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5,410자)

전날 밤

AI 감독의 구단 라인업 · 여오령

10월 1일 금요일 밤 아홉 시 반⁠, 라커룸 텔레비전 앞에 선수들이 몰려 있었다⁠. 화면 속은 광주였다⁠. 무등 썬더스의 시즌 마지막 경기⁠, 9회 말 2사 만루⁠. 무등 타자가 친 공이 높이 떴다⁠. 라커룸이 숨을 참았다⁠. 상대 유격수가 뒷걸음질 치며 공을 잡았다⁠.

라커룸이 터졌다⁠. 수건이 날아가고 누가 사물함을 주먹으로 쳤다⁠. 의찬이 의자 위에 올라가 춤을 췄다⁠. 고참 포수가 의찬의 다리를 붙잡고 끌어내렸다⁠.

“⁠내려와⁠, 인마⁠. 아직 아무것도 안 됐어⁠.⁠”

“⁠선배님⁠, 무등이 졌잖아요⁠! 우리 내일 이기면 5위예요⁠!⁠”

“⁠지면⁠?⁠”

“⁠지면⁠… 6위요⁠.⁠”

“⁠그러니까 내려와⁠.⁠”

텔레비전 자막이 바뀌었다⁠. 「⁠바다 건너 리그 AI 감독 첫 시즌⁠, 승률 5할 4푼으로 마쳐⁠」가 지나가고⁠, 「⁠해동리그 5위⁠, 10월 2일 해무–한양전으로 결정⁠」이 올라왔다⁠. 바로 밑에 한 줄이 더 지나갔다⁠. 「⁠같은 날 저녁 이사회⁠, ‘⁠AI 단독 지휘⁠’ 표결⁠」

우철은 라커룸 문가에 서서 텔레비전을 보았다⁠. 부목은 풀고 얇은 붕대만 감았다⁠. 오른팔을 몸에 붙이고 있었다⁠. 주머니에 종이 한 장이 접혀 있었다⁠. 어제 팀 닥터가 써 준 종이였다⁠.

「⁠배우철 · 오른쪽 팔꿈치 인대 완전 파열 · 소견⁠: 대타 한 타석 가능 · 번트 동작에 한함 · 풀스윙 금지 · 통증 시 즉시 교체⁠」

팀 닥터는 종이를 건네며 한숨을 쉬었다⁠. “⁠단장님이 이렇게 쓰라고 하셨어요⁠. 쓸 수 있는 데까지만⁠. 저는 쓸 수 있는 데까지 썼습니다⁠. 번트 한 번⁠. 그 이상은 의사로서 못 씁니다⁠.⁠”

*

어제 목요일은 채권단 시한이었다⁠. 오후 다섯 시에 경제 뉴스 자막이 떴다⁠. 「⁠해무해운⁠, 화물선 두 척 매각으로 채권단 시한 넘겨 … 청람과 구단 매각 본계약⁠」 같은 뉴스 끝에 짧은 화면이 붙어 있었다⁠. 연안부두 여객 터미널 앞에 선원 마흔여섯 명이 가방을 메고 서 있었다⁠. 배가 팔려서 내린 사람들이었다⁠.

우철은 어젯밤 뉴스 화면을 두 번 보았다⁠. 두 번째 볼 때 8월에 손을 잡았던 선원을 찾았다⁠. 선원은 화면에 없었다⁠. 지난번 배에서 내린 사람이었으니까⁠. 이번에 내린 마흔여섯 명의 얼굴 가운데에는 우철이 아는 얼굴이 없었다⁠. 다들 해무 모자를 쓰고 있지도 않았다⁠.

*

목요일 밤⁠, 미강은 거실 바닥에 다리미판을 펴고 남색과 하얀색 줄무늬 유니폼을 다렸다⁠. 다리미에서 김이 칙칙 올라왔다⁠. 우철은 소파에 앉아 김 오르는 소리를 들었다⁠.

“⁠나 내일 안 나가⁠.⁠”

“⁠알아⁠.⁠”

“⁠부상자 명단이야⁠. 덕아웃에도 못 앉아⁠.⁠”

“⁠알아⁠. 그래서 다려⁠.⁠”

미강이 유니폼 소매를 뒤집었다⁠. 오른쪽 팔꿈치 자리에 보호대가 스무 해 동안 쓸고 지나간 자국이 하얗게 남아 있었다⁠. 미강은 하얀 자국 위로 다리미를 천천히 밀었다⁠. 자국은 지워지지 않았다⁠.

