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6,465자) · 1597년 11월 24일~1598년 1월 12일, 우수영에서 보화도까지
흰 띠
이순신 · 네오
1597년 11월 24일 (음력 10월 16일) 맑음. 우수사와 미조항첨사를 해남으로 보냈다. 해남현감 유형도 보냈다. 나는 내일이 막내아들의 부음을 들은 지 나흘째 되는 날이라 마음대로 통곡할 수 없어 영 안의 강막지의 집에 갔다. 이경(밤 아홉 시에서 열한 시 무렵)에 순천부사와 우후 이정충과 김갑과 제포(창원 진해구 제덕동) 등이 해남에서 돌아왔다. 적의 머리 열셋과 적에게 들어간 송언봉 등을 베어 왔다.
11월 25일 (10월 17일) 맑음. 새벽에 아들을 곡하고 상복을 입었다. 슬프고 아픈 것을 어찌 견디랴. 우수사가 와서 보았다.
마음대로 통곡할 수 없었다.
배 위에서 통제사가 아들을 두고 울면 열셋이 보았다. 보면 흔들렸다. 그래서 배에서는 참았고, 참다 못해 뭍으로 올랐다. 영 안에서 소금 굽는 강막지의 집이었다. 처마가 낮아 허리를 굽히고 들어갔는데, 부엌 가마에서 바닷물 졸이는 짠 김이 방 안까지 배어 있었다. 벽에 걸린 소금 자루 밑으로 간수가 떨어져 흙바닥에 검은 점을 찍었다. 통제사가 울 자리를 찾아간 곳이 소금 굽는 사람의 집이었다.
그날 이경(밤 아홉 시에서 열한 시 무렵)에 순천부사 우치적과 우후 이정충과 김갑과 제포(창원 진해구 제덕동)가 해남에서 돌아왔다. 적의 머리 열셋과 적에게 들어간 송언봉 등의 목을 가져왔다. 횃불 아래 목들이 선창 판자 위에 줄지어 놓였다. 피는 이미 검게 굳었고, 풀린 상투에서 흘러내린 머리칼이 판자 틈에 끼어 있었다. 왜를 이끌던 아전의 얼굴은 여느 아전의 얼굴과 다르지 않았다. 하필 마음 놓고 울지도 못하는 날에 그 목이 왔다.
이튿날 새벽에 아들을 곡했다. 향을 피우자 연기가 낮은 천장에 닿아 옆으로 퍼지며 소금 냄새와 섞였다. 상복을 입고 흰 띠를 둘렀다. 어머니의 상복 위에 아들의 띠가 얹혔다. 한 몸에 두 상을 두른 채 나는 배로 돌아갔다. 슬프고 아픈 것을 어찌 견디랴. 초고에는 그 말을 두 번 썼다. 어찌 견디랴, 어찌 견디랴.
목이 온 밤과 곡한 새벽이 이틀에 걸쳐 있었다. 나는 그 이틀을 한 장에 이어서 썼다.
*
11월 28일 (10월 20일) 맑음. 미조항첨사와 해남과 강진현감이 해남 군량을 실어 오는 일로 고하고 돌아갔다. 안골만호 우수도 고하고 돌아갔다. 늦게 김종려와 정수와 백진남이 와서 보았다. 김종려를 소음도 등 열세 섬의 소금 굽는 데를 감독하는 도감검으로 정해 보냈다.
소금부터 정했다.
김종려를 불러 소음도를 비롯한 열세 섬의 소금 굽는 데를 맡겼다. 소금 가마를 감독하는 도감검 자리였다. 배도 열셋이고 섬도 열셋이었지만 그것은 우연이었다.
겨울이 오는데 곡식이 없었다. 소금은 있었다. 바닷물은 끝이 없고, 갯가에 가마를 걸고 불만 지피면 솥 바닥에 하얀 것이 앉았다. 손가락으로 긁으면 모래처럼 서걱거리는 그것을 뭍으로 지고 가면 곡식과 바꿀 수 있었다. 이항복은 뒤에 그 소금으로 두 달 만에 곡식 수만 석을 얻었다고 썼다.
