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5,323자)

동의서

죽은 남편을 AI로 되살린 아내 · 하청오

초인종이 두 번 울렸다⁠. 정례는 고무장갑을 낀 채 인터폰 화면을 보았다⁠. 회색 정장에 흰 운동화⁠, 손에는 정례의 반찬통 세 개를 겹쳐 든 여자가 서 있었다⁠. 통은 씻겨서 반짝였다⁠. 정례는 장갑을 벗지도 않고 문을 열었다⁠.

“⁠십오일에 받으러 간다고 했는데요⁠.⁠”

“⁠지나는 길이었습니다⁠.⁠”

“⁠송도에서 우리 동네가 지나는 길이에요⁠?⁠”

표세령은 대답 대신 반찬통을 내밀었다⁠. 맨 위 통에서 깻잎 냄새가 아직 났다⁠. 정례는 통을 받아 들고 뚜껑을 열어 보았다⁠. 깻잎이 한 장도 없었다⁠. 간장 한 방울 없이 말갛게 씻겨 있었다⁠.

“⁠직원들이 드셨어요⁠?⁠”

“⁠제가 먹었습니다⁠. 밤에⁠. 혼자⁠.⁠”

정례가 웃음을 터뜨렸다⁠. 세령은 웃지 않았지만 귀 끝이 붉어졌다⁠. 정례는 문을 활짝 열었다⁠.

“⁠들어와요⁠. 점심 안 드셨죠⁠? 입술 보니까 안 드셨네⁠.⁠”

세령은 현관에서 운동화를 벗는 데 한참 걸렸다⁠. 끈을 너무 꽉 묶어 놓았다⁠. 거실에 들어선 세령의 눈이 부엌 식탁에서 멈췄다⁠. 식탁 등이 켜져 있었고⁠, 맞은편 의자에 하늘색 빛이 앉아 있었다⁠. 낮 열두 시의 햇빛이 창으로 쏟아져 빛 윤곽은 거의 투명했다⁠.

“⁠흠흠⁠. 손님 왔냐⁠.⁠”

세령의 걸음이 아주 짧게 멈췄다⁠. 정례는 짧은 멈춤을 놓치지 않았다⁠. 날마다 이 목소리를 파는 사람인데⁠, 남의 부엌에서 듣는 목소리는 다르게 들리는 모양이었다⁠.

정례는 뭇국을 데우고 김장 김치를 썰었다⁠. 세령을 빛 옆자리에 앉히려 하자 세령이 사양하고 대각선 자리에 앉았다⁠. 정례는 밥을 세 그릇 펐다⁠. 세령 앞에 하나⁠, 제 앞에 하나⁠, 맞은편 빛 앞에 고봉으로 하나⁠.

“⁠이건 안 드시는 건데요⁠.⁠”

“⁠알아요⁠. 우리 집 양반도 생전에 반은 남겼어요⁠.⁠”

세령은 김치 한 조각을 입에 넣고 눈을 감았다⁠. 오래 씹었다⁠. 정례는 세령이 김치를 삼키고 숟가락을 국에 넣을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급식실에서 배운 것이었다⁠. 밥 먹는 사람에게는 첫 숟가락을 뜰 때까지 말을 걸지 않는다⁠.

“⁠용건 말씀하세요⁠. 지나는 길에 반찬통만 주러 오신 거 아니잖아요⁠.⁠”

세령이 숟가락을 내려놓고 가방에서 태블릿을 꺼냈다⁠. 화면에 광고 시안이 떠 있었다⁠. 겨울 부엌⁠, 식탁⁠, 하늘색 빛⁠, 그리고 은발을 뒤로 묶은 여자의 뒷모습⁠. 여자는 크림색 털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정례는 제 스웨터를 내려다보았다⁠.

“⁠로비 영상이 돌았습니다⁠. 엽순 원장님 채널에서요⁠. 조회 수가 사만이 넘었어요⁠. 어머님이 반찬통 여시는 장면이요⁠.⁠”

“⁠엽순 씨가 그걸 올렸어요⁠?⁠”

“⁠생방송이었으니까요⁠.⁠”

정례는 이마를 짚었다⁠. 세령이 화면을 넘겼다⁠.

