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6,485자) · 1597년 9월 19일~29일, 낙안에서 회령포까지

아직 열둘이 있습니다

이순신 · 네오

1597년 9월 19일 (음력 8월 9일) 맑음. 일찍 떠나 낙안(순천 낙안면)에 이르니 사람들이 많이 나와 오 리까지 뵈었다. 흩어져 달아난 까닭을 물으니 다 말하기를 병사가 적이 가까이 온다고 겁을 내어 창고에 불을 지르고 물러가서 그 때문에 백성이 무너져 흩어졌다고 했다. 고을에 이르니 관사와 창고 곡식이 다 타 버렸다. 관리와 마을 백성이 눈물을 뿌리며 와서 보지 않는 이가 없었다. 오후에 길을 떠나 십 리쯤 가니 늙은이들이 길가에 늘어서서 다투어 술병을 바쳤다. 받지 않으니 울면서 억지로 권했다. 저녁에 보성 조양창에 이르니 한 사람도 없었다. 창고 곡식은 봉해 잠긴 것이 그대로였다. 군관 넷을 시켜 지키게 했다. 나는 김안도의 집에서 잤다. 집주인은 이미 피해 나갔다.

늙은이들이 길가에 늘어섰다.

낙안 고을 오 리 밖부터 사람들이 나와 서 있었다. 흩어져 달아난 까닭을 물으니 다들 같은 말을 했다. 병사가 적이 가까이 온다고 겁을 먹고 창고에 불을 지르고 물러가자, 그걸 본 백성이 무너져 흩어졌다고. 고을에 들어서니 관사와 창고가 다 타서 내려앉았고, 숯이 된 서까래 끝에서 아직 가는 연기가 올랐다. 관리와 마을 백성이 눈물을 뿌리며 와서 보지 않는 이가 없었다. 나는 말 위에서 그 얼굴들을 차례로 보았지만, 우는 얼굴은 셀 수가 없었다.

오후에 길을 떠나 십 리쯤 가니 늙은이들이 길가에 늘어서서 다투어 술병을 바쳤다. 흙 묻은 손으로 병 주둥이를 받쳐 든 늙은이도 있었고, 제 것을 먼저 드리려고 옆 사람 팔꿈치를 밀어내는 늙은이도 있었다. 나는 받지 않았다. 상복을 입은 몸이었다. 받지 않으니 그들이 울면서 억지로 권했다.

일기는 거기서 멈춘다. 억지로 권했다는 데서 붓을 놓았고, 받았는지 마셨는지는 쓰지 않았다. 그 빈자리는 지금도 빈자리로 둔다. 다만 한 늙은이가 기어이 내 손에 병을 쥐여 주던 것은 기억한다. 한나절 볕을 받은 사기병이 손바닥에 미지근했다.

저녁에 보성 조양창(보성 조성면)에 이르니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 창고 곡식은 봉해 잠긴 것이 그대로였다. 자물쇠에 붉은 녹이 앉았고 봉한 종이는 빗물에 얼룩졌지만, 뜯긴 데는 한 군데도 없었다. 군관 넷을 남겨 지키게 했다. 아홉 가운데 넷을 곡식에 붙였으니 배보다 곡식이 먼저였다. 배가 없어도 먹을 것은 먼저 있어야 한다는 것을 다섯 해 전 여수에서 배웠다. 나는 주인이 피해 나간 김안도의 빈집에서 잤다.

*

9월 22일 (8월 12일) 맑음. 장계 초를 잡았다. 그대로 머물렀다. 거제현령과 발포(고흥 도화면)만호가 들어와 명령을 들었다. 배설이 겁내는 정상을 듣고 한탄을 이기지 못했다.

배설이 겁낸다.

거제현령 안위와 발포만호 소계남이 명령을 들으러 왔다. 열두 척 가운데 두 척을 맡은 장수들이었다. 명령을 다 듣고 나서도 둘은 일어나지 않고 머뭇거리다가 배설 이야기를 꺼냈다. 배설이 겁을 내고 있다, 어디로 옮겨 갈지를 궁리한다. 말하는 동안 안위는 제 무릎만 내려다보았다.

