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5,589자) · 1597년 10월 26일, 명량 건너편

관선

이순신 · 네오

1597년 10월 26일 (음력 9월 16일) 이날 이순신은 명량(해남과 진도 사이 울돌목) 물목에서 싸웠다. 저녁에 당사도(신안 암태면)로 옮겼다. 일기는 하늘이 준 다행이라고 적고 끝난다. 이 회차는 그 건너편이다.

도도 다카토라는 큰 배를 두고 왔다.

도도 집안의 기록은 그날의 싸움터를 수영, 스이엔이라고 부른다. 전라우수영(해남 문내면) 앞바다다. 거기 번선, 곧 조선 배 가운데 대장급 열세 척이 있었다고 했다. 저쪽 종이에도 열셋이었다. 큰 강의 여울보다 빠른 물살 한가운데 물이 조금 부드럽게 도는 자리가 있었고, 열셋은 거기 떠 있었다. 도도와 수군의 장수들은 그 배들을 기어이 잡겠다고 머리를 맞댔다. 그들이 의논하는 동안에도 물목 쪽에서는 물이 바위에 부딪치는 소리가 쉬지 않고 올라왔다.

큰 배로는 그 물목을 저어 내려갈 수 없었다. 무거운 배는 급한 물에 한번 붙잡히면 키가 말을 듣지 않고, 좁은 목에서 옆으로 돌면 뒤따르는 배와 엉킨다. 그래서 다들 관선으로 갈아탔다. 관선은 가운데 크기의 빠른 배다. 뱃전이 낮아 앉은 사람의 손이 물에 닿을 듯했고, 노꾼 몇이 붙으면 물 위를 미끄러지듯 달렸다. 큰 배를 뒤에 두고 온 까닭을 기록은 물살 하나로 댔다.

두 달 전 칠천량(거제 하청면 칠천도 앞)에서 그들은 배를 붙이고 기어올라 이겼다. 붙으려면 가야 했고, 가려면 물을 타야 했다. 서쪽으로 밀던 아침 물에 관선들이 좁은 물목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양쪽 벼랑이 좁혀 드는 곳에서 물은 거품을 물고 부풀어 올랐고, 가벼운 배는 노를 젓지 않아도 앞으로 튀어 나갔다. 뱃전에 부딪친 물보라가 갑옷 미늘 사이로 스며들었다.

*

앞의 배들이 적선을 만났다.

좁은 물목 안에서 관선들은 앞뒤로 바짝 붙어 들어갔다. 앞 배가 멈칫하면 뒤 배의 뱃머리가 그 고물을 들이받았고, 앞에서 터진 총통 소리는 양쪽 벼랑에 부딪쳐 몇 겹으로 되돌아왔다. 앞장선 배들에서 부상자가 많이 났다. 그 가운데 구루시마 이즈모가 죽었다. 이즈모의 수령, 구루시마 미치후사다. 기록은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 말하지 않는다. 붉은 비단옷을 입고 있었는지도 말하지 않는다. 조선 쪽 종이에는 안골포(창원 진해구 안골동) 적장 마다시라는 이름이 있다. 그 둘이 한 사람인지는 어느 종이도 확인해 주지 않는다. 한쪽은 구루시마가 죽었다 하고 다른 쪽은 마다시를 토막 냈다고 한다. 여기서는 둘을 나란히 세워 둔다.

수군이 거느린 가로들도 과반이 다치거나 죽었다. 가로는 대대로 집안을 받든 늙은 신하들이다. 주군의 아버지 대부터 곁을 지킨 사람들이 그 좁은 물에서 절반 넘게 쓰러졌다. 그 가운데 몇이 물에서 건져지고 몇이 건져지지 못했는지는 과반이라는 두 글자 속에 묻혔다. 자기 집이 크게 깨진 날의 숫자를, 그 집 사람들은 지우지 않고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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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 다카마사가 바다에 빠졌다.

감찰하러 따라온 군감 모리 다카마사가 관선을 몰아 번선에 덤볐다. 그가 조선 배 뱃전에 열십자 갈고리를 걸었다. 네 갈래로 벌어진 쇠갈퀴가 두꺼운 소나무 뱃전에 박히며 둔탁한 소리를 냈고, 매달린 밧줄이 팽팽하게 떨었다. 갈고리를 걸면 당기고, 당기면 붙고, 붙으면 오른다. 칠천량에서 익힌 순서였다. 그러나 갈고리가 걸리자마자 번선 위에서 활과 조총이 격하게 쏟아졌다. 그는 배에서 떨어져 바다에 잠겼다. 갑옷을 입은 몸은 물을 먹으면 돌처럼 무거워지고, 그 물목의 물은 사람을 가만두지 않고 끌고 간다. 도도 마고하치로와 도도 가게유 두 사람이 배를 대어 적선을 밀어내고 그를 건져 올렸다. 물에서 끌어낸 갑옷이 바닷물을 쏟아 내며 뱃바닥에 무겁게 부려졌다.

