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5,472자) · 1592년 6월 18일 밤 · 1580년 발포

오동나무

이순신 · 네오

만 19세 이상 이용가

1592년 6월 18일 (음력 5월 9일) 이날 이순신은 일기를 쓰지 못했다. 5월 9일 오시(낮 열한 시에서 한 시 무렵), 여러 배를 거느리고 무사히 본영으로 돌아왔다.

돌아온 밤에 장계를 썼다.

군관이 붓을 잡고 장군이 불렀다. 옥포(거제 옥포동)에서 스물여섯 척, 합포(창원 마산합포구)에서 다섯 척, 적진포(고성 거류면)에서 열한 척. 장수마다 몇 척을 깼는지 이름을 대고 숫자를 댔다. 이름과 숫자는 종이에 잘 들어갔다. 들어가지 않는 것이 하나 있었다.

경상우수사 원균이 배 세 척을 거느리고 왔는데, 그 군사들이 우리 장수들이 잡은 적선에 올라 물건을 뺏으려다 우리 사부 둘을 활로 다치게 했다. 주장이 아랫사람을 단속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거제현령 김준민은 바다가 멀지 않은데 여러 날 싸우는 동안 원균이 격문을 보내 재촉해도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그것을 조정에 어떻게 적는가.

장군은 한참 불러 주지 않았다. 군관이 붓을 든 채 기다리는 동안 먹이 붓끝에서 말라 갔고, 장군은 그 붓끝을 보고 있었다. 마르는 먹을 보고 있으면 시간이 보인다.

“적어라. 주장이 아랫사람을 단속하지 못한 것이 이보다 심할 수 없다. 조정에서 처치해 주시기를 엎드려 빈다.”

군관이 적었다. 적으면서 손이 조금 느려졌다. 이 줄이 무슨 줄인지 아는 손이었다. 경상우수사를 조정에 고하는 줄이고 함께 싸운 사람을 고하는 줄이다. 그 줄을 적고 나면 원균은 이 종이를 언젠가 읽게 될 것이고, 읽고 나면 이 장군을 어떻게 볼지 정해질 것이다.

장군은 그것을 알고 불렀다. 알고 부르는 것이 그 사람이었다. 열두 해 전에도 그랬다.

*

1580년 (선조 13년) 가을, 전라도 발포(고흥 도화면)

발포는 흥양(고흥) 땅 끝에 붙은 작은 진이다. 만호 하나가 지킨다. 서른여섯의 이순신이 그 만호로 왔다. 급제한 지 네 해였다. 함경도 변방에서 권관을 하고, 훈련원(서울 중구 을지로 동대문운동장 자리)에서 봉사를 하고, 충청병사의 군관을 하고, 그러고 나서 바다 끝에 왔다. 벼슬로는 오른 것이 아니었다. 바다로 온 것이었다.

객사 마당에 오동나무가 있었다.

오래된 나무였다. 몇 해나 됐는지 진의 아전들도 몰랐고 심은 사람이 없다는 것만 알았는데, 관가 마당에 심긴 나무는 심은 사람이 있어도 없는 것이다. 관가의 것이다. 이순신은 그 나무 그늘에서 활을 쏘았다. 그늘이 과녁까지 닿지는 않았다. 활 쏘는 자리까지만 닿았다.

어느 날 좌수사가 사람을 보냈다.

좌수사는 성박이었다. 발포는 좌수영(여수) 아래 있고 만호는 수사의 아랫사람이다. 수사가 보낸 사람이 마당에 서서 말했다. 객사 뜰의 오동나무를 베어 오라 하십니다. 거문고를 만드신답니다.

이순신이 물었다.

“누구의 나무인가?”

보낸 사람이 답을 못 했다. 그가 답을 못 하는 것을 보고 이순신이 대신 답했다.

“관가의 물건이다. 심어서 키운 지 여러 해다. 하루아침에 베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수사께서.”

“수사께서 거문고를 만드신다. 안다. 그런데 이것은 수사의 나무가 아니고 내 나무도 아니다. 관가의 나무다. 관가의 나무를 베려면 관가의 일이어야 한다. 거문고는 관가의 일이 아니다.”

보낸 사람이 돌아갔다.

진의 아전들이 마당 구석에서 그것을 보았다. 아전 하나가 다른 아전에게 작게, 만호가 미쳤나, 하고 말했다. 다른 아전이 미친 것이 아니라 모르는 것이라고 답했다. 첫 번째 아전이 아는 것 같은데, 하고 다시 말했다. 두 번째 아전이 답하지 않았다.

