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5,347자)

증거

죽은 남편을 AI로 되살린 아내 · 하청오

스무 날째 아침이었다⁠. 정례는 밥솥 뚜껑을 열고 밥을 한 그릇만 펐다⁠. 숟가락 한 벌을 식탁에 놓았다⁠. 식탁 등의 단추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맞은편 의자 등받이에 덕주의 점퍼가 걸쳐져 있었다⁠. 정례가 일부러 걸어 둔 것이었다⁠. 빈 의자보다는 나았다⁠.

처음 사흘은 혼잣말을 했다⁠. 국이 짜요⁠, 하고 제가 말하고 제가 웃었다⁠. 나흘째부터는 라디오를 켰다⁠. 트로트가 나오면 덕주가 싫어하던 가수인지 좋아하던 가수인지 혼자 가렸다⁠. 이레째에는 희온이 퇴근길에 손자를 데리고 와서 저녁을 먹고 갔다⁠. 손자는 꺼진 식탁 등을 보고 “⁠할아버지 자⁠?⁠” 하고 물었다⁠. 희온이 “⁠응⁠, 할아버지 이사 가셔⁠” 하고 대답했다⁠. 손자는 이사 가면 짜장면을 먹느냐고 물었다⁠. 희온이 대답을 못 하자 정례가 대신 먹는다고 했다⁠. 손자는 할아버지 짜장면을 자기가 먹겠다고 했다⁠.

봉달은 붕어빵을 문고리에 걸어 놓고 갔다⁠. 사흘에 한 번이었다⁠. 초인종은 누르지 않았다⁠. 봉지 안에 쪽지는 없었다⁠.

정례는 밥을 다 먹고 그릇을 씻었다⁠. 크림색 스웨터 위에 덕주의 점퍼를 입었다⁠. 현관에서 신발을 신다가 부엌을 한 번 돌아보았다⁠. 숟가락 한 벌이 건조대에 엎어져 있었다⁠.

*

법원 2층 화장실은 세면대가 셋이었다⁠. 정례가 손을 씻고 있는데 옆 세면대로 회색 정장 차림의 여자가 다가왔다⁠. 흰 운동화 밑창이 젖은 타일 위에서 작게 끽 소리를 냈다⁠. 세령이었다⁠. 세령은 물을 틀어 놓고 손을 씻지 않았다⁠. 거울 속에서 둘의 눈이 마주쳤다⁠. 정례는 손을 털고 점퍼 주머니에서 귤 하나를 꺼내 세령의 세면대 옆에 놓았다⁠.

“⁠봉달 씨가 문고리에 걸어 놓고 간 거예요⁠. 붕어빵 사러 갔다가 귤도 샀나 봐요⁠.⁠”

세령은 귤을 보기만 했다⁠.

“⁠어머님⁠, 오늘 그 통화 트시면 후회하실 겁니다⁠. 사람들은 어머님 남편을 이혼하려던 사람으로만 기억할 겁니다⁠.⁠”

“⁠대표님은 아버님 노래 끄시면 후회하실 거고요⁠.⁠”

세령이 물을 잠갔다⁠. 화장실이 조용해졌다⁠. 환풍기 도는 소리만 났다⁠.

“⁠저는 안 끕니다⁠.⁠”

“⁠알아요⁠. 나도 대표님더러 끄라고 안 해요⁠. 근데 대표님은 나더러 켜 두라고 하잖아요⁠. 우리 양반을 남의 말로⁠.⁠”

세령이 거울 속 정례를 보았다⁠. 정례는 거울 속 세령을 보았다⁠. 둘 다 돌아서지 않았다⁠. 세령이 먼저 귤을 집어 들었다⁠. 껍질을 까지는 않고 정장 주머니에 넣었다⁠.

