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6,129자) · 1598년 12월 17일, 서울. 그리고 하회에서
류성룡
이순신 · 네오
1598년 12월 17일 (음력 11월 19일), 한양 이날 이순신은 노량(남해 설천면과 하동 사이 물목)에서 죽었다. 같은 날 한양에서 영의정 류성룡이 파직되었다.
류성룡은 붓을 잡았다.
파직된 사람이 붓을 잡았다.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몇 해 뒤, 안동 하회의 고향 집에 내려가 있을 때였을 것이다. 거기서 지난 일을 징계해 뒷날을 삼간다는 뜻으로 징비록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임진년부터 차례로 적어 내려갔다. 마을을 감아 도는 강물 소리가 방 안까지 들었고, 겨울이면 벼루 가장자리부터 먹물이 얇게 얼었다. 그렇게 써 내려가다가 무술년 11월에 닿았다. 거기 한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이 죽은 날과 자기가 파직된 날은 같은 날이었다. 류성룡이 그것을 몰랐을 리 없다. 알면서도 그 자리에 자기 파직은 한 줄도 넣지 않고 이순신만 썼다. 자기를 뺐다. 그 뺀 자리를 여기 둔다. 뺀 자리에 그 사람이 서 있다.
*
먼저 죽음을 적었다.
통제사 이순신이 수군을 이끌고, 순천 왜교성에 갇힌 고니시를 구하러 사천과 남해에서 몰려온 시마즈의 배들을 바다 가운데서 크게 깨뜨렸으나 이순신이 죽고 적장 고니시가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그렇게 열어 놓고 나서 자세히 들어갔다. 날아오는 탄환이 가슴을 맞혀 등 뒤로 나갔고, 좌우가 부축해 장막 안에 들였다. 이순신이 말하기를 싸움이 한창 급하니 삼가 내가 죽었다고 말하지 말라 하고, 말을 마치고 끊어졌다.
어디서 들었을까. 조카 이분이 쓴 것과 같은 열 자가 들어 있으니, 이분이 류성룡에게 말했을 것이다. 이분은 이순신의 형의 아들로 노량에 있었고, 어쩌면 그 배에 있었다. 한양에 올라와 류성룡을 만나 그날 새벽을 말했고, 류성룡은 들은 대로 옮겼을 것이다. 두 사람이 만났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그래도 두 사람이 남긴 글에 같은 열 자가 똑같이 들어 있으니, 어디선가 한 번은 마주 앉았을 것이다. 이 이야기는 그 만남이 있었다고 보고 쓴다.
우리 군사와 명나라 군사가 이순신이 죽은 것을 듣고 진마다 통곡하기를 사사로운 친척을 곡하듯 했다. 상여가 가는 데마다 백성이 곳곳에 제사를 차리고 상여 수레를 잡고 울며 말했다. 공이 실로 우리를 살렸는데 이제 공이 우리를 버리고 어디로 가시는가. 길이 메어 수레가 나아가지 못했고, 길 가는 사람이 눈물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상여는 고금도(완도 고금면)에서 아산(충남 아산)으로 갔다. 어머니가 배로 올라간 길이었고, 아들이 먼저 상여로 간 길이었다. 이번에는 아버지가 그 길을 상여로 갔다. 언 길바닥에서 수레바퀴가 덜컹거렸고, 길가 제상에 꽂은 향의 연기가 찬바람에 옆으로 누웠다. 백성이 그 길을 붙잡아 수레가 가지 못했다. 류성룡은 그 수레를 보지 못한 채 썼다. 못 간 사람이 못 간 수레를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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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음에 사람을 적었다.
이순신은 자가 여해고 덕수 사람이라고, 그렇게 시작했다. 증조 이거는 성종과 연산이 동궁에 있을 때 강관이 되어 엄해서 꺼림을 받았고, 장령이 되어서는 탄핵을 피하지 않아 백관이 꺼렸다. 사람들은 그를 호랑이 장령이라 불렀다. 류성룡은 그 사람의 증조부터 불러냈다.
