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6,414자)
번트
AI 감독의 구단 라인업 · 여오령
10월 2일 토요일 오후 두 시, 해무 파크는 하늘이 파랬다. 구름이 한 점도 없어서 조명탑 꼭대기의 갈매기가 하얗게 도드라졌다. 관중석은 아침에 다 팔렸다. 3루 응원석에서 북소리가 일찍부터 둥둥 울렸고, 청람 앰프는 꺼져 있었다. 리그 명령이었다. 덕아웃까지 오는 것은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와 바닷바람 소리뿐이었다.
우철은 벤치 끝 배트 걸이 옆에 앉아 있었다. 남색과 하얀색 줄무늬 유니폼은 어젯밤 미강이 다린 것이었다. 오른쪽 팔꿈치에는 낡은 보호대를 다시 찼다. 서랍에서 꺼내 왔다. 보호대 밑에는 붕대가 두 겹이었다. 남색 모자 챙을 한 번 꺾었다.
“선배님, 오늘은 모자 각도 봐 드릴게요. 영포티 아니에요. 그냥 포티예요.”
의찬이 옆에 앉으며 말했다. 손가락으로 무릎을 계속 두드리고 있었다.
“포티가 뭔데.”
“그냥 멋있는 거요.”
경팔은 벤치 한가운데에서 해바라기씨를 깨물었다. 딱. 뒷주머니에 빨간 카드가 꽂혀 있었다. 화면 아래 접이식 의자는 비어 있었다. 석배의 자리였다. 석배는 3루 응원석 맨 앞줄에 앉아 있었다. 휴대전화를 들고 영상 통화를 켜 둔 채였다. 화면 속에서 석배의 아내가 아기를 안고 중계를 보고 있었다.
3루 응원석 가운데쯤에 미강과 탄우가 있었다. 탄우의 무릎 위에 스케치북이 덮여 있었다. 몇 줄 뒤에 곰이 반팔 티 차림으로 앉아 있었고, 곰 옆에서 「연안부두 늙은 갈매기들」 방장이 확성기를 들고 있었다. 우철은 덕아웃 그물 너머로 한 사람씩 찾았다. 다 찾고 나서 위를 보았다.
단장실 유리창 안에 사람이 넷 서 있었다. 가운데가 세겸이었다. 옆에 낯선 얼굴이 셋. 표결에서 아직 마음을 정하지 않은 구단주들이었다. 남포 구단주도 셋 가운데 하나였다.
화면에 라인업이 떴다. 오른쪽 아래 구석에 「항로 3.1」 대타 후보 줄 맨 아래.
「9. 배우철 · 기대 출루 0.06 · 팔꿈치 부상 반영 · 출전 권장 안 함」
*
경기는 처음부터 팽팽했다. 상대는 한양 블레이즈, 개막전과 같은 상대였다. 한양이 3회에 솔로 홈런으로 먼저 앞섰고, 해무가 5회에 두 점을 내서 뒤집었고, 한양이 7회에 다시 한 점을 따라붙었다. 2 대 2. 8회는 둘 다 점수를 못 냈다.
9회 초를 해무 마무리가 세 타자로 막았다. 3루 응원석이 일어났다. 탄우가 스케치북을 들었다가 덮었다. 미강이 탄우의 손을 잡아 무릎에 내려 주었다.
9회 말. 해무의 선두 타자가 초구를 쳐서 좌중간 2루타를 만들었다. 화면이 깜박였다.
“대주자, 도의찬.”
의찬이 헬멧을 집어 들었다. 이번에는 끈을 한 번에 맸다. 2루로 뛰어가다가 덕아웃을 돌아보았다. 우철은 자기 귀를 손가락으로 두 번 두드렸다. 의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타자가 2루 땅볼을 쳤다. 의찬이 3루로 갔다. 1사 3루.
한양이 마운드에 마무리 투수를 올렸다. 개막전 9회에 우철에게 끝내기 안타를 맞은 투수였다. 오늘은 8회에 나오지 않고 9회에 바로 올라왔다. 연습 투구가 미트에 꽂혔다. 탕. 맑았다. 지치지 않은 공이었다.
한양 내야가 자리를 잡았다. 1루수와 3루수가 베이스 뒤로 두어 걸음 물러났다. 땅볼을 잡아 홈으로 던지려면 앞으로 와야 하는데, 오히려 뒤로 갔다. 석배가 말한 그대로였다.