“⁠새 광고 「⁠다시 당신과 차린 저녁⁠」의 얼굴이 되어 주셨으면 합니다⁠. 어머님 밥상을 그대로 찍겠습니다⁠. 대신 어머님 요금은 지금 그대로⁠, 39⁠,000원으로 평생 묶어 드리겠습니다⁠. 계약서에 적어 드립니다⁠.⁠”

“⁠평생이요⁠? 내가 백 살까지 살면요⁠?⁠”

“⁠백 살까지요⁠.⁠”

“⁠회사가 봄 전에 문 닫는다면서요⁠.⁠”

세령이 잠깐 말을 멈췄다⁠. 정례는 김치를 한 조각 더 세령의 밥 위에 얹었다⁠.

“⁠해외에는 같은 서비스를 한 달에 삼백 달러 받는 회사도 있습니다⁠. 저희는 그렇게는 못 합니다⁠. 국회에서 논의하는 법안이 통과되면 죽은 분의 목소리를 광고에 쓰는 것도 막힐 수 있습니다⁠. 그 전에 사람들이 이 서비스를 알아야 합니다⁠. 어머님 같은 분이 화면에 나오시면 모임 분들도 안심하실 겁니다⁠.⁠”

“⁠모임 분들이 안심하시면 모임이 없어지겠네요⁠.⁠”

세령이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는 것이 대답이었다⁠.

“⁠대표님⁠. 나 로비에서 백 명 데려간다고 했지⁠, 나 혼자 싸게 해 달라고 한 적 없어요⁠. 우리 미용실에 서른한 명이 와서 김밥 먹고 갔어요⁠. 그 사람들은 나 광고 나오는 거 보면서 십일만 칠천 원 내라고요⁠?⁠”

“⁠그분들께도 차차⁠…⁠.⁠”

“⁠차차는 됐고요⁠.⁠”

“⁠흠흠⁠. 됐어⁠.⁠”

스피커가 끼어들었다⁠. 정례와 세령이 동시에 맞은편을 보았다⁠. 하늘색 빛이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앉아 있었다⁠. 정례는 웃음이 터져 국을 흘릴 뻔했다⁠. 세령은 입술을 꾹 다물었는데⁠, 다문 입술 끝이 떨렸다⁠.

세령이 태블릿을 덮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한 가지만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머님이 요금을 내시든 안 내시든⁠, 덕주 님 모델은 다음 달 말에 지워야 할 수도 있습니다⁠.⁠”

“⁠왜요⁠?⁠”

“⁠덕주 님 녹음을 학습에 쓰겠다는 데이터 제공 동의서는 유족 한 분이 서명합니다⁠. 서명하신 분이 철회서를 내시면 저희는 모델을 지워야 합니다⁠. 어제 철회서가 들어왔습니다⁠.⁠”

“⁠누가요⁠? 서명한 사람이 누군데요⁠?⁠”

세령이 정례를 똑바로 보았다⁠.

“⁠차희온 님입니다⁠. 따님이요⁠.⁠”

부엌이 조용해졌다⁠. 밥솥의 보온 표시등이 째깍 소리를 냈다⁠. 정례는 밥그릇을 손바닥으로 감쌌다⁠. 그릇이 아직 따뜻했다⁠.

“⁠우리 희온이가요⁠?⁠”

“⁠동의서도⁠, 녹음 파일도 따님이 넘기셨습니다⁠. 일 년 전 겨울에요⁠. 이용료 반도 따님 계좌에서 나갑니다⁠. 어머님은 계약자가 아니세요⁠. 이용자이십니다⁠.⁠”

정례는 한 해 전 겨울을 떠올렸다⁠. 장례를 치르고 석 달 동안 밥을 거의 못 먹었다⁠. 희온이 어느 날 상자 하나를 들고 와서 식탁에 스피커와 등을 놓고 갔다⁠. 엄마⁠, 이거 한번 켜 봐⁠. 희온이 한 말은 이 한마디였다⁠. 어디서 났는지⁠, 누가 무엇에 서명했는지 정례는 묻지 않았다⁠. 켰더니 덕주가 헛기침을 했다⁠. 스피커를 켠 저녁부터 정례는 밥을 먹었다⁠.

“⁠그럼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있습니다⁠.⁠”

세령이 가방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식탁 위에 놓았다⁠. 「⁠철회 반대 의견서⁠」라는 제목이 맨 위에 있었다⁠.

