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5,719자) · 1597년 10월 27일~11월 4일, 어외도에서 고군산도까지
어외도
이순신 · 네오
1597년 10월 27일 (음력 9월 17일) 맑음. 어외도에 이르니 피난선이 무려 삼백여 척이 먼저 와 있었다. 수군이 크게 이긴 것을 알고 다투어 서로 치하했다. 또 말과 섬으로 헤아리는 양식을 가지고 와서 관군에게 주었다. 나주 진사 임선과 임환과 임업 등이 와서 보았다.
삼백여 척이 먼저 와 있었다.
당사도(신안 암태면)를 떠나 북쪽으로 물길을 잡았을 때 바다에는 아직 새벽 안개가 낮게 깔려 있었다. 안개가 걷히자 어외도(신안 지도 앞) 앞바다가 돛대로 빽빽했다. 고깃배와 장삿배와 나룻배가 뱃전을 맞대고 떠 있었고, 뱃전마다 솥을 건 연기가 가늘게 올랐다. 젖은 장작이 타는 매운 냄새가 물 위를 낮게 건너왔고, 어느 배에선가 아이 울음이 터졌다가 그쳤다. 어제 먼바다에 늘어서 있던 백여 척만이 아니었다. 남도의 바닷가 사람이 다 여기 와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은 벌써 알고 있었다. 먼바다에서 싸움을 본 사람이 배에서 배로 말을 건넸을 것이다. 말은 물보다 빨랐다. 우리 배가 닿기도 전에 뱃전에 선 사람들이 손을 흔들고 무어라 소리쳤는데, 물 건너 오는 소리는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어도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있었다.
해가 오르자 작은 배들이 우리 배 곁으로 붙었다. 늙은이 하나가 쌀 자루를 두 손으로 받쳐 뱃전 위로 올렸다. 자루는 젖어 있었고 바닥에 모래가 묻어 있었다. 어디 모래밭에 묻어 두었던 쌀이다. 되로 헤아릴 만큼 가져온 사람도 있었고 섬으로 가져온 사람도 있었다. 다섯 해 동안 관군은 세금으로 백성의 양식을 받았다. 오늘은 백성이 제 손으로 싣고 와서 주었다. 격군들이 그 자루를 받아 배 밑으로 날랐다. 이레 동안 소금에 절인 콩만 씹던 사람들이었다. 자루를 멘 격군 하나가 사다리를 내려가다 말고 멈춰 서서, 자루 주둥이에 코를 대고 한참 숨을 들이쉬었다.
그날 저녁 배 밑에서 밥 짓는 냄새가 올라왔다. 나는 그 냄새를 오래 맡았다.
*
10월 28일 (9월 18일) 맑음. 어외도에 그대로 머물러 내 배 위에 있었다. 순천 감목관 김탁과 본영 종 계생이 탄환에 맞아 죽었다. 박영남과 봉학과 강진현감 이극신도 탄환에 맞았으나 중상에는 이르지 않았다.
이틀이 지나서야 죽은 사람을 적었다.
김탁은 순천 감목관이었다. 나라의 말을 기르는 사람이 말이 다 흩어진 뒤에 내 배에 올랐다. 무엇을 하겠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노를 젓겠다고 했다. 노 자리에 앉은 감목관은 처음 보았다. 계생은 여수 본영의 종이었다. 다섯 해 전 좌수영에서 처음 배를 띄울 때부터 물을 긷고 불을 지피던 사람이라 나는 그의 목소리를 안다. 둘 다 명량에서 탄환을 맞았다. 배 위에서 맞았고, 배 위에서 식었다.
박영남과 봉학과 이극신은 맞고도 살았다. 이극신은 어깨에 싸맨 무명을 이틀째 갈지 않았는데, 피가 말라 천이 살에 들러붙어 있었다. 떼면 다시 터진다고 그는 웃었다. 웃을 때 어깨가 들썩였고, 무명 위로 누런 물이 번졌다. 배 안에는 이틀 내내 피와 바닷물이 섞인 비린내가 빠지지 않았다.
내 배 한 척에서 둘이 죽고 셋이 다쳤다. 백서른셋 가운데로 들어간 배의 값이 그것이었다. 적은 값이라고 생각한 것을 나는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통제사는 그 수를 세야 하는 사람이다. 다만 그 수가 적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 오래 걸렸다.
그들의 집이 어디 있는지는 몰랐다. 그래서 이름만 적었다. 김탁, 계생. 종이 위에 적힌 이름은 먹이 마르면 남는다. 나는 먹이 다 마를 때까지 종이를 접지 않고 판자 위에 펴 두었다. 바닷바람이 종이 귀퉁이를 자꾸 들어 올려서 벼루로 눌러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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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9일 (9월 19일) 일찍 떠나 배를 몰았다. 바람이 부드럽고 물이 순했다. 무사히 칠산 바다를 건넜다. 저녁에 법성포에 이르니 흉한 적이 뭍으로 와서 인가를 곳곳이 불태웠다. 해 질 때 홍농 앞바다에 이르러 배를 대고 잤다.
