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6,017자) · 1597년 9월 26일, 남원
코
이순신 · 네오
1597년 9월 26일 (음력 8월 16일) 이날 이순신은 장흥 군영구미에 있었다. 이틀 뒤 회령포(장흥 회진)에서 배 열둘을 보았다. 같은 날 새벽에 남원성이 떨어졌다. 이 회차는 남원이다.
달이 낮 같았다.
8월 보름이었다. 한가위 달이 남원 들판 위로 둥글게 떠올라 성벽의 돌 틈과 해자의 물과 논에 선 벼 이삭까지 하나하나 비추었다. 벼는 한창 고개를 숙이는 중이었다. 이슬 내린 이삭이 달빛을 받아 은빛으로 떨렸고, 논둑 풀숲에서는 풀벌레가 쉬지 않고 울었다. 그 달 아래 남원성이 있었다.
명나라 총병 양원이 지키는 성이었다. 그는 성을 한 길 더 쌓아 올리고, 성 밖에는 말이 넘지 못하게 나무 울타리를 세운 양마장을 둘렀다. 성벽에 포 구멍을 뚫고 해자를 한두 길 깊이로 팠다. 성 안에는 요동 마군 삼천이 있었다. 전라병사 이복남이 겨우 수백을 데리고 들어왔고, 광양현감 이춘원과 조방장 김경로가 그 뒤를 따랐다. 좁은 성 안 골목마다 요동 말이 매여 있었다. 밤이면 말들이 발굽으로 돌바닥을 긁는 소리와 말똥 냄새가 골목을 채웠고, 성 위에 선 군사들은 창자루를 무릎 사이에 세운 채 졸다가 깼다.
밖에는 오만이 있었다. 대장은 우키타 히데이에, 선봉은 고니시였고, 시마즈와 하치스카와 조소카베와 가토 요시아키가 그 아래 진을 쳤다. 칠천량(거제 하청면 칠천도 앞)에서 조선 수군을 깨뜨린 자들이 뭍으로 올라와 곧장 남원까지 왔다. 한산이 무너지고 열흘 만이었다. 들판 곳곳에 그들의 화톳불이 별처럼 흩어져 있었다. 밤바람이 불 때마다 그 불들이 한꺼번에 흔들렸다.
*
풀을 베었다.
15일 낮에 왜가 성 밖의 잡초와 논의 벼를 셀 수 없이 베었다. 낫질 소리가 성벽 아래에서 하루 종일 사각거렸고, 벤 것은 큰 다발로 묶여 담과 벽 사이에 쌓였다. 성 위에서 내려다보는 사람들은 그것이 무엇에 쓰일지 헤아리지 못했다. 익어 가는 벼였다. 먹으려고 벤 것이 아니었다. 볏단에서는 풋내와 흙냄새가 났다. 성 위까지 그 냄새가 올라왔다.
밤 일경(저녁 일곱 시에서 아홉 시 무렵)에 왜 진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크게 일었다. 무언가를 줄지어 나르는 소리 같았다. 그와 함께 여러 포가 성을 향해 어지러이 불을 뿜었고, 탄환이 성 위로 비와 우박처럼 쏟아졌다. 여장의 돌이 튀어 얼굴을 때렸다. 성 위 사람들은 목을 움츠린 채 밖을 엿보지 못했다. 매운 화약 연기가 달을 가렸다가 걷히기를 되풀이했다. 귀가 먹먹해서, 옆 사람이 무어라 소리쳐도 입 모양만 보였다.
한두 시각 뒤 소리가 멎었다. 사람들이 고개를 들었을 때 풀 다발은 이미 해자를 메우고 양마장 안팎에 쌓여 성벽과 높이가 나란했다. 해자에 찰랑이던 물 위로 누런 볏단이 둑처럼 솟아 있었다. 왜들이 그 볏단을 짓밟고 성에 올랐다. 젖은 볏단은 밟히면서 발목까지 푹푹 꺼졌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사다리가 성가퀴에 걸리는 소리가 잇달아 났다.
