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5,457자)

항로가 고른 남자

AI 감독의 구단 라인업 · 여오령

4월의 마지막 월요일⁠, 구단 사무동 2층 작은 회의실 문 앞에서 우철은 안쪽 소리를 들었다⁠. 의자 다리가 바닥을 긁는 소리⁠, 종이 넘기는 소리⁠, 그리고 세겸의 고른 목소리였다⁠.

“⁠직구 평균 구속이 지난해보다 3킬로미터 떨어졌습니다⁠. 왼손 타자 상대 피안타율은 리그 아래에서 세 번째고요⁠. 항로는 남은 시즌 선배님의 기대 기여를 마이너스로 봅니다⁠.⁠”

열네 해를 해무 마운드에서 던진 왼손 투수가 회의실 안에 있었다⁠. 선수들은 덩치 때문에 곰이라고 불렀다⁠. 곰은 지난 설명회에서 항로가 자기 공도 좋아하냐고 물었던 고참이었다⁠.

우철은 노크하지 않고 문을 열었다⁠.

곰이 탁자 앞에 글러브를 무릎에 얹고 앉아 있었다⁠. 맞은편에 세겸과 운영팀장이 있었고⁠, 탁자 위 태블릿에 항로의 화면이 떠 있었다⁠. 빨간 막대가 아래로 길게 뻗어 있었다⁠.

“⁠배 선수님⁠, 지금은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곰 형 방출 통보하는 자리죠⁠? 동료가 들어오면 안 되는 자리면 동료한테 숨길 일인가 봅니다⁠.⁠”

세겸이 운영팀장을 보았다⁠. 운영팀장이 일어나려는데 곰이 손을 들어 막았다⁠.

“⁠놔둬⁠. 어차피 쟤도 다음이다⁠.⁠”

곰이 웃었다⁠. 웃는데 글러브를 쥔 손가락이 하얬다⁠. 우철은 문을 등지고 서서 세겸을 보았다⁠.

“⁠단장님⁠. 형 직구 떨어진 거 형도 압니다⁠. 그래서 올해 커브를 새로 만들었어요⁠. 겨울 내내 배팅장 와서 탄우한테 받아 달라고 했다고요⁠. 그 커브는 항로가 압니까⁠?⁠”

“⁠항로는 공 하나하나의 회전을 압니다⁠.⁠”

“⁠그럼 항로가 형을 자른 겁니까⁠, 단장님이 자른 겁니까⁠?⁠”

“⁠구단이 자릅니다⁠.⁠”

“⁠그 구단이 누군데요⁠?⁠”

세겸은 태블릿 화면을 끄지 않았다⁠. 빨간 막대가 계속 떠 있었다⁠.

“⁠배 선수님⁠, 항로 뒤에 숨는다고 생각하시죠⁠? 아닙니다⁠. 항로가 맞아서 하는 말입니다⁠. 틀린 숫자면 제가 안 씁니다⁠.⁠”

“⁠숫자가 맞으면 단장님 입으로 말하세요⁠. 화면 대신⁠.⁠”

세겸이 태블릿을 집어 화면을 껐다⁠. 그러고는 곰을 똑바로 보았다⁠.

“⁠선배님⁠, 방출입니다⁠. 제가 결정했습니다⁠. 잔여 연봉은 규정대로 드립니다⁠.⁠”

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어나서 글러브를 옆구리에 끼고 우철 옆을 지나갔다⁠. 문 앞에서 멈추더니 우철의 오른쪽 팔꿈치 보호대를 손가락으로 툭 쳤다⁠.

“⁠이거 갈 때 나한테 먼저 말해라⁠. 내가 커브 받아 줄게⁠.⁠”

곰이 복도로 나갔다⁠. 스파이크를 신지 않은 운동화 소리가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

월요일 저녁 라커룸 공기가 무거웠다⁠. 선수회 단톡방에 공지가 하나 올라와 있었다⁠. 「⁠4월에만 방출 둘⁠. 고참 회의 내일 오전 열 시⁠」 아래로 이모티콘이 줄줄이 달렸다⁠. 화난 얼굴⁠, 우는 얼굴⁠, 그리고 어떤 신인이 실수로 보낸 하트 하나⁠.