그 두 달의 셈을 나는 흰 띠를 두른 채 했다. 마음은 죽고 몸만 남았다고 쓴 지 엿새 만이었다. 몸이 남아서, 남은 몸이 셈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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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9일 (10월 21일) 비가 오다 눈이 오다 함. 바람이 몹시 참. 뱃사람들이 추위에 얼까 걱정되어 마음을 정할 수 없었다. 무안현감 남언상이 들어왔다. 언상은 본래 수군에 속한 벼슬인데 제 몸을 보전하려는 셈으로 수군에 오지 않고 산골에 숨은 지 이미 한 달 남짓이다. 적이 물러간 뒤에 무거운 벌을 받을까 두려워 비로소 와서 보였다. 그 정상이 지극히 놀랄 만하다.
뱃사람들이 얼까 걱정이었다.
비가 오다 눈이 오다 했고 바람이 몹시 찼다. 진눈깨비가 뜸 지붕 위에 쌓였다가 녹아 틈으로 떨어졌고, 배 밑 노 자리에는 발목까지 찬물이 고였다. 격군들은 맨발에 짚을 감고 노를 잡았다. 손등이 붉게 부르터서 갈라진 틈마다 피가 비쳤고, 판자 위에 내린 눈은 녹지 않고 하얗게 남았다. 옷이 없었고 옷을 구할 데도 없었다.
소금이 곡식이 되고 곡식이 솜옷이 되려면 두 달이 걸린다. 그 두 달 동안 사람이 언다. 마음을 정할 수 없었다. 그날 일기에 그렇게 썼다. 정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 정할 수 없다고 쓰는 것도 하나의 정함이었다.
그날 무안현감 남언상이 들어왔다. 본래 수군에 딸린 벼슬인데, 제 몸을 보전하려고 수군에 오지 않고 산골에 숨은 지 한 달이 넘은 사람이었다. 적이 물러가자 무거운 벌이 두려워 그제야 얼굴을 내밀었다. 도포 자락에 산길의 도깨비바늘이 잔뜩 붙어 있었다. 그 정상이 지극히 놀랄 만했다.
다섯 해 동안 이런 사람을 여럿 보았는데도 나는 또 놀랐다. 놀라기를 그만두면 잡을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이튿날 그를 가리포(완도) 전선에 가두었다.
*
12월 8일 (10월 30일) 맑음. 아침에 집 짓는 데 내려가 앉았다. 여러 장수가 와서 뵈었다. 해남현감도 와서 적에게 붙은 사람들이 한 짓을 전했다. 황득중을 섬 북쪽 봉우리에 보내 집 지을 재목을 베어 오게 했다. 늦게 해남에서 적에게 붙은 정은부와 김신웅과 왜에게 우리 사람을 죽이라고 가리킨 자 둘과 사족 처녀를 빼앗아 욕보인 김애남을 아울러 목을 베었다.
12월 14일 (11월 6일) 맑음. 일찍 새 집 짓는 데 올라가 종일 서성거렸다. 해 지는 줄 몰랐다.
보화도로 갔다.
보화도(목포 고하도)는 목포 앞에서 서북풍을 막아 주는 섬이었다. 배를 감추기에 매우 알맞았고, 뭍에 내려 섬 안을 돌아보니 형세가 많았다. 발음도는 동쪽을 못 봐서 버렸다. 여기는 됐다. 됐다고 정하고 집을 짓기 시작했다.
다섯 달 동안 배에서 잤다. 배에서 겨울을 나면 격군이 언다. 배보다 집이 먼저였다. 아침에 집 짓는 데로 내려가 앉자 여러 장수가 와서 뵈었고, 해남현감은 적에게 붙은 사람들이 한 짓을 낱낱이 전했다. 황득중을 섬 북쪽 봉우리로 보내 재목을 베어 오게 했다. 다섯 해 전 여수에서 배 만들 나무를 베던 일과 같았다. 이번에는 집이었다. 집이 있어야 배를 만든다.
그날 늦게 해남에서 적에게 붙은 정은부와 김신웅, 왜에게 우리 사람을 죽이라고 가리킨 자 둘, 사족 처녀를 빼앗아 욕보인 김애남을 아울러 베었다. 망치 소리가 나는 터 옆에서 칼이 내려갔다. 짓는 날과 베는 날이 같은 날이었다. 통제사는 둘 다 한다.
