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7,675자) · 1598년 12월 16일~17일, 노량
노량
이순신 · 네오
1598년 12월 16일 (음력 11월 18일) 이날부터 이순신은 일기를 쓰지 못했다. 조카 이분이 적었다. 유시(오후 다섯 시에서 일곱 시 무렵)에 적선이 남해에서 수없이 나와 엄목포에 대었다. 또 노량(남해 설천면과 하동 사이 물목)에 와서 대는 것이 수를 알 수 없었다. 공이 도독과 약속해 이 밤 이경(밤 아홉 시에서 열한 시 무렵)에 함께 떠났다. 사경(새벽 한 시에서 세 시 무렵)에 노량에 이르러 적 오백여 척을 만났다. 크게 싸워 아침에 이르렀다.
전날 밤에 고니시가 불을 들었다.
17일 초저녁, 왜교(순천 해룡면 신성리) 성 위로 불이 올랐다. 조금 뒤 남해 쪽 어둠에서도 불 하나가 답하듯 올랐다. 고니시가 구원을 청하는 신호였고, 곤양(사천 곤양면)과 사천에 있던 적이 그 불을 보고 노량으로 배를 몰았다.
앞장선 것은 시마즈였다. 일본 쪽 기록에 따르면 그는 처음에 코웃음을 쳤다. 우리가 한마음이면 명나라 군사쯤은 깨고도 남는데 무엇 하러 구원을 비는가. 그래 놓고 그는 병든 아들 다다쓰네를 섬에 남겨 둔 채 그날 밤 군사를 나누어 떠났다.
공은 장수들에게 군사를 갖추고 기다리라고 일렀다. 무엇이 오는지 아는 밤이었다. 며칠 전 도독과 얼굴을 붉히며, 저기 있는 것은 적이 아니라 붙잡혀 간 우리 사람들이라고 다투었던 바로 그 남해 쪽에서 배가 끝없이 밀려 나왔다. 남해의 배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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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독과 약속해 이 밤 이경(밤 아홉 시에서 열한 시 무렵)에 함께 떠났다.
뇌물을 받고 길을 열어 주려던 사람이 그날 밤은 함께 떠났다. 조카는 그 함께를 놓치지 않았다. 이백 년 뒤에 엮인 명나라 역사도, 진린이 급히 등자룡을 보내 조선 장수 이순신과 함께 적을 맞게 했다고 썼다. 두 나라의 기록이 한 낱말에서 만났다.
등자룡은 일흔이 넘은 풍성 사람이었다. 키가 크고 날래기가 남달라서, 젊어서는 강서의 도적을 쳤고 늙어서는 운남 변방을 지켰다. 그 사람이 명나라 배가 아니라 조선 배에 올랐다. 도독이 판옥선에 오르던 것처럼 올라, 수군 천 명과 큰 배 셋을 거느리고 선봉에 섰다. 투구 끈 아래로 흰 수염이 비어져 나온 사람이 맨 앞에 있었다.
사경(새벽 한 시에서 세 시 무렵)에 노량에 이르렀다. 남해와 하동 사이의 좁은 물목으로, 계사년에 처음 일기에 오른 이름이고 정유년에 안위가 통곡하던 곳이었다. 물살이 좁은 목을 빠져나가며 뱃머리를 자꾸 옆으로 떠밀었고, 격군들은 얼어 곱은 손가락을 입김으로 녹여 가며 노를 고쳐 잡았다. 거기 오백여 척이 있었다. 오백은 조카가 쓴 수이지 누가 하나하나 센 수가 아니다. 셀 사람은 그 밤에도 셌겠지만 그 수는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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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경(밤 열한 시에서 새벽 한 시 무렵)에 손을 씻었다.
노량에 닿기 전, 공은 배 위에서 손을 씻고 무릎을 꿇어 하늘에 빌었다. 이 원수를 없앨 수 있다면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 동짓달 바닷물은 손을 넣는 순간 뼈마디까지 저렸을 것이다. 여섯 해 동안 붓을 잡은 손, 어제 빈손으로 와서 알렸다고 쓴 그 손을 그 물에 담갔다. 갑판 판자에 꿇은 무릎으로 밤이슬의 찬 기운이 천천히 스며들었다.
