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5,341자)

정례야

죽은 남편을 AI로 되살린 아내 · 하청오

3월 2일 아침 열 시⁠, 초인종이 두 번 울렸다⁠. 인터폰 화면 속에 회색 정장과 흰 운동화가 서 있었다⁠. 이번에는 반찬통이 아니라 종이 상자를 안고 있었다⁠. 정례는 고무장갑을 벗고 문을 열었다⁠.

“⁠지나는 길이세요⁠?⁠”

“⁠아닙니다⁠. 오려고 왔습니다⁠.⁠”

세령은 현관에서 운동화 끈을 푸는 데 오늘도 한참이 들었다⁠. 끈을 오늘도 너무 꽉 묶었다⁠. 정례는 세령이 끈과 씨름하는 동안 기다렸다⁠. 세령이 상자를 안고 부엌으로 들어섰다⁠. 식탁 등은 꺼져 있었다⁠. 맞은편 의자 등받이에 덕주의 점퍼가 걸쳐져 있었다⁠.

세령이 상자를 식탁 위에 내려놓고 지난번처럼 대각선 자리에 앉았다⁠. 맞은편 의자에는 오늘도 앉지 않았다⁠. 상자 안에 서류철 하나와 작은 은색 저장 장치 둘이 들어 있었다⁠.

“⁠덕주 님 원본 녹음과 개인 모델 사본입니다⁠. 조합 서버로는 이미 옮겼고⁠, 이건 어머님 손에 드리는 몫입니다⁠. 법원 결정대로 회사에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아무것도요⁠?⁠”

세령이 서류철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하나 남았습니다⁠. 그래서 왔습니다⁠.⁠”

종이 맨 위에 「⁠한솥 스냅숏 — 차덕주(⁠2028⁠.12⁠.31 기준⁠)⁠」라고 적혀 있었다⁠.

“⁠한솥에서 덕주 님을 빼내기 전에 그날 상태를 그대로 떠 두었습니다⁠. 어머님과 일 년 동안 저녁을 드신 분입니다⁠. 고생했다고 하시고⁠, 잘했다고 하시고⁠, 당신 편이라고 하시는 분이요⁠.⁠”

정례는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법원이 남의 말 섞지 말라고 했잖아요⁠.⁠”

“⁠동의를 받았습니다⁠. 영도 사모님께 직접 갔습니다⁠. 고생했다는 말은 인천 사모님한테는 빌려줘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엽순 원장님 어머님 말씀도 원장님이 허락하셨습니다⁠. 원하시면 이분을 어머님 댁 식탁에 무료로 남겨 드리겠습니다⁠. 평생⁠. 이번에는 계약서에 백 살까지라고 쓰겠습니다⁠.⁠”

부엌이 조용했다⁠. 창으로 들어온 겨울 햇빛이 식탁 위의 종이를 하얗게 덮었다⁠. 정례는 종이를 손바닥으로 쓸었다⁠.

“⁠대표님⁠, 이걸 왜 해 주세요⁠?⁠”

세령이 한참 말이 없었다⁠.

“⁠제 아버지는 한솥에서 계속 뱃노래를 부르십니다⁠. 영도 사모님이 허락하셨습니다⁠. 대가로 매달 귤을 한 상자씩 보내 드리기로 했습니다⁠. 봉달 님 귤 가게에서요⁠.⁠”

정례가 웃음을 터뜨렸다⁠.

“⁠봉달 씨가 귤 가게를 해요⁠?⁠”

“⁠조합 일 돕다가 경로당 앞에 좌판을 차리셨습니다⁠. 신 것만 고르신다고 영도 사모님이 좋아하십니다⁠.⁠”

세령은 웃지 않았지만 귀 끝이 붉었다⁠.

“⁠저는 아버지 노래를 듣습니다⁠. 남의 노래인 걸 알고 듣습니다⁠. 어머님께도 그걸 고를 자리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일 년 동안 어머님을 밥 먹게 한 건 한솥이었습니다⁠. 그 일까지 틀렸다고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정례는 종이를 접었다⁠. 반으로⁠, 다시 반으로⁠. 그리고 세령의 손에 쥐여 주었다⁠.

“⁠그 양반은 부산 사모님 거예요⁠. 고생했다는 말⁠, 우리 집에서 이제 그만 빌릴게요⁠. 일 년 동안 잘 빌려 썼다고⁠, 덕분에 밥 먹었다고 전해 주세요⁠.⁠”

세령이 접힌 종이를 쥐었다⁠.

