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5,714자)

인대

AI 감독의 구단 라인업 · 여오령

9월 셋째 주 토요일 아침⁠, 배팅장 기계들은 아직 꺼져 있었다⁠. 우철은 계단을 올라가다가 2층 문 앞에서 멈췄다⁠. 안에서 텔레비전 소리가 났다⁠. 아침 스포츠 뉴스였다⁠. 앵커의 목소리가 또렷했다⁠.

“⁠해무 마린스 배우철 선수가 오른쪽 팔꿈치 인대가 파열된 상태로 경기에 나서 온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구단은 지난달 정기 검진에서 이를 확인했으며⁠, AI 감독 항로가 배 선수의 출전을 줄여 온 것도 선수 보호를 위한 판단이었다고 밝혔습니다⁠.⁠”

우철은 문을 열었다⁠. 미강이 계산대 뒤에 서 있었다⁠. 리모컨을 쥔 손이 아래로 늘어져 있었다⁠. 텔레비전 화면 한쪽에 흑백 사진이 떠 있었다⁠. 지난달 구단 검진 때 찍은 사진이었다⁠. 하얀 줄이 실처럼 가늘었다⁠.

탄우가 4번 철망 앞에 앉아 있었다⁠. 포수 미트를 무릎에 얹고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우철이 들어온 것을 알고도 돌아보지 않았다⁠.

“⁠언제부터야⁠?⁠”

미강이 물었다⁠. 목소리 끝이 올라가지 않았다⁠. 대답을 이미 아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지난겨울⁠.⁠”

“⁠겨울⁠.⁠”

미강이 리모컨을 계산대에 내려놓았다⁠. 플라스틱이 유리판에 닿는 소리가 작았다⁠.

“⁠겨울부터 냉동실 얼음이 없어졌지⁠. 나 그때부터 알았어⁠. 뭔지만 몰랐지⁠.⁠”

“⁠말하려고 했어⁠.⁠”

“⁠언제⁠? 응급실에서⁠? 뉴스보다 늦게⁠?⁠”

미강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커졌다⁠. 텔레비전 앵커의 목소리를 덮었다⁠.

“⁠단장님은 지난달에 알았대⁠. 기자들은 오늘 아침에 알았고⁠. 나는 텔레비전으로 알았어⁠. 탄우는 나랑 같이 알았고⁠. 우리 집에서 제일 늦게 안 사람이 우리야⁠. 그게 말이 돼⁠?⁠”

우철은 대답하지 못했다⁠. 오른쪽 팔꿈치 보호대가 갑자기 무거웠다⁠.

“⁠단장이 일부러 흘린 거야⁠. 리그 조사 때문에⁠. 항로가 내 숫자 내린 게 내 팔 때문이라고 하려고⁠.⁠”

“⁠알아⁠. 그 사람 머리 좋은 거 알아⁠. 지금 그 사람 얘기 하는 거 아니야⁠. 당신 얘기 하는 거야⁠.⁠”

미강이 계산대를 돌아 나와 우철 앞으로 왔다⁠. 손을 뻗어 보호대 위를 잡았다⁠. 세게 잡지 않았다⁠. 그냥 손바닥을 얹었다⁠. 보호대 안의 열이 미강의 손바닥으로 건너갔다⁠.

“⁠뜨겁네⁠.⁠”

“⁠아침엔 원래 그래⁠.⁠”

“⁠당신 거짓말할 때 대답 빨라진다고 했지⁠.⁠”

4번 철망 앞에서 탄우가 일어났다⁠. 미트를 손에 낀 채 이쪽으로 걸어왔다⁠. 아빠 앞에 와서 보호대를 보았다⁠. 엄마 손이 얹힌 자리였다⁠.

“⁠아빠 팔⁠, 끊어져⁠?⁠”

“⁠아직 안 끊어졌어⁠.⁠”

“⁠끊어지면 아빠 공 못 던져⁠? 나랑 캐치볼도⁠?⁠”

우철은 무릎을 굽혀 탄우의 눈높이로 내려갔다⁠. 오른쪽 무릎이 뚝 소리를 냈다⁠. 마흔 살 무릎이었다⁠.

“⁠탄우야⁠. 아빠가 다음부터는 뉴스보다 먼저 말할게⁠.⁠”

탄우가 미트를 두 번 주먹으로 두드렸다⁠. 대답 대신이었다⁠. 그러고는 미트를 벗어 아빠 왼손에 끼워 주었다⁠. 작은 미트가 손가락 마디에서 멈췄다⁠.