어려서 영특하고 매이지 않았다. 아이들과 놀 때면 나무를 깎아 활과 화살을 만들었고, 마을에서 뜻에 맞지 않는 사람을 만나면 그 눈을 쏘려 했다. 어른들이 꺼려 그 집 문 앞을 감히 지나지 못했다. 눈을 쏘려 한 아이를 류성룡은 나무라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같은 동네 골목에서 그 나무 활을 본 적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무과에 급제해 훈련원(서울 중구 을지로 동대문운동장 자리) 봉사가 되었다. 병조판서 김귀영이 서녀를 첩으로 주려 했으나 이순신은 응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까닭을 묻자, 내가 처음 벼슬길에 나와 어찌 감히 권세 있는 집에 발을 붙여 승진을 꾀하겠는가 하고 답했다.
병조정랑 서익이 훈련원의 아는 사람을 차례를 넘어 올리려 하자 이순신이 장무관으로 안 된다고 버텼다. 서익이 뜰 아래로 불러 따졌으나, 이순신은 말과 얼굴빛을 바꾸지 않고 곧게 밝히며 흔들리지 않았다. 서익이 크게 노해 기세로 눌러도 종용(차분하고 태연하게)히 대답하고 끝내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 뜰의 흙바닥에 선 사람의 그림자가 해를 따라 길어지는 동안, 그 대답은 한 번도 높아지지 않았다. 아래 관리들이 계단 아래서 서로 돌아보며 혀를 내둘렀다. 이 관원이 감히 본조에 맞서니 앞길을 안 돌아보는가. 해가 저물어 서익이 부끄러워 굽히고 보냈고, 아는 사람들이 이 일로 이순신을 알았다.
류성룡이 그것을 적었다. 건천동(서울 중구 인현동) 같은 동네에서 어릴 때부터 알던 사람이, 그 사람의 서른 무렵을 썼다. 종용히, 그 말을 골랐다. 명량(해남과 진도 사이 울돌목)에서 이순신이 장수들을 부드럽게 타일렀다고 일기에 쓸 때도 같은 말이 들어갔다. 종용, 그 두 글자에 그 사람이 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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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에서 있었던 일도 적었다.
옥에 갇힌 이순신의 앞날은 헤아릴 수 없었다. 옥 안에는 눅눅한 볏짚 냄새가 배어 있었고, 낮에도 벽 틈으로 드는 빛은 손바닥 하나를 덮지 못했다. 옥리가 형의 아들 분에게 몰래, 뇌물이 있으면 면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순신이 듣고 분에게 노해 죽으면 죽는 것이지 어찌 도리를 어겨 살기를 구하겠느냐고 했다. 그 지조가 이와 같았다.
죽으면 죽는 것이다. 옥에서 이분에게 한 그 말을 이분이 류성룡에게 전했을 것이다. 류성룡은 그때 영의정이었다. 영의정이 그 사람을 옥에서 꺼내지 못했고, 꺼낸 것은 정탁이었다. 류성룡은 그 둘 다 쓰지 않았다. 자기가 하지 못한 일 대신 그 사람이 한 말을 썼고, 그 여섯 자를 쓰는 동안 붓 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 획이 굵어졌다.
사람됨이 말과 웃음이 적고 용모가 단아해 삼가는 선비 같았으나 속에 담기(두려움 없이 맞서는 배짱)가 있었다. 몸을 잊고 나라를 위해 죽은 것은 본래 쌓아 온 것이었다. 형 희신과 요신이 다 먼저 죽자 이순신이 그 남은 아이들을 제 자식같이 돌보아, 시집 장가를 보낼 때 반드시 형의 자식을 먼저 하고 뒤에 제 자식을 했다. 재주가 있고 명이 없어 백에 하나도 펴지 못하고 죽었다. 아아 애석하다.