김효의가 그것을 보았다. 화약과 포를 다루는 군기시 파진군으로, 양원을 따라 남원에 들어간 열두 사람 가운데 혼자 살아남은 사람이다. 그는 살아서 한양으로 올라가 류성룡에게 그 밤을 말했다. 그 밤 그의 옷에는 화약 그을음이 배어 있었을 것이고, 그 냄새는 한양까지 가는 길에도 빠지지 않았을 것이다. 남원의 마지막 밤은 김효의의 눈으로 본다. 열둘 가운데 남은 하나의 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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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문.
성 안 곳곳에서 불길이 일었다. 초가지붕이 타면서 콩 볶듯 튀었고, 불티가 달빛 속으로 날아올랐다. 명나라 군사가 모두 말을 타고 문을 나가려 했다. 그러나 문이 굳게 닫혀 쉽게 열리지 않았고, 좁은 길에 사람과 말이 뒤엉켜 말 발이 묶인 것처럼 길이 메워졌다. 말들이 울며 앞발을 들었다. 마침내 문이 열리자 군사와 말이 서로 먼저 나가려고 문을 다투었다. 문턱에 걸려 넘어진 사람 위로 말굽이 지나갔다. 비명과 말 울음이 성문 안 좁은 통로에서 부딪쳐 한 덩어리로 울렸다.
왜는 성 밖에 두세 겹으로 둘러서서 요긴한 길목마다 지키고 있었다. 긴 칼이 달빛에 번쩍이며 어지러이 내려왔다. 명나라 군사는 머리를 숙이고 칼을 받았다. 쇠가 뼈에 닿는 둔한 소리가 성문 밖 여기저기서 났다. 달이 밝아서 벗어난 사람이 거의 없었다. 낮 같은 달이 사람을 하나도 숨겨 주지 않았다. 논둑으로 달아나던 그림자가 달빛에 길게 누웠고, 그 그림자를 따라 칼이 왔다.
양원은 가정 몇을 데리고 말을 달려 포위를 뚫고, 겨우 몸만 빠져나갔다. 왜가 그를 총병인 줄 알고 일부러 놓아주었다는 말이 돌았다. 그렇게 살아 나간 사람을 명나라 황제가 뒤에 죽여 그 목을 돌렸다.
이복남이 죽었다. 임현이 죽고 김경로가 죽고 이춘원이 죽었으며, 명나라 장수를 맞아 모시던 접반사 정기원도 죽었다. 이복남은 얼마 전 부유창에 불을 지르고 순천 창고를 버리고 물러나, 통제사가 탄식할 만하다고 일기에 쓴 사람이었다. 그 사람이 겨우 수백을 데리고 남원에 들어와 성과 함께 죽었다. 물러났던 사람이 이번에는 물러나지 않았다. 성이 떨어지던 밤, 불타는 성 안 어디에서 그가 쓰러졌는지는 아무도 적지 않았다. 탄식과 죽음을 나란히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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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을 가져가지 않았다.
와키자카 집안의 기록은 그 밤을 이렇게 남겼다. 벤 적이 이천쯤이었고, 그 가운데 야스하루의 몫이 오백여였다. 그 뒤로 열흘 넘게 산과 마을을 뒤져 모조리 베었는데, 쓰다듬듯이 베었다. 그리고 한 줄이 더 붙어 있다. 목은 가져가지 않고 코를 베어 목의 수로 셈했다. 이때 야스하루의 목 수가 이천여였다.
목은 무겁다. 한 사람이 서넛만 들어도 팔이 빠진다. 코는 가볍다. 가벼운 것을 소금에 절여 통에 담고 배에 실어 바다 건너 히데요시에게 보냈다. 통마다 굵은 소금이 켜켜이 부어졌고, 뚜껑을 덮기 전에 숫자를 적은 종이가 얹혔다. 히데요시가 그것을 세어 상을 주었다. 야스하루는 삼천 석을 더 받았다. 코 이천여가 쌀 삼천 석이 되었다.
