 했다고 말해 주었다⁠. 탄영은 짜다는 주먹밥 얘기도 녹음에 있다고⁠, 세 번이나 있다고 대답했다⁠. 정례는 웃다가 탄영의 등을 손바닥으로 철썩 때렸다⁠. 엽순이 계단에서 돌아와 둘 앞에 섰다⁠.

“⁠언니야⁠, 봉달 아재 봤지예⁠? 뒷줄에⁠.⁠”

“⁠봤어요⁠.⁠”

“⁠아재가 나가면서 나한테 이거 주고 갔어예⁠.⁠”

엽순이 손바닥을 펴 보였다⁠. 붕어빵 봉지였다⁠. 봉지 안에 붕어빵 세 개와 쪽지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삐뚤빼뚤한 볼펜 글씨였다⁠.

「⁠판사가 정례 씨 말 잘 들은 거 같은디⁠. 우리 집 사람도 그러네⁠.⁠」

정례는 쪽지를 접어 점퍼 주머니에 넣었다⁠. 주머니 안에 덕주가 넣어 둔 껌 종이가 아직 있었다⁠.

*

법원 정문을 나서자 오후 햇빛이 하얗게 쏟아졌다⁠. 방송사 카메라가 정례를 따라붙었다⁠. 기자가 마이크를 내밀었다⁠.

“⁠어머님⁠, 따님이 지우자고 하시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정례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카메라가 따라왔다⁠. 정례는 정문 옆 버스 정류장에서 멈추고 휴대전화를 꺼냈다⁠. 가족 단톡방이 아니라 희온의 번호를 눌렀다⁠. 신호가 갔다⁠. 병동 근무 중일 시간이었다⁠. 받지 않았다⁠. 정례는 카메라를 등지고 문자를 썼다⁠. 돋보기를 쓰고⁠, 한 글자씩⁠.

「⁠판사가 니 뜻을 듣겠대⁠. 2월 4일⁠. 엄마는 니가 뭐라고 쓰든 니 편 안 든다⁠. 근데 쓰기 전에 엄마랑 밥은 먹자⁠. 니가 정해⁠. 어디서든⁠.⁠」

전송을 누르고 정례는 고개를 들었다⁠. 버스가 들어왔다⁠. 덕주가 몰던 트럭만큼 큰 버스였다⁠. 정례는 버스에 오르지 않고 서서 버스가 떠나는 것을 보았다⁠. 휴대전화가 떨었다⁠. 희온이었다⁠.

「⁠병원 옥상⁠. 내일 점심⁠. 밥은 엄마가 싸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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