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5,282자) · 1592년 7월 8일, 사천 선창

사천

이순신 · 네오

만 19세 이상 이용가

1592년 7월 8일 (음력 5월 29일) 맑음. 우수사가 오지 않아 혼자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새벽에 떠나 곧장 노량(남해 설천면과 하동 사이 물목)에 이르니 경상우수사가 와서 만났다. 적이 머무는 곳을 물으니 적이 사천 선창(사천 용현면 선진리)에 있다고 했다. 곧장 그곳에 이르니 왜인이 이미 뭍에 내려 봉우리 위에 진을 치고 그 배를 봉우리 아래에 늘어 대고 굳게 막아 싸웠다. 내가 여러 장수를 독려하여 한꺼번에 달려들어 화살을 비처럼 쏘고 여러 총통을 놓으니 바람과 우레처럼 어지러웠다. 적이 두려워 물러났고 화살 맞은 자가 몇백인지 모르며 왜의 머리를 많이 베었다. 군관 나대용이 탄환에 맞았고 나도 왼쪽 어깨 위에 탄환을 맞아 등을 뚫고 나갔으나 중상에 이르지는 않았다. 열세 척을 불태웠다.

이틀 전에 종이가 왔다. 원균의 것이었다. 적선 십여 척이 사천과 곤양(사천 곤양면)에 닿았고 자기는 배를 남해 노량으로 옮긴다고 했다. 뒷면은 비어 있었다.

이억기와는 6월 3일에 앞바다에서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오늘이 5월 29일이다. 나흘을 기다리면 그 사이에 적이 곤양에서 하동으로, 하동에서 이 도로 넘어오고, 넘어오면 기다린 것이 아니라 내준 것이 된다. 나는 이억기에게 먼저 간다는 글을 보내고 새벽에 닻을 올렸다. 스물세 척이었다. 지난번보다 하나 적은 것은 하나를 흥양(고흥)에 남겼기 때문이고, 조방장 정걸이 그 배로 좌도의 빈 진포들을 지킨다. 스물셋도 두 번 셌다. 두 번 다 스물셋이었다.

노량에 이르니 원균이 있었다. 배 세 척이었다. 하동 선창에 옮겨 있다가 우리 배를 보고 노를 재촉해 왔고, 자기 배 위에서 내 배 쪽으로 몸을 내밀고 적의 자취를 말했는데 말이 빨랐다. 종이보다 빠른 말이었다. 종이에는 없던 것이 말에는 있었다. 사천 선창. 배 열두 척. 뭍에 오른 왜가 사백.

그때 바다 저쪽에서 왜선 한 척이 나왔다.

곤양에서 나와 사천으로 가는 배였다. 기슭을 따라 갔다. 기슭을 따라 가는 배는 도망치는 배다. 앞의 장수들이 노를 재촉해 쫓았고 방답첨사 이순신과 남해현령 기효근이 따라붙었고, 왜인들이 배를 버리고 뭍으로 뛰었다. 빈 배를 깨고 태웠다. 연기가 올랐다. 그 연기를 보고 사천 선창의 적이 우리가 온 것을 알았을 것이다. 알았어도 됐다. 알라고 태운 것이기도 했다.

*

사천 선창은 산 하나가 칠팔 리를 구불구불 뻗어 내린 자리다. 그 산등성이에 왜가 있었다. 사백은 되어 보였다. 긴 뱀처럼 진을 쳤는데 붉고 흰 깃발이 어지럽게 꽂혀 있어서 눈이 어지러웠고, 제일 높은 봉우리에 따로 장막이 서 있었고, 사람이 그 앞을 오갔다. 지휘를 듣는 모양이었다. 배는 열두 척. 누각처럼 생긴 배들이 산 아래 기슭에 줄지어 있었다.

산 위의 왜가 우리를 내려다보며 칼을 휘둘렀다. 업신여기는 것이었다. 내려오라는 것이었다.

배들이 그 아래로 나란히 나갔다. 활을 쏘려니 살이 닿지 않았고, 배를 태우려니 물이 빠져 있었다. 판옥선은 크다. 큰 배는 얕은 물에 못 들어간다. 저쪽은 높고 우리는 낮았다. 해도 기울고 있었다.

나는 뱃전을 잡고 서 있었다. 등뼈가 무거웠다. 앓고 난 자리가 아니라 그 위쪽이었다. 물을 보았다. 물은 아직 빠지고 있었는데, 빠지는 물은 되돌아오고, 되돌아오는 데 시간이 걸린다. 그 시간을 어디에 쓰는가.

장수들을 불렀다. 배와 배 사이로 말을 옮겼다.

“저들이 우리를 업신여긴다. 우리가 물러가는 척하면 저들이 반드시 배에 올라 쫓아올 것이다. 그때 물 가운데로 끌어내 친다.”