정한위략은 같은 밤을 다르게 그린다. 도도 다카토라가 먼저 성에 올라 목 이백육십구를 얻었다. 그의 군사 이소자키 이에노부는 열네 살에 붉은 옷 입은 장수를 잡았다. 히데이에와 고니시가 삼천여 급을 베었다. 시마즈는 산 아래로 달아나는 성병을 쳐서 사백이십여를 베었고, 나무에 올라 숨은 사람 하나를 손수 총으로 쏘아 죽였다. 달빛 아래 나뭇잎 사이로 옷자락이 희끗 비쳤을 것이다. 그 집안은 그 한 발을 자랑으로 남겼다. 자랑으로 쓰인 것이 이 종이에 오면 자랑이 아니게 된다. 오게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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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남이 적었다.
남원에서 태어난 사람이다. 그는 뒤에 히데요시의 명령을 이렇게 옮겨 두었다. 처음 군사를 보낼 때 히데요시가 말했다. 해마다 군사를 보내 그 나라 사람을 다 죽여 빈 땅을 만든 뒤에 일본 서쪽 사람을 옮겨 살게 할 것이니, 십 년을 하면 된다. 다만 사람은 귀가 둘이고 코는 하나니 코를 베어 한 사람 죽인 표시로 바치고, 각기 코를 한 되씩 채운 뒤에야 산 채로 잡는 것을 허락한다.
쌀을 되던 그 되에 코를 담았다.
그래서 이번에 건너온 왜는 사람만 보면 죽이건 안 죽이건 번번이 코를 베었다. 산 사람의 코도 되에 들어갔고, 되가 찼다. 그 뒤 수십 년 동안 이 나라 길에서 코 없는 사람을 매우 많이 볼 수 있었다. 조경남은 자기 고을 길에서 그 얼굴들을 수십 년 동안 마주쳤다. 장터에서도 나루에서도 논둑에서도, 얼굴 한가운데가 움푹 꺼진 사람들이 숨을 쉴 때마다 쌕쌕 바람 새는 소리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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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코가 어디로 갔는가. 소금 통에 담겨 배 밑창에 실렸다. 뱃길 내내 통 속에서 소금물이 출렁였을 것이다. 배가 파도를 넘을 때마다 통을 묶은 새끼줄이 삐걱거렸고, 배 밑창에는 소금과 피가 섞인 비린내가 고였을 것이다. 바다를 건너 히데요시 앞에 놓였고, 히데요시는 되로 세어 석으로 바꾸어 상을 내렸다. 되에서 석으로, 코가 쌀이 되었다. 소금에 절인 살은 쌀 몇 톨보다도 가벼웠다. 셈은 어디에나 있다. 통제사는 배를 척으로 세었고 히데요시는 코를 되로 세었다. 무엇을 세는가가 사람을 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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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 없는 사람이 길을 걸었다.
조경남은 이름을 남기지 않았다. 너무 많았다. 많은 사람은 이름이 없다. 여기 한 사람을 지어서 둔다. 지어야 하는 것이 있다.
남원 사람이다. 열여섯, 벼를 베던 아이였다. 제 논의 벼를 왜가 베어 다발로 묶는 것을 보고 산으로 달아났다. 바위 밑에서 도토리를 씹고 풀잎의 이슬을 핥으며 열흘을 버텼고, 열흘째 되는 날 잡혔다. 죽이지는 않았다. 되를 채우려고 코만 베었다. 칼날이 차가웠다는 것밖에 아이는 기억하지 못했다. 피가 입으로 흘러 들어와 쇠 맛이 났다. 제 얼굴이 어떻게 되었는지 안 것은 며칠 뒤 골짜기 물에 얼굴을 비췄을 때였다. 물이 그것을 보여 주었다. 아이는 물에 손을 넣어 제 얼굴을 흩뜨렸다. 물결이 가라앉자 얼굴이 다시 떠올랐다.
그 사람은 뒤에 남원 길을 걸었다. 조경남이 본 그 길을 수십 년 동안 코 없는 얼굴로 걸으며 밥을 먹고 아이를 낳고 벼를 베었다. 가을마다 낫을 들면 볏단으로 해자를 메우던 그 밤이 손끝에 먼저 왔다. 낫이 벼 밑동을 끊을 때 나는 사각 소리가 그해 성벽 아래서 하루 종일 나던 소리와 같았다. 그 사람은 벼를 베다가 가끔 허리를 펴고 오래 서 있었다. 그 생각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말하면 사람들이 코를 보고, 코를 보면 되를 보고, 되를 보면 바다 건너를 본다.
