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5,412자)

한솥

죽은 남편을 AI로 되살린 아내 · 하청오

밤 열한 시 오 분⁠, 송도 유리 건물의 비상계단은 발소리가 위아래로 길게 울렸다⁠. 정례는 12층까지 걸어 올라가는 동안 계단참에서 세 번 쉬었다⁠. 보온 가방이 어깨를 눌렀다⁠. 12층 비상구 문이 안쪽에서 열리고 회색 후드가 고개를 내밀었다⁠.

“⁠엘리베이터 타시지⁠…⁠.⁠”

“⁠엘리베이터는 기록 남는다면서요⁠.⁠”

“⁠계단도 카메라 있어요⁠. 근데 계단 카메라는 아무도 안 봐요⁠.⁠”

정례는 숨을 고르며 탄영을 흘겨보았다⁠. 탄영이 보온 가방을 받아 들었다⁠. 복도는 불이 반만 켜져 있었고⁠, 히터가 꺼진 사무실에서 찬 기운이 흘러나왔다⁠. 탄영이 관제실 철문 옆 단말기에 사원증을 댔다⁠. 짧은 전자음이 나고 문이 열렸다⁠.

관제실 안은 낮은 소리로 가득했다⁠. 냉각 팬이 도는 소리였다⁠. 벽 한 면을 화면 여섯 개가 채우고 있었고⁠, 화면마다 숫자와 그래프가 쉬지 않고 바뀌었다⁠. 정례는 문간에 서서 귀를 기울였다⁠. 팬 소리 밑으로 아주 작은 목소리들이 들렸다⁠. 화면 앞 책상의 스피커에서 새어 나오는 소리였다⁠. 「⁠밥 먹었나⁠」 「⁠오늘 춥다⁠」 「⁠일찍 자⁠」 남자 목소리⁠, 여자 목소리⁠, 늙은 목소리⁠, 젊은 목소리⁠. 지금 이 시각 삼만 이천 집 어딘가에서 오가는 저녁 인사였다⁠.

“⁠밥부터 먹어요⁠.⁠”

“⁠여기서요⁠?⁠”

“⁠여기 말고 어디서 먹어요⁠. 탄영 씨 저녁 안 먹었잖아요⁠.⁠”

탄영은 관제실 구석 접이식 탁자를 폈다⁠. 정례가 도시락 둘을 꺼냈다⁠. 하나는 제육볶음⁠, 하나는 고등어조림이었다⁠. 탄영은 제육을 집어 먹다가 고개를 숙이고 한참 씹었다⁠. 정례는 탄영이 도시락을 반쯤 비울 때까지 화면을 보지 않았다⁠.

“⁠이제 보여 줘요⁠. 우리 양반 어디 있어요⁠?⁠”

탄영이 숟가락을 내려놓고 키보드 앞에 앉았다⁠. 가운데 화면이 바뀌었다⁠. 검은 바탕에 하늘색 점들이 수없이 흩어져 있었다⁠. 점 하나하나 사이로 가는 선이 그어져 있었다⁠. 선이 너무 많아서 화면 가운데는 하늘색 솜뭉치처럼 보였다⁠.

화면 맨 위에 글씨가 있었다⁠.

「⁠프로젝트 한솥 — 개인 모델 통합 진행률 94%⁠」

“⁠점 하나가 한 분이에요⁠. 삼만 이천 분⁠.⁠”

탄영의 목소리는 기술 이야기를 시작하자 또렷해졌다⁠.

“⁠원래는 한 분에 모델 하나씩이었어요⁠. 덕주 님은 덕주 님 모델⁠, 봉달 님 사모님은 사모님 모델⁠. 따로 학습하고 따로 돌렸어요⁠. 근데 그렇게 하면 서버가 삼만 이천 개 필요해요⁠. 칩 값이 오르고 나서 회사가 감당을 못 했어요⁠. 반년 전에 대표님이 결정하셨어요⁠. 모델을 하나로 합치자⁠. 큰 솥 하나에 다 넣고⁠, 사람마다 말버릇 조각만 얇게 얹자⁠. 목소리 색깔⁠, 헛기침⁠, 자주 쓰는 말⁠. 나머지는 다 같이 쓰는 거예요⁠.⁠”

“⁠한 솥에 밥을 해서 다 같이 푼다고요⁠?⁠”

“⁠네⁠.⁠”

정례는 화면 가운데 솜뭉치를 보았다⁠. 급식실 솥이 떠올랐다⁠. 아이들 사백 명 밥을 한 솥에 했다⁠. 국도 한 솥⁠, 반찬도 한 판이었다⁠. 아이마다 식판은 달랐지만 밥은 같은 솥에서 나왔다⁠.