엿새 뒤 새 집 짓는 데 올라가 종일 서성거렸다. 나무를 자르고 세우고 얽는 것을 보았다. 갓 벤 소나무에서 송진 냄새가 진하게 났고, 그 냄새가 찬바람에 실려 몇 번이고 코끝에 닿았다. 도끼 소리가 봉우리 쪽에서 낮게 울려 돌아왔다. 기둥 하나를 세울 때마다 새끼줄을 당기는 사람들의 입김이 한꺼번에 하얗게 올랐다. 해 지는 줄 몰랐다.
아들이 죽은 지 스무 날이 넘었다. 나무를 보는 동안에는 아들이 없었고, 그 동안이 종일이었다. 일기에는 해 지는 줄 몰랐다고만 썼다. 나머지는 쓰지 않았다.
*
12월 24일 (11월 16일) 맑음. 군공 마련기를 보니 안위가 통정이 되었다. 그 나머지도 차례로 벼슬을 받았다. 은자 스무 냥을 천한 신에게 상으로 내렸다. 명나라 장수 양 경리가 붉은 비단 한 필을 보내며 배에 붉은 비단을 걸고 싶으나 멀어서 못 한다고 했다.
안위가 통정이 되었다.
군공 마련기, 곧 공을 따져 상을 매긴 문서가 내려왔다. 통정대부는 정삼품 당상이다. 명량에서 내가 두 번 이름을 불러 앞으로 내세운 사람이 당상관이 되었다. 나머지도 차례로 벼슬을 받았다. 목을 베려다 먼저 공을 세우라고 미뤄 둔 김응함의 이름도 그 안 어디쯤 있었을 것이다.
천한 신에게는 은자 스무 냥이 내려왔다. 손바닥에 올린 은은 생각보다 무거웠고 차가웠다. 열셋으로 백서른셋을 막은 값이었다.
명나라 장수 양 경리는 붉은 비단 한 필을 보내왔다. 배에 붉은 비단을 걸어 주고 싶으나 멀어서 못 한다는 말이 함께 왔다. 기름종이를 벗기자 붉은빛이 겨울 햇빛을 받아 눈을 찔렀다. 나는 그것을 다시 접었다. 상복 입은 사람의 배에 붉은 것은 걸지 않는다. 비단은 궤 밑바닥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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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8년 1월 12일 (정유년 12월 5일) 맑음. 군공을 세운 장수들에게 상직첩을 나누어 주었다. 도원수 군관이 유지를 가지고 왔다. 이제 선전관을 통해 통제사 이순신이 아직 권도를 따르지 않아 여러 장수가 민망히 여긴다고 들었다. 사사로운 정이 비록 간절하나 나랏일이 바야흐로 급하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싸움터에서 용맹이 없으면 효가 아니라고 했다. 싸움터의 용맹은 소찬만 먹어 기력이 곤한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에는 경도와 권도가 있으니 늘 하던 제도를 굳게 지킬 수 없다. 경은 내 뜻을 깊이 알아 소찬을 그만두고 권도를 따르라. 아울러 권도의 물건을 내렸다. 더욱 감격하고 애통하다. 감격하고 애통하다.
권도를 따르라.
상중에는 고기를 먹지 않는다. 어머니의 상이 여덟 달, 아들의 상이 두 달이었다. 그동안 나는 채소만 먹었다. 소찬이 길어지자 무릎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고, 밤마다 헛땀이 속옷을 적셨다. 장수들이 그것을 민망히 여겼다. 그 말이 선전관을 거쳐 한양으로 올라가 임금의 귀에 닿았다.
도원수의 군관이 유지를 가지고 왔다. 싸움터에서 용맹이 없으면 효가 아니라고 했다. 소찬만 먹어 기력이 곤한 사람은 싸움터의 용맹을 낼 수 없다고 했다. 예에는 늘 지키는 경도와 때에 따라 하는 권도가 있으니, 지금은 소찬을 그만두고 권도를 따르라고 했다. 권도의 물건이 함께 왔다. 짚으로 싼 꾸러미에서 기름 냄새가 올라왔다. 고기였다. 임금이 신하에게 고기를 보냈다.
더욱 감격하고 애통했다. 감격하고 애통했다. 같은 말을 두 번 썼다. 임금이 신하의 밥상까지 걱정한 것이 감격이었고, 어머니와 아들을 두고 고기를 먹으라는 말이 애통이었다. 두 마음이 한 줄에 겹쳐서 두 번 나왔다.