*

같은 날 오후⁠, 해동리그가 공문을 냈다⁠. 덕아웃 텔레비전 자막으로 먼저 떴다⁠. 「⁠해동리그⁠, 조사 기간 해무 항로를 3월 초 판으로 되돌리라고 명령⁠」 아래에 한 줄이 더 붙었다⁠. 「⁠단장실 수정 사항 모두 효력 정지⁠」

경기 전 덕아웃 화면 오른쪽 아래 구석에 작은 회색 글씨가 떴다⁠. 「⁠항로 3⁠.1 · 리그 명령에 따른 복원⁠」

선수들이 하나둘 화면 앞에 모였다⁠. 라인업이 올라왔다⁠. 대타 후보 줄은 아직 비어 있었다⁠. 대타 순위는 경기 중에 상황이 오면 뜬다⁠. 고참 포수가 팔짱을 끼고 중얼거렸다⁠.

“⁠이게 원래 항로냐⁠. 4월 비 오는 날 그거⁠.⁠”

“⁠네⁠. 그 항로예요⁠.⁠”

대답한 것은 투수 코치였다⁠. 투수 코치는 석배가 앉던 접이식 의자에 앉아 빨간 카드를 무릎 위에 올려 두고 있었다⁠. 카드를 어디에 넣어야 할지 몰라 사흘째 무릎에만 두고 다녔다⁠.

오늘 상대는 무등 썬더스였다⁠. 5위 무등과 6위 해무⁠, 반 경기 차였다⁠.

*

8회 말⁠, 해무는 2 대 3으로 지고 있었다⁠. 1사 1루와 2루⁠. 무등이 마운드에 왼손 투수를 올렸다⁠. 4월 비 오던 날 우철에게 2루타를 맞은 키 큰 투수였다⁠. 투수가 로진 가루를 묻혔다⁠. 한 번⁠, 두 번⁠, 세 번⁠.

화면이 깜박였다⁠. 대타 순위가 올라왔다⁠.

「⁠1⁠. 배우철 · 기대 출루 0⁠.35 · 대타 권장⁠」

스피커가 고른 목소리로 말했다⁠.

“⁠대타⁠, 배우철⁠.⁠”

덕아웃이 조용해졌다⁠. 다들 우철의 오른팔을 보았다⁠. 아침 뉴스를 다 본 얼굴들이었다⁠. 우철은 배트 걸이에서 배트를 뽑았다⁠. 손잡이 테이프를 새로 감은 배트였다⁠.

계단 위에서 운동화 소리가 빠르게 내려왔다⁠. 세겸이었다⁠. 덕아웃에 직접 내려온 것은 석배를 해고한 날 이후 처음이었다⁠. 세겸은 숨이 조금 차 있었다⁠. 단장실에서 계단을 뛰어 내려온 것이었다⁠.

“⁠투수 코치님⁠. 카드 쓰세요⁠. 배 선수님 빼세요⁠.⁠”

투수 코치가 무릎 위의 카드를 내려다보았다⁠.

“⁠단장님⁠, 카드는 항로를 뒤집는 데 쓰는 건데요⁠.⁠”

“⁠뒤집으세요⁠. 항로가 지금 부상 선수를 내보냅니다⁠. 진단서를 못 읽어서요⁠. 사람이 읽어야죠⁠. 그러라고 있는 카드라고 하셨잖아요⁠, 다들⁠.⁠”

우철은 헬멧을 쓰다 말고 세겸을 보았다⁠. 세겸의 말은 틀린 데가 없었다⁠. 숫자를 다 기억하는 사람의 말이었다⁠.

“⁠제 팔입니다⁠, 단장님⁠.⁠”

“⁠구단 선수의 팔입니다⁠. 계약서에 그렇게 써 있습니다⁠. 팔이 끊어지면 구단은 남은 연봉을 다 드려야 하고⁠, 언론은 구단이 부상 선수를 내보냈다고 씁니다⁠. 리그 조사 중에요⁠.⁠”

“⁠그래서 빼시려고요⁠? 제 팔 걱정이 아니라⁠.⁠”

“⁠둘 다입니다⁠. 저는 늘 둘 다예요⁠.⁠”

세겸이 투수 코치를 돌아보았다⁠.

“⁠코치님⁠.⁠”

투수 코치가 카드를 집었다⁠. 카드를 들고 세겸을 보고⁠, 우철을 보고⁠, 다시 화면을 보았다⁠. 3루 응원석에서 함성이 커졌다⁠. 전광판에는 이미 「⁠대타 배우철 — 항로 선택⁠」이 떠 있었다⁠.

투수 코치가 카드를 뒷주머니에 꽂았다⁠.