“⁠안 나가는 사람 유니폼을 왜 다려⁠?⁠”

“⁠마지막 경기잖아⁠. 관중석에 입고 앉아⁠. 당신 관중석에서 유니폼 입고 앉아 있으면⁠, 사람들이 다 알아⁠. 스무 해 뛴 사람이 거기 있다고⁠.⁠”

방에서 탄우가 스케치북을 들고 나왔다⁠. 매직 뚜껑을 입에 물고 있었다⁠. 스케치북을 펼쳐 보였다⁠. 큼직한 글자였다⁠. 「⁠아빠 회색도 색이다⁠」

“⁠이거 내일 들 거야⁠.⁠”

“⁠그 말 어디서 들었어⁠?⁠”

“⁠의찬이 형 숏폼에서⁠. 아빠가 경팔 할아버지한테 한 말이라던데⁠. 조회 수 삼십만이래⁠.⁠”

미강이 다리미를 세워 두고 웃었다⁠. 우철도 웃었다⁠. 탄우는 웃지 않고 스케치북을 다시 덮었다⁠.

“⁠아빠⁠. 우리 팀 대회 졌어⁠. 준결승에서⁠. 근데 우리 점수 세 점 중에 두 점이 번트였어⁠.⁠”

“⁠잘했네⁠.⁠”

“⁠코치님이 그랬어⁠. 번트는 아웃 하나 주고 한 점 사는 거래⁠. 근데 우리 팀은 키가 작아서 그게 제일 싸대⁠.⁠”

탄우가 매직 뚜껑을 닫았다⁠. 딸깍⁠.

“⁠아빠는 키 크니까 비싸겠다⁠.⁠”

미강이 다리미를 다시 들었다⁠. 김이 칙 올라왔다⁠. 우철은 유니폼 소매의 하얀 자국을 보다가 눈을 감았다⁠. 다리미 소리⁠, 매직 뚜껑 소리⁠, 창밖에서 들어오는 연안부두의 뱃고동 소리가 차례로 지나갔다⁠.

*

밤 열한 시⁠, 구장 조명은 꺼지고 덕아웃 천장 등 하나만 켜져 있었다⁠. 화면도 켜져 있었다⁠. 내일 경기의 예비 라인업이 떠 있었다⁠. 화면 팬이 낮게 돌았다⁠. 바다에서 파도 소리가 그물망을 넘어 들어왔다⁠.

경팔이 벤치 한가운데에 앉아 해바라기씨를 깨물었다⁠. 의찬이 벤치 끝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우철은 늘 앉던 자리⁠, 배트 걸이 옆에 앉았다⁠. 부상자 명단 선수가 덕아웃에 앉는 것은 경기 중에만 안 되는 일이었다⁠. 밤에는 아무도 막지 않았다⁠.

덕아웃 계단에서 발소리가 났다⁠. 조심스럽게 한 칸씩 내려왔다⁠. 석배였다⁠. 해고된 데이터 코치는 구장 출입증이 없었다⁠. 3루 쪽 관중 출입문을 지키는 경비 아저씨가 석배를 보더니 손을 휘저어 들여보냈다고 했다⁠. 「⁠딸 사진 보여 주면 들여보내 준다⁠」고 했다는 것이다⁠.

“⁠딸 사진 보여 줬냐⁠?⁠”

“⁠스무 장이요⁠, 총괄님⁠. 아저씨가 열다섯 장째에 문 열어 줬어요⁠.⁠”

석배가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빨간 얼굴이 이제 조금 하얘진 아기가 눈을 뜨고 있었다⁠. 경팔이 휴대전화를 받아 들고 오래 보았다⁠.

“⁠위 이병이네⁠.⁠”

“⁠아직 이병도 아니에요⁠. 일주일 됐어요⁠.⁠”

“⁠그럼 훈련병⁠.⁠”

의찬이 경팔 어깨 너머로 휴대전화를 들여다보았다⁠.

“⁠코치님 닮았어요⁠. 안경만 없지⁠.⁠”

“⁠안경은 커서 쓰겠죠⁠.⁠”

석배가 휴대전화를 거두고 노트북을 꺼냈다⁠. 해고되면서도 들고 나간 자기 노트북이었다⁠. 노트북 화면에 한양 블레이즈의 분석 화면이 떠 있었다⁠.

“⁠한양도 올여름부터 청람 걸 써요⁠. 감독은 사람인데⁠, 분석 화면은 청람 거예요⁠. 남포도 그렇고요⁠. 다들 같은 숫자를 봐요⁠. 그런데 형⁠.⁠”

석배가 화면 한 줄을 짚었다⁠.