백에 하나라고 썼다. 옥포(거제 옥포동)와 한산도(통영 한산면)와 명량과 노량, 여섯 해 동안 한 것이 모두 백에 하나였다. 나머지 아흔아홉이 무엇인지 류성룡은 쓰지 않았으나 알았을 것이고, 알아서 애석하다고 했다. 파직된 영의정이 그 두 글자를 썼다. 먹이 마르기를 기다리는 동안 그는 한참 그 종이 앞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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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됨을 다 쓰고 나서 마지막에 달밤을 하나 더 두었다. 통제사가 군중에 있을 때 밤낮으로 경계를 엄히 해 갑옷을 벗은 적이 없었다. 견내량(거제와 통영 사이 좁은 물목)에서 적과 대치할 때 여러 배가 이미 닻을 내렸고, 밤에 달빛이 매우 밝았다. 통제사가 갑옷을 입은 채 북을 베고 누웠다가 문득 일어나 앉아, 좌우를 불러 소주를 가져오게 해 한 잔 마셨다. 여러 장수를 다 앞에 불러 말했다. 오늘 밤 달이 매우 밝다. 적은 꾀가 많아 달 없는 때 반드시 우리를 습격하겠지만 달이 밝아도 응당 습격해 올 것이다. 경비를 엄히 하지 않을 수 없다. 각을 불게 하고 여러 배가 다 닻을 올리게 했다. 각 소리가 달빛 깔린 물 위로 길게 퍼지자, 배마다 젖은 닻줄이 감겨 올라오는 소리가 뒤를 이었다. 척후선에 전령하니 척후 군졸이 바야흐로 깊이 잠들어 있어, 깨워 변을 기다리게 했다.
한참 뒤에 척후가 달려와 적이 온다고 알렸다. 그때 달이 서산에 걸려 산 그림자가 바다에 거꾸로 비쳤고, 바다 반쪽이 어슴푸레 어두웠다. 적선이 수없이 그 어둑한 데서 나와 우리 배에 다가오려 했다. 중군이 대포를 쏘고 함성을 지르니 여러 배가 다 응했다. 적이 대비가 있는 것을 알고 한꺼번에 조총을 쏘았다. 소리가 바다를 흔들고 날아오는 탄환이 물에 떨어지는 것이 비 같았으나, 마침내 감히 범하지 못하고 물러갔다. 여러 장수가 신이라고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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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룡은 이순신을 신이라고 여겼다는 그 다섯 자로 끝냈다.
그가 고른 마지막 장면은 옥포도 한산도도 명량도 노량도 아니었다. 어느 해인지도 적지 않은 이름 없는 밤이었다. 견내량의 달과 소주 한 잔, 북을 베고 누웠다가 일어난 사람을 맨 끝에 두었다.
왜 그 밤인가. 류성룡이 까닭을 쓰지 않았으므로 여기서 짓는다. 그 밤에는 아무도 죽지 않았고 배도 깨지지 않았다. 적이 왔다가 갔을 뿐이다. 이긴 밤이 아니라 지지 않은 밤이었다. 여섯 해 동안 이긴 밤보다 지지 않은 밤이 훨씬 많았고, 그런 밤이 수백이었다. 그 수백 가운데 달이 서산에 걸리고 산 그림자가 바다에 거꾸로 비친 밤 하나를 골라 끝에 두었다. 지지 않은 그 밤들에 그 사람이 있었다.
소주 한 잔도 두었다. 이진에서 소주로 무너졌던 사람이 견내량에서는 소주 한 잔을 마시고 일어났다. 목을 타고 내려간 독한 술기운이 차가운 갑옷 속 가슴을 잠깐 덥혔을 것이다. 한 잔이라고, 류성룡은 수를 붙여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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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룡은 붓을 놓았다.
놓고 나서도 하회에서, 같은 날 파직된 자기를 쓰지 않았다. 죽은 사람을 쓰고 자기를 쓰지 않는 것이 그 사람의 예였다. 예를 지켰고, 지킨 것이 남았다. 붓을 헹군 대야의 물이 천천히 검게 흐려졌다. 창호지 너머로 강 건너 부용대의 벼랑이 저녁 빛에 붉게 물들었다가, 이내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건천동이라는 마을에서 두 사람이 자랐다. 하나는 무과를 하고 하나는 문과를 했다. 하나는 정읍(전북 정읍)에서 일곱 계단을 올랐고, 하나는 그 계단을 놓았다. 하나는 바다에서 죽고 하나는 같은 날 벼슬에서 떨어졌다. 떨어진 사람이 죽은 사람을 썼고, 쓴 것이 여기 있다. 이 종이도 여기서 끝난다.