어영담이 옆 배에서 손바닥을 폈다. 검지로 손바닥 가운데를 짚었다. 여기까지 나가면 물이 든다고 했다. 물이 들면 배가 들어간다고 했다.

“얼마나 걸리는가?”

“한 식경입니다. 물은 사람이 맞추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한 식경을 물러가는 척하는 데 쓴다.”

배를 돌렸다. 일 리도 못 가서 산 위가 움직였다. 이백쯤 되는 왜가 진에서 내려와 반은 배를 지키고 반은 기슭에 모여 서서 포를 쏘고 뛰었다. 뛰는 것이 보였다. 조롱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싸우지 않으면 약한 것을 보이는 것이 된다. 그리고 물이 들고 있었다. 뱃전 아래로 물이 차오르는 것이 보였고 배가 조금씩 떠올랐다. 등뼈의 무게가 그만큼 가벼워지지는 않았다.

*

거북선을 앞세웠다.

이 배를 만든 것은 왜의 변고를 걱정해서였다. 앞에 용머리를 두고 그 입으로 큰 포를 쏘고, 등에 쇠 송곳을 박았다. 안에서는 밖을 볼 수 있고 밖에서는 안을 볼 수 없다. 적선 수백 척 가운데라도 뚫고 들어가 포를 쏠 수 있게 만들었다. 만들고 나서 4월 12일에 앞바다에서 지자포와 현자포를 쏘아 보았다. 그때 배가 한 뼘쯤 밀렸다가 돌아오는 것을 뱃전을 잡고 느꼈고, 그 한 뼘이 아직 손바닥에 있었다.

오늘 그 배가 처음 적에게 간다. 돌격장이 탔다.

거북선이 먼저 나갔다. 노 소리가 우리 배와 달랐다. 위가 덮여 있어서 소리가 안에서 울렸다. 그 배가 적선 사이로 들어가서 천자 지자 현자 황자 포를 쏘았고, 네 가지 소리가 잇달아 났고, 산 위와 기슭과 배 위 세 곳의 왜가 한꺼번에 총을 쏘았다. 탄환이 비처럼 왔다. 그 사이에 우리나라 사람이 섞여서 쏘는 것이 보였다. 끌려간 사람들이었다. 끌려간 사람이 우리를 쏘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나는 노를 재촉했다. 먼저 올라갔다. 내 배가 적선을 곧장 들이받았다.

여러 장수의 배가 구름처럼 모였다. 철환과 장편전과 피령전과 화전과 천자 지자 총통이 바람과 비처럼 나갔고 저마다 힘을 다했고 소리가 하늘과 땅을 흔들었다. 크게 다쳐 엎어지는 자, 끌려 달아나는 자를 셀 수 없었다. 왜가 높은 언덕으로 물러가 앉았다. 감히 앞으로 나올 뜻이 없었다.

장수들이 번갈아 드나들었다. 권준, 어영담, 이순신, 배흥립, 정운, 김완, 이몽구, 김인영, 가안책, 송성, 이응화. 이름을 부르면 배가 나갔다가 들어왔다. 열두 척을 다 깼다. 김완이 우리나라 아이 하나를 찾아냈다. 이응화가 목 하나를 베었다.

산 위에서 왜가 멀리 서서 보고 있었다. 소리를 지르고 발을 구르고 크게 울었고, 우는 소리가 물 위로 왔다. 저들도 운다. 그것을 나는 그날 처음 들었다.

*

탄환은 언제 맞았는지 모른다.

들이받을 때였는지 그 뒤였는지 모른다. 왼쪽 어깨 위가 뜨거웠고 뜨거운 것이 등 뒤로 지나갔는데, 등뼈 옆이었고 무겁던 자리 바로 옆이었다. 뚫고 나간 것은 나중에 알았다. 그때는 뜨거운 것만 알았다.

활을 놓지 않았다. 놓으면 뱃전에서 보는 사람들이 알고, 안 놓으면 모른다. 한 번 더 당겼다. 당기는 손은 안 떨렸다. 풀 때 떨렸다. 풀 때 떨리는 것은 원래 그렇다. 원래 그런 것을 붙들고 한 번 더 당겼다.

옷이 젖는 것을 느꼈다. 비는 안 왔다. 맑은 날이었다.

송희립이 옆에 와 있었다. 언제 왔는지 몰랐다. 그가 내 왼쪽을 보고 나를 보았고, 나는 그를 보지 않고 산을 보았고,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예였다. 그가 한 걸음 옆에 섰다. 왼쪽이었다. 뱃전 쪽에서는 그의 몸에 가려 내 왼쪽이 안 보이게 됐다. 그것도 예였다.

나대용이 탄환에 맞았다는 말이 왔다. 이설이 화살을 맞았다고 했다. 둘 다 죽지는 않는다고 했다.