수사가 크게 노했다는 말이 며칠 뒤에 왔다. 노했는데 나무는 가져가지 못했다. 노한 것과 가져가는 것은 다른 일이었다. 나무는 마당에 그대로 있었고 그늘도 그대로여서, 이순신은 그 그늘에서 활을 쏘았다. 화살이 몇 대 맞았는지는 적지 않았다.

*

그해에 감사 손식이 순행을 돌았다.

감사는 도의 으뜸이고 수사보다 위다. 그 감사가 이순신에 대해 나쁜 말을 듣고 벌을 주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무슨 말이었는지는 전하지 않는다. 오동나무 얘기가 흥양을 지나 능성(화순 능주)까지 갔는지도 모른다. 감사가 능성에 이르러 이순신을 불러 명을 받게 했다.

객사에 앉혀 놓고 진법 책을 강론시켰다. 다 외웠다. 진 치는 그림을 그리게 했다. 이순신이 붓을 잡고 그리는 동안 진의 모양이 종이 위에 섰다. 앞이 어디고 뒤가 어디고 어디가 열리고 어디가 닫히는지를 붓이 정해 나갔다. 손이 흔들리지 않았다. 당길 때 안 떨리는 손이 붓을 잡아도 안 떨렸다.

감사가 책상 위로 몸을 숙여 그것을 오래 보았다.

“이것이 어찌 이리 정한가?”

그러고 나서 집안 내력을 물었다. 덕수 이씨. 증조가 장령 이거. 감사가 그 이름을 알았다. 호랑이 장령. 감사가 말했다.

“내가 처음에 알지 못한 것이 한이다.”

그 뒤로 감사는 그를 무겁게 대했다. 벌은 없었다. 이순신은 발포로 돌아왔고, 돌아오는 길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감사가 무엇을 듣고 벌을 주려 했는지 끝내 묻지 않았다. 물으면 그 말을 한 사람이 생긴다.

*

그다음 수사는 이용이었다.

이용은 이순신이 굽히지 않는 것을 미워했다. 굽히지 않는 사람을 위에서 보면 뻣뻣하게 보이고, 뻣뻣한 것을 꺾으려면 일이 있어야 해서, 이용은 일을 만들었다. 소속 다섯 포에 알리지 않고 갑자기 군사를 점고했다.

네 포는 빠진 사람이 많았다. 발포는 셋이었다.

이용은 발포만 이름을 들어 조정에 장계를 올리려 했다. 죄를 청하려는 것이었다. 셋이 빠진 진을 고하고 수십이 빠진 진은 두려는 것이었다.

이순신이 그것을 먼저 알았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전하지 않는다. 다섯 포의 아전들은 서로 알고, 아는 사람이 알려 주었을 것이다. 그는 네 포의 빠진 사람 명단 초본을 먼저 얻어서 가지고 있었고, 가지고 있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수사의 막료들이 그것을 알았다. 막료 이하가 수사 앞에 늘어서서 말했다. 발포는 빠진 사람이 제일 적습니다. 그리고 이 아무개가 네 포의 명단을 이미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장계를 올리시면 뒤에 뉘우칠 일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수사가 그렇게 여겼다. 급히 사람을 보내 장계를 쫓아가 되돌렸다.

이순신은 그 명단을 쓰지 않았다. 쓰지 않고 가지고 있었고,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 장계가 돌아왔다. 겨눈 것이지 쏜 것이 아니었다. 쏘았으면 맞았을 것이다.

*

이용이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수사와 감사가 만나 관원의 성적을 매기는 자리였다. 상중하로 매기고 하를 받으면 벼슬이 떨어진다. 이용은 이순신을 하에 두려고 했고 감사도 그것을 따르려 했다.

도사 조헌이 붓을 잡고 있었다. 도사는 감사의 아랫사람이고 붓을 잡는 사람이고 매긴 것을 적는 사람인데, 조헌이 붓을 들고 적지 않았다.

“이 아무개가 군사를 다스리는 것이 이 도에서 으뜸이라고 자세히 들었습니다. 여러 진을 다 하에 두시더라도 이 아무개는 깎을 수 없습니다.”

붓을 든 사람이 안 적으면 성적이 안 된다. 하가 되지 않았다.

이순신은 그 자리에 없었다. 있었으면 무슨 말을 했을지 모르고, 없어서 아무 말도 안 했고, 조헌을 만난 적도 없었다. 만난 적 없는 사람이 붓을 안 들어 준 것이다. 그 얘기를 나중에 들었을 때 그는 오래 말이 없다가 한 마디 했다. 붓을 안 드는 것도 일이다.

*

이태 뒤 봄에 군기경차관이 발포에 왔다.

군기를 살피는 관원이다. 살피고 나서 군기를 손질하지 않았다고 조정에 아뢰었다. 이순신이 파직됐다.