“⁠심문 끝나고 먹겠습니다⁠.⁠”

“⁠시어요⁠. 봉달 씨는 신 것만 골라 사요⁠.⁠”

세령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세령은 휴지로 마른 손을 닦고 먼저 나갔다⁠. 정례는 거울 앞에서 머리를 다시 뒤로 묶었다⁠. 은발 몇 가닥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

*

두 번째 심문은 첫 번째보다 큰 법정에서 열렸다⁠. 방청석이 꽉 찼다⁠. 방송사 기자가 넷⁠, 신문 기자가 더 많았다⁠. 모임 사람들이 쉰 명 넘게 왔고⁠, 정례가 모르는 얼굴도 많았다⁠. 한솥을 고른 이용자들이었다⁠. 그들은 스피커를 품에 안고 방청석 오른편에 몰려 앉았다⁠. 맨 뒷줄 구석에는 오늘도 털모자를 쓴 봉달이 있었다⁠.

신청인석에 정례와 희온이 나란히 앉았다⁠. 희온은 근무복 대신 남색 정장을 입었다⁠. 결혼식 때 입고 처음 꺼낸 옷이라고 했다⁠. 허리가 좀 끼었다⁠. 희온은 자리에 앉자마자 정례의 손을 잡았다가⁠, 너무 세게 잡았는지 놓았다가⁠, 다시 잡았다⁠.

“⁠엄마 손 차다⁠.⁠”

“⁠니 손이 뜨거운 거야⁠.⁠”

판사가 들어오고 모두 일어났다가 앉았다⁠. 판사는 희온의 의견서를 넘겨보았다⁠.

“⁠차희온 씨⁠. 철회를 거두고 신청인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의견서에 쓰신 대로입니까⁠?⁠”

희온이 일어났다⁠.

“⁠네⁠. 아버지를 지우지 않겠습니다⁠. 대신 아버지 말로만 다시 만들어 주십시오⁠. 제가 뺀 통화 하나도 넣어서요⁠. 오늘 증거로 냈습니다⁠.⁠”

“⁠앉으십시오⁠.⁠”

*

먼저 탄영이 증인석에 섰다⁠. 회색 후드 대신 셔츠를 입었는데 단추를 한 칸씩 어긋나게 잠갔다⁠. 정례가 법정에 들어오기 전에 복도에서 다시 잠가 주려 했지만 탄영은 이대로가 마음이 편하다고 했다⁠.

탄영은 한솥을 증언했다⁠. 반년 전 시작된 통합⁠, 말버릇 조각⁠, 새어 나가는 말⁠, 남아 있는 사본 육 퍼센트⁠. 목소리가 처음에는 떨렸다⁠. 기술 이야기가 나오자 또렷해졌다⁠. 회사 대리인이 반대 신문에 나섰다⁠.

“⁠증인은 고인의 통화 하나를 학습에서 뺐지요⁠? 회사에 보고도 없이⁠.⁠”

“⁠네⁠.⁠”

“⁠증인이 만든 모델은 처음부터 고인의 말을 고쳐 놓은 것 아닙니까⁠?⁠”

“⁠네⁠. 고쳤습니다⁠.⁠”

방청석이 술렁였다⁠. 대리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로 돌아가려는데 탄영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다시 넣자고 하는 겁니다⁠. 덕주 님 녹음 칠 년 치 중에 제가 뺀 건 십사 분짜리 통화 하나예요⁠. 한솥은 덕주 님 말을 이천 집에 나눠 주고⁠, 남의 말을 덕주 님 입에 수백 개 넣었어요⁠. 저는 하나 뺐고⁠, 한솥은 수백 개 넣었어요⁠. 하나는 다시 넣을 수 있어요⁠. 수백 개는 원본이 없으면 못 빼요⁠.⁠”

대리인이 걸음을 멈췄다⁠. 판사가 탄영을 보았다⁠.

“⁠증인이 뺀 통화를 지금 재생할 수 있습니까⁠?⁠”

변호사가 일어났다⁠.

“⁠신청인이 증거로 냈습니다⁠. 고인의 딸이 직접 냈습니다⁠.⁠”

판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법정 직원이 노트북을 법정 스피커에 이었다⁠. 희온이 정례의 손을 꽉 잡았다⁠. 정례는 앞만 보았다⁠.

*

신호음이 두 번 갔다⁠.

「⁠어⁠, 덕주야⁠. 웬일이냐⁠, 대낮에⁠.⁠」

「⁠흠흠⁠.⁠」

법정 스피커는 집의 스피커보다 컸다⁠. 헛기침이 법정의 높은 천장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방청석 오른편⁠, 한솥을 고른 이용자들 사이에서 누군가 숨을 들이켰다⁠. 숨을 들이켠 사람의 스피커도 저 헛기침을 했을 것이다⁠. 정례는 덕주의 헛기침이 이천 집 밥상에서 울리는 것을 처음으로 귀로 그려 보았다⁠.