10월 30일 (9월 20일) 맑음. 새벽에 배를 띄워 곧장 위도에 이르렀다. 피난선이 많이 대어 있었다. 이광축과 이지화 부자가 와서 보았다.
10월 31일 (9월 21일) 맑음. 일찍 떠나 고군산도에 이르렀다. 호남순찰사가 내가 온 것을 듣고 배를 타고 급히 옥구로 향했다고 했다.
배를 북쪽으로 몰았다.
칠산 바다(영광 앞바다)는 물결이 사나운 데다. 그날은 바람이 순해서 뱃머리가 물을 가르는 소리가 고르게 났다. 노꾼들은 노를 거두고 돛에 바람을 맡겼다. 쉬는 손을 무릎 위에 얹은 채 아무도 말이 없었다. 다섯 해 동안 나는 남쪽 바다에만 있었다. 적이 서쪽 바다를 따라 올라가 한강으로 가려 한다면 그 길목을 막아야 했고, 남쪽에는 이제 배를 댈 데도 없었다. 우수영(해남 문내면)은 비었고 한산도(통영 한산면)는 적의 손에 있었다.
법성포(영광 법성면)에 닿았을 때 뭍에서 연기가 올랐다. 적이 바다에서 지고 뭍으로 가서 집을 태운 것이다. 초가지붕이 타는 연기는 누렇고, 기와집이 타는 연기는 검다. 그날 법성포의 연기는 거의 누랬다. 가난한 마을이었다. 우리는 배를 대지 않고 홍농(영광 홍농읍) 앞바다로 가서 잤다. 밤새 그 냄새가 바람을 타고 왔다. 짚과 서까래가 탄 냄새에 무언가 눌어붙은 냄새가 섞여 있었다. 잠든 격군 몇이 기침을 했다.
위도(부안 위도면)에도 피난선이 가득했다. 뭍이 불타니 남도 사람들이 다 배 위로 올라와 있었다. 배 위에서 밥을 짓고 아이를 재우고 늙은 부모의 이불을 여몄다. 뱃전에 널어 둔 아이 기저귀가 바람에 펄럭였고, 솥 밑에서 마른 미역 줄기가 타닥거리며 탔다. 그들 가운데 몇이 우리 배를 보고 절을 했다. 절을 받는 것이 무거웠다.
고군산도(군산 옥도면)에 닿자 호남순찰사가 내가 온다는 말을 듣고 배를 타고 급히 옥구(군산 옥구읍)로 떠났다고 했다. 한 도의 살림을 맡은 사람이 통제사를 피했다. 그 까닭을 나는 짐작했지만 적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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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일 (9월 23일) 맑음. 승첩 장계의 초를 잡았다. 정희열이 와서 보았다.
11월 3일 (9월 24일) 맑음. 기운이 편치 않아 신음했다. 김홍원이 와서 보았다.
11월 4일 (9월 25일) 맑음. 기운이 매우 편치 않았다. 헛땀이 몸을 적셨다.
이긴 것을 알리는 장계를 썼다.
다섯 해 전 옥포(거제 옥포동)에서 처음 쓴 것과 같은 종류의 글이었다. 그때는 여수의 동헌에서 썼고 이번에는 고군산도의 흔들리는 배 위에서 썼다. 먹을 갈다가 벼루의 물이 기울어 흘렀다. 붓끝이 파도를 따라 조금씩 떨렸다. 배 밑에서 올라오는 습기에 종이가 눅어서, 획마다 먹이 가장자리로 번졌다. 한 장을 버리고 새로 폈다.
이틀 뒤에 몸이 무너졌다. 명량에서 이레 동안 아프지 않던 몸이었다. 이진에서 곽란으로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던 몸이 그 이레를 버텼고, 버틴 값이 한꺼번에 왔다. 밤에 헛땀이 흘러 속옷이 등에 붙었다. 식은 땀이 마르면서 몸이 떨렸다. 아들 회가 젖은 옷을 벗기고 마른 옷을 입혔다. 나는 그가 하는 대로 두었다. 회의 손이 차가웠다. 옷고름을 매는 손가락이 두 번 헛돌았다.
뒤에 류성룡은 그 싸움을 이렇게 적었다. 이순신이 열두 척에 대포를 싣고 물때를 타고 흐름을 따라 공격하니 적이 패해 달아나고 군성이 크게 떨쳤다. 한양에 앉은 사람이 물때를 알았다. 장계에 그 말이 들어 있었을 것이다. 배 위에서 기울어지는 벼루를 붙잡고 쓴 글이 그렇게 한양까지 갔다.
*
11월 6일 (9월 27일) 맑음. 송한과 김국과 배세춘 등이 승첩 장계를 가지고 뱃길로 올라갔다.
11월 7일 (9월 28일) 맑음. 송한이 바람에 막혀 돌아왔다.
11월 8일 (9월 29일) 맑음. 장계가 정제와 함께 다시 올라갔다.
장계가 돌아왔다.