조선 쪽 종이에도 갈고리가 나온다. 김돌손의 갈고리는 붉은 옷을 물에서 뱃머리로 끌어 올렸다. 모리의 갈고리는 조선 배 뱃전에 걸렸다가 그 주인을 물로 떨어뜨렸다. 같은 날 같은 물목에서 갈고리 하나는 올렸고 하나는 떨어뜨렸다. 두 갈고리가 같은 쇠인지, 서로 몇 발짝 떨어져 있었는지는 두 종이 모두 말이 없다.

*

아침 다섯 시 무렵부터 유시(오후 다섯 시에서 일곱 시 무렵)까지 싸웠다.

조선 쪽 일기에는 시각이 없다. 아침에 별망이 오고 밤에 달을 타고 옮겼다는 말 사이가 통째로 비어 있다. 그 빈 하루를 저쪽 기록이 종일이라는 한마디로 채운다. 유시(오후 다섯 시에서 일곱 시 무렵)면 해가 진도 산마루로 넘어가는 때다. 물목 위로 붉은 빛이 비스듬히 깔리고, 벼랑 그림자가 물을 절반쯤 덮는다. 그때까지 그들은 그 물 위에 있었다.

종일 싸웠으나 잡지 못했다. 번선은 제 배의 형편과 그 물을 잘 알았다. 바람을 가늠해 물목 입구를 빠져나가더니 돛을 걸고 달렸고, 관선으로는 쫓아갈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번선이 바람을 보고 빠져나갔다고, 기록은 한숨처럼 맺는다.

저쪽 기록은 바람을 말하고 물때는 말하지 않는다. 그 바람이 어느 쪽에서 불어왔는지도 기록은 대지 않는다. 한낮에 물이 뒤집힌 것을 몰랐는지, 알고도 쓰지 않았는지는 알 수 없다. 관선 뱃전에서 보인 것은 바람을 한껏 받은 조선 배의 돛이었을 것이다. 조선 쪽에서는 적이 물러갔고, 일본 쪽에서는 조선 배가 빠져나갔다. 같은 오후가 두 종이에서 서로 반대편으로 달아났다.

*

도도 다카토라는 손에 두 군데 상처를 입었다.

그 집 사람들은 그를 이즈미 님이라 불렀다. 이즈미 님도 손을 두 군데 다치셨다. 어느 손인지, 화살인지 탄환인지는 없다. 두 군데라는 수만 있다. 높은 사람의 상처를 적으면서도 말끝에 공대를 잊지 않은 문장이다.

다섯 해 전 거제 앞바다에서 그는 야습으로 하초선 백여 척을 잡았다고 기록되었다. 배를 잡던 그 손이 이날 두 군데 다쳤다. 손을 다친 사람은 칼자루도 뱃전 난간도 제대로 움켜쥐지 못한다. 그는 물러났다. 물러난 뒤의 일을 그 집 기록은 서둘러 이어 간다.

그 뒤로 청국, 곧 충청도로 가서 산과 성들을 떨어뜨렸다. 앞서 머물던 고마가이로 돌아가 한 달쯤 있다가 안골포로 갔다. 성을 다 지어 번을 서는 조소카베에게 넘겨주고 귀국했다. 감장과 일만 석을 더 받아 도합 팔만 석이었다. 팔만 석이 되셨다.

기록은 팔만 석에서 끝난다. 진 날 바로 뒤에 성을 떨어뜨린 날과 팔만 석을 이어 붙였다. 진 것을 적고, 그 위에 이긴 것을 덮었다. 덮은 자국이 그대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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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키자카의 집 종이에도 이 날이 없다.

협판가전기는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집안에서 엮은 기록이다. 다섯 해 전 한산도(통영 한산면)에서 겨우 목숨을 건져 빠져나간 일과, 솔잎을 씹으며 버틴 열사흘이 거기 있다. 칠천량에서 열여섯 척을 잡은 일도 있다. 히데요시가 8월에 보낸 글도 옮겨 두었다. 그쪽도 사람을 조금 잃었다니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는 글이다. 그다음 장은 남원이고, 코를 벤 이야기다. 열여섯 척과 코 사이에 명량이 없다.

도도의 집은 진 날을 적고 덮었다. 와키자카의 집은 아예 적지 않았다. 두 집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그 날을 비워 두었다. 한 집은 글자로 덮었고, 한 집은 아무것도 쓰지 않은 빈자리로 덮었다. 조선 쪽 일기가 없었다면 이 날은 도도 집 종이 속의 손 두 군데와 과반과 구루시마로만 남았을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이 날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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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도 다카토라가 잡은 배를 센다.

다섯 해 전 거제 앞바다에서 야습으로 하초선 백여 척을 잡았다. 칠천량에서는 예순여 척이었고, 히데요시가 문서에 그렇게 써 주었다. 그 공으로 그는 천하 배의 정사를 맡았고 오동꽃 휘호와 붉은 배 휘장을 받았다. 붉은 배 휘장은 먼바다에서도 그 배가 누구의 것인지 알아보게 하는 표지였다. 배를 잡아 이름을 얻고, 잡은 배로 팔만 석에 오른 사람이었다.