「⁠정씨⁠, 하나 물어보자⁠. 이혼하면 연금 반 떼 줘야 되냐⁠?⁠」

기자들의 볼펜이 한꺼번에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사각사각⁠, 마른 소리였다⁠. 희온이 고개를 숙였다⁠. 정례는 고개를 들고 있었다⁠.

통화가 이어졌다⁠. 숨 막힌다는 말⁠, 학교 그만둔 아내가 하루 종일 집에 있다는 말⁠, 나가 놀다 오라는 소리를 하루에 세 번 듣는다는 말⁠. 방청석 몇 사람이 웃음을 참았다⁠. 웃음을 참는 소리도 들렸다⁠. 그리고 덕주가 말했다⁠.

「⁠내가 나가 주면 저 사람이 좀 편하지 않겠나 싶어서⁠. 연금 반 떼 주고⁠, 집은 저 사람 주고⁠. 나는 트럭에서 자도 돼⁠.⁠」

웃음을 참던 소리가 멎었다⁠.

「⁠너 형수한테 그 말 해 봤냐⁠?⁠」

「⁠말을 어떻게 해⁠. 흠흠⁠. 됐어⁠. 끊어⁠.⁠」

통화가 끊겼다⁠. 법정이 조용했다⁠. 법정 직원이 노트북을 닫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판사가 정례를 보았다⁠.

“⁠신청인 은정례 씨⁠.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정례는 일어났다⁠. 덕주의 점퍼 소매를 걷었다⁠.

“⁠이게 우리 양반 목소리예요⁠.⁠”

정례는 방청석 오른편을 한 번 보았다⁠. 스피커를 안은 사람들이 정례를 보고 있었다⁠.

“⁠이 통화 하고 나서 우리 양반은 이혼하자고 안 했어요⁠. 나가 주겠다는 말도 안 했어요⁠. 두 해 뒤에 폐암 진단을 받았고⁠, 그다음 해에 갔어요⁠. 그 말을 끝까지 안 했어요⁠. 근데 한솥은 내가 당신 나랑 이혼하려고 했냐고 물었더니⁠, 당신 편이지⁠, 오늘도 고생했어⁠, 하더라고요⁠. 부산 어부 아저씨 말로요⁠.⁠”

정례는 잠깐 숨을 골랐다⁠.

“⁠우리 양반이 안 한 말은 안 한 대로 두고 싶어요⁠. 한 말은 한 대로 두고 싶고요⁠. 그거면 돼요⁠.⁠”

정례가 앉았다⁠. 희온이 정례의 손을 잡았다⁠. 이번에는 놓지 않았다⁠.

*

세령은 스스로 참고인으로 나섰다⁠. 증인석에 앉은 세령은 오늘도 회색 정장에 흰 운동화였다⁠. 태블릿은 들고 오지 않았다⁠.

“⁠제 아버지는 2024년에 돌아가셨습니다⁠. 기계공학과 교수였습니다⁠. 강의 녹음 백사십 시간으로 제가 처음 만든 모델이 아버지입니다⁠. 회사는 그 다음에 생겼습니다⁠.⁠”

방청석이 조용해졌다⁠.

“⁠아버지는 지금 한솥 안에 계십니다⁠. 요새 뱃노래를 부르십니다⁠. 평생 노래를 안 하신 분입니다⁠. 저는 압니다⁠. 매일 밤 듣습니다⁠. 끄지 않습니다⁠.⁠”

세령은 방청석 오른편을 보았다⁠.

“⁠저기 계신 분들도 아십니다⁠. 삼만 이천 가족 가운데 이만 구천 가족이 한솥을 고르셨습니다⁠. 남의 말이 섞여도 목소리가 있는 게 낫다고 고르셨습니다⁠. 저는 그분들의 선택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신청인 어머님의 선택도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참고인⁠, 결론을 말씀하십시오⁠.⁠”

세령이 고개를 들었다⁠.