화면이 깜박였다.
“대타, 등번호 6. 기대 득점 0.44.”
백업 내야수가 헬멧을 집었다. 덕아웃이 경팔을 보았다. 경팔은 화면을 보지 않았다. 해바라기씨를 하나 깨물고, 껍질을 손바닥에 받고, 우철을 보았다.
“배 병장. 바람.”
“홈에서 바다로 붑니다. 아침보다 셉니다.”
“한양 내야는?”
“물러섰습니다. 1루수, 3루수 둘 다. 포수가 자꾸 미트로 땅을 칩니다. 땅볼 오면 빨리 던지라는 신호예요. 저한테 강한 땅볼만 기다리는 겁니다.”
경팔이 껍질을 주머니에 넣었다. 뒷주머니에서 빨간 카드를 꺼냈다. 카드 모서리가 닳아 둥글었다. 경팔은 계단을 올라가다가 한 번 위를 보았다. 단장실 유리창이었다. 세겸이 유리창 안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움직이지 않았다.
경팔이 주심 앞에 카드를 들어 보였다.
전광판에 글자가 떴다. 「해무 마린스 사람 카드 사용 — 대타 배우철」
관중석이 한 박자 늦게 반응했다. 그러고는 한꺼번에 일어났다. 3루 응원석에서 「배우철」이 세 음절로 끊겨 터져 나왔다. 배, 우, 철. 탄우가 스케치북을 높이 들었다. 「아빠 회색도 색이다」
스피커가 고른 목소리로 말했다.
“사람 카드 사용이 확인되었습니다. 기대 승리 확률 하락.”
우철은 헬멧을 썼다. 배트 걸이에서 개막전 공 자국이 남은 배트를 뽑았다. 왼손으로 뽑았다.
*
타석의 흙이 말라 있었다. 스파이크 밑에서 사각거렸다. 우철은 바깥 금을 오른발로 한 번 지우고 들어갔다. 오른팔을 몸에 붙이고, 배트를 왼손으로 쥐고, 오른손은 손잡이 위에 얹기만 했다.
한양 포수가 마스크 안에서 말했다.
“선배님, 팔 괜찮으세요? 뉴스 봤어요.”
“너 오늘은 미트 소리 맑다.”
“마무리가 오늘 처음 던지거든요. 개막전처럼은 안 돼요.”
“알아.”
포수가 미트로 땅을 툭 쳤다. 내야수들이 다시 한 발씩 물러났다. 3루에서 의찬이 베이스에 발을 붙이고 있었다. 의찬의 스파이크가 흙을 긁는 소리가 들렸다. 사각, 사각. 떨고 있었다.
초구. 투수가 공을 놓았다. 직구였다. 우철은 배트를 어깨에 얹은 채 보냈다. 바깥으로 빠졌다. 볼.
관중석이 아, 하고 숨을 쉬었다. 단장실 유리창 안에서 누가 팔짱을 꼈다.
두 번째 공. 직구가 몸쪽 무릎으로 왔다. 우철은 보냈다. 스트라이크. 원 볼 원 스트라이크. 한양 포수가 다시 미트로 땅을 쳤다. 1루수가 한 걸음 더 물러났다. 강하게 치는 공, 몸에 맞고 튀는 공에 대비하는 자리였다. 화면 숫자가 그렇게 시켰다.
우철은 눈을 반쯤 감았다. 함성을 지나서, 한 가지 소리를 찾았다. 3루였다. 의찬의 스파이크 소리가 멈춰 있었다. 의찬이 숨을 고르고 있었다. 의찬의 귀가 열려 있었다.
투수가 세트 자세에 들어갔다. 우철은 아직 배트를 세워 두었다. 투수의 왼발이 땅에서 떨어지는 순간 우철은 몸을 돌렸다. 오른발을 앞으로 끌어 투수를 마주 보았다. 배트를 눕혔다. 왼손이 손잡이를 쥐고, 오른손 엄지와 검지가 배트 몸통 뒤에 붙었다. 오른팔을 구부렸다. 팔꿈치가 가만히 있었다. 무릎을 굽혀 눈을 공 높이로 내렸다. 탄우가 가르쳐 준 대로였다.
배트가 눕는 소리를 한양 내야는 듣지 못했다. 들었을 때는 공이 이미 손을 떠나 있었다.
직구였다. 가운데 높이. 우철은 때리지 않았다. 받았다.