“⁠누구냐⁠, 하트⁠?⁠”

“⁠죄송합니다⁠! 손가락이 미끄러졌어요⁠!⁠”

의찬이 휴대전화를 두 손으로 감싸 쥐고 고개를 숙였다⁠. 고참들이 그제야 웃었다⁠. 웃음은 오래 가지 않았다⁠. 텔레비전에서 뉴스가 돌았다⁠. 「⁠청람테크⁠, 해외 리그 한 곳과 AI 감독 계약⁠」 화면 속 청람 부사장이 낯선 나라 구장 앞에서 웃고 있었다⁠. 바로 밑 자막에는 해무해운 화물선 한 척이 싱가포르항에 묶여 있다는 소식이 지나갔다⁠. 연료비를 못 내서 배가 떠나지 못한다는 기사였다⁠.

“⁠배가 묶이면 선원들은 어떻게 돼요⁠?⁠”

의찬이 물었다⁠. 고참 하나가 대답했다⁠.

“⁠배에서 산다⁠. 집에 못 오고⁠.⁠”

*

화요일 오전 열 시⁠, 라커룸 가운데 탁자에 고참 여섯이 둘러앉았다⁠. 신인들은 사물함 앞에 서서 휴대전화를 보는 척하며 귀를 열어 두었다⁠. 커피 자판기가 웅 하고 돌다가 덜컥 컵을 떨어뜨렸다⁠.

“⁠광고 거부하자⁠. 단체로⁠.⁠”

서른다섯 살 포수가 탁자를 손바닥으로 쳤다⁠. 맞은편 2루수가 고개를 저었다⁠.

“⁠거부하면 다음 방출 명단에 우리 이름 먼저 올라가⁠. 항로가 ‘⁠팀 분위기 저해⁠’ 같은 거 계산 못 하겠냐⁠?⁠”

“⁠그런 것도 계산한대⁠?⁠”

“⁠모르니까 무섭지⁠.⁠”

다들 우철을 보았다⁠. 우철은 사물함에 등을 기대고 팔짱을 끼고 있었다⁠. 오른팔이 왼팔 위로 올라가 있었는데⁠, 팔꿈치가 당겨서 슬그머니 왼팔을 위로 바꿨다⁠.

“⁠거부는 각자 해⁠. 같이 하면 단장이 우리를 한 덩어리로 자르기 편해⁠. 하나씩 하면 하나씩 이유를 대야 하고⁠.⁠”

“⁠형은 할 거예요⁠?⁠”

“⁠나는 아직 대사를 못 외웠다⁠.⁠”

탁자가 웃었다⁠. 사물함 앞에서 의찬이 손을 반쯤 들었다⁠.

“⁠저기⁠, 저는 그 광고에 춤추는 역할로 나가는데요⁠. 저도 거부해야 돼요⁠?⁠”

“⁠너는 춰⁠. 신인은 춤추는 거다⁠.⁠”

“⁠선배님⁠, 그거 완전 꼰대 말투예요⁠.⁠”

“⁠꼰대는 쉰부터다⁠. 나는 영포티라며⁠.⁠”

포수가 커피를 뿜을 뻔했다⁠. 회의는 결론 없이 끝났다⁠. 단톡방에는 「⁠각자 판단⁠」이라는 공지가 하나 더 올라왔고⁠, 아래로 하트가 또 하나 달렸다⁠. 이번에도 의찬이었다⁠.

*

화요일 경기는 응원 앰프부터 달랐다⁠. 청람이 협찬한 새 응원 음향이 외야 스탠드 밑에 설치됐다⁠. 해무 공격 때마다 항로의 이름을 넣은 노래가 쿵쿵 울렸다⁠. 「⁠항로 따라 가자⁠, 해무 마린스⁠」 북소리가 덕아웃 바닥까지 울려서 벤치가 떨렸다⁠.

우철은 벤치 끝에서 이마를 찡그렸다⁠. 미트 소리가 안 들렸다⁠. 투수의 숨도⁠, 포수의 정강이 보호대 소리도 노래에 묻혔다⁠.

7회 말⁠, 해무가 3 대 0으로 앞선 1사 주자 없는 상황에서 화면이 깜박였다⁠.

“⁠대타⁠, 배우철⁠. 출전 시간 배분⁠.⁠”

덕아웃에서 누가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가 입을 막았다⁠. 석배가 고개를 숙였다⁠.

“⁠형⁠, 항로가 고참 출전 시간을 나눠 주는 거예요⁠. 점수 차 있을 때⁠.⁠”

“⁠설거지 시키는 거네⁠.⁠”

“⁠그렇게 말하면 좀⁠…⁠…⁠.⁠”

“⁠맞잖아⁠.⁠”

우철은 헬멧을 쓰고 올라갔다⁠. 전광판에 「⁠대타 배우철⁠」이 뜨자 외야 스탠드의 앰프가 더 크게 울렸다⁠. 「⁠항로 따라 가자⁠」 상대 팀은 스물한 살 마무리 후보를 올렸다⁠. 연습 투구 공이 미트에 꽂힐 때 바람 가르는 소리가 났는데⁠, 미트 소리는 앰프에 먹혔다⁠.