“⁠분리 명령이 나면 사본 수천 개를 다시 따로 돌려야 합니다⁠. 저희 비용으로는 석 달을 못 버팁니다⁠. 그래서 어제 이사회에서 정했습니다⁠. 분리 명령이 나면 2월 말일에 「⁠다시 당신⁠」 서비스 전체를 닫겠습니다⁠. 한솥도⁠, 사본도⁠, 전부⁠. 닫는 날까지 모든 유족께 원본을 돌려드리겠습니다⁠.⁠”

법정이 터졌다⁠. 방청석 오른편에서 누가 일어나 소리쳤다⁠. “⁠우리 집 사람은 왜 꺼⁠!⁠” 다른 사람이 정례를 가리켰다⁠. “⁠저 사람 때문에 다 꺼져⁠!⁠” 법정 경위가 일어났다⁠. 판사가 법봉 대신 손바닥으로 탁자를 두 번 쳤다⁠.

“⁠참고인⁠. 지금 하시는 말이 법원에 대한 압박입니까⁠?⁠”

“⁠계산입니다⁠, 재판장님⁠. 거짓말이 아닙니다⁠.⁠”

세령의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정례는 세령의 오른손을 보았다⁠. 증인석 탁자 모서리를 엄지로 누르고 있었다⁠. 손톱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판사가 한참 말이 없다가 입을 열었다⁠.

“⁠결정은 서면으로 하겠습니다⁠. 이달 안에 내겠습니다⁠.⁠”

*

법정 밖 복도는 기자들로 막혀 있었다⁠. 정례와 희온은 변호사 뒤에 붙어 계단으로 빠져나갔다⁠. 정례의 휴대전화가 주머니에서 쉬지 않고 떨었다⁠. 계단참에서 꺼내 보니 단톡방이 셋이었다⁠. 모임 방⁠, 가족 방⁠, 그리고 여고 동창 방 「⁠삼학년 칠반 영원히⁠」

동창 방이 제일 빨랐다⁠.

「⁠정례야 너네 신랑 그랬어⁠?⁠?⁠」 「⁠트럭에서 잔다고⁠? 아이고⁠」 「⁠우리 신랑도 그 말 했는데 안 나가더라⁠」 「⁠정례야 밥 먹었니⁠」 「⁠뉴스 나왔어 너 머리 이쁘더라⁠」

정례는 돋보기를 찾다가 그냥 엄지 그림을 하나 보냈다⁠. 이번에는 제대로 엄지였다⁠. 동창들이 하트를 스무 개 보냈다⁠.

모임 방은 달랐다⁠. 엽순이 퍼다 붙인 글이 줄줄이 올라와 있었다⁠. 한솥을 고른 이용자들이 기사 댓글과 다른 단톡방에 쓴 글이었다⁠.

「⁠인천 그 할머니 때문에 우리 엄마 2월에 꺼진다⁠」 「⁠본인은 남편 꺼 놓고 남의 가족까지 끄나⁠」 「⁠이혼하려던 남편 목소리를 왜 그렇게 지키는지⁠」

엽순이 글 밑에 한 줄을 달았다⁠. 「⁠언니야⁠, 이런 거 보지 마이소⁠. 나도 우리 엄마 안 끄는데 언니 편이라예⁠.⁠」

희온이 정례의 휴대전화를 빼앗아 화면을 껐다⁠.

“⁠보지 마⁠.⁠”

“⁠다 맞는 말이야⁠.⁠”

“⁠엄마⁠.⁠”

“⁠세령 씨 말도 맞아⁠. 봉달 씨 말도 맞고⁠. 다들 맞는 말이야⁠. 근데 다 맞으면 어떻게 해⁠?⁠”

희온이 대답하지 못했다⁠. 계단 아래에서 털모자를 쓴 봉달이 올라오고 있었다⁠. 봉달은 계단참에서 정례와 눈이 마주치자 멈췄다⁠. 봉달의 품에 스피커가 안겨 있었다⁠. 봉달은 정례를 오래 보다가 말했다⁠.

“⁠정례 씨⁠. 우리 집 사람 2월 말에 꺼진대⁠.⁠”

봉달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처음으로 크지 않았다⁠.

“⁠정례 씨 이기면⁠.⁠”

12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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