“⁠단장님⁠, 저 카드 쓰는 법 모른다고 했잖아요⁠. 맡기실 때⁠.⁠”

세겸이 투수 코치를 한참 보았다⁠. 투수 코치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덕아웃 뒤쪽에서 고참 포수가 웃음을 참느라 기침을 했다⁠. 세겸은 아무 말 없이 우철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끝까지 휘두르지 마세요⁠. 부탁입니다⁠.⁠”

우철은 대답 대신 헬멧 끈을 맸다⁠.

*

타석에 들어서자 바닷바람이 등 뒤에서 불었다⁠. 외야에서 홈으로 부는 바람이 오늘은 반대였다⁠. 홈에서 외야로⁠, 바다 쪽으로 불었다⁠. 우철은 바람 소리를 한 번 듣고 귀덮개를 눌렀다 뗐다⁠.

무등의 포수가 미트로 정강이 보호대를 툭 쳤다⁠. 한 번⁠. 4월에는 한 번이면 몸쪽이었다⁠. 초구가 바깥쪽으로 왔다⁠. 포수가 버릇을 바꾼 것이다⁠. 우철은 보냈다⁠. 볼⁠.

포수가 툭툭 두 번 쳤다⁠. 공이 몸쪽으로 왔다⁠. 우철은 엉덩이를 빼며 보냈다⁠. 스트라이크⁠. 원 볼 원 스트라이크⁠. 포수가 마스크 안에서 웃었다⁠.

“⁠선배님⁠, 저 이제 거꾸로 칩니다⁠. 4월에 들켜서요⁠.⁠”

“⁠잘했다⁠.⁠”

우철은 포수 대신 마운드를 들었다⁠. 투수가 공을 받아 바지에 손을 닦았다⁠. 로진 가루를 묻혔다⁠. 한 번⁠, 두 번⁠. 세 번째가 없었다⁠. 9월 밤은 손이 말라 있었다⁠. 손가락이 마른 날 로진을 덜 묻히는 투수는 커브를 던진다⁠. 실밥이 손가락에 걸려야 하니까⁠.

투수가 와인드업을 했다⁠. 우철은 왼발을 반 발 내디딜 자리를 미리 골랐다⁠.

공이 손을 떠났다⁠. 커브였다⁠. 높게 떠오르다가⁠, 떨어지지 않았다⁠. 마른 손가락에서 실밥이 조금 일찍 빠졌다⁠. 공이 허리 높이에서 둥실 머뭇거렸다⁠.

반만 휘두를 수 있었다⁠. 반으로 치면 1루수 머리를 넘기는 안타였다⁠. 한 점⁠. 동점⁠.

우철은 끝까지 휘둘렀다⁠.

배트가 공을 만나는 소리보다 먼저⁠, 오른쪽 팔꿈치 안에서 소리가 났다⁠. 툭⁠. 고무줄이 끊어지는 소리였다⁠. 몸 안에서 난 소리였는데 귀로 들렸다⁠. 그다음에 배트 소리가 왔다⁠. 딱⁠. 깊고 둔한 소리였다⁠. 스무 해 동안 몇 번 들어 본 적 없는 소리였다⁠.

공이 바닷바람을 타고 좌중간으로 날아갔다⁠. 중견수가 펜스까지 달렸다가 멈췄다⁠. 공이 펜스를 넘어 외야 관중석 뒤쪽 바다 방향으로 사라졌다⁠.

4 대 3⁠.

관중석의 소리가 한꺼번에 무너져 내렸다⁠. 우철은 배트를 놓았다⁠. 놓으려고 해서 놓은 것이 아니었다⁠. 오른손이 배트를 쥐고 있지 못했다⁠. 배트가 흙 위에 떨어져 한 번 튀었다⁠.

우철은 왼손으로 오른쪽 팔꿈치를 감싸 쥐고 1루로 걸었다⁠. 뛰지 못했다⁠. 걸어서 1루를 밟고⁠, 2루를 밟았다⁠. 2루와 3루 사이에서 무릎이 한 번 꺾였다⁠. 3루 코치가 달려와 부축하려 했다⁠. 우철은 고개를 저었다⁠. 혼자 3루를 밟았다⁠. 3루 응원석이 바로 옆이었다⁠. 탄우가 의자 위에 올라가 있었다⁠.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입을 벌린 채 아빠의 오른팔만 보고 있었다⁠. 미강이 탄우의 허리를 붙잡고 있었다⁠. 미강의 얼굴은 보지 않았다⁠. 보는 순간 다리가 멈춘다는 것을 우철은 알았다⁠.

