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5,511자)

배팅장의 밤

AI 감독의 구단 라인업 · 여오령

화요일 오후 세 시⁠, 해무 파크 덕아웃에 해바라기씨 껍질이 다시 쌓이기 시작했다⁠. 경팔이 돌아온 첫날이었다⁠. 경팔은 화면 아래 접이식 의자에 앉지 않고 벤치 한가운데에 앉아 씨를 깨물었다⁠. 딱⁠. 빨간 카드는 뒷주머니에 꽂혀 있었다⁠. 모서리가 다시 닳아 가고 있었다⁠.

부상자 명단에 오른 선수는 경기 중 덕아웃에 앉지 못한다⁠. 우철은 경기 전 덕아웃까지만 내려갔다⁠. 부목 댄 팔을 목에 걸고 벤치 끝 배트 걸이 옆에 잠깐 앉았다⁠. 의찬이 2군에서 올라와 있었다⁠. 9월이 되어 1군 등록 인원이 늘어난 덕이었다⁠. 의찬은 우철의 부목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가⁠, 한참 뒤에 말했다⁠.

“⁠선배님⁠, 부목 색깔이 영포티예요⁠.⁠”

“⁠병원에서 골라 준 거다⁠.⁠”

“⁠병원도 영포티네요⁠.⁠”

경팔이 씨 껍질을 뱉으며 웃었다⁠. 화면에 라인업이 올라왔다⁠. 오른쪽 아래 구석에는 「⁠항로 3⁠.1⁠」 대타 후보 줄에서 우철의 이름은 빠져 있었다⁠. 대신 맨 아래에 회색 글씨가 한 줄 붙어 있었다⁠. 「⁠부상자 명단 · 배우철⁠」

“⁠배 병장⁠, 너 이제 회색이다⁠.⁠”

“⁠회색도 색입니다⁠, 감독님⁠.⁠”

“⁠코치다⁠.⁠”

해무와 무등은 승률이 같았다⁠. 남은 경기는 해무가 넷⁠, 무등이 셋⁠. 5위는 마지막 경기까지 가야 정해질 판이었다⁠. 우철은 경기 시작 삼십 분 전에 덕아웃을 나와 관중석 계단을 올라갔다⁠. 3루 응원석 맨 뒷줄에 앉았다⁠. 앞줄의 「⁠연안부두 늙은 갈매기들⁠」 방장이 돌아보더니 오징어 다리를 한 줌 내밀었다⁠. 우철은 왼손으로 받았다⁠. 관중석에서 보는 덕아웃은 생각보다 작았다⁠. 벤치 끝 배트 걸이 옆 자리가 비어 있었다⁠.

*

화요일 밤 아홉 시⁠, 배팅장 4번 철망 안에서 기계가 공을 물었다⁠. 윙⁠, 하고 바퀴 도는 소리가 나고 공이 날아왔다⁠. 탄우가 배트를 눕혔다⁠. 톡⁠. 공이 배트에 맞고 매트 위로 굴러가다가 석 자 앞에서 멈췄다⁠. 공이 죽는 소리는 작았다⁠. 매트의 고무가 공을 붙잡는 소리였다⁠.

“⁠아빠⁠, 봤어⁠? 이게 죽은 번트야⁠.⁠”

“⁠공이 죽었네⁠.⁠”

“⁠죽어야 돼⁠. 살아서 굴러가면 투수가 잡아⁠.⁠”

우철은 철망 밖 의자에 앉아 있었다⁠. 부목은 의자 옆에 풀어 두었다⁠. 팔꿈치는 보라색으로 부어 있었고⁠, 보호대는 집 서랍에 넣고 왔다⁠. 오른팔을 무릎 위에 조심스럽게 얹었다⁠. 진통제가 반쯤 남아 있어서 아픈 것이 멀리서 왔다⁠.

“⁠아빠도 해 봐⁠.⁠”

“⁠아빠는 번트 안 대 봤어⁠.⁠”

“⁠그러니까 해 봐⁠. 안 대 봤으니까⁠.⁠”

탄우가 철망 문을 열고 배트를 내밀었다⁠. 열한 살짜리 배트라 가볍고 짧았다⁠. 우철은 왼손으로 배트를 받았다⁠. 철망 안으로 들어가 타석에 발을 디뎠다⁠. 마흔 살이 열한 살 배트를 쥐니 배트가 장난감 같았다⁠.

