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6,173자) · 1598년 10월 14일~11월 11일, 나로도에서 왜교까지

왜교

이순신 · 네오

1598년 10월 14일 (음력 9월 15일) 맑음. 진 도독과 함께 한꺼번에 군사를 움직여 나로도에 이르렀다.

10월 19일 (9월 20일) 맑음. 진시(아침 일곱 시에서 아홉 시 무렵)에 유도에 이르니 명나라 장수 유 제독이 이미 군사를 나아가게 했다. 물과 뭍에서 끼고 치니 적의 기세가 크게 꺾여 두려워하는 기색이 많았다. 수군이 드나들며 포를 쏘았다.

무술년 정월 초나흘에서 끊긴 붓이 아홉 달 만인 9월 보름에 돌아왔다.

돌아온 붓이 처음 쓴 것은 진 도독과 함께 한꺼번에 군사를 움직여 나로도에 이르렀다는 한 줄이었고, 그 줄에서 무게가 실린 말은 함께였다. 아홉 달 동안 안 썼는지, 쓴 종이가 어디서 없어졌는지는 모른다. 모르는 것은 모르는 채 둔다. 오래 굳어 있던 붓끝은 첫 획에서 먹을 너무 많이 머금었고, 그렇게 번진 글자로 도독과 함께라고 썼다.

닷새를 가서 나로도와 방답(여수 돌산읍)을 지나 좌수영(여수) 앞바다에 배를 대었다. 다섯 해 전 스물넷을 만들어 내보낸 여수였다. 선창 말뚝은 반쯤 썩어 물이끼를 두르고 있었고, 뭍에서 불어오는 바람에는 밥 짓는 연기 냄새가 한 오라기도 섞여 있지 않았다. 부유창과 순천과 우수영(해남 문내면)에 이어 네 번째로 보는 참담함이었다. 빈 데를 오래 보지 않으려고 삼경(밤 열한 시에서 새벽 한 시 무렵)에 하개도로 옮겼다.

유도는 순천 앞바다의 섬으로, 고니시가 들어앉은 왜교(순천 해룡면 신성리) 성이 건너다보이는 자리였다. 유정이 이미 뭍으로 군사를 내어 물과 뭍에서 끼고 쳤고, 성 위의 깃발들이 자꾸 자리를 바꾸는 것이 배에서도 보였다. 적이 두려워하고 있었다. 수군은 드나들며 포를 쏘았는데, 치고 빠지고 다시 치는 그 방식은 다섯 해 전 웅포(창원 진해구 웅천동 앞 포구)에서 쓰던 것이었다. 포가 울릴 때마다 판옥선 갑판이 발바닥 밑에서 한 번씩 튀어 올랐고, 화약 연기가 매워 사부들이 소매로 눈을 문질렀다. 배가 늘어 이제 열셋은 아니었으나, 몇 척인지는 그날 쓰지 않았다.

*

10월 20일 (9월 21일) 맑음. 아침에 군사를 나아가게 해 종일 싸웠다. 그러나 물이 매우 얕아 다가가 싸울 수 없었다. 남해의 적이 가벼운 배를 타고 들어와 정탐할 때 허사인 등이 쫓았다. 적이 뭍에 내려 산으로 올라갔다. 그 배와 잡물을 빼앗아 곧 도독에게 바쳤다.

10월 21일 (9월 22일) 맑음. 아침에 군사를 나아가게 해 싸웠다. 유격이 왼팔에 탄환을 맞았으나 중상은 아니었다. 명나라 사람 열하나가 탄환에 맞아 죽었다. 지세포(거제 일운면)만호와 옥포(거제 옥포동)만호가 탄환에 맞았다.

물이 얕아서 물때가 이르기 전에는 다가가 싸울 수 없었다. 왜교는 순천 검단산 아래 갯벌 위에 쌓은 성이다. 물이 빠지면 잿빛 뻘이 끝없이 드러나고, 배는 그 뻘에 배를 붙인 채 옴짝달싹 못 한다. 물이 차오르면 노를 저어 들어가고 물이 돌아서면 나왔다. 명량(해남과 진도 사이 울돌목)에서 물때를 셌듯이 여기서도 셌는데, 여기 셈은 훨씬 단순했다. 하루에 물이 두 번 들면 두 번 가고 두 번 나온다. 그것을 종일 되풀이했다. 뻘 냄새가 비리고 무거워서 해가 기울 무렵에는 격군들 옷에도 그 냄새가 배어 있었고, 노를 걷어 올릴 때마다 노깃에서 검은 진흙이 뚝뚝 떨어졌다.