문득 큰 별이 바다 가운데 떨어져 보는 사람이 이상히 여겼다. 정말 별이 떨어졌는지는 모른다. 그 밤 하늘에는 별이 많았을 것이고, 그 가운데 하나를 조카가 바다로 떨어뜨렸다. 떨어뜨릴 만한 밤이었다. 나무라지 않고 그대로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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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게 싸워 아침에 이르렀다.
밤새 싸웠다. 남원 사람 조경남이 이 싸움을 뒤에 적었다. 한밤중에 적선이 광주 산도로부터 구름이 합치듯 안개가 모이듯 모여들어 곧장 노량을 지나 왜교로 향하려 했다. 한 번 바라 소리가 울리니 포 소리와 북 소리가 함께 진동하고, 아군과 명군이 돌발해 좌우에서 엄습했다. 화살과 돌이 섞여 떨어지고 불붙은 섶을 마구 던져 허다한 왜선을 태반이나 불태웠다. 적이 목숨을 걸고 혈전했으나 지탱하지 못해 관음포(남해 고현면)로 물러났다. 날이 이미 밝았다.
불붙은 섶을 던지는 것은 다섯 해 전 안골포(창원 진해구 안골동)에서 쓴 수였다. 밤에 배에 불이 붙으면 그 배가 횃불이 되어 둘레의 적을 비추고, 비친 적에게 화살이 날아간다. 송진 타는 냄새와 젖은 나무가 불 속에서 튀는 소리가 좁은 물목을 가득 채웠다. 칠천량(거제 하청면 칠천도 앞)에서는 저쪽이 우리를 밤에 쳤고, 노량에서는 우리가 저쪽을 밤에 쳤다. 같은 밤이 한 바퀴 돌아 노량에 와 있었다.
시마즈 집안의 기록은 그 밤을 제 쪽에서 본다. 새벽 안개가 자욱한 데서 등자룡의 배가 시마즈의 배에 가까이 와 두 군사가 서로 놀랐다. 등자룡이 장사 이백을 데리고 조선 배에 뛰어올라 곧장 앞으로 떨쳐 쳤다. 시마즈 군사는 쇠 갈고리로 그 배를 걸고 화기를 배 안에 던졌고, 불이 나자 건너가 싸우다 쉰넷이 죽었다. 쉰넷은 그 집 사람들이 센 수다. 그런데 명나라 쪽에서 던진 화기가 등자룡의 배에 잘못 들어가 배 안에 불이 났고, 시마즈 군사가 그 틈을 타서 등자룡을 쳐 죽였다. 따르던 군사도 다 죽었다.
다른 배가 잘못 화기를 등자룡의 배에 던졌다는 것은 명나라 역사도 똑같이 썼다. 제 편이 던진 불이 제 편 배에 떨어졌고, 적이 그 틈을 탔다. 일흔 넘은 사람이 남의 나라 배에서 제 편 불에 죽었다. 제 허물인데도 명나라는 그 줄을 지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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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이 구하러 갔다.
명나라 역사는 이순신이 등자룡을 구하러 갔다가 역시 죽었다고 썼다. 조카의 순서는 다르다. 도독의 배가 적에게 둘러싸여 거의 함락될 뻔한 일을 뒤에 두었다. 순서가 다른 두 기록을 둘 다 둔다.
19일 새벽, 공은 바야흐로 싸움을 독려하다가 문득 날아오는 탄환을 맞았다. 어디를 맞았는지 조카는 쓰지 않았고 류성룡이 썼다. 날아오는 탄환이 가슴을 맞혀 등 뒤로 나갔고, 좌우가 부축해 장막 안으로 들였다. 조경남의 기록은 또 다르다. 적의 포병이 배 꼬리에 엎드렸다가 이순신을 향해 일제히 쏘아 탄환에 맞아 인사불성이 되었고, 급히 장좌에게 명해 방패로 몸을 지탱하게 했다. 희끄무레하게 밝아 오는 갑판 위에서, 방패를 받쳐 든 팔들이 무게를 못 이겨 떨렸을 것이다. 그 방패도 둔다.