“⁠아빠⁠, 오른손은 이렇게⁠. 꽉 잡지 말고⁠, 집게처럼⁠.⁠”

탄우가 우철의 오른손을 잡아 배트 몸통 위쪽에 얹었다⁠. 엄지와 검지 두 개로만 배트 뒤를 받치게 했다⁠. 손가락이 공 맞는 자리 바로 뒤에 붙었다⁠.

“⁠손가락 맞으면 어떡해⁠?⁠”

“⁠손가락 뒤에 숨기면 안 맞아⁠. 코치님이 그랬어⁠. 그리고 팔은 쭉 펴지 말고 구부려⁠. 공을 때리는 게 아니라 받는 거야⁠. 포수처럼⁠.⁠”

“⁠포수처럼⁠.⁠”

“⁠아빠는 포수 해 봤잖아⁠. 리틀야구 때⁠. 엄마가 그랬어⁠.⁠”

우철은 오른팔을 구부렸다⁠. 구부리니 팔꿈치가 덜 당겼다⁠. 휘두를 때 당기던 곳이 가만히 있었다⁠. 왼손이 배트 손잡이를 쥐고⁠, 오른손 두 손가락이 배트를 받쳤다⁠. 힘은 왼손에만 있었다⁠.

탄우가 기계 단추를 눌렀다⁠. 공이 날아왔다⁠. 우철은 배트를 내밀었다⁠. 공이 배트 끝에 맞고 위로 튀어 철망 천장에 부딪혔다⁠.

“⁠아빠⁠, 그건 뜬공이야⁠. 아웃⁠.⁠”

“⁠알아⁠.⁠”

“⁠무릎을 굽혀⁠. 눈을 공 높이로 내려⁠.⁠”

두 번째 공⁠. 우철은 무릎을 굽혔다⁠. 오른쪽 무릎이 뚝 소리를 냈다⁠. 공이 배트 아래쪽에 맞고 매트 위로 세게 튀어 기계 앞까지 굴러갔다⁠.

“⁠살았다⁠. 투수가 잡아⁠.⁠”

세 번째 공⁠. 우철은 눈을 반쯤 감았다⁠. 기계 바퀴가 공을 무는 소리를 들었다⁠. 윙⁠, 탁⁠. 바퀴가 공을 놓는 순간을 듣고 배트를 공 앞에 가만히 두었다⁠. 때리지 않았다⁠. 받았다⁠.

톡⁠.

공이 배트에 맞고 매트로 떨어졌다⁠. 굴러가다가 한 자 앞에서 멈췄다⁠. 고무가 공을 붙잡는 소리가 났다⁠.

탄우가 철망을 손바닥으로 탕탕 쳤다⁠.

“⁠죽었다⁠! 아빠 공 죽었어⁠!⁠”

계산대 뒤에서 미강이 고개를 들었다⁠. 노트북을 보던 미강이 4번 철망을 보고⁠, 매트 위에 멈춘 공을 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노트북으로 고개를 돌렸다⁠. 입꼬리가 조금 올라가 있었다⁠.

*

열 시가 되자 손님이 다 빠졌다⁠. 탄우는 대기 의자에 누워 휴대전화로 숏폼을 보다가 잠이 들었다⁠. 화면에서 의찬의 춤 영상이 혼자 돌았다⁠. 「⁠2군에서도 춤은 1군⁠」이라는 제목이었다⁠.

미강이 계산대에서 노트북을 덮었다⁠.

“⁠말할 거 있어⁠.⁠”

“⁠나도⁠.⁠”

“⁠나 먼저 해⁠. 당신은 맨날 늦게 말하잖아⁠.⁠”

미강이 계산대 서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부동산 중개소 이름이 찍힌 종이였다⁠.

“⁠배팅장 내놨어⁠. 지난주에⁠.⁠”

우철은 종이를 보았다⁠. 숫자가 몇 개 적혀 있었다⁠. 권리금⁠, 보증금⁠, 남은 대출⁠.

“⁠거래 깨지고 나서⁠. 해설 계약금도 없고⁠, 당신 내년 연봉도 없고⁠. 이자는 달마다 오고⁠. 계산해 보니까 내년 봄까지는 버텨⁠. 그다음은 못 버텨⁠.⁠”

“⁠나 때문에⁠.⁠”

“⁠당신 때문 맞아⁠. 근데 당신 탓은 아니야⁠.⁠”

미강이 종이를 다시 서랍에 넣었다⁠.

“⁠탄우한테는 아직 말 안 했어⁠. 탄우 다음 대회 끝나고 말할 거야⁠. 번트 연습장 없어진다고⁠.⁠”

우철은 대기 의자에서 자는 탄우를 보았다⁠. 휴대전화가 가슴 위에 엎어져 있었다⁠. 화면 불빛이 아이 턱 밑을 파랗게 비췄다⁠.