톡.
배트에 공이 닿는 순간 오른쪽 팔꿈치 안에서 끊어진 자리가 울렸다. 뜨거운 것이 손끝까지 내려갔다. 우철은 배트를 놓지 않았다. 공이 배트에서 떨어져 3루 선을 따라 굴렀다. 잔디와 흙 사이로. 바닷바람이 홈에서 불어와 공을 등 뒤에서 밀지 않았다. 공이 느려졌다. 한 자, 두 자. 3루 선 안쪽에서 공이 멈췄다.
3루에서 소리가 났다. 의찬의 스파이크가 흙을 박차는 소리였다. 배트에 공이 닿는 소리를 듣고 뛴 다리였다.
한양 3루수가 뒤에서 달려 나왔다. 너무 멀었다. 맨손으로 공을 집었을 때 의찬은 이미 홈까지 절반을 와 있었다. 3루수가 홈을 보았다가 1루를 보았다. 홈은 늦었다. 3루수가 1루로 던졌다. 우철은 배트를 내려놓고 1루로 걸었다. 뛰지 못했다. 공이 우철보다 먼저 1루수 글러브에 들어갔다. 아웃.
의찬이 홈에 몸을 던졌다. 포수가 미트를 내밀었다. 미트는 비어 있었다.
주심의 두 팔이 옆으로 펴졌다.
3 대 2.
*
전광판에 글자가 떴다. 「해무 마린스 끝내기 승 · 해동리그 5위 확정」 밑에 작은 글씨로 한 줄. 「배우철 희생번트 · 프로 데뷔 첫 번트」 맨 밑에 한 줄 더. 「대타 통산 104 · 리그 최다 타이」
1루와 2루 사이에서 우철은 선수들에게 둘러싸였다. 아무도 덮치지 않았다. 다들 오른팔을 피해서 왼쪽으로만 안았다. 의찬이 흙투성이 얼굴로 뛰어와 우철의 왼쪽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의찬이 울면서 웃었다.
“선배님, 들렸어요! 톡! 톡 하는 거!”
“네 다리가 들은 거다.”
경팔이 덕아웃 계단에 앉아 해바라기씨 봉지를 하늘로 털었다. 씨가 그라운드로 쏟아졌다. 갈매기 두 마리가 조명탑에서 내려왔다.
덕아웃 화면에 경기 분석이 떴다. 투수 코치가 사진으로 찍어 우철에게 보내 주었다. 「대타 결과: 희생번트 · 번트 확률 0.00 · 원인 분석 불가」
3루 응원석에서 탄우가 스케치북을 뒤집었다. 뒷면에도 글자가 있었다. 어젯밤 아빠가 자고 나서 쓴 글자였다. 「아빠 번트」 미강이 탄우를 뒤에서 껴안고 있었다. 미강은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고개를 숙이고 탄우의 정수리에 이마를 대고 있었다.
단장실 유리창 안에서 구단주 하나가 박수를 쳤다. 남포 구단주였다. 세겸은 박수를 치지 않았다. 유리창에 손바닥을 대고 그라운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저녁 일곱 시, 해동리그 이사회가 끝났다. 라커룸 텔레비전에 자막이 떴다. 「‘AI 단독 지휘안’ 부결 … 찬성 4, 반대 6」 바로 밑에 한 줄이 이어졌다. 「해무 마린스 찬성 · 남포 시걸스 반대로 돌아서」 그다음 줄. 「청람테크, 해무 인수 마무리 … 표결 조건 오백억 원은 무산」
라커룸이 함성으로 찼다. 누가 샴페인 대신 맥주 캔을 땄다. 칙 소리가 여기저기서 났다. 우철은 사물함 앞 의자에 앉아 오른팔에 얼음 봉지를 대고 있었다. 미강이 사 온 얼음이었다. 화면에 해무해운 소식이 한 줄 더 지나갔다. 「해무해운 남은 배 여덟 척 … 선원 마흔여섯 명 재고용은 내년 봄 이후」
우철은 자막이 지나갈 때까지 보았다. 맥주 캔 소리가 귀에서 멀어졌다.
*
밤 열 시, 덕아웃은 비어 있었다. 화면은 꺼져 있었다. 팬 소리도 없었다. 바다에서 파도 소리만 그물망을 넘어 들어왔다. 바닥에 해바라기씨가 흩어져 있었다. 경팔이 치우겠다고 하고 안 치운 씨였다.