그 사람의 코가 어디 있는지는 모른다. 소금에 절여 바다를 건너, 교토 어딘가 사람들이 귀 무덤이라 부르는 코 무덤에 묻혔을 것이다. 그 사람은 그것을 몰랐다. 몰라도 거기 있었다. 코는 바다 건너에 있고 얼굴은 남원에 있었다. 둘로 나뉜 채 둘 다 있었다. 있는 것을 없다고 하지 않는 것, 이 종이는 그 일을 한다.
같은 날 이순신은 배 열둘을 세러 가고 있었다. 그가 척으로 세러 가는 동안 남원에서는 되로 세었다. 같은 날을 둘로 쓴다. 둘 다 그날이다.
사료 · 8월 13일 왜 선봉 백여가 남원성 아래 이르고, 14일 성 삼면을 둘러싸고, 15일 성 밖 잡초와 논의 벼를 베어 큰 다발로 쌓고, 밤 일경에 포를 어지러이 쏘아 풀 다발로 해자를 메우고 양마장 안팎에 쌓아 성과 나란해져 짓밟고 오른 것, 북문에서 「말 발이 묶인 것 같고 길이 메워지고」 왜가 두세 겹 둘러싸 긴 칼로 베어 「머리를 숙이고 칼을 받았다」, 「달이 밝아 벗어난 사람이 거의 없었다」, 양원이 겨우 몸만 빠져나간 것과 「왜가 총병인 줄 알고 일부러 놓아주었다」는 말, 이복남·임현·김경로·이춘원·정기원의 죽음, 양원을 따라 들어간 파진군 열둘 가운데 김효의 혼자 살아 성이 떨어진 일을 자세히 말한 것, 양원이 뒤에 죄를 받아 목이 돌려진 것 ― 류성룡, 징비록 권2 · 「15일 밤 달이 낮 같아 다카토라와 야스하루가 새벽까지 기다리지 말고 달빛을 타고 먼저 치기로 한」 것, 도도 다카토라가 먼저 올라 목 이백육십구, 열네 살 이소자키 이에노부가 붉은 옷 장수를 잡은 것, 히데이에·고니시의 삼천여 급, 시마즈가 산 아래에서 사백이십여를 베고 「나무에 올라 숨은 사람 하나를 손수 총으로 쏘아 죽인」 것, 야스하루의 이천여 ― 가와구치 조주, 정한위략 권5(1831). 우키타 히데이에·고니시·시마즈·하치스카·조소카베·가토 요시아키의 오만이 남원으로 향한 것 ― 같은 책 · 「목은 가져가지 않고 코를 베어 목의 수로 셈했다. 이때 야스하루의 목 수가 이천여였다」, 야스하루 몫 오백여, 「열흘 넘게 산과 마을을 뒤져 모조리 베었다」 ― 협판가전기(사적집람 15). 이 책은 남원을 사문이라 잘못 적고 날짜를 9월 15일로 적는다 · 「사람은 귀가 둘이고 코는 하나니 코를 베어 한 사람 죽인 표시로 바치고 각기 코를 한 되씩 채운 뒤에야 산 채로 잡는 것을 허락한다」는 히데요시의 명, 「죽이건 안 죽이건 번번이 코를 베어 그 뒤 수십 년간 이 나라 길에서 코 없는 사람을 매우 많이 볼 수 있었다」 ― 조경남, 난중잡록 정유년 7월(국역) · 열여섯 살 남원 사람과 물에 비친 얼굴, 교토의 코 무덤에 그 코가 있으리라는 것은 지어냈다. 코를 소금에 절여 보낸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 이 회차는 3인칭이다. 김효의의 눈과 두 나라의 기록과 지어낸 한 사람으로 썼다 · 양력 날짜 ― 한국천문연구원 음양력 변환. 정유년 8월 16일은 양력 9월 26일이다. 이순신은 8월 17일 군영구미, 18일 회령포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