초구는 시속 157킬로미터 직구였다⁠. 우철은 공이 지나간 다음에 배트를 생각했다⁠. 두 번째 공도 직구였고⁠, 배트가 늦었다⁠. 헛스윙⁠. 세 번째 공은 슬라이더였다⁠. 우철은 공이 꺾이는 소리를 기다렸다⁠. 소리는 오지 않았다⁠. 앰프에서 북소리만 둥⁠, 둥 울렸다⁠. 배트가 공 위를 지나갔다⁠.

삼진이었다⁠.

덕아웃으로 돌아오는 계단에서 우철은 헬멧을 벗었다⁠. 귀가 먹먹했다⁠. 화면에 짧은 글자가 떴다⁠. 「⁠대타 결과 예측대로⁠」

8회 초 수비 시간⁠, 우철은 덕아웃 뒤 복도로 빠져나가 외야 스탠드 밑 음향실 문을 두드렸다⁠. 좁은 방에 모니터 넷과 커다란 음향판이 있었다⁠. 청람 로고가 박힌 조끼를 입은 젊은 기사가 헤드폰을 한쪽 귀에만 걸치고 앉아 있었다⁠.

“⁠앰프 좀 줄여 줄 수 있어요⁠? 반만⁠.⁠”

“⁠선수님⁠, 죄송해요⁠. 계약서에 해무 공격 때 최소 음량이 정해져 있어요⁠. 청람 쪽 계약이라 제가 못 건드려요⁠.⁠”

“⁠최소 음량이 얼마예요⁠?⁠”

기사가 음향판의 바늘을 가리켰다⁠. 바늘이 빨간 칸 바로 앞에서 떨고 있었다⁠.

“⁠이 정도면 옆 사람 말이 안 들려요⁠. 그게 목표래요⁠. 관중이 다 같이 한 덩어리로 느끼게⁠.⁠”

“⁠덕아웃도 한 덩어리가 됐네요⁠. 귀 막힌 덩어리⁠.⁠”

기사가 미안한 얼굴로 헤드폰을 마저 썼다⁠. 우철은 음향실을 나와 복도를 걸었다⁠. 스탠드 밑 콘크리트가 북소리에 맞춰 둥⁠, 둥 울렸다⁠. 귀가 아니라 발바닥으로 들리는 소리였다⁠.

경기는 8회부터 흔들렸다⁠. 해무 불펜이 볼넷 둘과 2루타 하나로 석 점을 내줬다⁠. 3 대 3⁠. 9회 말 2사 2루에서 항로는 의찬을 골랐다⁠. 의찬은 이번에는 헬멧 끈을 놓치지 않았다⁠. 초구를 기다리지도 않고 첫 공을 받아쳤다⁠. 공이 우익수 앞으로 굴렀고 2루 주자가 홈을 밟았다⁠.

덕아웃이 쏟아져 나갔다⁠. 우철도 나갔다⁠. 의찬을 끌어안는데 의찬이 우철 귀에 대고 소리쳤다⁠.

“⁠선배님⁠! 저 아무 생각 안 하고 쳤어요⁠!⁠”

“⁠그게 제일 잘 치는 거다⁠.⁠”

우철은 웃었다⁠. 웃으면서 외야 스탠드를 보았다⁠. 앰프가 끝내기 노래를 쿵쿵 틀고 있었다⁠.

*

밤 열한 시⁠, 연안부두 아파트 식탁에 고지서 두 장이 놓여 있었다⁠. 배팅장 대출 이자와 관리비였다⁠. 탄우는 식탁 끝에서 숙제를 하다가 연필을 귀에 꽂고 우철을 보았다⁠.

“⁠아빠⁠, 숙제가 「⁠우리 아빠를 소개합니다⁠」인데⁠. 아빠 직업 뭐라고 써⁠?⁠”

“⁠야구 선수⁠.⁠”

“⁠애들이 그러는데⁠, 아빠는 선수가 아니라 대타래⁠. 대타가 직업이야⁠?⁠”

“⁠대타는 선수가 하는 일이야⁠.⁠”

“⁠그럼 오늘은 무슨 일 했어⁠?⁠”

미강이 설거지를 하다가 웃음을 참느라 어깨를 들썩였다⁠. 우철은 탄우의 공책을 끌어다 보았다⁠. 「⁠우리 아빠는 귀가 좋습니다⁠. 우리 아빠는 엄마한테 진다⁠.⁠」 연필 글씨가 반듯했다⁠.