“⁠당신은⁠? 할 말⁠.⁠”

“⁠석배가 아빠 됐대⁠. 딸이래⁠. 세 시간 전에 사진 왔어⁠.⁠”

미강의 얼굴이 단번에 풀렸다⁠. 우철이 왼손으로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신생아 사진이었다⁠. 빨간 얼굴에 눈을 꼭 감고 있었다⁠. 석배의 문자가 아래에 붙어 있었다⁠.

「⁠형 딸이에요 삼 킬로 백 그램⁠」 「⁠와이프가 이름을 형 이름 한 글자 넣자는데 제가 말렸어요 철이는 좀⁠」 「⁠그리고 형 단장님이 제 소송 가지고 형한테 뭐 내밀지도 몰라요 받지 마요⁠」 「⁠저 변호사 구했어요 갈매기 방장님 아드님이 변호사래요 수임료는 해무 우승하면 받는대요⁠」

미강이 사진을 오래 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우승하면 받는대⁠. 그럼 공짜잖아⁠.⁠”

“⁠5위는 했어⁠.⁠”

“⁠5위는 우승이 아니야⁠.⁠”

*

열한 시가 다 되어 계단에서 운동화 소리가 올라왔다⁠. 셔터를 반쯤 내려 두었는데⁠, 셔터 밑으로 남색 정장 바지가 보였다⁠. 몸을 숙여 셔터 밑으로 들어온 사람은 세겸이었다⁠. 혼자였다⁠. 넥타이는 없었고⁠, 손에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다⁠.

“⁠늦게 죄송합니다⁠. 사모님 계실 때 뵙겠다고 했는데⁠, 이 시간밖에 안 났습니다⁠.⁠”

미강이 계산대 뒤에서 일어났다⁠. 팔짱을 꼈다⁠.

“⁠단장님⁠. 전화로는 많이 뵀는데 얼굴은 처음이네요⁠.⁠”

“⁠네⁠. 전화로 실례 많이 했습니다⁠.⁠”

세겸이 배팅장 안을 둘러보았다⁠. 기계 다섯 대⁠, 철망⁠, 매트 위에 굴러다니는 공들⁠. 대기 의자에서 자는 탄우를 보고 목소리를 낮췄다⁠.

“⁠한 번 쳐 봐도 되겠습니까⁠? 돈은 내겠습니다⁠.⁠”

“⁠천 원에 스무 개요⁠. 카드는 안 받아요⁠.⁠”

세겸이 지갑에서 천 원짜리를 꺼내 계산대에 올렸다⁠. 미강이 3번 기계를 켰다⁠. 시속 100킬로미터⁠. 세겸은 정장 윗도리를 벗어 철망에 걸쳐 두고 셔츠 소매를 걷었다⁠. 헬멧을 쓰고 타석에 들어갔다⁠. 배트를 쥐는 손이 어색하지 않았다⁠.

첫 공은 헛스윙이었다⁠. 두 번째 공은 파울⁠. 세 번째 공에서 딱⁠, 하고 맑은 소리가 났다⁠. 공이 철망 끝 그물에 꽂혔다⁠. 미강이 눈썹을 올렸다⁠.

“⁠칠 줄 아시네요⁠.⁠”

“⁠3루수 글러브 산 날부터 쳤습니다⁠. 2013년 6월이요⁠.⁠”

세겸이 열 개를 쳤다⁠. 반은 맞았고 반은 빗나갔다⁠. 열 개째를 치고 배트를 내렸다⁠. 숨이 조금 찼다⁠. 헬멧을 벗지 않고 철망 너머의 우철을 보았다⁠.

“⁠목요일이 채권단 시한입니다⁠. 청람이 매각 대금을 깎아서⁠, 시한까지 모자라는 돈은 배 두 척을 팔아 메웁니다⁠. 다음 주에 두 척⁠. 선원 마흔여섯 명이 내립니다⁠. 표결이 통과되면 오백억이 들어오고⁠, 그럼 내년 봄에 두 척을 되사 올 수 있습니다⁠. 시세가 오르기 전에요⁠.⁠”

“⁠표결이 필요하시겠네요⁠.⁠”

“⁠네⁠. 그래서 왔습니다⁠.⁠”

세겸이 헬멧을 벗었다⁠. 머리가 땀에 눌려 있었다⁠.