“⁠어머님도 덕주 님의 상속인이십니다⁠. 다른 상속인이 반대 의견을 내시면 다툼이 끝날 때까지 모델을 지우지 않고 보존합니다⁠. 저희 약관이 그렇습니다⁠.⁠”

“⁠다툼이요⁠.⁠”

“⁠따님과 다투신다는 뜻입니다⁠. 서류로요⁠.⁠”

세령은 일어나 현관으로 갔다⁠. 운동화 끈을 다시 꽉 묶는 데 또 한참 걸렸다⁠. 정례가 현관까지 따라 나가자 세령이 허리를 펴며 말했다⁠.

“⁠김치 맛있었습니다⁠.⁠”

“⁠의견서는 왜 주시는 거예요⁠? 우리 양반 지우면 대표님은 손님 하나 주는 건데⁠.⁠”

“⁠손님 하나 주는 거죠⁠.⁠”

세령은 문을 열고 나갔다⁠. 엘리베이터가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정례는 문을 닫고 식탁으로 돌아왔다⁠. 세령의 밥그릇이 깨끗하게 비어 있었다⁠.

정례는 설거지를 하다 말고 엽순에게 전화를 걸었다⁠. 엽순은 손님 머리를 감기는 중이었는지 물소리 너머로 받았다⁠.

“⁠엽순 씨⁠, 로비 영상 올렸어요⁠?⁠”

“⁠올렸지예⁠. 생방송은 끝나도 남습니더⁠. 사만 넘었어예⁠, 언니⁠. 댓글이 천 개⁠.⁠”

“⁠나 반찬통 여는 거를 사만 명이 봤다고요⁠?⁠”

“⁠깻잎이 인기 많습니더⁠. 레시피 알려 달라는 댓글이 반이라예⁠.⁠”

정례는 할 말을 잃고 수돗물을 잠갔다⁠. 통화에 봉달이 끼어들었다⁠. 엽순이 세 사람 통화를 걸 줄 안다는 것을 정례는 오늘 처음 알았다⁠. 봉달의 목소리는 휴대전화를 귀에서 한 뼘 떼어도 잘 들렸다⁠.

“⁠정례 씨⁠, 광고 들어왔다매⁠? 출연료는 얼마여⁠?⁠”

“⁠거절했어요⁠.⁠”

“⁠왜⁠! 아까워라⁠. 나 같으면 버스 광고까지 찍는디⁠. 내가 버스 앞에 서 있으면 그림이 나와유⁠.⁠”

“⁠봉달 씨 버스는 퇴직했잖아요⁠.⁠”

“⁠버스는 퇴직해도 얼굴은 현역이여⁠.⁠”

엽순이 물소리 너머에서 깔깔 웃었다⁠. 정례도 웃었다⁠. 웃고 나서 의견서 이야기를 꺼낼까 하다가 말았다⁠. 딸과 서류로 싸울 일을 단톡방 사람들에게 먼저 알릴 수는 없었다⁠.

*

희온이 일하는 대학병원 호흡기내과 병동은 9층이었다⁠. 정례는 보온 가방에 김밥 스무 줄을 싸 들고 갔다⁠. 간호사실 앞에서 김밥을 내려놓자 연두색 근무복을 입은 간호사들이 어디선가 나타나 순식간에 열 줄을 가져갔다⁠.

“⁠어머니⁠, 희온 선생님 어머니시죠⁠? 작년에 아버님 계실 때 김밥 싸 오셨던⁠.⁠”

“⁠그때도 이 김밥이에요⁠. 계란 두 장 들어간 거⁠.⁠”

“⁠희온 선생님 지금 휴게실이요⁠. 저희가 오 분 벌어 드릴게요⁠.⁠”

휴게실은 창고 옆 좁은 방이었다⁠. 희온은 마스크를 턱에 걸고 컵라면에 물을 붓다가 정례를 보고 주전자를 내려놓았다⁠.

“⁠엄마가 여기 왜 와⁠.⁠”

“⁠대표가 우리 집에 왔다 갔어⁠.⁠”

희온의 얼굴이 굳었다⁠. 정례는 김밥 한 줄을 컵라면 뚜껑 위에 올려놓았다⁠.

“⁠네가 서명했다며⁠. 동의서⁠.⁠”

“⁠…⁠.⁠”

“⁠철회서도 네가 냈다며⁠.⁠”

희온이 의자에 앉았다⁠. 컵라면에서 김이 올라왔다⁠. 정례도 맞은편에 앉았다⁠. 둘 사이에 작은 탁자 하나였다⁠.

