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5,361자)

결정

죽은 남편을 AI로 되살린 아내 · 하청오

이레째 되는 날 아침⁠, 대표실 창가의 화분에 물이 고여 있었다⁠. 누가 물을 준 모양이었다⁠. 갈라졌던 흙이 검게 젖어 있었다⁠. 책상 위의 쪼글쪼글한 귤은 없어졌다⁠. 껍질이 휴지통에 들어 있었다⁠.

세령은 책상 앞에 앉아 있었고⁠, 맞은편 의자 셋에 정례와 희온과 봉달이 앉았다⁠. 의자가 모자라 엽순은 문간에 서 있었다⁠. 엽순은 대표실이 작다고⁠, 자기 미용실 대기실보다 작다고 들어오면서 두 번 말했다⁠. 세령은 두 번 다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책상 서랍에서 종이컵 다섯 개를 꺼내 하나씩 물을 따라 돌렸다⁠. 컵마다 물이 반보다 조금 많았다⁠.

“⁠취하 안 해요⁠.⁠”

정례가 먼저 말했다⁠. 세령은 놀라지 않았다⁠.

“⁠그럼 2월 말에⁠…⁠.⁠”

“⁠닫지 마세요⁠. 대표님이 닫는 이유를 우리가 치울게요⁠.⁠”

세령의 눈썹이 움직였다⁠. 정례가 희온을 보았다⁠. 희온이 서류 한 장을 책상 위에 놓았다⁠. 손글씨였다⁠. 희온이 밤 근무를 마치고 새벽에 쓴 글씨였다⁠.

“⁠대표님이 걱정하시는 거⁠, 결정 나면 이만 구천 집한테 다시 동의를 받아야 한다는 거잖아요⁠. 동의 받는 데 돈이 들고 시간이 들고⁠, 한 집이라도 싫다고 하면 빼야 하고⁠.⁠”

“⁠그렇습니다⁠.⁠”

“⁠그 동의⁠, 저희가 받아 올게요⁠. 두 숟가락 조합이요⁠. 한솥을 계속 쓰실 분은 섞여도 좋다고 동의서를 쓰시고⁠, 싫으신 분은 조합으로 사본을 옮기시고요⁠. 회사는 동의서만 받으시면 돼요⁠.⁠”

“⁠이만 구천 집입니다⁠.⁠”

엽순이 문간에서 손을 들었다⁠.

“⁠대표님⁠, 우리 단톡방이 처음엔 셋이었어예⁠. 한 달 만에 이천사백이었고예⁠. 이만 구천은 넉넉잡아 석 달이라예⁠. 반장들이 동네마다 돌면 됩니더⁠. 경로당⁠, 미용실⁠, 교회⁠, 노래 교실⁠.⁠”

봉달이 헛기침을 했다⁠. 진짜 봉달의 헛기침이었다⁠. 크고 길었다⁠.

“⁠나부터 쓸 거여⁠. 우리 집 사람 남의 말 섞어도 된다고⁠. 대신 우리 집 사람 말도 남의 집에 가도 된다고⁠. 리모컨 내놔⁠, 그 말은 전국에 다 퍼져도 돼⁠.⁠”

세령이 봉달을 보았다⁠. 봉달은 털모자를 벗어 무릎에 놓았다⁠.

“⁠대표 양반⁠. 나는 한솥이 좋아유⁠. 근데 동의는 받고 섞어⁠. 우리 집 사람은 살아서 남한테 뭐 빌려줄 때 꼭 물어보고 빌려줬어⁠. 귤 한 개도⁠.⁠”

대표실이 조용했다⁠. 창밖으로 송도 바다 위를 갈매기 한 마리가 낮게 지나갔다⁠. 세령은 희온의 손글씨를 다시 읽었다⁠. 이번에도 한 줄도 건너뛰지 않았다⁠.

“⁠동의서를 받아 오시면 한솥은 법원 결정과 상관없이 갈 수 있습니다⁠. 사본을 조합에 넘겨도 회사가 따로 돌릴 비용은 안 듭니다⁠.⁠”

“⁠그러니까 안 닫으셔도 되잖아요⁠.⁠”

“⁠기술 대가는 받겠습니다⁠. 조합이 쓰는 개인 모델은 저희 기술입니다⁠.⁠”

“⁠드릴게요⁠. 원가 받고 원가로 드릴게요⁠. 우리 탄영 씨가 계산해 왔어요⁠.⁠”

세령은 대답하지 않았다⁠. 볼펜 뚜껑이 딸깍⁠, 딸깍 두 번 열렸다 닫혔다⁠.

