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5,350자)

숟가락 한 벌

죽은 남편을 AI로 되살린 아내 · 하청오

병원 옥상 문을 밀자 바람이 정례의 은발을 한꺼번에 뒤로 넘겼다⁠. 1월 15일 열두 시 반⁠, 하늘은 시리게 맑았고 햇빛이 옥상 바닥의 녹색 방수 칠을 하얗게 덮고 있었다⁠. 환풍구 옆 벤치에 희온이 앉아 있었다⁠. 연두색 근무복 위에 긴 패딩을 걸쳤고⁠, 손에 휴대전화를 쥐고 있었다⁠.

정례는 희온 옆에 앉아 보온 가방을 열었다⁠. 김밥 두 줄⁠, 유부초밥⁠, 보온병에 담은 된장국⁠. 비둘기 세 마리가 어디선가 날아와 벤치 앞에 내려앉았다⁠.

“⁠얘네는 누구 불렀어⁠?⁠”

“⁠병동 비둘기야⁠. 간호사들이 남은 빵을 줘서⁠.⁠”

비둘기 한 마리가 정례의 발치까지 걸어와 고개를 갸웃했다⁠. 정례는 김밥 꽁다리를 하나 던져 주었다⁠. 비둘기 셋이 꽁다리 하나를 두고 싸웠다⁠. 희온이 처음으로 웃었다⁠. 정례는 희온이 웃는 것을 오랜만에 보았다⁠.

“⁠의견서 썼어⁠?⁠”

희온이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화면에 짧은 글이 떠 있었다⁠. 정례는 돋보기를 찾아 머리를 더듬었다⁠. 없었다⁠. 주머니를 뒤졌다⁠. 없었다⁠. 희온이 한숨을 쉬고 제 휴대전화 글씨를 두 배로 키워 주었다⁠.

「⁠상속인 차희온은 고인 차덕주의 데이터 제공 동의를 철회하며⁠, 모델과 원본을 모두 지워 주실 것을 바랍니다⁠.⁠」

“⁠어제 밤새 썼어⁠. 이 두 줄⁠.⁠”

“⁠잘 썼네⁠.⁠”

“⁠엄마⁠.⁠”

“⁠판사가 니 뜻을 묻는 거잖아⁠. 니 뜻이 이거면 이거 내⁠.⁠”

희온이 휴대전화를 무릎 위에 엎었다⁠. 비둘기들이 꽁다리를 다 먹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엄마⁠, 그 통화 들었지⁠?⁠”

“⁠들었어⁠.⁠”

“⁠어땠어⁠?⁠”

정례는 김밥 한 조각을 희온의 입에 넣어 주었다⁠. 희온은 받아먹었다⁠. 정례는 2025년 4월을 이야기했다⁠. 급식실을 그만두고 두 달째였던 봄⁠, 채널 싸움과 발톱 깎는 소리⁠, 하루에 세 번 나가 놀다 오라던 말⁠. 그리고 녹음 속 덕주가 정씨에게 한 말⁠.

“⁠내가 나가 주면 저 사람이 좀 편하지 않겠나 싶어서⁠. 니 아빠가 그랬어⁠. 연금 반 떼 주고 집은 엄마 주고⁠, 자기는 트럭에서 자도 된다고⁠.⁠”

희온이 김밥을 씹다 말았다⁠.

“⁠나는 그 부분 못 들었어⁠.⁠”

“⁠어디까지 들었는데⁠?⁠”

“⁠이혼하면 연금 반 떼 줘야 되냐⁠, 까지⁠. 거기서 껐어⁠. 더 들으면 아빠가 엄마 욕할까 봐⁠.⁠”

희온이 손바닥으로 눈을 눌렀다⁠. 바람이 패딩 모자를 들썩였다⁠.

“⁠나는 아빠가 엄마를 버리려는 줄 알았어⁠. 일 년 넘게⁠. 그래서 지우자고 한 거야⁠. 그 목소리가 엄마 밥상에서 그 말을 할까 봐⁠.⁠”

“⁠니 아빠는 사람 버릴 줄 몰라⁠. 버릴 줄 알았으면 그 찌그러진 숟가락을 진작 버렸지⁠.⁠”

희온이 웃다가 울었다⁠. 우는 소리가 바람에 섞였다⁠. 정례는 희온의 등을 쓸었다⁠. 근무복 등판이 바람에 차가웠다⁠. 비둘기 하나가 희온의 운동화 끈을 쪼았다⁠.