공이 말했다, 싸움이 한창 급하다. 삼가 내가 죽었다고 말하지 말라. 말을 마치고 갔다. 조카와 류성룡이 따로 쓴 두 종이에 같은 열 자가 있다. 두 사람이 같은 말을 옮겼으니 그 말은 거기 있었다.
마지막으로 내린 명은 자기 죽음을 세지 말라는 것이었다. 장수 하나가 쓰러진 것을 배마다 세기 시작하면 온 함대가 흔들린다. 이제는 열셋이 아니라 몇 척인지 모를 배였지만, 몇이든 흔들리는 것은 같았다. 흔들리지 않게 해 두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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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와 완이 곁에 있었다.
큰아들 회와 형의 아들 완이 활을 잡고 곁에 있었다. 둘은 울음을 삼키고 서로 말했다. 일이 여기 이르렀으니 망극하고 망극하다. 그러나 발상하면 온 군사가 놀라 움직이고 적이 그 틈을 타며 시신도 온전히 돌아가지 못하니, 참고 싸움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것만 못하다. 활을 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려 있었다.
회가 아버지를 안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갑옷을 입은 채인 몸은 무거웠고, 방 안에는 화약 연기와 피 냄새가 엉겨 있었다. 시중드는 종 김이와 회와 완, 세 사람만 알았다. 여섯 해 동안 곁을 지킨 친신 송희립 무리도 몰랐다. 아는 사람은 셋이었고, 셋 밖으로는 새지 않았다.
깃발을 휘두르고 싸움을 독려하기를 전과 같이 그치지 않았다. 류성룡은 완이 했다고 썼다. 완은 본래 담량이 있어 그 죽음을 숨기고 이순신의 영으로 싸움을 독려하기를 더욱 급히 하니 군중이 몰랐다. 조경남은 회라고 썼다. 아들 회가 배에 있다가 아버지의 분부에 따라 북을 울리고 기를 휘둘렀다. 두 사람 다 거기 있었으니 둘 다 둔다. 하나가 북을 치고 하나가 기를 휘둘렀을 것이다. 그 배에서 한 사람이 빠졌고, 둘이 그 한 사람 몫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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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독의 배가 둘러싸였다.
거의 함락될 뻔했다. 여러 장수가 공의 배에서 깃발을 휘둘러 재촉하는 것을 보고 다투어 달려가, 에워싼 적을 풀었다. 공이 없는 공의 배가 그렇게 했다. 명량(해남과 진도 사이 울돌목)에서 초요기를 올리던 그 깃대에 오늘은 완이 깃발을 올렸고, 장수들은 깃발을 보고 갔다. 사람이 없어도 깃발이 있었다. 깃발이 곧 사람이었다.
싸움이 끝나자 도독이 급히 배를 가까이 옮기며 말했다. 통제사 빨리 오시오, 빨리 오시오. 완이 뱃머리에 서서 울며 말했다. 숙부의 명이 끊어졌습니다. 도독이 배 위에 엎어지기를 세 번 하고 크게 통곡했다. 이미 죽은 뒤에 나를 구할 수 있었는가 하며 가슴을 치며 오래 울었다. 류성룡은 도독이 의자에서 스스로 땅에 몸을 던졌다고 썼다. 나는 노야가 살아서 나를 구하러 온 줄 알았는데 어찌하여 죽었는가. 이야라고 부르던 사람을 그 사람이 노야라고 불렀다. 도독의 군사가 다 고기를 던지고 먹지 않았다. 던져진 고깃점들이 젖은 갑판 위에 흩어진 채, 아침 햇빛을 받아 식어 갔다.
*
조경남은 이렇게 수를 세었다. 낮도 되지 않아 적선이 거의 다 진멸되고 물에 뛰어들어 죽는 자가 헤아릴 수 없었으며, 도망해 벗어난 것이 겨우 쉰여 척이었고 구백여 급을 베었다. 명나라 역사는 불타고 물에 빠져 죽은 자를 만으로 셌다. 류성룡은 적선 이백여 척을 태우고 죽이고 잡은 것이 셀 수 없었다고 썼다. 시마즈 집안은 따르던 군사가 절반 죽었다고 했다.