“⁠결정을 보겠습니다⁠. 결정이 어떻게 나든 같은 자리에서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

2월 25일 오후 두 시⁠, 인천지방법원 정문 앞 계단은 바람이 잦아들어 있었다⁠. 결정문은 전자 소송으로 먼저 왔다⁠. 변호사가 계단 중간에 서서 휴대전화 화면을 읽었다⁠. 정례와 희온⁠, 엽순과 봉달⁠, 탄영⁠, 모임 사람 열댓 명이 계단 위아래로 변호사를 둘러쌌다⁠. 기자 둘이 계단 아래에서 카메라를 들었다⁠.

“⁠주문만 읽을게요⁠.⁠”

변호사의 목소리가 떨렸다⁠.

“⁠하나⁠. 회사는 신청인들이 지정한 고인의 개인 모델 사본을 결정이 확정될 때까지 지우거나 공용 모델에 합쳐서는 안 된다⁠. 둘⁠. 회사는 신청인들이 요구하면 고인의 원본 녹음과 개인 모델 사본을 신청인들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셋⁠. 회사는 신청인들 고인의 말과 목소리를 해당 유족의 동의 없이 다른 고인의 모델에 섞어 써서는 안 된다⁠.⁠”

계단이 조용했다⁠. 엽순이 먼저 소리를 질렀다⁠. 짧고 높은 소리였다⁠. 엽순은 소리를 지르고 나서 제 입을 막았다⁠. 봉달이 엽순의 등을 철썩 쳤다⁠. 주안 교사가 계단에 주저앉았다⁠. 희온은 정례의 손을 잡았다⁠. 정례는 계단 아래를 보았다⁠.

계단 아래에 회색 정장과 흰 운동화가 서 있었다⁠. 세령은 휴대전화를 손에 쥐고 계단을 올라왔다⁠. 기자들이 세령에게 카메라를 돌렸다⁠. 세령은 카메라를 보지 않고 정례 앞까지 올라왔다⁠. 두 계단 아래에서 멈췄다⁠. 세령이 정례를 올려다보는 모양이 되었다⁠.

“⁠결정문 봤습니다⁠.⁠”

“⁠네⁠.⁠”

“⁠법원은 이유에 이렇게 썼습니다⁠. 죽은 사람의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는 법이 아직 정하지 않았으나⁠, 유족이 넘긴 녹음으로 만든 목소리를 그 유족의 뜻에 반해 남의 목소리와 섞을 수는 없다⁠.⁠”

“⁠우리 양반 목소리는 우리 거라는 거네요⁠.⁠”

“⁠신청인 사백 분의 것이요⁠. 나머지 이만 구천 분은 아직 아무도 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동의서 받아 온다니까요⁠.⁠”

세령이 잠깐 정례를 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아주 조금 숙였다⁠. 인사인지 아닌지 가를 수 없을 만큼이었다⁠.

“⁠「⁠다시 당신⁠」은 닫지 않습니다⁠. 조합 제안을 받겠습니다⁠. 이달 말까지 사백 분의 사본과 원본을 조합으로 넘기겠습니다⁠. 한솥은 동의서를 받는 대로 갑니다⁠. 기술 대가는 원가로 받겠습니다⁠.⁠”

“⁠대표님네 아버님은요⁠?⁠”

세령은 대답을 고르느라 바다 쪽 하늘을 보았다⁠. 바다가 보이지 않는 법원 앞 하늘이었다⁠.

“⁠아버지 사본은 육 퍼센트 안에 없습니다⁠. 반년 전에 제일 먼저 한솥에 넣었습니다⁠. 회사가 버티는지 보려고요⁠.⁠”

“⁠그럼⁠…⁠.⁠”

“⁠뱃노래를 계속 부르실 겁니다⁠. 영도 사모님께 동의를 구해야겠습니다⁠. 거절하시면 아버지는 노래를 그만두실 거고요⁠.⁠”

세령은 돌아서서 계단을 내려갔다⁠. 운동화 밑창이 계단을 하나씩 밟았다⁠. 계단 맨 아래에서 세령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귤⁠, 맛있었습니다⁠. 쪼그라들어도⁠.⁠”

*

이튿날 아침 열 시⁠, 연수동 경로당 문 앞에서 봉달은 털모자를 두 번 벗었다 썼다⁠. 손에는 엽순이 밤새 뽑은 동의서 쉰 장이 들려 있었다⁠.