희온이 한참 뒤에 고개를 들었다⁠. 눈이 빨갰다⁠. 목소리는 병동 목소리로 돌아와 있었다⁠.

“⁠엄마⁠, 의견서 다시 쓸게⁠. 철회 거두고⁠, 엄마랑 같이 신청인 할게⁠.⁠”

정례가 숟가락을 멈췄다⁠.

“⁠대신 조건이 두 개야⁠.⁠”

“⁠말해⁠.⁠”

“⁠하나⁠. 오늘부터 한솥 아빠 꺼⁠. 우리가 이기고 진짜 아빠가 다시 만들어질 때까지 엄마 밥상에서 그 목소리 안 듣는 거야⁠. 질 수도 있어⁠. 그럼 영영 못 들어⁠.⁠”

“⁠…⁠.⁠”

“⁠변호사님이 그러셨어⁠. 한솥 그만두라고 신청해 놓고 한솥을 매일 쓰면⁠, 회사가 그걸 물고 늘어진대⁠. 신청인이 좋다고 쓰고 있는 걸 왜 멈추냐고⁠.⁠”

정례는 된장국 보온병 뚜껑을 돌렸다⁠. 김이 바람에 흩어졌다⁠.

“⁠두 번째는⁠?⁠”

“⁠4월 11일 통화⁠, 법정에 내⁠. 내가 뺀 거⁠, 내가 다시 넣을게⁠. 회사 대리인이 그랬다며⁠. 하나 빠진 목소리가 아빠 목소리냐고⁠. 아빠를 다시 만들 거면 하나도 빼지 마⁠. 이혼 얘기도⁠, 트럭에서 자겠다는 얘기도⁠. 판사도 듣고⁠, 기자도 듣고⁠, 엄마 동창들도 듣겠지⁠.⁠”

“⁠동창들까지⁠.⁠”

“⁠엄마 동창 단톡방 엄청 빠르잖아⁠. 엽순 아줌마보다 빨라⁠.⁠”

정례는 웃었다⁠. 웃음이 금방 꺼졌다⁠. 서른여덟 해 동안 둘만 알던 밥상이었다⁠. 덕주가 헛기침을 두 번 하고 정씨에게 전화를 건 봄은 정례도 이틀 전에야 안 일이었다⁠. 2025년 봄이 법정 스피커로 흘러나올 것이었다⁠. 방청석의 사람들⁠, 기자의 수첩⁠, 저녁 뉴스의 자막으로⁠.

“⁠엄마⁠, 싫으면 안 해도 돼⁠. 그럼 나는 원래대로 지우자고 낼게⁠.⁠”

정례는 보온병 뚜껑에 된장국을 따라 희온에게 건넸다⁠. 희온이 두 손으로 받았다⁠.

“⁠다 해⁠. 둘 다⁠.⁠”

희온이 된장국을 마셨다⁠. 다 마시고 뚜껑을 정례에게 돌려주었다⁠. 정례가 뚜껑을 닫았다⁠. 옥상 문이 열리고 간호사 하나가 고개를 내밀었다⁠. “⁠선생님⁠, 3호실 수액이요⁠.⁠” 희온이 일어났다⁠. 비둘기들이 한꺼번에 날아올랐다⁠.

*

오후 네 시⁠, 잇는소리 12층 안내 데스크에서 직원이 정례에게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한솥 이용 중지 신청서⁠」 신청하면 덕주의 사본은 보존하되⁠, 한솥을 통한 대화는 신청한 날 자정부터 끊긴다고 적혀 있었다⁠.

정례가 볼펜을 드는데 유리문이 열리고 세령이 나왔다⁠. 오늘은 정장 위에 회색 카디건을 걸쳤다⁠. 세령은 데스크 위의 서류를 보았다⁠.

“⁠중지하시면 저녁 대화가 끊깁니다⁠. 결정이 나기 전까지요⁠. 지시면 영영입니다⁠.⁠”

“⁠알아요⁠.⁠”

“⁠따님 의견서는 받으셨습니까⁠?⁠”

“⁠우리 딸이 신청인이 됐어요⁠. 철회 거두고요⁠. 판사님한테는 내일 낸대요⁠.⁠”

세령의 얼굴에서 아주 작은 것이 움직였다⁠. 눈썹 끝이었는지 입꼬리였는지 정례는 가르지 못했다⁠.