「⁠배우철 · 번트 시도 확률 0⁠.00 · 수비 위치 기본(⁠후진⁠)⁠」

“⁠형은 스무 해 동안 번트를 한 번도 안 댔잖아요⁠. 청람 숫자는 없던 일은 영으로 봐요⁠. 내일 형이 나오면 한양 내야는 뒤로 물러서 있을 거예요⁠. 형이 치는 사람이니까⁠. 강하게 치는 공 잡으려고⁠.⁠”

경팔이 씨를 깨물다 멈췄다⁠. 덕아웃이 조용해졌다⁠. 파도 소리만 들렸다⁠.

“⁠의찬아⁠.⁠”

“⁠네⁠, 코치님⁠.⁠”

“⁠너 내일 대주자로 나간다⁠. 3루에 서 있게 될 거다⁠. 항로가 너를 그렇게 쓸 거다⁠. 발이 제일 빠르니까⁠.⁠”

“⁠제가 3루에 있으면요⁠?⁠”

“⁠3루에 있으면 귀를 열어 둬라⁠. 배 병장 배트가 눕는 소리⁠.⁠”

“⁠배트 눕는 데도 소리가 나요⁠?⁠”

“⁠나⁠. 배 병장한테는⁠.⁠”

의찬이 우철을 보았다⁠. 우철은 왼손으로 배트 걸이에서 배트 하나를 뽑았다⁠. 무릎에 가로로 눕혔다⁠. 배트가 벤치 나무에 닿으면서 낮게 톡⁠, 소리를 냈다⁠.

“⁠이 소리⁠.⁠”

“⁠그게 다예요⁠?⁠”

“⁠다다⁠. 그다음은 네 다리가 듣는다⁠.⁠”

*

계단 위에서 다른 발소리가 내려왔다⁠. 운동화였다⁠. 한 칸씩⁠, 서두르지 않았다⁠. 덕아웃 안의 넷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세겸이었다⁠. 정장 윗도리 없이 남색 셔츠 차림이었다⁠. 밤바람에 셔츠 소매가 펄럭였다⁠. 손에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다⁠. 세겸은 덕아웃 바닥에 내려서서 해바라기씨 껍질을 밟았다⁠. 바삭⁠, 소리가 났다⁠. 세겸은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추 코치님⁠, 껍질은 치우고 가시죠⁠.⁠”

“⁠내일 치운다⁠. 내일 마지막이다⁠.⁠”

세겸이 석배를 보았다⁠. 석배가 노트북을 덮지 않았다⁠. 세겸도 덮으라고 하지 않았다⁠.

“⁠위 코치님⁠, 따님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단장님 덕분에 출산 휴가는 넉넉해요⁠.⁠”

세겸이 웃지도 화내지도 않고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러고는 화면 앞으로 걸어갔다⁠. 화면에 내일의 예비 라인업이 떠 있었다⁠. 대타 후보 줄 맨 아래 회색 글씨⁠. 「⁠부상자 명단 · 배우철⁠」

“⁠배 선수님⁠. 소견서 받았습니다⁠. 번트 한 타석⁠.⁠”

“⁠등록은 없다고 하셨습니다⁠.⁠”

“⁠하겠습니다⁠.⁠”

덕아웃이 얼어붙었다⁠. 의찬이 일어나다가 벤치 모서리에 정강이를 찧었다⁠. 아프다는 소리도 못 냈다⁠.

“⁠왜요⁠?⁠”

우철이 물었다⁠. 세겸이 화면을 올려다본 채로 대답했다⁠.

“⁠내일 구단주 세 분이 경기 보러 오십니다⁠. 남포 구단주님도요⁠. 표결 몇 시간 전입니다⁠. 지금 표가 반반입니다⁠. 찬성 다섯⁠, 반대 다섯⁠. 아직 모르는 분이 셋이고요⁠. 그분들이 내일 볼 그림을 제가 고르겠습니다⁠.⁠”

세겸이 휴대전화를 꺼냈다⁠. 화면을 몇 번 눌렀다⁠.