“⁠두 번째 줄은 지워라⁠.⁠”

“⁠엄마가 쓰라고 했는데⁠?⁠”

미강이 고무장갑을 벗고 식탁으로 왔다⁠. 고지서 옆에 서류 한 장을 내려놓았다⁠. 청람이 보낸 광고 출연 계약서였다⁠.

“⁠이거 사인하면 이달 이자 나와⁠. 당신이 말 하나만 하면 돼⁠. ‘⁠항로 감독님을 믿습니다⁠.⁠’⁠”

“⁠그 말을 내가 왜 해⁠?⁠”

“⁠당신이 왜 안 해⁠? 오늘 삼진 먹었다며⁠. 항로가 예측대로래⁠. 그럼 믿는 거 맞잖아⁠.⁠”

“⁠오늘은 앰프 때문에 못 들었어⁠.⁠”

“⁠핑계가 귀로도 오네⁠.⁠”

우철이 웃었다⁠. 미강은 안 웃었다⁠. 펜을 계약서 위에 굴려 놓았다⁠.

“⁠나는 당신 믿어⁠. 그러니까 당신이 항로 믿는 척하는 거 하루만 해⁠. 하루⁠.⁠”

우철은 펜을 집었다⁠. 오른손으로 집었다가 팔꿈치가 찌르르해서 왼손으로 옮겨 쥐었다⁠. 미강이 왼손에 쥔 펜을 보았다⁠. 우철은 서둘러 오른손으로 다시 옮겨 사인했다⁠. 글씨가 삐뚤어졌다⁠.

*

수요일 아침⁠, 해무 파크 외야 잔디에 하얀 반사판과 카메라 세 대가 놓였다⁠. 촬영 감독이 확성기로 외쳤다⁠. 「⁠항로가 고른 남자 · 첫 번째 장면⁠」 우철은 유니폼을 입고 대기 타석에 무릎을 꿇은 채 카메라를 보았다⁠. 뒤에서 의찬이 청람 로고가 박힌 모자를 쓰고 춤 연습을 하고 있었다⁠. 숏폼에서 유행하는 동작이었다⁠.

“⁠선수님⁠, 화면 쪽을 올려다보시면서 천천히⁠, 진심을 담아서요⁠. ‘⁠항로 감독님을 믿습니다⁠.⁠’⁠”

“⁠항로 감독님을⁠, 믿습니다⁠.⁠”

“⁠너무 끊겼어요⁠. 다시 갈게요⁠.⁠”

“⁠항로 감독님을 믿습니다⁠.⁠”

“⁠지금은 화난 분 같아요⁠.⁠”

“⁠항로 감독님을⁠…⁠…⁠.⁠”

“⁠웃으면서요⁠!⁠”

열네 번째 촬영에서 우철은 카메라 대신 의찬을 보았다⁠. 의찬은 춤을 멈추고 우철을 보고 있었다⁠. 촬영장에 바닷바람이 불어 반사판이 펄럭였다⁠. 우철이 무릎을 펴고 일어났다⁠.

“⁠감독님⁠. 이 말은 못 하겠습니다⁠.⁠”

“⁠선수님⁠, 대사 하나예요⁠.⁠”

“⁠어제 곰 형이 항로 화면 보고 짐 쌌어요⁠. 오늘 제가 항로 믿는다고 하면⁠, 그 영상을 곰 형이 봅니다⁠.⁠”

촬영장이 조용해졌다⁠. 반사판 뒤에서 청람 부사장이 걸어 나왔다⁠. 회색 운동화가 잔디에 젖어 짙어져 있었다⁠. 부사장은 화를 내지 않았다⁠. 다가와서 우철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안 들리게 목소리를 낮췄다⁠.

“⁠선수님⁠, 마음 압니다⁠. 7월 말까지만 웃어 주세요⁠. 7월 말에 선수단 연봉 총액만 맞추면 그다음엔 아무도 안 잘립니다⁠. 그때부터는 다 좋은 일만 있어요⁠.⁠”

“⁠연봉 총액이요⁠?⁠”

부사장의 손이 우철 어깨에서 멈췄다⁠. 웃는 얼굴이 그대로 굳었다⁠. 반사판이 한 번 더 펄럭였다⁠.

“⁠…아⁠, 단장님이 아직 말씀 안 하셨구나⁠.⁠”

4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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