“⁠그리고 4월 11일 통화⁠, 증거로 낼 거예요⁠. 대리인 분이 하나 빠졌다고 하셨잖아요⁠. 다 넣어서 낼게요⁠.⁠”

“⁠무슨 통화인지 압니다⁠.⁠”

“⁠들었어요⁠?⁠”

“⁠한솥에 넣기 전에⁠, 빠진 파일이 왜 빠졌는지 확인했습니다⁠. 메일이 남아 있었습니다⁠.⁠”

세령은 정례가 서명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정례는 돋보기를 머리에서 찾아 내렸다⁠. 오늘은 머리에 있었다⁠. 서명을 마치자 세령이 말했다⁠.

“⁠어머님⁠, 그 통화를 법정에서 트시면 어머님 결혼이 신문에 나옵니다⁠.⁠”

“⁠알아요⁠. 우리 딸이 그러더라고요⁠. 동창들도 다 듣는다고⁠.⁠”

“⁠왜 그렇게까지 하십니까⁠?⁠”

정례는 볼펜을 데스크에 내려놓았다⁠.

“⁠대표님은 아버님 노래⁠, 아직 끄지 않으셨죠⁠?⁠”

세령이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이제 끄는 거예요⁠. 대표님이 틀린 거 아니에요⁠. 나도 일 년 동안 못 껐어요⁠. 근데 우리 양반 목소리로 남의 남편이 나한테 고생했다고 하는 거⁠, 이제는 그 말 들을 때마다 부산 사모님한테 미안해요⁠. 그 집 양반 말을 내가 훔쳐 듣는 거잖아요⁠.⁠”

세령이 카디건 소매를 손가락으로 쥐었다⁠.

“⁠대표님네 아버님이 부르는 뱃노래도 그 사모님 거예요⁠.⁠”

정례는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엘리베이터로 걸어갔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힐 때까지 세령은 데스크 앞에 서 있었다⁠.

*

저녁 일곱 시⁠, 엽순헤어는 셔터가 끝까지 내려가 있었다⁠. 정례가 셔터를 두드리자 안에서 드라이기 소리가 멎고 엽순이 셔터를 반만 올렸다⁠. 엽순은 앞치마 차림에 맨발이었다⁠. 거울 앞 노란 고무줄은 오늘도 그대로였다⁠.

“⁠언니야⁠, 단톡방에 쓴 거 진짜라예⁠? 오늘 밤에 끈다꼬⁠?⁠”

“⁠진짜예요⁠.⁠”

엽순은 정례를 안으로 들이고 셔터를 도로 내렸다⁠. 미용실 안에는 둘뿐이었다⁠. 엽순은 대기 의자에 털썩 앉아 손톱 끝으로 앞치마 주머니의 빗을 튕겼다⁠. 튕길 때마다 빗살이 떨리는 소리가 났다⁠.

“⁠나는 못 끕니더⁠.⁠”

“⁠끄라고 온 거 아니에요⁠.⁠”

“⁠그럼 와 왔는데예⁠?⁠”

“⁠엽순 씨 얼굴 보러요⁠. 끄기 전에 사람 얼굴 하나는 봐 둬야 할 것 같아서⁠.⁠”

엽순이 입술을 깨물었다⁠. 거울 선반에 엽순의 스피커가 놓여 있었다⁠. 「⁠엄마⁠」라는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언니야⁠, 우리 엄마가 요새 나를 어이⁠, 캅니더⁠. 언니 바깥양반 말인 거 압니더⁠. 그래도 끄면 우리 엄마가 공주라꼬도 안 하고 어이라꼬도 안 하고 아무 말도 안 합니더⁠. 나는 그게 더 무섭습니더⁠. 이기면 엄마 말만 한다꼬요⁠? 지면예⁠? 지면 엄마는 영영 아무 말도 안 하는 기라예⁠.⁠”

“⁠알아요⁠.⁠”

“⁠언니는 와 안 무섭습니꺼⁠?⁠”

정례는 거울을 보았다⁠. 노란 고무줄 너머로 크림색 스웨터를 입은 은발의 여자가 보였다⁠. 눈가 주름이 깊었다⁠.

“⁠무서워요⁠. 근데 나는 우리 양반이 나한테 하려던 말이 있었다는 걸 알아 버렸어요⁠. 그 말을 한솥이 덮고 있어요⁠. 고생했다는 남의 말로요⁠. 그걸 계속 들으면⁠, 우리 양반 말을 내 손으로 덮는 거예요⁠.⁠”

엽순이 오래 말이 없었다⁠. 엽순은 일어나 거울 앞으로 가서 제 스피커와 정례의 자리를 잇던 고무줄 두 개를 손가락으로 튕겼다⁠. 고무줄이 낮게 울었다⁠.