허사인 등이 빼앗은 배와 잡물은 곧 도독에게 바쳤다. 예순아홉을 내준 뒤로는 잡은 것을 다 그쪽으로 보냈다. 주는 것으로 도독의 마음을 붙들어 두는 길이었고, 한번 들어선 길이라 도중에 멈출 수 없었다.

이튿날 명나라 사람 열하나가 죽었다. 유격은 왼팔을 맞았고 지세포만호와 옥포만호도 맞았는데, 일기에는 이름 없이 벼슬만 올렸다. 죽은 명나라 사람 열하나는 이름도 벼슬도 없이 수로만 남았다. 그들은 내 사람이 아니어서 이름을 물을 자리가 없었다. 그 사정을 알았으므로 수만 적었다.

*

10월 29일 (9월 30일) 맑음. 이날 저녁 왕 유격과 복 유격과 이 파총이 배 백여 척을 거느리고 진에 이르렀다. 등불이 휘황했다. 적도들이 반드시 간담이 깨졌을 것이다.

등불이 휘황했다.

명나라 배 백여 척이 밤에 등불을 켜 들고 와서 왜교 앞바다에 늘어섰다. 뱃전마다 매단 등이 물 위에 두 겹으로 비쳐서, 어두운 바다가 한 자쯤 위로 떠오른 것처럼 보였다. 기름 타는 냄새가 바람을 타고 우리 배까지 건너왔다. 다섯 해 전 한산도(통영 한산면)의 밤, 일흔셋이 타오르던 불빛이 떠올랐다. 그 불은 적의 배가 타는 불이었고 오늘 불은 우리 쪽 불이었다. 명나라 배를 우리 쪽이라고 써도 된다. 그날은 우리 쪽이었다.

적도들이 반드시 간담이 깨졌을 것이다. 성벽 뒤에서 적이 무엇을 느꼈는지 나는 모른다. 그런데도 반드시라는 말이 붓에서 먼저 나왔다. 반드시는 아는 사람의 말이 아니라 바라는 사람의 말이다. 백여 척의 등불이면 바랄 만했고, 바라는 말을 종이에 올린 것은 오랜만이었다.

*

11월 1일 (10월 2일) 맑음. 묘시(아침 다섯 시에서 일곱 시 무렵)에 군사를 나아가게 했다. 우리 수군이 먼저 올랐다. 낮까지 싸워 적을 많이 죽였다. 사도첨사가 탄환에 맞아 죽었다. 이청일도 죽었다. 제포(창원 진해구 제덕동)만호 주의수와 사량(통영 사량도)만호 김성옥과 해남현감 유형과 진도군수 선의경과 강진현감 송상보가 탄환에 맞았으나 죽지 않았다.

사도첨사가 죽었는데, 일기에는 그 이름 없이 벼슬만 올렸다.

조카가 뒤에 이름을 넣었다. 황세득, 공의 처종형, 아내의 사촌 형이 탄환을 맞아 싸우다 죽었다.

왜 이름을 안 썼는가. 이름을 쓰면 그는 처종형이 되고, 처종형 앞에서 붓을 든 사람은 통제사가 아니라 아내의 친척이 된다. 그래서 사도첨사라는 벼슬로 썼다. 조카는 통제사가 아니었으니 이름을 넣어도 되었다. 여러 장수가 장막으로 들어와 조문하며, 세득이 나랏일에 죽었으니 그 죽음이 영광이라고 했다. 장막 안에는 젖은 갑옷에서 나는 쇠 냄새가 채 가시지 않았고, 초가 한쪽으로만 녹아 촛농이 길게 흘러내렸다. 그 말에 무엇이라고 답했는지는 어디에도 없다. 답이 없는 자리가 답이었다.