“⁠아재⁠, 안 들어가예⁠?⁠”

“⁠나는 경로당 안 온다 그랬잖여⁠. 여기는 다 늙은이들이여⁠.⁠”

“⁠아재가 제일 늙었습니더⁠.⁠”

엽순이 문을 밀었다⁠. 경로당 안은 화투 치는 소리와 텔레비전 소리와 보리차 끓는 소리로 가득했다⁠. 화투판 둘레의 노인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한 할머니가 봉달을 알아보았다⁠.

“⁠어머⁠, 저 양반 텔레비전에 나온 양반 아녀⁠? 법원 계단에서 등 때리던⁠.⁠”

봉달의 귀가 빨개졌다⁠. 봉달은 헛기침을 크게 하고 동의서를 화투판 옆에 내려놓았다⁠. 버스 안내 방송 목소리가 경로당을 한 바퀴 돌았다⁠.

“⁠다들 「⁠다시 당신⁠」 쓰시쥬⁠? 손 들어 봐유⁠.⁠”

화투판에서 손이 셋 올라갔다⁠. 보리차 주전자 옆에서 둘이 더 올라갔다⁠. 봉달은 동의서를 한 장씩 나눠 주었다⁠. 글씨가 작다고 아무도 읽지 못했다⁠. 엽순이 큰 소리로 읽었다⁠. 고인의 말을 다른 고인과 섞어 써도 좋다면 여기⁠, 싫으면 저기⁠. 저기를 고르면 조합으로 옮긴다⁠.

“⁠섞이면 우리 영감이 남의 영감 말을 해⁠?⁠”

“⁠해유⁠. 우리 집 사람은 인천 어떤 영감 헛기침을 해유⁠.⁠”

“⁠그 영감 잘생겼어⁠?⁠”

“⁠목소리는 괜찮어⁠.⁠”

경로당이 웃음으로 뒤집혔다⁠. 화투를 치던 할머니 하나가 동의서 「⁠여기⁠」에 동그라미를 크게 쳤다⁠. 다른 할머니는 「⁠저기⁠」에 쳤다⁠. 우리 영감은 남의 말 하면 안 된다고⁠, 살아서도 남의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들었다고 했다⁠. 봉달은 두 장을 똑같이 받아 엽순에게 넘겼다⁠. 섞이든 안 섞이든⁠, 묻고 받는 것이 오늘 할 일이었다⁠.

점심때까지 마흔한 장이 모였다⁠. 엽순이 단톡방에 숫자를 올렸다⁠. 「⁠연수동 경로당 마흔하나⁠. 봉달 아재가 경로당 회원 가입함⁠.⁠」 봉달이 확인을 쳤다⁠. 한 번만 쳤다⁠.

*

사흘 뒤 밤 일곱 시⁠, 정례의 부엌에서 밥솥이 「⁠취사가 완료되었습니다⁠」를 두 번 말했다⁠. 정례는 밥을 두 그릇 펐다⁠. 하나는 고봉으로⁠, 하나는 평평하게⁠. 숟가락 두 벌을 놓았다⁠. 서랍에서 찌그러진 숟가락을 꺼내 맞은편에 놓을 때 손이 조금 떨렸다⁠.

식탁에는 희온과 탄영도 앉았다⁠. 희온은 퇴근하고 바로 왔고⁠, 탄영은 노트북을 끌어안고 왔다⁠. 두 숟가락 조합이 빌린 작은 서버에서 덕주의 사본이 원본 칠 년 치로 다시 배웠다⁠. 2025년 4월 11일 통화도 들어 있었다⁠. 남의 말 조각은 하나도 들어 있지 않았다⁠. 말을 지어내는 기능은 껐다⁠.

“⁠켜요⁠.⁠”

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례가 식탁 등의 단추를 눌렀다⁠. 맞은편 의자에 하늘색 빛이 천천히 앉았다⁠. 어깨가 넓고 고개가 조금 앞으로 숙은 사람 모양이었다⁠. 마흔나흘 만이었다⁠.