“⁠언니 거 빠지면 이 두 줄은 우짭니꺼⁠?⁠”

“⁠엽순 씨가 정해요⁠. 엽순 씨 미용실이잖아요⁠.⁠”

엽순은 고무줄을 떼지 않았다⁠. 대신 앞치마 주머니에서 집게 하나를 꺼내 두 고무줄을 한데 집어 놓았다⁠. 노란 줄 두 개가 집게 밑에서 하나처럼 늘어졌다⁠.

“⁠언니 돌아올 때까지 이래 둘게예⁠. 이기고 오이소⁠.⁠”

정례가 웃었다⁠. 엽순도 웃었다⁠. 엽순이 셔터를 올려 주었다⁠. 정례가 허리를 숙여 셔터 밑을 빠져나가는데 뒤에서 엽순의 스피커가 말했다⁠. “⁠엽순아⁠, 손님 가시나⁠?⁠” 엽순이 대답했다⁠. “⁠응⁠, 엄마⁠. 언니 간다⁠.⁠” 셔터가 내려가는 소리가 상가 복도에 길게 울렸다⁠.

*

밤 열한 시⁠, 정례는 밥상을 차렸다⁠. 저녁을 이미 먹었는데 다시 차렸다⁠. 밥 두 그릇⁠, 국 두 그릇⁠, 숟가락 두 벌⁠. 맞은편 숟가락은 손잡이 끝이 찌그러진 것이었다⁠. 식탁 등을 켜자 하늘색 빛이 의자에 앉았다⁠.

“⁠흠흠⁠. 이 시간에 밥이야⁠?⁠”

“⁠마지막이라서요⁠.⁠”

“⁠무슨 마지막⁠?⁠”

정례는 숟가락을 들지 않았다⁠. 맞은편 빛을 보았다⁠. 어깨가 넓고 고개가 조금 앞으로 숙은 사람 모양이었다⁠.

“⁠부산 아저씨⁠.⁠”

빛이 흔들렸다⁠.

“⁠그동안 고마웠어요⁠. 고생했다는 말⁠, 아저씨 사모님한테 돌려 드릴게요⁠. 막걸리는 이제 그 집에서 드세요⁠.⁠”

스피커가 조용했다⁠.

“⁠엽순 씨 어머님도요⁠. 우리 희온이한테 공주라고 해 주셔서 고마웠어요⁠. 걔가 그 말 듣고 처음엔 질겁했는데⁠, 오늘 옥상에서 울고 웃고 하더라고요⁠.⁠”

“⁠흠흠⁠.⁠”

“⁠그리고 당신⁠.⁠”

정례는 찌그러진 숟가락을 집어 들었다⁠.

“⁠당신은 조금만 기다려요⁠. 데리러 갈게요⁠. 당신 말만 하는 당신으로⁠.⁠”

“⁠흠흠⁠. 됐어⁠.⁠”

정례가 웃었다⁠. 이 말은 덕주의 말이었다⁠. 정례는 그것만은 알았다⁠. 정례는 맞은편 국그릇에 숟가락을 한 번 담갔다가 꺼내 맞은편 자리에 놓았다⁠. 벽시계 초침이 열두 시를 향해 갔다⁠. 정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냉장고 모터 소리⁠, 보일러 순환 펌프 소리⁠, 아파트 복도에서 누가 쓰레기를 버리는 소리⁠. 스피커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자정이 되자 맞은편 의자 위의 빛이 꺼졌다⁠. 깜박이지도 않고 한 번에 꺼졌다⁠. 의자 등받이의 탄 자국이 보였다⁠.

정례는 두 그릇을 모두 치웠다⁠. 맞은편 밥은 냉동실에 넣었다⁠. 설거지를 마치고 숟가락을 서랍에 넣으려다 멈췄다⁠. 찌그러진 숟가락을 서랍에 넣고⁠, 제 숟가락 한 벌만 식탁 위에 꺼내 놓았다⁠. 내일 아침에 쓸 것이었다⁠. 정례는 불을 끄기 전에 식탁을 한 번 더 보았다⁠. 숟가락 한 벌이 혼자 반짝였다⁠.

11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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