송한과 김국과 배세춘이 장계를 기름종이에 싸서 품에 넣고 뱃길로 떠났다. 이튿날 해 질 무렵 송한이 젖은 채로 돌아왔다. 수염 끝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고 입술이 파랬다. 북쪽에서 바람이 거꾸로 불어 배가 나아가지 못했다고 했다. 그는 품에서 장계를 꺼내 두 손으로 내밀었는데, 기름종이가 겉만 젖고 속은 말라 있었다. 나는 그것을 받아 상 위에 하루 두었다. 이튿날 정제에게 들려 다시 보냈다.
명량에서 적은 바람을 보고 물목을 빠져나갔다고 뒤에 적었다. 그날은 바람이 우리를 도왔다. 오늘은 같은 바람이 이긴 소식을 막았다. 바람은 어느 편도 들지 않는다. 먼저 헤아리는 쪽이 이길 뿐이다.
북풍이 크게 불던 날 나주목사 배응경과 무장현감 이람이 작은 배를 타고 찾아왔다. 순찰사는 피했고 목사와 현감은 왔다. 둘 다 옷자락이 바닷물에 젖어 무거웠다. 배에 오를 때 목사의 젖은 도포 자락이 뱃전에 철썩 감겼고, 현감이 그 자락을 걷어 주었다.
*
헛땀이 나는 밤에 누워 수를 헤아렸다.
열셋, 서른하나, 다섯, 백서른셋. 그리고 삼백여. 앞의 넷은 하나까지 센 수였고, 삼백여만 끝이 없었다. 피난선의 수는 날마다 달랐다. 오늘 떠난 배가 있었고 오늘 온 배가 있었다. 세지 못하는 수가 처음으로 반가웠다.
류성룡은 그 사람들을 이렇게 적었다. 이순신이 진도에 이르러 군선을 거두니 열몇 척이었다. 바닷가 사람으로 배를 타고 피난하는 자가 수없이 많았는데 이순신이 왔다는 말을 듣고 기뻐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나누어 부르니 멀고 가까운 데서 구름처럼 모여 군의 뒤에서 형세를 도왔다.
구름이라는 말이 맞았다. 명량에서 우리 뒤 먼바다에 떠 있던 백여 척을 적은 끝내 세지 못했다. 세지 못한 것이 적을 머뭇거리게 했다. 배 밑창으로 물이 스미는 소리가 가늘게 났다. 누운 등 아래 판자가 물결을 따라 조금씩 들렸다가 내려앉았다.
헛땀이 또 났다. 나는 닦지 않고 두었다. 정할 것이 많았다. 겨울을 날 섬, 격군들의 솜옷, 곡식, 소금, 그리고 배. 열셋으로는 겨울을 넘길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밤에는 아무것도 정하지 않았다. 몸이 아플 때는 먼저 낫는 것이 일이다. 창밖에서 파도가 뱃전을 치는 소리가 밤새 고르게 났다. 사료 · 9월 17일 어외도에 피난선 삼백여 척이 먼저 와서 수군이 크게 이긴 것을 알고 다투어 치하하고 말과 섬으로 헤아리는 양식을 관군에게 준 것, 나주 진사 임선·임환·임업 ― 난중일기 정유년 9월 17일(전서본) · 9월 18일 내 배 위에서 순천 감목관 김탁과 본영 종 계생이 탄환에 맞아 죽고 박영남·봉학·이극신이 맞았으나 중상이 아닌 것 ― 난중일기 9월 18일 · 9월 19일 「바람이 부드럽고 물이 순해 무사히 칠산 바다를 건넜다」, 법성포에서 적이 뭍으로 와 인가를 불태운 것, 홍농 앞바다, 20일 위도의 피난선, 21일 고군산도에서 호남순찰사가 「내가 온 것을 듣고 배를 타고 급히 옥구로 향한」 것 ― 난중일기 9월 19~21일 · 9월 23일 승첩 장계의 초, 24~25일 「기운이 편치 않아 신음했다」, 「헛땀이 몸을 적셨다」 ― 난중일기 9월 23~25일 · 「이순신이 진도에 이르러 군선을 거두니 열몇 척을 얻었다. 바닷가 사람으로 배를 타고 피난하는 자가 수없이 많았는데 이순신이 왔다는 말을 듣고 기뻐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나누어 부르니 멀고 가까운 데서 구름처럼 모여 군의 뒤에 두어 형세를 도왔다」, 「이순신이 열두 척에 대포를 싣고 물때를 타고 흐름을 따라 공격하니 적이 패해 달아나고 군성이 크게 떨쳤다」 ― 류성룡, 징비록 권2 · 9월 27일 송한 등이 승첩 장계를 가지고 뱃길로 올라갔다가 28일 바람에 막혀 돌아오고 29일 정제와 함께 다시 올라간 것, 22일 북풍에 배응경·이람이 온 것 ― 난중일기 9월 22~29일 · 승첩 장계의 내용은 이 작품의 사료 폴더에 없다. 장계에 물때를 적었을 것이라는 것, 북쪽으로 간 셈, 순찰사가 피한 까닭, 「구름」의 셈은 지어냈다 · 이 회차는 이순신의 1인칭이다 · 양력 날짜 ― 한국천문연구원 음양력 변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