우철은 벤치 끝 배트 걸이 옆에 앉아 있었다. 계단 위에서 운동화 소리가 내려왔다. 서두르지 않았다. 세겸이 넥타이 없이 남색 셔츠 차림으로 덕아웃 바닥에 내려왔다. 해바라기씨를 밟았다. 바삭. 이번에는 발밑을 보지 않았다.
세겸이 손에 공 하나를 들고 있었다. 흙이 묻어 있었다.
“3루수가 1루로 던진 공입니다. 1루수가 덕아웃에 던져 넣었더군요. 경기 공이라 구단 것이지만, 내일부터 구단이 청람 것이라서요. 오늘 밤까지는 제가 드릴 수 있습니다.”
세겸이 공을 벤치에 내려놓았다. 우철과 한 뼘 떨어진 자리였다.
“표결, 제가 졌습니다. 남포 구단주님이 번트 보고 돌아서셨습니다. 그분이 저한테 그러시더군요. 숫자에 영으로 나온 걸 사람이 하는 걸 보니까 무섭다고. 내년에 자기 구단 덕아웃에 그걸 볼 사람이 하나는 있어야겠다고.”
“단장님은 찬성하셨다면서요.”
“네. 찬성했습니다. 해무해운이 오백억이 필요하니까요. 지금도 필요합니다. 다음 주에 남은 여덟 척 가운데 하나를 더 팔지 정합니다.”
“단장님은 이제 어디로 가십니까?”
“해무해운으로 돌아갑니다. 청람 구단의 첫 단장은 청람 사람이 합니다. 저는 배를 지킵니다. 남은 여덟 척.”
세겸이 덕아웃 벽의 꺼진 화면을 올려다보았다. 검은 화면에 덕아웃 천장 등 하나와 두 사람의 모습이 비쳤다.
“배 선수님은 기록을 못 깨셨네요. 백네 개에서 멈췄습니다.”
“다음 사람이 깨겠죠.”
“팔꿈치는 월요일 수술이라고 들었습니다.”
“아내가 잡았습니다.”
“배팅장도 내놓으셨다고요.”
“그것도 아십니까?”
“부동산이 인천에 몇 개 없습니다.”
세겸이 웃었다. 처음으로 우철이 들어 본 소리 내는 웃음이었다. 짧았다.
“저는 오백억을 잃었고, 배 선수님은 팔이랑 기록이랑 배팅장을 잃으셨습니다. 숫자로 보면 제가 더 잃었습니다.”
“숫자로 보면요.”
세겸은 대답하지 않았다. 계단으로 걸어갔다. 첫 계단에 발을 올리고 멈췄다.
“열한 살 때요. 추 코치님한테 번트 배울 때, 공 보고 대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소리 듣고 댔습니다. 배트에 공 닿는 소리가 좋아서. 오늘 그 소리, 유리창 안에서는 안 들렸습니다.”
세겸이 계단을 올라갔다. 운동화 소리가 마지막 계단에서 끊겼다.
우철은 벤치 위의 공을 왼손으로 집었다. 흙이 손바닥에 묻었다. 공을 쥐고 덕아웃 계단을 올라갔다. 3루 응원석 앞 그물 아래에 미강과 탄우가 기다리고 있었다. 구장 조명 절반이 꺼져 있었고, 남은 절반이 그라운드를 비췄다.
탄우가 스케치북을 둘둘 말아 배트처럼 쥐었다. 그물 옆 출입문으로 그라운드에 내려와 3루 선 앞 흙에 무릎을 굽혔다. 말아 쥔 스케치북을 눕혔다. 「아빠 번트」라는 글자가 바깥으로 말려 있었다.
“아빠, 던져.”
우철은 오른팔을 몸에 붙인 채 왼손으로 공을 쥐었다. 열 걸음 떨어진 자리에서 무릎을 굽히고, 공을 아래에서 위로 살짝 던졌다. 공이 낮게 날아갔다. 탄우가 스케치북 끝을 공 앞에 가만히 두었다.
톡.
공이 흙 위에 떨어져 3루 선을 따라 조금 구르다 멈췄다. 미강이 그물 너머에서 손뼉을 두 번 쳤다. 바다에서 바람이 홈을 지나 외야로 불었다. 멈춘 공 위로 해바라기씨 껍질 하나가 굴러가다가 공에 닿아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