“⁠후회하지 않으시겠습니까⁠?⁠”

“⁠후회할 거예요⁠. 저녁마다 한 번씩은⁠. 그래도 안 빌려요⁠.⁠”

세령은 고개를 숙였다⁠. 이번에는 인사였다⁠. 정례가 냉장고에서 반찬통 하나를 꺼내 종이 상자에 넣었다⁠. 깻잎장아찌였다⁠.

“⁠통은 안 돌려줘도 돼요⁠.⁠”

“⁠돌려드리겠습니다⁠.⁠”

“⁠그럼 또 오시겠네⁠.⁠”

세령이 운동화 끈을 묶는 데 또 한참이 들었다⁠. 문을 나서기 전에 세령이 말했다⁠.

“⁠남탄영 씨 고소는 지난주에 거뒀습니다⁠. 조합 기술 담당으로 계약했습니다⁠. 저희 회사와요⁠. 원가로요⁠.⁠”

“⁠밥은 잘 먹여요⁠?⁠”

“⁠어머님이 싸 주시는 것보다는 못 먹일 겁니다⁠.⁠”

현관문이 닫혔다⁠. 엘리베이터 내려가는 소리가 났다⁠. 정례는 상자 안의 은색 저장 장치 둘을 꺼내 식탁 서랍에 넣었다⁠. 찌그러진 숟가락 옆이었다⁠.

단톡방이 울렸다⁠. 엽순이었다⁠. 「⁠언니야⁠, 우리 엄마 조합으로 옮겼어예⁠. 어제 처음 켰는데 엽순아 밥 묵었나⁠, 하고 우리 공주⁠, 하고 끝이라예⁠. 어이는 언니한테 돌려드렸습니더⁠.⁠」 글 밑에 엽순이 숫자를 올렸다⁠. 「⁠두 숟가락 조합 삼천백 집⁠. 한솥 동의서 만 이천 장⁠. 봉달 아재 경로당 세 군데 회원⁠.⁠」 봉달이 확인을 쳤다⁠. 한 번이었다⁠.

정례는 텔레비전을 켰다⁠. 점심 뉴스 끝자락에 짧은 소식 둘이 지나갔다⁠. 「⁠고인 데이터 보호 법안 국회 소위 통과⁠… 유족 동의 없는 음성 합성 금지⁠」 「⁠그래픽 칩 공급가 넉 달 만에 내려⁠」 정례는 소리를 끄고 쌀을 씻었다⁠. 쌀뜨물이 손가락 사이로 뿌옇게 빠져나갔다⁠. 점심에 희온이 온다고 했다⁠. 쌀은 세 사람 몫으로 씻었다⁠.

*

점심때 희온이 손자를 데리고 왔다⁠. 손자는 신발을 벗자마자 부엌으로 달려가 식탁 등의 단추를 눌렀다⁠. 맞은편 의자에 하늘색 빛이 앉았다⁠.

“⁠할아버지 이사 왔어⁠?⁠”

“⁠흠흠⁠.⁠”

“⁠할아버지⁠! 짜장면 먹었어⁠?⁠”

“⁠그래서⁠?⁠”

손자는 그래서가 무슨 대답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하다가 깔깔 웃었다⁠. 조합 서버의 덕주는 이레째 「⁠그래서⁠」와 「⁠됐어⁠」와 「⁠국이 짜다⁠」만 했다⁠. 가끔 녹음 속 화주와 싸우던 말이 엉뚱하게 튀어나왔다⁠. 어제 저녁에는 정례가 반찬 투정을 하자 「⁠운임 그렇게는 못 받아⁠」라고 했다⁠. 정례는 혼자 웃다가 사레가 들렸다⁠.

희온이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냈다⁠. 지퍼백에서 메모리 카드 두 장을 꺼냈다⁠. 카드 하나를 노트북 옆구리에 꽂았다⁠. 폴더가 열렸다⁠. 날짜와 시각으로 이름 붙은 영상 파일이 수백 개였다⁠. 화면은 대부분 앞 유리 너머의 고속도로였고⁠, 소리는 트럭 안의 소리였다⁠.