홈 플레이트에 선수들이 몰려 있었다⁠. 우철이 홈을 밟자 아무도 덮치지 않았다⁠. 고참 포수가 우철의 왼쪽 어깨를 조심스럽게 감쌌다⁠. 다들 오른팔을 피해서 우철을 안았다⁠.

전광판에 글자가 떴다⁠. 「⁠배우철 대타 통산 104호 안타 · 리그 최다 타이⁠」 바로 밑에 작은 글씨로 한 줄⁠. 「⁠대타 홈런 · 항로 선택⁠」

덕아웃 화면에는 다른 글자가 떠 있었다⁠. 투수 코치가 나중에 사진으로 보여 주었다⁠. 「⁠대타 결과⁠: 예측 초과 · 원인 분석 불가⁠」

*

밤 열한 시⁠, 인천의 대학병원 응급실 복도는 소독약 냄새와 자판기 커피 냄새가 섞여 있었다⁠. 우철은 오른팔에 부목을 대고 복도 의자에 앉아 있었다⁠. 진통제가 들어가서 팔꿈치는 멀었다⁠. 남의 팔처럼 멀었다⁠.

탄우는 옆 의자에 웅크려 잠들어 있었다⁠. 포수 미트를 베개처럼 볼에 대고 있었다⁠. 미강이 자판기 커피 두 잔을 들고 왔다⁠. 하나를 우철의 왼손에 쥐여 주었다⁠.

“⁠수술 날짜 잡았어⁠. 10월 4일 월요일⁠. 당신이 시즌 다 뛰고 하겠다고 우길 거 알아서⁠, 마지막 경기 다음 월요일로⁠.⁠”

“⁠우기기도 전에 잡았네⁠.⁠”

“⁠당신이 느려서 내가 빨라졌어⁠.⁠”

미강이 옆에 앉았다⁠. 커피를 마시지 않고 두 손으로 컵만 감쌌다⁠.

“⁠끝까지 휘둘렀지⁠. 반만 휘둘러도 됐는데⁠.⁠”

“⁠어떻게 알아⁠?⁠”

“⁠나 배팅장 사장이야⁠. 하루에 스윙 천 개 봐⁠. 당신 배트가 끝까지 돌아가는 거 3루 응원석에서 다 보였어⁠.⁠”

우철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쓰고 뜨거웠다⁠.

“⁠반만 휘두르면 동점이었어⁠. 끝까지 휘두르면 역전이고⁠.⁠”

“⁠그래서 역전 골랐어⁠? 팔 대신⁠?⁠”

“⁠응⁠.⁠”

미강이 한참 말이 없었다⁠. 응급실 안쪽에서 누가 신음했고 간호사가 빠르게 지나갔다⁠. 탄우가 잠결에 미트를 고쳐 쥐었다⁠.

“⁠나는 동점 골랐을 거야⁠.⁠”

“⁠알아⁠.⁠”

“⁠그래서 당신이랑 결혼했나 봐⁠. 둘 다 동점 고르면 집에 역전이 없잖아⁠.⁠”

미강이 웃었다⁠. 우는 것과 웃는 것이 반씩 섞인 웃음이었다⁠. 우철은 왼손으로 미강의 손등을 덮었다⁠.

복도 끝 자동문이 열렸다⁠. 운동화 소리가 들어왔다⁠. 세겸이었다⁠. 정장 윗도리를 팔에 걸고⁠, 손에 서류 봉투 하나를 들고 있었다⁠. 우철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잠든 탄우를 보고 목소리를 낮췄다⁠.

“⁠늦게 죄송합니다⁠. 축하드립니다⁠. 백네 개⁠. 리그 기록 타이입니다⁠. 해무가 5위로 올라갔고요⁠.⁠”

“⁠숫자 다 기억하시네요⁠.⁠”

“⁠네⁠.⁠”

세겸이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 미강이 대신 받았다⁠. 봉투 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미강이 읽고 나서 우철에게 보여 주었다⁠.

「⁠배우철 · 부상자 명단 등록 · 사유⁠: 오른쪽 팔꿈치 인대 완전 파열 · 복귀 예정⁠: 시즌 종료 이후⁠」

“⁠팀 닥터 소견입니다⁠. 남은 경기 없습니다⁠. 10월 2일도요⁠.⁠”

세겸은 그렇게 말하고 탄우를 한 번 더 보았다⁠. 미트를 볼에 댄 채 자는 아이였다⁠. 세겸은 무슨 말을 하려다 그만두었다⁠. 돌아서서 자동문 쪽으로 걸어갔다⁠. 운동화 소리가 복도에서 작아졌다⁠. 자동문이 열렸다가 닫혔다⁠. 바깥 공기가 한 번 밀려 들어왔다가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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