명량에서 잡은 배는 없다. 잡은 것이 없으니 그 집 기록은 잡은 수 대신 다친 손을 올렸다. 백여 척, 예순여 척, 그리고 손 두 군데가 그의 세 바다였다. 세 번째 바다에서 그는 한 척도 잡지 못했고, 그 집 사람들은 쫓아갈 수도 없었다는 말까지 감추지 않았다. 정직한 기록이다. 그래서 조선 쪽 일기 곁에 나란히 둘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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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한위략에는 명량이 없다.

이백 년 뒤 가와구치 조주가 조선 정벌을 엮은 책이다. 이순신의 이름을 여러 번 불러내고 칠천량을 길게 쓰고 도도가 예순 척을 얻었다고 쓴 책에, 이 날은 빠져 있다. 비슷한 자리에 한 대목이 있을 뿐이다. 9월 13일에 적군 삼만이 당도(거제, 일본 기록의 이름)에 성을 쌓고 웅거했다. 도도와 구키가 쳤으나 아군이 이롭지 못했다. 당도는 명량이 아니고 삼만은 열셋이 아니다. 무엇을 가리킨 말인지 알 수 없다. 아군이 이롭지 못했다는 그 한마디가 정한위략에 남은 명량의 전부다.

없는 것은 없는 대로 둔다. 남은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도도의 집 사람들이 쓴 것, 곧 구루시마가 죽고 가로가 과반 쓰러지고 도도가 손 두 군데를 다치고 종일 싸우고도 잡지 못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 나라의 큰 책에 이 날이 빠져 있다는 것이다. 둘 다 있는 그대로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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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사도에는 열엿새 달이 떠 있었다.

이순신은 그날 밤 달을 타고 옮긴 당사도에 있었다. 물 위에 붉은 것은 더 떠 있지 않았다. 바람이 잦아든 물에 열세 척의 그림자가 나란히 떠 있었다. 그 옷은 뱃머리에 올랐다가 토막 나 물로 돌아갔다. 옷의 주인이 누구인지, 이제 두 나라의 종이가 서로 다르게 말한다. 그는 그것을 몰랐다.

그는 열셋을 세고 있었다. 저쪽이 무엇을 세고 있는지 그는 몰랐다. 구루시마가 죽은 것도, 도도의 손도, 모리가 물에 빠졌다가 건져진 것도 몰랐다. 준사가 마다시라고 부른 붉은 옷이 정말 누구였는지도 끝내 확인하지 못했다. 몰라도 그는 세었다. 그날 깨뜨린 배는 끝자리까지 짚어 센 서른하나였다.

저쪽도 세었다. 그 집 사람들은 다친 가로의 수와 이즈미 님의 손에 난 상처와 끝내 못 잡은 번선 열세 척을 셌다. 양쪽에서 센 수를 나란히 놓으면 하루가 된다. 그 하루가 명량이었다.

사료 · 「수영이라는 곳에 번선의 대장급 열세 척이 있었다」, 「큰 강의 여울보다 빠른 물살 안에 조금 물이 부드러운 데 열셋이 있어 기어이 잡겠다고 의논했다」, 「큰 배로 그 물목을 저어 내려가는 것은 안 되어 다들 관선으로 갈아탔다」, 「앞의 배들이 적선을 만나 부상자가 많이 나고 그 가운데 구루시마 이즈모가 죽었다」, 「수군이 거느린 가로들도 과반이 부상하거나 죽었다」, 모리 민부대보(다카마사)가 갈고리를 걸었다가 활과 조총에 바다로 떨어져 도도 마고하치로·도도 가게유가 건진 것, 「아침 다섯 시 무렵부터 유시까지 싸웠으나 번선이 배 형편을 잘 알아 바람을 보고 물목 입구를 빠져나가 돛을 걸고 달려 쫓아갈 수 없었다」, 「이즈미 님도 손을 두 군데 다치셨다」, 그 뒤 청국의 산성들을 떨어뜨리고 안골포 성을 조소카베에게 넘기고 귀국해 일만 석을 더해 팔만 석이 된 것 ― 등당가각서(1641, 사적집람 15) · 정한위략(가와구치 조주, 1831)의 수군 발췌에는 명량 항목이 없고 「9월 13일 적군 삼만이 당도에 웅거해 도도·구키가 쳤으나 아군이 이롭지 못했다」만 있다 ― 이 작품의 사료 폴더 요약 · 구루시마 미치후사가 곧 마다시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추정이나 두 기록이 서로를 가리키지 않는다. 이 작품은 확정하지 않았다 · 갈고리 둘, 바람과 물때의 차이, 「덮은 것이 보인다」, 당사도의 두 셈은 지어냈다 · 이 회차는 도도 다카토라 쪽 3인칭이다. 인물이 생각한 것은 짓지 않고 그 집의 기록을 읽는 자리에서 썼다 · 양력 날짜 ― 한국천문연구원 음양력 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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