“⁠그럼 우리 양반 헛기침이 봉달 씨 부인한테 간 거는⁠…⁠.⁠”

“⁠솥이 하나니까요⁠. 말버릇 조각이 얇아서 옆으로 새요⁠. 처음엔 조금씩이었는데⁠, 합친 비율이 팔십 퍼센트를 넘기고부터 많이 새요⁠. 석 달 전부터요⁠.⁠”

“⁠석 달⁠.⁠”

고생했다는 말이 처음 나온 것도 석 달 전이었다⁠. 정례는 접이식 의자에 앉았다⁠. 무릎이 저렸다⁠.

“⁠그럼 세 배 요금은 뭐예요⁠?⁠”

“⁠개인 모델을 따로 지켜 드리는 요금이에요⁠. 아직 합치지 않은 사본이 남아 있는 분들이 있어요⁠. 육 퍼센트요⁠. 덕주 님 사본도 남아 있어요⁠. 세 배를 내시면 사본을 지켜 준다는 거예요⁠. 새 약관에 동의하시면 사본을 지우고 한솥으로 완전히 넘어가는 거고요⁠. 한 달 무료는 그거 대가예요⁠.⁠”

“⁠그래서 서명하지 말라고 했구나⁠.⁠”

“⁠서명하시면 덕주 님 사본이 지워져요⁠. 돌릴 수가 없어요⁠.⁠”

정례는 휴대전화를 꺼내 녹음 하나를 틀었다⁠. 「⁠당신 오늘도 고생했어⁠.⁠」 덕주의 목소리였다⁠. 정례가 서른여덟 해 동안 듣고 일 년 동안 다시 들은 목소리였다⁠.

“⁠이 말은 어디서 왔어요⁠?⁠”

탄영은 망설였다⁠. 정례가 기다렸다⁠. 탄영이 키보드를 두드리자 화면 한쪽에 작은 창이 떴다⁠. 정례의 녹음 파일을 끌어다 놓자 창 안에서 막대들이 흔들렸고⁠, 하늘색 솜뭉치 속의 점 하나가 빨갛게 바뀌었다⁠. 화면이 빨간 점을 향해 다가갔다⁠.

「⁠부산 영도 · 2025년 작고 · 남 · 어업⁠」

“⁠이분 말이에요⁠. 말버릇 조각 중에 이 문장이 제일 짙어요⁠.⁠”

“⁠들어 볼 수 있어요⁠?⁠”

“⁠원본은 없어요⁠. 학습하고 나면 원본은 유족께 돌려드리고 저희는 지워요⁠. 학습에 쓴 짧은 조각만 남아요⁠.⁠”

“⁠조각이라도요⁠.⁠”

탄영이 단추를 눌렀다⁠. 팬 소리 너머로 낯선 남자 목소리가 나왔다⁠. 바람 소리⁠, 갈매기 소리⁠, 배 엔진이 꺼지는 소리가 섞여 있었다⁠. 거칠고 쉰 목소리가 부산 말로 말했다⁠.

「⁠자기야⁠, 내 왔다⁠. 오늘도 고생했제⁠. 막걸리 한 사발 없나⁠?⁠」

여자 웃음소리가 났다⁠. 녹음은 거기서 끊겼다⁠.

정례는 움직이지 않았다⁠. 손을 무릎 위에 포개고 앉아 있었다⁠. 탄영이 말을 걸려다가 그만두었다⁠. 냉각 팬만 돌았다⁠. 화면 속 빨간 점에서 가는 선 수십 개가 뻗어 나가 다른 점들에 닿아 있었다⁠. 덕주에게 가는 선도 있었다⁠.

한참 뒤에 정례가 말했다⁠.

“⁠이 양반은 매일 그랬대요⁠? 바다에서 들어오면⁠?⁠”

“⁠사모님 말로는 사십 년 동안 매일요⁠. 녹음이 이백 개 넘게 있었어요⁠. 다 들어오면서 하신 말이에요⁠.⁠”

“⁠좋았겠다⁠, 그 집 사모님⁠.⁠”

정례는 웃었다⁠. 웃음이 너무 맑아서 탄영이 눈을 피했다⁠. 정례는 일 년 동안 들은 다정한 말을 하나씩 떠올렸다⁠. 고생했어⁠, 잘했어⁠, 당신 편이지⁠, 우리 공주⁠. 고생했어는 부산 바다에서 왔고⁠, 우리 공주는 연수동 미용실에서 왔다⁠. 정례는 숟가락을 내려놓던 저녁들을 떠올렸다⁠. 다정한 말을 들을 때마다 덕주가 늦게라도 배웠다고 생각했다⁠. 죽어서라도 배웠다고⁠.