“⁠10월 2일⁠, 은퇴식에 서 주세요⁠. 8회 끝나고 클리닝 타임에⁠. 덕아웃 말고⁠, 홈 플레이트 앞에서⁠. 꽃다발⁠, 영상⁠, 아드님 시구까지 다 하겠습니다⁠. 타석은 없이요⁠. 청람이 마지막 조건으로 원하는 그림입니다⁠. AI 시대에 박수 받고 떠나는 베테랑⁠. 표결 몇 시간 전에 구단주들이 그 그림을 봅니다⁠.⁠”

“⁠대신요⁠?⁠”

“⁠대신 위 코치님 소송을 청람이 취하하게 하겠습니다⁠. 오늘 딸 낳으셨다면서요⁠. 축하할 일에 소송장이 같이 가면 안 되잖아요⁠.⁠”

미강이 팔짱을 풀었다⁠. 우철을 보았다⁠. 우철은 대기 의자 옆에 서 있었다⁠. 자는 탄우의 운동화 끈이 풀려 있었다⁠. 우철은 왼손으로 끈을 집었다가 맬 수 없어서 놓았다⁠.

“⁠석배가 문자 보냈습니다⁠. 단장님이 자기 소송 가지고 저한테 뭐 내밀 거라고⁠. 받지 말라고⁠.⁠”

세겸이 짧게 웃었다⁠. 처음으로 웃음이 웃음 같았다⁠.

“⁠위 코치님은 숫자를 늦게 믿지만⁠, 사람은 빨리 읽으시네요⁠.⁠”

“⁠타석 없는 은퇴식은 안 하겠습니다⁠.⁠”

“⁠그러면 등록은 없습니다⁠. 부상자 명단에서 안 빼 드립니다⁠. 10월 2일에 배 선수님은 관중석에 계셔야 합니다⁠. 아드님 옆에⁠.⁠”

“⁠압니다⁠.⁠”

세겸이 배트를 철망 벽에 세워 두었다⁠. 정장 윗도리를 집어 팔에 걸었다⁠. 셔터 쪽으로 가다가 4번 철망 앞에서 멈췄다⁠. 매트 위에 공 하나가 멈춰 있었다⁠. 기계 앞 한 자 거리였다⁠. 아까 우철이 죽인 공이었다⁠.

“⁠번트입니까⁠?⁠”

“⁠아들한테 배웠습니다⁠. 오늘⁠.⁠”

“⁠스무 해 동안 한 번도 안 대셨죠⁠. 대타로 칠백열두 번 나가셔서 번트는 영 개입니다⁠.⁠”

“⁠그것도 기억하세요⁠?⁠”

“⁠항로도 압니다⁠. 배 선수님 번트 기록이 영이라서⁠, 항로는 배 선수님이 번트를 댈 확률을 영으로 봅니다⁠. 상대 구단 화면들도 다 그렇게 봅니다⁠.⁠”

세겸이 매트 위의 공을 내려다보았다⁠. 운동화 끝으로 공을 건드리려다 그만두었다⁠.

“⁠번트는 아웃 하나 주고 한 베이스 사는 거라고⁠, 제가 추 코치님한테 그랬습니다⁠. 비효율이라고⁠. 열한 살 때 그분한테 번트 배웠는데요⁠.⁠”

미강이 계산대에서 세겸을 보았다⁠. 세겸은 공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배 선수님⁠. 팀 닥터 소견서⁠, 목요일까지 보내 주세요⁠.⁠”

“⁠등록은 없다면서요⁠.⁠”

“⁠없습니다⁠. 소견서는 받아 두는 겁니다⁠. 한 타석짜리로요⁠. 번트 한 번이면 팔꿈치가 어떻게 되는지⁠, 의사가 쓴 종이로⁠.⁠”

세겸이 몸을 숙여 셔터 밑으로 나갔다⁠. 계단을 내려가는 운동화 소리가 났다⁠. 한 칸⁠, 두 칸⁠. 중간에서 소리가 멈췄다가 다시 내려갔다⁠. 바깥 골목에서 차 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미강이 계산대에서 나와 4번 철망 앞으로 갔다⁠. 매트 위의 공을 주워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공에 묻은 고무 가루를 엄지로 털었다⁠.

“⁠이 사람⁠, 당신 공 주우려고 했어⁠. 운동화로⁠.⁠”

“⁠안 주웠잖아⁠.⁠”

“⁠안 주운 게 더 이상해⁠.⁠”

미강이 공을 우철의 왼손에 쥐여 주었다⁠. 대기 의자에서 탄우가 몸을 뒤척였다⁠. 가슴 위의 휴대전화가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의찬의 춤 영상이 바닥에서 혼자 계속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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