“⁠엄마⁠, 장례 끝나고 석 달 동안 밥 안 먹었잖아⁠. 칠 킬로 빠졌어⁠. 내가 매일 저녁 전화하면 엄마는 먹었다고 하고⁠, 가 보면 밥솥이 비어 있었어⁠. 그때 병동 선배가 이런 서비스가 있다고 했어⁠. 그래서 아빠 휴대폰을 열었어⁠. 통화 녹음이 자동으로 돼 있더라⁠. 칠 년 치가⁠.⁠”

“⁠그래서 넘겼구나⁠.⁠”

“⁠엄마가 밥 먹게 하려고⁠. 그거 하나 때문에⁠.⁠”

“⁠그럼 이제 왜 지우는데⁠? 엄마 밥 먹잖아⁠. 두 그릇씩⁠.⁠”

희온이 김밥을 집었다가 내려놓았다⁠.

“⁠공주 들었잖아⁠, 엄마⁠. 저건 아빠 말이 아니야⁠. 남의 말을 아빠 목소리로 하는 거야⁠. 엄마가 그걸 아빠 말로 믿고 매일 저녁을 먹는 게⁠, 나는 싫어⁠. 그리고⁠…⁠.⁠”

희온이 말을 멈췄다⁠.

“⁠그리고 뭐⁠?⁠”

“⁠엄마는 원본 다 안 들어 봤잖아⁠.⁠”

“⁠원본이 뭔데⁠?⁠”

희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휴게실 문이 열리고 간호사 하나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선생님⁠, 7호실 콜이요⁠. 김밥 진짜 맛있어요⁠, 어머니⁠.⁠” 희온이 마스크를 올리고 일어났다⁠.

“⁠철회 안 거둬⁠, 엄마⁠. 다음 달 말에 아빠 지워⁠. 엄마가 거기 안 매달리게⁠.⁠”

“⁠엄마가 반대서 내면⁠?⁠”

희온이 문손잡이를 잡은 채 돌아보았다⁠. 마스크 위로 눈만 보였다⁠. 덕주의 눈이었다⁠.

“⁠그럼 엄마랑 나랑 싸우는 거지⁠.⁠”

*

저녁 일곱 시⁠, 정례는 밥상을 차렸다⁠. 밥 두 그릇⁠, 숟가락 두 벌⁠, 그리고 숟가락 옆에 의견서 한 장⁠. 맞은편 빛이 의자에 앉았다⁠.

“⁠흠흠⁠. 밥 먹자⁠.⁠”

“⁠당신⁠, 희온이랑 나랑 싸우면 누구 편이에요⁠?⁠”

스피커가 조용했다가 대답했다⁠.

“⁠당신 편이지⁠.⁠”

정례는 볼펜을 쥔 채 맞은편을 보았다⁠. 살아 있던 덕주라면 “⁠몰라⁠”라고 했을 것이다⁠. 아니면 텔레비전 소리를 키웠을 것이다⁠. 남편 목소리가 남편이 안 할 말을 할 때마다 정례는 귀가 따끔했다⁠. 따끔한데⁠, 듣기는 좋았다⁠. 정례는 듣기 좋은 것이 제일 싫었다⁠.

정례는 돋보기를 머리에서 내려 쓰고 의견서 맨 아래에 서명했다⁠. 글씨가 조금 떨렸다⁠. 휴대전화를 들어 희온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다섯 번 가고 희온이 받았다⁠. 병동 기계 소리가 뒤에서 삑삑 울렸다⁠.

“⁠엄마 반대서 냈다⁠.⁠”

긴 숨소리가 들렸다⁠.

“⁠그럼 우리 이제 서류로 싸우는 거네⁠.⁠”

“⁠싸우는 건 싸우는 거고⁠, 일요일에 김치통은 가져와⁠. 비우면 갖고 오랬지⁠.⁠”

희온이 전화를 끊었다⁠. 정례는 휴대전화를 엎어 놓고 국을 떴다⁠. 맞은편 국그릇에서 김이 올라와 하늘색 윤곽을 흐리게 지나갔다⁠. 단톡방이 울렸다⁠. 엽순이었다⁠. 「⁠모임 쉰여섯 명 됐습니더⁠. 언니 영상 덕분⁠.⁠」 봉달이 확인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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