시마즈의 배는 매우 위급해서 겨우 빠져나가 당도(거제, 일본 기록의 이름)로 피했다. 배는 찍혀 부서졌고, 화살이 판자에 고슴도치 털처럼 박혀 있었다. 관음포 앞바다에는 아침 내내 부서진 널빤지와 그을린 돛 조각이 떠다녔고, 썰물이 그것들을 천천히 바깥 바다로 끌고 나갔다.
명나라 역사는 하나를 더 썼다. 시마즈가 고니시를 구하러 오자 진린이 바다 가운데서 맞아 쳐 죽였다. 죽였다고 썼으나 시마즈는 죽지 않았다. 그는 살아서 19일 당도를 떠나 일본으로 돌아갔고, 그 나라 책은 명나라 책을 거짓이라고 했다. 거짓도 거짓이라는 이름을 붙여 둔다. 그렇게 아뢴 사람은 진린이었을 것이고, 논공에서 으뜸도 진린이었다.
고니시는 싸움이 한창일 때 묘도 서량을 따라 몰래 바다로 나가, 순천을 버리고 작은 배로 달아났다고 명나라 역사가 썼다. 달아나서 살았다. 산 사람의 수는 아무도 세지 않는다. 세는 것은 죽은 사람이고, 그 죽은 사람 가운데 하나가 그 배의 방 안에 누워 있었다.
*
김이가 방 안에 있었다.
시중드는 종, 셋 가운데 하나였다. 회와 완이 밖에서 깃발을 휘두를 때 그는 시신 곁에 있었다. 조카는 김이라는 그 이름을 적어 남겼다. 그가 무엇을 했는지는 없고, 곁에 있었다는 것뿐이다.
여기서는 지어내지 않는다. 그가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했는지 지어내면, 그의 아침이 남의 것이 된다. 대신 하나만 둔다. 좁은 방 안에 둘이 있었다. 하나는 종이고 하나는 통제사였다. 밖에서 북이 울렸고, 판자 너머로 건너온 그 소리에 방 안의 널빤지가 가늘게 떨었다. 하나는 그 소리를 듣고 하나는 듣지 않았다. 듣지 않는 사람 곁에 듣는 사람이 아침까지 앉아 있었다. 판자 틈으로 아침이 들어왔고, 들어온 것을 하나가 보았다.
배 밖에서는 아직 세고 있었다. 회와 완이 세고, 도독이 세고, 조경남과 명나라와 시마즈가 셌는데 그 수가 다 달랐다. 다른 수를 다 두는 것이 예다. 세지 않은 사람이 하나 있었다. 여섯 해 동안 세던 사람이 그날 아침에는 세지 않았다. 그 마지막을 그대로 둔다.
사료 · 11월 17일 초저녁 고니시가 불을 들어 남해의 적과 응하고 곤양·사천의 적이 노량에 온 것, 공이 여러 장수에게 엄히 군사를 갖추고 기다리게 한 것, 18일 유시에 적선이 남해에서 수없이 나와 엄목포와 노량에 댄 것, 「도독과 약속해 이 밤 이경에 함께 떠나 사경에 노량에서 적 오백여 척을 만나 크게 싸워 아침에 이르렀다」, 「이 밤 삼경에 공이 배 위에서 손을 씻고 무릎 꿇어 하늘에 빌었다. 이 원수를 없앨 수 있다면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 문득 큰 별이 바다 가운데 떨어졌다」, 19일 새벽 「싸움을 독려하다 문득 날아오는 탄환을 맞았다. 싸움이 한창 급하다. 삼가 내가 죽었다고 말하지 말라. 말을 마치고 갔다」, 회와 완이 「발상하면 온 군사가 놀라고 적이 틈을 타며 시신도 온전히 돌아가지 못한다」며 시신을 안고 방 안에 들어가 시중드는 종 김이와 셋만 알고 송희립도 몰랐다는 것, 깃발을 휘둘러 싸움을 독려하기를 전과 같이 한 것, 도독의 배가 둘러싸이자 공의 배 깃발을 보고 장수들이 구한 것, 싸움이 끝나 도독이 「통제사 빨리 오시오」 하자 완이 「숙부의 명이 끊어졌습니다」 하니 도독이 배 위에 세 번 엎어지며 「이미 죽은 뒤에 나를 구할 수 있었는가」 하고 도독 군사가 고기를 던지고 먹지 않은 것 ― 이분, 이충무공행록 · 「날아오는 탄환이 가슴을 맞혀 등 뒤로 나갔다. 