신이라고 여겼다는 다섯 자를 류성룡이 끝에 두었고, 여기도 그 끝을 둔다. 그 사람은 신이 아니라 세는 사람이었다. 물때를 세고 배를 세고 죽은 사람의 이름을 세던 사람을 장수들이 신이라 부른 것을 나무라지 않는다. 세는 사람이 없는 밤에 사람들은 신을 찾는다. 그 밤에는 세는 사람이 있었고, 그래서 지지 않았다. 그뿐이다. 그 전부를 두고 붓을 놓는다. 여섯 해 붓을 잡은 사람이 붓을 놓은 자리, 같은 자리에.
사료 · 「통제사 이순신이 수군으로 그 구원병을 바다 가운데서 크게 깨뜨렸다. 이순신이 죽었다」, 「날아오는 탄환이 가슴을 맞혀 등 뒤로 나갔다. 싸움이 한창 급하다. 삼가 내가 죽었다고 말하지 말라. 말을 마치고 끊어졌다」, 「우리 군사와 명나라 군사가 진마다 통곡하기를 사사로운 친척을 곡하듯 했다. 상여가 가는 데마다 백성이 제사를 차리고 수레를 잡고 울며 공이 실로 우리를 살렸는데 이제 우리를 버리고 어디로 가시는가 하니 길이 메어 수레가 나아가지 못했다」 ― 류성룡, 징비록 권2 · 「이순신은 자가 여해고 덕수 사람이다」, 증조 이거의 「호랑이 장령」, 어릴 때 「뜻에 맞지 않는 사람의 눈을 쏘려 해 어른들이 그 집 문 앞을 감히 지나지 못한」 것, 김귀영의 서녀를 거절하며 「어찌 감히 권세 있는 집에 발을 붙여 승진을 꾀하겠는가」, 서익 앞에서 「말과 얼굴빛을 바꾸지 않고 종용히 대답해 끝내 꺾이지 않아 아래 관리들이 혀를 내두른」 것, 옥에서 「죽으면 죽는 것이지 어찌 도리를 어겨 살기를 구하겠는가」, 「말과 웃음이 적고 용모가 단아해 삼가는 선비 같았으나 속에 담기가 있었다」, 형의 아이들을 먼저 시집 장가 보낸 것, 「재주가 있고 명이 없어 백에 하나도 펴지 못하고 죽었다. 아아 애석하다」 ― 징비록 권2 · 「통제사가 군중에 있을 때 갑옷을 벗은 적이 없었다. 견내량에서 달이 밝은 밤 갑옷을 입은 채 북을 베고 누웠다가 일어나 소주 한 잔을 마시고 여러 장수를 불러 오늘 밤 달이 밝으니 적이 반드시 습격해 올 것이라 하고 각을 불어 닻을 올리게 하고 잠든 척후를 깨웠다. 달이 서산에 걸려 산 그림자가 바다에 비쳐 반쪽이 어두운 데서 적선이 수없이 나오자 중군이 대포를 쏘고 함성을 지르니 적이 조총을 비처럼 쏘다 감히 범하지 못하고 물러갔다. 여러 장수가 신이라고 여겼다」 ― 징비록 권2. 이 대목이 징비록 본편의 이순신 기사 끝이다 · 류성룡이 무술년 11월 19일 파직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나 이 작품의 사료 폴더에는 선조실록이 없다. 징비록 본편은 그 파직을 그 자리에 적지 않았다 · 류성룡이 붓을 잡은 때와 곳, 이분이 류성룡에게 말했으리라는 것, 마지막 장면을 고른 까닭은 지어냈다 · 이 회차는 류성룡의 3인칭이다. 이 작품의 마지막 회차다 · 양력 날짜 ― 한국천문연구원 음양력 변환. 무술년 11월 19일은 양력 1598년 12월 17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