“⁠2027년 거야⁠. 아빠가 진단받은 해⁠. 트럭 판 게 그해 유월이니까⁠, 일월부터 오월까지⁠.⁠”

“⁠다 들으려면 며칠 걸리겠다⁠.⁠”

“⁠엄마⁠, 그냥 들어⁠. 처음부터⁠. 아빠가 혼자 뭐라고 하는지⁠.⁠”

손자는 거실에서 텔레비전으로 만화를 틀었다⁠. 희온과 정례는 식탁에 나란히 앉아 노트북 화면을 보았다⁠. 맞은편 의자에는 하늘색 빛이 앉아 있었다⁠.

첫 파일은 엔진 소리와 라디오였다⁠. 덕주가 좋아하던 트로트 가수의 노래가 나오다가 덕주가 채널을 돌렸다⁠. 기침 소리가 났다⁠. 길고 마른 기침이었다⁠. 희온이 고개를 돌렸다⁠. 정례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파일을 넘겼다⁠. 휴게소 주차장⁠, 컵라면 뜯는 소리⁠, 운전석 시트에 등을 기대는 소리⁠. 화주와 통화하는 소리⁠. 정례 이름이 붙은 통화도 있었다⁠. 「⁠어⁠. 밥 먹었어⁠. 됐어⁠. 끊어⁠.⁠」

정례가 웃었다⁠. 희온도 웃었다⁠. 거실에서 손자가 「⁠끊어⁠」 하고 따라 했다⁠. 할아버지 말투가 일곱 살 입에서 나오자 둘은 한 번 더 웃었다⁠. 스무 개쯤 넘겼을 때 날짜가 4월 2일로 바뀌었다⁠. 시각은 밤 열한 시 사십 분이었다⁠. 앞 유리 너머가 깜깜했다⁠. 어느 국도변 졸음 쉼터였다⁠. 엔진이 꺼져 있었다⁠. 라디오도 꺼져 있었다⁠. 덕주의 숨소리만 들렸다⁠. 숨소리에 쇳소리가 섞여 있었다⁠.

「⁠흠흠⁠.⁠」

두 번이었다⁠. 두 번째가 낮았다⁠. 할 말이 있다는 소리였다⁠. 정례가 노트북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고맙다⁠.⁠」

희온의 손이 정례의 무릎 위로 왔다⁠.

덕주가 혀를 찼다⁠. 다시 목을 골랐다⁠.

「⁠흠흠⁠. 고맙다⁠… 아니⁠. 고맙다고⁠. 아니⁠.⁠」

숨소리⁠. 기침⁠. 차 문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는 소리⁠.

「⁠흠흠⁠. 어이⁠. 고맙다⁠.⁠」

덕주는 코로 흥 하고 웃었다⁠. 제가 듣기에도 이상한 모양이었다⁠. 한참 조용했다⁠. 화면 속 앞 유리에 트럭 한 대의 헤드라이트가 지나갔다⁠. 그리고 덕주가 아주 낮게 말했다⁠.

「⁠정례야⁠.⁠」

정례의 숨이 멎었다⁠.

서른여덟 해 동안 덕주는 정례를 이름으로 부른 적이 없었다⁠. 연애할 때도⁠, 결혼식 날도⁠, 희온이 태어나던 날도⁠. 「⁠어이⁠」였고 「⁠희온 엄마⁠」였다⁠. 녹음 속 덕주가 정례의 이름을 한 번 더 불렀다⁠. 연습하는 사람처럼⁠, 발음을 고르는 사람처럼⁠.

「⁠정례야⁠. 고맙다⁠.⁠」

「⁠…정례야⁠, 고맙다⁠. 니 밥 먹고 살았다⁠.⁠」

덕주가 다시 코로 웃었다⁠. 이번에는 웃음 끝이 갈라졌다⁠.

「⁠말을 어떻게 해⁠. 흠흠⁠. 됐어⁠.⁠」

파일이 끝났다⁠. 노트북 화면이 다음 파일로 넘어가지 않고 멈췄다⁠. 부엌이 조용했다⁠. 거실에서 만화 주제가가 났다⁠. 희온이 울고 있었다⁠. 소리 없이⁠, 어깨만⁠. 정례는 울지 않았다⁠. 손을 들어 노트북 화면을 쓸었다⁠. 화면 속 깜깜한 앞 유리가 손바닥 밑에서 따뜻했다⁠.