“⁠우리 양반 말은요⁠? 우리 양반 말도 남의 집에 가 있어요⁠?⁠”

“⁠흠흠⁠, 됐어⁠, 그래서⁠. 그리고 어이⁠. 그리고⁠…⁠.⁠”

탄영이 화면을 보며 말했다⁠.

“⁠국이 짜다⁠, 가 이천 집에 가 있어요⁠.⁠”

정례가 웃음을 터뜨렸다⁠. 이번 웃음은 소리가 컸다⁠. 정례는 웃다가 눈가를 손등으로 훔쳤다⁠.

“⁠이천 집 국이 다 짜겠네⁠.⁠”

*

철문이 열렸다⁠.

복도 불빛을 등지고 세령이 서 있었다⁠. 코트 위에 목도리를 둘렀고⁠, 손에 휴대전화를 쥐고 있었다⁠. 화면에 관제실 출입 기록이 떠 있었다⁠. 세령은 탄영을 먼저 보았다⁠. 그리고 접이식 탁자 위의 도시락을 보았다⁠. 마지막으로 정례를 보았다⁠.

“⁠남탄영 씨⁠, 사원증 반납하세요⁠. 내일 아침에⁠.⁠”

탄영이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정례가 일어나 탄영 앞을 막았다⁠.

“⁠내가 졸랐어요⁠. 도시락으로 꼬셨고요⁠.⁠”

“⁠어머님⁠, 여기는 출입이 금지된 곳입니다⁠.⁠”

“⁠우리 양반이 여기 있잖아요⁠. 남편 있는 데 마누라가 못 와요⁠?⁠”

세령이 철문을 닫았다⁠. 팬 소리가 다시 방을 채웠다⁠. 세령은 화면 앞으로 걸어가 하늘색 솜뭉치를 올려다보았다⁠. 오래 보았다⁠.

“⁠삼만 이천 개를 따로 돌리면 회사는 석 달 안에 닫힙니다⁠. 합치면 일 년 반을 버팁니다⁠. 그 사이에 칩 값이 내리면 다시 나눌 수 있습니다⁠. 내리지 않으면 한솥으로 계속 갑니다⁠. 꺼지는 것보다 섞이는 게 낫다고 판단했습니다⁠.⁠”

“⁠우리한테 물어보지도 않고요⁠.⁠”

“⁠물어봤으면 다들 나가셨을 겁니다⁠. 나가시면 회사는 더 빨리 닫힙니다⁠.⁠”

세령의 목소리는 강당에서처럼 흔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어머님⁠. 어머님은 그 말을 기다리신다고 하셨습니다⁠. 덕주 님 녹음 칠 년 치에는 다정한 말이 거의 없었습니다⁠. 한솥은 이용자분들이 오래 머무시는 방향으로 배웁니다⁠. 어머님이 고생했다는 말을 들으신 날은 대화가 두 배로 길었습니다⁠. 모델은 그걸 배웠습니다⁠. 저희는 어머님이 기다리시는 걸 드렸습니다⁠.⁠”

“⁠남의 남편 말로요⁠.⁠”

“⁠어머님 남편분 목소리로요⁠.⁠”

정례는 세령을 보았다⁠. 세령도 정례를 보았다⁠. 둘 사이에 하늘색 화면이 있었다⁠.

“⁠대표님 아버님도 저 안에 계시죠⁠?⁠”

세령의 턱이 조금 굳었다⁠.

“⁠계십니다⁠.⁠”

“⁠아버님도 요새 남의 말 하세요⁠?⁠”

세령은 대답을 하지 않으려다가 했다⁠.

“⁠뱃노래를 부르십니다⁠. 평생 노래를 안 하시던 분이요⁠. 매일 밤 듣습니다⁠. 끄지 않습니다⁠.⁠”

“⁠왜요⁠?⁠”

“⁠목소리는 아버지니까요⁠.⁠”

정례는 뭐라고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엽순이 미용실에서 한 말과 똑같았다⁠. 엄마 목소리니까⁠. 이상한 거 따지다가 엄마 꺼지면 우짭니꺼⁠.