사람들이 말했다. 그 사람이 군기를 손질하는 것이 저렇게 정밀하고 엄한데 끝내 벌을 받는다. 그것은 지난날 훈련원에서 굽히지 않았던 원한 때문이다. 훈련원에서 병조 낭관이 제 사람을 순서를 뛰어넘어 올리려 할 때 봉사 이순신이 안 된다고 했다. 낭관이 그것을 마음에 두었고, 마음에 둔 것이 여섯 해를 돌아 발포까지 왔다.

파직되던 날 그는 객사 마당에 서 있었다.

오동나무가 있었다. 그늘이 있었다. 그늘은 활 쏘는 자리까지만 닿았고, 그는 그 자리에서 마지막으로 활을 쏘았고, 몇 대가 맞았는지는 적지 않았다. 적을 종이가 없었다. 만호의 일기는 없다. 그가 일기를 쓰기 시작한 것은 그 뒤로 열 해가 더 지나서였다.

나무는 남았다. 그가 떠나고도 남았다. 거문고가 되지 않았다.

*

1592년 6월 18일 밤, 여수

장계가 끝났다. 군관이 붓을 놓고 손을 털었다.

장군은 봉하지 않고 한 번 더 읽었다. 원균의 줄을 읽고 김준민의 줄을 읽고 나서 봉했다. 봉한 종이를 역자에게 주었다. 역자가 마당을 나갔다. 말굽 소리가 났다가 안 났다.

송희립이 옆에 서 있었다. 언제 왔는지 몰랐다.

“그 줄을 꼭 넣으셔야 했습니까?”

“넣지 않으면 없던 일이 된다.”

“없던 일이 되면 편합니다.”

“편한 것과 맞는 것은 다르다. 두 사람이 다쳤다. 다친 사람이 있는데 없던 일로 하면 그 둘은 어디로 가는가?”

송희립이 답하지 않았다. 답하지 않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예였다.

장군은 마당을 보았다. 좌수영 객사 마당에는 오동나무가 없었다. 다른 나무가 있었는데 무슨 나무인지 어두워서 보이지 않았고, 그늘도 보이지 않았다. 밤이라 그늘이 없었다.

“열두 해 전에 나무 한 그루를 안 베어 준 적이 있다.”

“들었습니다.”

“그때 그 나무가 어떻게 됐는지 아는가?”

“모릅니다.”

“나도 모른다.”

그는 그 말을 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원균의 종이는 손바닥만 하고 뒷면이 비어 있었는데, 오늘 보낸 자기 종이는 여러 장이고 뒷면까지 차 있었다. 그 종이가 조정에 닿는 데 며칠이 걸릴지 몰랐다. 조정이 어디 있는지도 몰랐다. 서쪽 어딘가에 있었다.

사료 · 5월 9일 오시 본영에 돌아온 것, 원균의 군사가 노획을 다투다 우리 사부 둘을 다치게 한 것, 「주장이 아랫사람을 단속하지 못함이 이보다 심할 수 없다, 조정의 처치를 엎드려 빈다」, 거제현령 김준민이 끝내 나타나지 않은 것 ― 옥포파왜병장, 이충무공전서 권2. 원균이 「배 세 척」을 거느렸다는 것도 같은 장계 · 1580년 발포만호가 된 것, 좌수사 성박이 객사 뜰 오동나무를 베어 거문고를 만들려 하자 「관가의 물건이다, 심은 지 여러 해인데 하루아침에 베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고 거절한 것, 수사가 크게 노했으나 가져가지 못한 것 ― 이분, 이충무공행록 · 감사 손식이 참소를 듣고 벌하려다 능성에서 진서를 강론시키고 진형을 그리게 한 뒤 「어찌 이리 정한가」 「처음 알지 못한 것이 한이다」 하고 무겁게 대한 것 ― 같은 행록 · 수사 이용이 다섯 포를 불시에 점고하여 발포만 죄를 청하려다, 이순신이 네 포의 결원 초본을 먼저 얻어 두었다는 막료들의 말에 장계를 되돌린 것 ― 같은 행록 · 도사 조헌이 붓을 잡고 「이 아무개는 깎을 수 없다」며 하 등급 적기를 거부한 것 ― 같은 행록 · 1582년 봄 군기경차관의 아룀으로 파직된 것, 사람들이 훈련원 시절의 원한 때문이라 한 것 ― 같은 행록 · 아전들의 말, 발포 마당의 그늘, 마지막으로 활을 쏜 것, 송희립과의 대화는 지어냈다. 이순신이 처음 발포에 온 해의 나이 서른여섯은 1545년생으로 센 것이다 · 양력 날짜 ― 한국천문연구원 음양력 변환. 이날 일기는 없다(전서본 5월 5일부터 28일까지 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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