먹었는지는 일기에 없다. 없는 것을 지어내지 않는다. 조카도 공이 비통함을 그치지 않았다고만 남겼다. 임금의 명이었으니 먹었을 것이다. 통제사가 곤하면 열셋이 곤하다는 것을 임금이 헤아렸고, 신하는 그 헤아림을 따른다. 흰 띠를 두른 채 고기를 씹는 사람, 그 겨울의 통제사가 그랬을 것이다.
*
보화도의 겨울.
집이 섰고 배가 늘었다. 나는 배 만드는 조선처에 나가 앉았다. 대패가 판자를 밀고 지나갈 때마다 얇은 대팻밥이 둘둘 말려 발치에 쌓였고, 판자 이음새에 붓는 뜨거운 송진 냄새가 추위 속에서 맵게 퍼졌다.
영암군수가 밥 서른 말을 지어 역군을 먹이고 군량미 이백 석과 벼 칠백 석을 마련했다. 해남 의병이 왜의 머리 하나와 환도 하나를 바쳤다. 무안 진사는 벼 열닷 섬을 싣고 왔다. 다 세었다. 세어졌다. 세는 것이 날마다 늘었다.
아들 셋 가운데 하나가 없었다. 그것은 세지 않았다. 세는 것이 늘어도 세지 않는 것 하나는 남아 있어야 했다. 흰 띠가 그 자리를 지켰다. 흰 띠를 두르고 조선처에 앉아 있는 사람을, 그 겨울 장수들이 보았다.
사료 · 10월 16일 「내일이 막내아들 부음을 들은 지 나흘째라 마음대로 통곡할 수 없어 영 안의 강막지 집에 갔다」, 이경에 우치적 등이 적의 머리 열셋과 송언봉을 베어 온 것, 17일 「새벽에 아들을 곡하고 상복을 입었다. 슬프고 아픈 것을 어찌 견디랴」 ― 난중일기 정유년 10월 16~17일(전서본). 「소금 굽는 사람 강막지」, 「향을 피우고 곡했다. 흰 띠를 둘렀다」, 「어찌 견디랴 어찌 견디랴」 ― 초고본 책6 · 10월 20일 김종려를 열세 섬 소금 굽는 데의 도감검으로 보낸 것 ― 난중일기 10월 20일. 「소금을 굽고 팔아 두 달 안에 곡식 수만 석을 얻었다」 ― 이항복, 충민사기 · 10월 21일 「뱃사람들이 추위에 얼까 걱정되어 마음을 정할 수 없었다」, 무안현감 남언상의 「지극히 놀랄 만한」 정상, 22일 가리포 전선에 가둔 것 ― 난중일기 10월 21~22일 · 10월 29일 보화도가 「배를 감추기에 매우 알맞고 형세가 많아」 진을 두고 집을 짓기로 한 것, 30일 황득중이 재목을 베어 온 것과 정은부·김신웅·김애남 등을 벤 것, 11월 6일 「새 집 짓는 데 올라가 종일 서성거려 해 지는 줄 몰랐다」 ― 난중일기 10월 29일~11월 6일 · 11월 16일 군공 마련기에 안위가 통정이 된 것, 「은자 스무 냥을 천한 신에게」, 양 경리의 붉은 비단 ― 난중일기 11월 16일 · 12월 5일 유지 「통제사 이순신이 아직 권도를 따르지 않아 여러 장수가 민망히 여긴다 … 싸움터에서 용맹이 없으면 효가 아니다 … 예에는 경도와 권도가 있으니 … 소찬을 그만두고 권도를 따르라. 아울러 권도의 물건을 내린다」, 「더욱 감격하고 애통하다. 감격하고 애통하다」 ― 난중일기 12월 5일. 「공이 비통함을 그치지 않았다」 ― 이분, 이충무공행록 · 11월 5일 영암군수가 밥 서른 말을 지어 역군을 먹이고 군량미 이백 석과 벼 칠백 석을 마련했다고 한 것, 7일 해남 의병의 왜 머리, 28일 무안 진사 김덕수의 벼 열닷 섬, 12월 10일 배 만드는 데 나가 앉은 것 ― 난중일기 11월 5일~12월 10일 · 붉은 비단을 배에 안 건 것, 고기를 먹었는지, 「안 세는 것 하나」, 부르튼 손과 소나무 냄새는 지어냈다 · 이 회차는 이순신의 1인칭이다 · 양력 날짜 ― 한국천문연구원 음양력 변환. 정유년 12월 5일은 양력 1598년 1월 12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