우리 수군이 먼저 올랐다. 백여 척의 등불보다 우리가 먼저 갔고, 먼저 간 자리에서 사도첨사가 죽었다. 앞장서면 죽는 사람이 나온다. 다섯 해 동안 앞장섰고 오늘도 앞장섰는데, 오늘 나온 사람이 처종형이었다. 그를 벼슬 넉 자로 썼다. 붓을 내려놓고 보니 손가락 마디에 묻은 먹이 물에 헹궈도 잘 빠지지 않았다.

맞았으나 죽지 않은 다섯은 이름을 다 적었다. 주의수, 김성옥, 유형, 선의경, 송상보. 산 사람은 이름으로 쓰고 죽은 사람은 벼슬로 썼다. 그날 하루만 그런 법을 두었다.

*

11월 2일 (10월 3일) 맑음. 도독이 유 제독의 밀서에 따라 초저녁에 나아가 싸웠다. 삼경까지 사선 열아홉 척과 호선 스무여 척이 불탔다. 도독이 거꾸러진 것을 말로 할 수 없다. 안골만호 우수가 탄환에 맞았다.

사선 열아홉 척이 걸렸다.

갯벌에 걸린 일은 조카가 적었다. 물이 빠지는 것을 보고 공이 도독에게 우선 배를 돌리라고 했으나 도독은 듣지 않았다. 과연 사선 열아홉이 얕은 만에 배를 얹었고, 적이 뻘을 밟고 몰려와 에워쌌다. 그 밤의 뻘은 불빛을 받아 번들거렸고, 걸린 배들의 용골이 한쪽으로 기울며 삐걱거리는 소리가 물 건너까지 들렸다.

공이 앉아서 볼 수 없다며 배 일곱에 싸울 도구와 무사를 많이 싣고 장수를 골라 보내면서 경계해 말했다. 적이 걸린 배를 보면 반드시 틈을 타서 함께 잡으려 한다. 너희는 다만 힘써 싸워 스스로 보전하라. 물이 이르면 곧 돌아오라. 물이 오면 돌아오고 물이 안 오면 버틴다는, 물때가 시킨 말이었다. 일곱은 명대로 해서 다 온전히 돌아왔다. 걸린 사선은 다 무찔러졌다.

도독이 거꾸러진 것을 말로 할 수 없었다. 집을 헐 때 거꾸러지며 달려오던 그 사람이, 이번에는 제 배 열아홉 때문에 뱃전을 붙잡고 무너졌다. 사선 열아홉에 호선 스무여, 마흔 가까운 배가 하룻밤에 불탔다. 남의 배까지 헤아려 두는 것이 통제사의 일인데, 도독은 제 배도 헤아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헤아리지 않아서 걸렸다. 원균이 물과 뭍을 헤아리지 않고 칠천량(거제 하청면 칠천도 앞)에 배를 댄 것과 같은 일을 명나라 도독이 했고, 나는 그것을 곁에서 보았다. 보자마자 일곱을 냈다. 날이 밝을 무렵 돌아오는 돛을 하나씩 헤아렸고, 일곱째 돛이 물목을 돌아 나올 때까지 뱃전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

11월 5일 (10월 6일) 맑음. 서풍이 크게 붊. 도원수가 군관을 보내 글을 전했다. 유 제독이 달아나 물러나려 한다. 통분하고 통분하다.

11월 8일 (10월 9일) 육병이 이미 물러갔다. 그래서 도독과 함께 배를 거느리고 해안정에 이르렀다.

11월 11일 (10월 12일) 나로도에 이르렀다.

명나라 육군 유 제독은 묘병 만오천을 이끌고 왜교 북쪽에 진을 치고 있었다. 도원수의 글에서 달아나 물러나려 한다는 글자를 읽고, 유정이 발을 빼려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날은 서풍이 크게 불어 장막 자락이 쉬지 않고 기둥을 때렸고, 글을 펼쳐 든 손끝에서 종이가 자꾸 뒤집혔다.

통분하고 통분하다. 다섯 해 만에 명나라 장수에게 그 말을 다시 썼는데, 이번에는 우리 편이라고 써야 하는 사람에게 썼다.