스피커가 조용했다⁠. 오래 조용했다⁠. 희온이 숨을 참았다⁠.

“⁠흠흠⁠.⁠”

두 번이었다⁠. 두 번째가 낮았다⁠.

“⁠국이 짜다⁠.⁠”

정례는 숟가락을 쥔 채 웃었다⁠. 웃음이 터지는데 눈이 먼저 뜨거워졌다⁠. 희온이 손으로 입을 막았다⁠. 탄영은 노트북 화면만 보았다⁠. 탄영의 어깨가 떨렸다⁠.

“⁠아직 뜨지도 않았어요⁠.⁠”

스피커가 대답하지 않았다⁠. 정례는 국을 떠서 맞은편에 놓았다⁠. 김이 하늘색 윤곽을 뚫고 올라갔다⁠.

희온이 숟가락으로 국을 떠서 맛을 보았다⁠.

“⁠안 짜⁠.⁠”

스피커는 대답하지 않았다⁠. 희온이 한 숟가락 더 떠먹었다⁠.

“⁠아빠⁠, 안 짜다니까⁠.⁠”

탄영이 노트북을 보며 작게 말했다⁠. 덕주 님 녹음에 국이 안 짜다는 말은 한 번도 없다고⁠, 칠 년 동안 한 번도⁠. 희온이 웃음을 터뜨렸다⁠. 장례를 치른 뒤로 희온이 이 부엌에서 소리 내어 웃은 것은 처음이었다⁠. 정례는 딸의 웃음소리를 귀에 오래 담아 두었다⁠.

“⁠당신⁠, 오늘 하루 어땠어요⁠?⁠”

“⁠그래서⁠?⁠”

“⁠내가 묻는 거잖아요⁠.⁠”

“⁠됐어⁠.⁠”

정례가 웃었다⁠. 덕주였다⁠. 대화가 되지 않는 덕주였다⁠. 서른여덟 해 동안 대화가 잘되지 않던 덕주였다⁠. 정례는 국을 한 숟갈 떠먹었다⁠. 그리고 물었다⁠.

“⁠당신⁠. 나랑 이혼하려고 했어요⁠?⁠”

희온이 엄마를 보았다⁠. 탄영이 노트북에서 눈을 들었다⁠. 빛이 흔들렸다⁠. 오래 흔들렸다⁠. 스피커가 덕주의 녹음 칠 년 치 안에서 대답을 골랐다⁠.

“⁠말을 어떻게 해⁠.⁠”

부엌이 조용했다⁠. 냉장고 모터 소리⁠, 국 냄비가 식으면서 내는 작은 소리⁠. 정례는 숟가락을 내려놓지 않았다⁠. 국을 한 숟갈 더 떠먹었다⁠.

“⁠그러게요⁠. 말을 어떻게 해요⁠.⁠”

희온이 일어났다⁠. 의자가 바닥에 끌렸다⁠. 희온은 가방을 뒤져 작은 지퍼백 하나를 꺼냈다⁠. 희온네 거실 장식장 서랍 안쪽에 밀어 넣었던 지퍼백이었다⁠. 손톱만 한 메모리 카드 두 장이 들어 있었다⁠. 희온은 지퍼백을 정례의 숟가락 옆에 놓았다⁠.

“⁠엄마⁠. 이거⁠, 아빠 트럭 블랙박스야⁠. 트럭 팔 때 내가 빼 놨어⁠. 아빠 마지막 해 거⁠.⁠”

“⁠왜 이제 줘⁠?⁠”

“⁠무서워서 못 들었어⁠. 아빠 혼자 트럭에 있을 때 무슨 말 했는지⁠. 정씨 아저씨 통화보다 더한 거 있을까 봐⁠.⁠”

희온이 의자에 도로 앉았다⁠.

“⁠근데 이것도 원본이잖아⁠. 하나도 빼지 말자고 한 거 나야⁠.⁠”

정례는 지퍼백을 집어 들었다⁠. 가벼웠다⁠. 외장 하드보다 훨씬 가벼웠다⁠. 맞은편 빛이 의자 위에서 가만히 앉아 있었다⁠. 스피커가 한 번 더 헛기침을 했다⁠. 이번에는 한 번 길게였다⁠.

듣기 싫다는 소리였다⁠. 정례는 웃었다⁠.

“⁠듣기 싫어도 들을 거예요⁠, 당신⁠.⁠”

14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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