죽지는 않는다. 그 말을 나는 내게도 했다.

*

해가 산 뒤로 갔다.

용감한 사부들을 뽑아 산으로 올려 보내 베게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숲이 빽빽하고 날이 저물어서 올라가면 당한다. 작은 배 몇 척만 남겨 두었다. 남긴 배로 적이 밤에 내려오면 끌어내 잡을 셈이었다.

배를 돌려 사천 땅 모자랑포(사천 용현면)로 갔다. 진을 치고 밤을 지냈다.

밤이 되어서야 어깨를 보았다. 등불 아래서 송희립이 옷을 벗겼는데 옷이 어깨에 붙어 있어서 떼는 데 시간이 걸렸고, 떼어 낸 옷의 소매 안쪽이 검붉게 굳어 있어서 그것이 발꿈치까지 흘러내렸던 것을 그제야 알았다. 앞에 구멍이 하나 있었다. 뒤에도 하나 있었다. 앞이 작고 뒤가 컸다. 들어간 데가 작고 나온 데가 크다. 그런 것이라고 했다.

“중상은 아닙니다.”

“안다.”

“내일은.”

“내일도 나간다.”

송희립이 옷을 다시 입혔다. 왼팔을 소매에 넣는 데 시간이 걸렸고, 넣고 나서 나는 일어섰다. 일어서니 등뼈의 무게가 다리로 내려갔고 다리가 견뎠다. 어깨의 무게는 어디로도 내려가지 않았다. 어깨에 그대로 있었다.

원균이 사람을 보내왔다. 내일 새벽에 남겨 둔 적선 두 척이 있는 데로 가서 화살 맞아 죽은 왜의 목을 베어 오겠다고 했다. 자기는 군사가 없어 싸움에서는 못 했으니 목이라도 베겠다고 했다.

나는 그러라고 했다.

그러라고 하고 나서 그 말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보았다. 종이가 아니라 말이었다. 말에는 뒷면이 없다. 뒷면이 없어서 뒤집어 볼 수가 없었다.

사료 · 5월 27일 원균의 관문(적선 십여 척이 사천·곤양에 닿음), 이억기와 6월 3일 약속했으나 먼저 떠난 것, 전선 스물세 척, 정걸을 흥양에 남긴 것 ― 당포파왜병장, 이충무공전서 권2 · 노량에서 원균이 배 세 척으로 온 것, 곤양에서 나온 왜선 한 척을 방답첨사와 남해현령이 쫓아 태운 것 ― 같은 장계 · 사천 선창의 지형, 산 위의 왜 사백여 명과 붉고 흰 깃발과 장막, 배 열두 척, 물이 빠져 판옥선이 못 들어간 것, 거짓 물러나 끌어낸 것, 이백여 명이 내려와 조롱한 것 ― 같은 장계 · 거북선의 생김(용머리로 포를 쏘고 등에 쇠 송곳, 안에서는 밖을 보고 밖에서는 안을 못 봄)과 이날 돌격장이 타고 처음 싸운 것 ― 같은 장계. 거북선의 4월 12일 시험 ― 난중일기 · 왜 가운데 우리나라 사람이 섞여 쏜 것, 장군이 노를 재촉해 먼저 올라가 곧장 들이받은 것, 장수 열한 명의 이름, 열두 척 격파, 김완이 아이 하나를 찾고 이응화가 목 하나를 벤 것, 산 위의 왜가 발을 구르며 통곡한 것 ― 같은 장계 · 왼쪽 어깨 위에 탄환을 맞아 등을 뚫었으나 중상은 아님, 나대용이 탄환에 맞고 이설이 화살을 맞은 것 ― 난중일기 5월 29일, 당포파왜병장. 행록은 다르게 적는다 ― 「피가 발꿈치까지 흘렀는데 활을 놓지 않고 종일 싸웠고, 싸움이 끝난 뒤 칼끝으로 살을 갈라 탄환을 꺼냈는데 몇 치 깊이였다」. 일기·장계는 탄환이 등을 뚫고 나갔다 하고 행록은 꺼냈다 한다. 여기서는 일기를 따르되 피가 발꿈치까지 흐른 것은 행록에서 가져왔다 · 모자랑포에서 밤을 지낸 것, 6월 1일 새벽 원균이 남겨 둔 적선과 죽은 왜의 목을 베러 가겠다 한 것, 「군사가 없어 싸우지 못했다」 ― 당포파왜병장 · 일기와 장계의 배 수가 다르다. 일기는 열세 척, 장계는 열두 척에 곤양에서 나온 한 척을 더한 것으로 읽힌다 · 어영담의 손바닥, 송희립이 왼쪽에 선 것, 밤에 어깨를 본 장면과 대화는 지어냈다 · 양력 날짜 ― 한국천문연구원 음양력 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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