“⁠항로는 이제 정직합니다⁠. 리그가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정직한 항로는 팔꿈치가 끊어진 선수를 맨 아래에 둡니다⁠. 내일 9회에 사람 카드가 정직한 항로를 뒤집고 팔 끊어진 마흔 살 대타를 내보냅니다⁠. 그리고 못 칩니다⁠. 저는 그 그림에 걸겠습니다⁠. 사람이 고른 게 진다⁠. 그게 표결 전 마지막 장면입니다⁠.⁠”

“⁠제가 치면요⁠?⁠”

“⁠치시면 제가 집니다⁠. 표 몇 개를 잃겠죠⁠. 오백억도요⁠.⁠”

“⁠왜 그런 걸 거십니까⁠? 안 올리면 아무 일도 없는데⁠.⁠”

세겸이 휴대전화에서 눈을 떼고 우철을 보았다⁠. 덕아웃 천장 등 하나가 세겸의 얼굴을 위에서 비췄다⁠. 눈 밑이 검었다⁠.

“⁠안 올리면 구단주들은 사람 카드가 쓸 데가 없어서 안 쓴 걸로 봅니다⁠. 그럼 반반이 그대로 갑니다⁠. 반반은 저한테 집니다⁠. 판을 키워야 이기는 쪽 몫이 커집니다⁠. 저는 숫자를 믿습니다⁠. 0⁠.06이 무슨 뜻인지 압니다⁠.⁠”

세겸이 휴대전화 화면을 눌렀다⁠. 덕아웃 화면이 한 번 깜박였다⁠. 대타 후보 줄 맨 아래의 회색 글씨가 지워지고⁠, 하얀 글씨가 올라왔다⁠.

「⁠9⁠. 배우철 · 기대 출루 0⁠.06 · 팔꿈치 부상 반영 · 출전 권장 안 함⁠」

화면 오른쪽 아래에 작은 글씨가 한 줄 더 떴다⁠. 「⁠1군 등록 · 10월 2일⁠」

경팔이 해바라기씨를 깨물었다⁠. 딱⁠. 껍질을 손바닥에 받았다⁠. 바닥에 뱉지 않았다⁠.

“⁠세겸아⁠.⁠”

“⁠단장입니다⁠.⁠”

“⁠세겸아⁠. 너 열한 살 때 번트 댈 때⁠, 공 보고 댔냐⁠, 소리 듣고 댔냐⁠?⁠”

세겸이 대답하지 않았다⁠. 계단으로 걸어갔다⁠. 첫 계단에 발을 올리고 멈췄다⁠. 돌아보지 않았다⁠.

“⁠기억 안 납니다⁠.⁠”

“⁠숫자는 다 기억한다며⁠.⁠”

“⁠숫자만 기억합니다⁠.⁠”

세겸이 계단을 올라갔다⁠. 계단 중간에서 다시 한 번 멈췄다⁠. 이번에는 돌아보았다⁠. 화면 아래의 우철을 보았다⁠.

“⁠배 선수님⁠, 내일 사람 카드가 실패하면⁠, 저녁 표결은 통과됩니다⁠. 그러면 내년부터 이 덕아웃에는 저 화면만 남습니다⁠. 잘 주무세요⁠.⁠”

운동화 소리가 계단 위로 사라졌다⁠. 덕아웃에 넷이 남았다⁠. 화면 팬 소리와 파도 소리가 번갈아 들어왔다⁠. 의찬이 찧은 정강이를 문지르며 작게 말했다⁠.

“⁠선배님⁠, 저 지금 무서워요⁠. 내일 3루에 서는 게⁠.⁠”

“⁠나도⁠.⁠”

“⁠선배님도요⁠?⁠”

“⁠나는 번트를 오늘까지 열한 번 대 봤다⁠. 아들한테⁠. 죽은 건 넷⁠.⁠”

“⁠넷이요⁠?⁠”

“⁠넷이면 많은 거다⁠. 스무 해에 영 개였으니까⁠.⁠”

석배가 노트북을 덮었다⁠. 덮는 소리가 화면 팬 소리를 한 번 끊었다⁠. 경팔이 해바라기씨 봉지를 접어 주머니에 넣고 일어났다⁠. 무릎이 뚝 소리를 냈다⁠.

“⁠들어가 자라⁠. 내일 낮 경기다⁠. 해 뜨면 바람이 홈에서 바다로 분다⁠. 번트한 공이 덜 굴러간다⁠.⁠”

경팔이 덕아웃 천장 등을 껐다⁠. 화면만 남았다⁠. 화면 불빛 아래에서 우철은 왼손으로 배트를 배트 걸이에 도로 꽂았다⁠. 배트가 제자리에 들어가며 나무끼리 부딪치는 소리를 냈다⁠. 작고 낮은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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