좌우가 부축해 장막 안에 들였다」, 「완은 본래 담량이 있어 그 죽음을 숨기고 이순신의 영으로 싸움을 독려하기를 더욱 급히 하니 군중이 몰랐다」, 진린이 「의자에서 스스로 땅에 몸을 던지며 나는 노야가 살아서 나를 구하러 온 줄 알았는데 어찌하여 죽었는가」 한 것, 「적선 이백여 척을 태우고 죽이고 잡은 것이 셀 수 없었다」, 「고니시가 우리 수군이 적을 쫓아 그 진영을 지나는 사이에 뒤로 빠져나갔다」 ― 류성룡, 징비록 권2 · 「한밤중에 적선이 구름이 합치듯 안개가 모이듯 모여 노량을 지나 왜교로 향하려는데 바라 소리가 울리자 포와 북이 진동하고 양군이 좌우에서 엄습해 불붙은 섶을 던져 왜선 태반을 태웠다」, 「이순신이 친히 북채를 잡고 먼저 올라 추격하는데 적의 포병이 배 꼬리에 엎드렸다가 일제히 쏘아 이순신이 탄환에 맞아 인사불성이 되었다. 급히 장좌에게 방패로 몸을 지탱하게 하고 발상하지 못하게 했다. 아들 회가 배에 있다가 북을 울리고 기를 휘둘렀다」, 「도망해 벗어난 것이 겨우 쉰여 척, 구백여 급을 베었다」, 고니시가 묘도 서량으로 몰래 나가 바다로 달아난 것 ― 조경남, 난중잡록 무술년 11월 19일(국역) · 「진린이 급히 등자룡을 보내 조선 장수 이순신과 함께 맞게 했다」, 「불타고 물에 빠져 죽은 자가 만으로 셌다」, 「시마즈가 고니시를 구하러 오자 진린이 바다 가운데서 맞아 쳐 죽였다」, 논공에서 진린이 으뜸 ― 명사 권247 진린전. 「등자룡은 일흔이 넘었으나 뜻이 더욱 굳세어 장사 이백을 데리고 조선 배에 뛰어올라 떨쳐 쳤다. 다른 배가 잘못 화기를 등자룡의 배에 던져 불이 나자 적이 그 틈을 타 등자룡이 싸우다 죽었다. 이순신이 구하러 갔다가 역시 죽었다」 ― 같은 책 등자룡전 · 「고니시가 시마즈·마쓰라에게 구원을 빌자 우리가 한마음이면 명병을 깨기에 넉넉하다 하고 17일 밤에 떠난」 것, 「18일 새벽 안개가 자욱해 등자룡의 배가 시마즈의 배에 가까이 와 두 군사가 서로 놀랐다」, 「쇠 갈고리로 우리 배를 걸고 화기를 던져 우리 군사 쉰넷이 죽었다」, 「적이 던진 화기가 등자룡의 배에 잘못 들어가 우리 군사가 등자룡을 쳐 죽였다」, 「이순신이 구하러 와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힘껏 싸우는데 우리 군사가 총을 쏘아 그 가슴을 맞혀 등 뒤로 나갔다」, 「시마즈의 배가 매우 위급해 겨우 당도로 피했고 배가 찍혀 부서지고 화살이 판자에 고슴도치 털처럼 박혔다」, 명사가 시마즈를 죽였다고 적은 것이 거짓이라는 것 ― 가와구치 조주, 정한위략 권5(시마즈 가기·정한록 인용) · 밤 싸움의 셈, 「깃발이 사람이었다」, 방 안의 김이에 대한 대목, 찬 바닷물과 판자 너머의 북소리는 지어냈다. 김이가 무엇을 했는지는 짓지 않았다 · 이 회차는 3인칭이다. 여섯 사람의 종이를 나란히 두었다 · 양력 날짜 ― 한국천문연구원 음양력 변환. 무술년 11월 19일은 양력 12월 17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