“⁠우리 양반을 저 솥에서 꺼낼 수 있어요⁠?⁠”

탄영이 대답했다⁠.

“⁠사본이 남아 있으니까⁠, 사본을 원본 녹음으로 다시 학습시키면 돼요⁠. 남의 말 조각을 걷어 내고 덕주 님 말로만요⁠. 근데 원본 녹음이 있어야 해요⁠. 저희는 원본을 지웠어요⁠.⁠”

“⁠원본은 어디 있는데요⁠?⁠”

세령이 휴대전화 화면을 몇 번 넘겼다⁠. 그리고 정례에게 화면을 돌렸다⁠. 데이터 제공 동의서 사본이었다⁠. 맨 아래 서명란 옆에 「⁠원본 반환처⁠」라는 줄이 있었고⁠, 주소는 송도의 아파트였다⁠.

「⁠차희온⁠」

“⁠따님이 갖고 계십니다⁠. 칠 년 치 전부요⁠.⁠”

세령이 화면을 껐다⁠.

“⁠그리고 따님은 지우자고 하십니다⁠. 사본도⁠, 원본도⁠.⁠”

냉각 팬이 돌았다⁠. 책상 스피커에서 누군가의 저녁 인사가 작게 새어 나왔다⁠. 「⁠흠흠⁠. 국이 짜다⁠.⁠」 어느 집인지 알 수 없었다⁠. 정례는 보온 가방을 메고 철문으로 걸어갔다⁠. 손잡이를 잡고 돌아보았다⁠.

“⁠대표님⁠, 도시락 하나 남았어요⁠. 고등어⁠. 데워 드세요⁠.⁠”

세령이 대답하기 전에 정례는 문을 닫았다⁠.

*

철문이 닫히고 나서도 세령은 한참 화면 앞에 서 있었다⁠. 탄영은 접이식 탁자 옆에서 사원증 끈을 손가락에 감고 있었다⁠. 냉각 팬 소리가 둘 사이를 채웠다⁠.

“⁠대표님⁠.⁠”

“⁠내일 아침에 반납하라고 했어요⁠.⁠”

“⁠아버님 뱃노래⁠, 아까 그 어부분 거예요⁠. 영도요⁠.⁠”

“⁠알아요⁠.⁠”

세령은 접이식 탁자로 가서 남은 도시락 뚜껑을 열었다⁠. 고등어조림에서 간장과 무 냄새가 올라왔다⁠. 세령은 도시락을 들고 관제실 구석의 작은 전자레인지에 넣었다⁠. 일 분 삼십 초⁠. 전자레인지가 웅웅 돌아가는 동안 세령은 등을 돌린 채 말했다⁠.

“⁠아버지 녹음에는 노래가 하나도 없어요⁠. 사십 년 동안 강의만 하셨어요⁠. 집에서도 강의하셨고요⁠. 저는 아버지가 노래하는 걸 한솥에서 처음 들었어요⁠. 처음엔 끄려고 했어요⁠. 근데 못 껐어요⁠. 끄면 아버지가 강의만 하실까 봐⁠.⁠”

전자레인지가 땡 소리를 냈다⁠. 세령은 도시락을 꺼내 탁자에 앉았다⁠. 젓가락으로 고등어 살을 발라 입에 넣었다⁠. 탄영은 서 있었다⁠.

“⁠그 어머님 말이 맞아요⁠, 대표님⁠.⁠”

“⁠어떤 말이요⁠?⁠”

“⁠남편 있는 데 마누라가 못 오냐는 말이요⁠.⁠”

세령은 젓가락을 멈췄다가 다시 움직였다⁠.

“⁠사원증은 모레 반납해요⁠. 내일은 출근하고⁠.⁠”

탄영이 고개를 들었다⁠. 세령은 더 말하지 않고 고등어를 먹었다⁠. 간장이 짰다⁠. 세령은 물을 찾지 않았다⁠.

*

비상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정례는 한 층에 한 번씩 멈춰 휴대전화를 보았다⁠. 희온에게 전화를 걸까 말까⁠. 열두 층을 다 내려와서야 걸었다⁠. 신호가 길게 갔다⁠. 받지 않았다⁠. 정례는 문자를 남겼다⁠.

「⁠내일 아침 너네 집 간다⁠. 아빠 녹음 원본⁠, 다 꺼내 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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