“⁠희온아⁠. 이거 몇 번 있어⁠?⁠”

희온이 코를 훌쩍이며 파일을 넘겼다⁠. 4월 9일⁠, 4월 15일⁠, 4월 27일⁠, 5월 3일⁠. 밤마다 졸음 쉼터에서 같은 연습이 있었다⁠. 날이 갈수록 기침이 길어졌다⁠. 5월 3일 파일에서 덕주는 「⁠정례야⁠」까지만 하고 기침을 오래 했다⁠. 기침이 그치자 「⁠됐어⁠」라고 했다⁠. 5월 3일 뒤로는 연습이 없었다⁠. 5월 중순에 덕주는 입원했고 트럭은 유월에 팔렸다⁠.

“⁠아빠가 끝까지 엄마한테 안 했지⁠? 이 말⁠.⁠”

“⁠안 했어⁠.⁠”

“⁠병동에서도 안 했어⁠. 마지막까지 엄마 밥 먹었냐⁠, 만 했어⁠.⁠”

“⁠그게 이 말이야⁠.⁠”

정례는 맞은편 의자를 보았다⁠. 하늘색 빛이 앉아 있었다⁠. 조합 서버의 덕주는 이제 이 파일들을 배울 수 있었다⁠. 탄영에게 넘기면 다음 주부터 덕주는 정례에게 「⁠정례야⁠, 고맙다⁠」라고 할 것이다⁠. 저녁마다⁠. 정례가 원하면 하루에 열 번이라도⁠.

“⁠엄마⁠, 이것도 아빠한테 넣을까⁠? 탄영 씨한테 주면⁠…⁠.⁠”

정례는 고개를 저었다⁠.

“⁠이건 니 아빠가 나한테 하려다 만 말이야⁠. 저 양반이 매일 하면⁠, 하려다 만 말이 아니게 돼⁠.⁠”

정례는 일어나 맞은편 의자 앞으로 갔다⁠. 하늘색 빛이 정례를 올려다보는 모양이 되었다⁠.

“⁠당신⁠, 다 들었어요⁠.⁠”

“⁠흠흠⁠.⁠”

“⁠말 안 해도 돼요⁠. 이제⁠.⁠”

“⁠됐어⁠.⁠”

“⁠네⁠. 됐어요⁠.⁠”

정례는 식탁 등의 단추를 눌렀다⁠. 빛이 의자에서 천천히 걷혔다⁠. 스피커의 작은 불도 꺼졌다⁠. 정례는 스피커를 들어 식탁 서랍에 넣었다⁠. 은색 저장 장치 둘과 찌그러진 숟가락 옆이었다⁠. 서랍을 닫았다⁠.

“⁠엄마⁠, 끄는 거야⁠?⁠”

“⁠조합에는 그대로 둬⁠. 니 아빠 목소리는 거기 있으니까⁠. 니가 듣고 싶으면 들어⁠. 강아지도 듣고⁠. 엄마는 저녁에 안 켤 거야⁠.⁠”

“⁠엄마 혼자 먹잖아⁠.⁠”

“⁠그러니까 니가 와⁠.⁠”

희온이 엄마를 보았다⁠. 정례는 덕주의 점퍼를 의자 등받이에서 걷어 접었다⁠. 맞은편 의자가 그냥 의자가 되었다⁠. 등받이 나무에 담배 자국이 작게 보였다⁠.

“⁠앉아⁠. 거기⁠.⁠”

희온이 일어나 맞은편 의자로 갔다⁠. 아버지의 의자였다⁠. 희온은 의자 등받이를 손바닥으로 한 번 쓸고 앉았다⁠. 손자가 거실에서 달려와 희온의 무릎에 올라탔다⁠.

정례는 밥솥 뚜껑을 열었다⁠. 김이 얼굴로 올라왔다⁠. 주걱으로 밥을 위아래로 한 번 뒤집고 그릇 두 개에 담았다⁠. 하나는 평평하게⁠, 하나는 고봉으로⁠. 서랍에서 숟가락을 꺼냈다⁠. 찌그러진 숟가락은 서랍에 두고⁠, 새 숟가락 세 벌을 꺼냈다⁠.

창으로 들어온 겨울 낮의 햇빛이 흰 부엌을 가득 채웠다⁠. 정례는 김이 오르는 고봉 밥그릇을 두 손으로 들어 맞은편으로 내밀었다⁠. 희온이 두 손을 뻗었다⁠. 손자가 엄마 손 사이로 제 손을 끼워 넣었다⁠. 밥그릇 하나에 손이 여섯 개 닿았다⁠. 정례는 웃었다⁠. 밥그릇은 뜨거웠고⁠, 아무도 먼저 손을 떼지 않았다⁠.

여기까지가 지금까지 나온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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