사흘 뒤 육병이 물러갔다. 뭍이 빠지면 물과 뭍에서 끼고 치는 싸움은 끝나고, 갯벌 위의 왜교는 물만으로는 닿지 않는다. 그래서 물러났다. 해안정과 좌수영과 나로도, 온 길을 열흘 만에 되짚어 갔다. 노를 저어 나아가는 동안 뒤로 멀어지는 검단산이 한참이나 같은 크기로 따라왔다.

갯벌 위 왜교에는 아직 고니시가 있었다. 못 잡았다는 말 대신 나로도에 이르렀다는 넉 자만 남겼다. 그 넉 자 뒤로 붓이 다시 끊겨, 열사흘부터 11월 초이레까지 일기가 없다. 없는 동안의 일은 조카가 채웠다. 붙잡혔다 도망해 온 변경남이 와서 말하기를, 지난 8월 일본에서 나올 때 적의 우두머리 히데요시가 이미 죽었고, 여러 우두머리가 서로 서려고 다투어 정하지 못해 적들이 물러가기에 급하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날이 11월 6일이다. 나는 그날 일기를 쓰지 않았다. 들었을 때 무엇을 썼을지 지어내지 않고, 대신 하나만 둔다. 여섯 해 전 배 칠백을 바다에 띄운 사람, 코를 되로 세라고 한 사람이 죽었고, 그 죽음을 도망쳐 온 사람의 입이 전했다. 전해진 날 통제사가 종이에 남긴 것은 없다. 있는 날과 없는 날을 다 두는 것이 이 종이가 하는 일이다.

사료 · 9월 15일 「진 도독과 함께 한꺼번에 군사를 움직여 나로도에 이르렀다」, 19일 좌수영 앞바다 「보기에 참담했다」, 20일 유도에서 유 제독과 「물과 뭍에서 끼고 치니 적의 기세가 크게 꺾였다」, 「수군이 드나들며 포를 쏘았다」 ― 난중일기 무술년 9월 15~20일(전서본) · 9월 21일 「물이 매우 얕아 다가가 싸울 수 없었다」, 빼앗은 배를 곧 도독에게 바친 것, 22일 유격의 왼팔과 「명나라 사람 열하나가 탄환에 맞아 죽었다」 ― 난중일기 9월 21~22일 · 9월 30일 명나라 배 백여 척이 와서 「등불이 휘황했다. 적도들이 반드시 간담이 깨졌을 것이다」 ― 난중일기 9월 30일 · 10월 2일 「우리 수군이 먼저 올라 낮까지 싸워 적을 많이 죽였다. 사도첨사가 탄환에 맞아 죽었다」, 주의수·김성옥·유형·선의경·송상보 ― 난중일기 10월 2일. 「사도첨사 황세득은 공의 처종형이다. 여러 장수가 조문하며 세득이 나랏일에 죽었으니 그 죽음이 영광이라고 했다」 ― 이분, 이충무공행록 · 10월 3일 「도독이 유 제독의 밀서에 따라 초저녁에 나아가 삼경까지 싸워 사선 열아홉 척과 호선 스무여 척이 불탔다. 도독이 거꾸러진 것을 말로 할 수 없다」 ― 난중일기 10월 3일. 「공이 물이 빠지는 것을 보고 도독에게 배를 돌리라 했으나 듣지 않아 사선 열아홉이 얕은 만에 걸리자 앉아서 볼 수 없다며 배 일곱을 보내 물이 이르면 돌아오라 하니 일곱이 다 온전히 돌아왔다」 ― 행록 · 10월 6일 「유 제독이 달아나 물러나려 한다. 통분하고 통분하다」, 9일 「육병이 이미 물러갔다」, 12일 「나로도에 이르렀다」 ― 난중일기 10월 6~12일. 10월 13일부터 11월 7일까지 일기가 없다 · 11월 6일 변경남이 「지난 8월 일본에서 나올 때 히데요시가 이미 죽었고 여러 우두머리가 서로 서려고 다투어 정하지 못해 적들이 물러가기에 급하다」고 한 것 ― 행록 · 「네 번 참담했다」, 명나라 사람을 수만 센 까닭, 「산 사람은 이름, 죽은 사람은 벼슬」, 도독을 원균에 견준 것은 지어냈다 · 이 회차는 이순신의 1인칭이다 · 양력 날짜 ― 한국천문연구원 음양력 변환. 무술년 9월 15일은 양력 10월 14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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