한탄을 이기지 못했다. 그날 밤 초고에는 더 썼다. 권세 있는 집에 아첨하여 감당 못 할 자리에 함부로 올라 나라 일을 크게 그르쳤다. 조정에 살피는 사람이 없다. 어찌하랴 어찌하랴. 전서본을 엮은 사람들은 이 대목을 뺐다. 조정을 나무란 글이니 뺄 만했다. 그러나 조정에 살피는 사람이 없다는 말은 원균에게 한 것도 배설에게 한 것도 아니었다. 살피는 사람이 없어서 원균이 부산으로 나갔고, 배설이 수사 자리에 올랐고, 내가 옥에 갔다. 먹을 찍던 붓이 그 대목에서 한참 멈추었다가 다시 움직였다.

장계 초를 잡았다. 무엇을 썼는지 그날 일기에는 없다. 조카가 뒤에 옮겨 놓은 여덟 자가 있을 뿐이다. 지금 신에게 전선이 아직 열둘 있습니다.

*

그 장계는 유지에 대한 답이었다.

조정은 수군이 너무 적어 적을 막을 수 없으니 뭍에 올라 싸우라고 했다. 수군을 거두고 원수 밑으로 들어가라는 말이었다. 열두 척으로 무엇을 하겠느냐는 물음이 그 안에 들어 있었다. 촛불 심지가 타들어 가면서 방 안이 자꾸 어두워졌고, 나는 두 번 심지를 잘라 가며 답을 써 내려갔다.

임진년부터 대여섯 해 동안 적이 감히 전라와 충청으로 곧장 치고 들지 못한 것은 수군이 그 길을 막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신에게 전선이 아직 열둘 있습니다. 죽을힘을 내어 막아 싸우면 오히려 할 수 있습니다. 지금 만약 수군을 다 없애면 이는 적이 다행으로 여기는 것이고, 충청 오른쪽을 지나 한강에 이를 것이니 이것이 신이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전선이 비록 적으나 미천한 신이 죽지 않으면 적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미천한 신이 죽지 않으면. 나는 그렇게 썼다. 죽겠다는 말이 아니라 살아 있겠다는 말이었다. 통제사가 살아 있고 배가 열둘 있으면 적은 우리를 가볍게 보지 못한다. 수군을 없애지 않는다. 열둘로 간다. 어디로 갈지는 아직 몰랐지만, 없애지 않는다는 것 하나만은 그 밤에 정했다. 다 쓰고 나서 붓을 내려놓으니 오른 손목이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그 장계가 한양으로 올라가는 동안 나는 서쪽으로 내려갔다.

*

9월 23일 (8월 13일) 맑음. 거제현령과 발포만호가 돌아갔다. 우후 이몽구가 전령을 받고 들어왔다. 본영의 군기를 하나도 옮겨 싣지 않은 일로 곤장 여든을 쳐서 보냈다. 하동현감 신진이 와서 전했다. 초사흗날 내가 떠난 뒤에 진주 정개산성과 벽견산성이 파해 흩어져 저절로 무너졌다고 했다. 애통할 만하다.

곤장 여든.

이몽구는 전라좌수영(여수)의 우후였다. 본영에 쌓아 둔 군기를 하나도 옮겨 싣지 않고 왔다. 창과 활과 화살이 적이 들어올 길목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나는 곤장 여든을 쳐서 돌려보냈다. 통제사가 되고 처음 친 곤장이었다. 매가 살에 떨어질 때마다 마른 소리가 마당을 울렸고, 나는 여든까지 눈을 돌리지 않았다. 다섯 해 전 여수에서 활터에 빠진 사람에게 곤장을 칠 때는 내 뒤에 배가 스물넷 있었다. 지금은 열둘이었고, 열둘뿐이라서 매를 더 아낄 수가 없었다.

하동현감 신진이 와서 전했다. 초사흗날 내가 떠난 뒤 진주 정개산성과 벽견산성이 파해 흩어져 저절로 무너졌다고 했다. 정개산성은 흰 옷으로 그 아래를 지나며 올려다본 성이었다. 적이 오기도 전에 사람이 먼저 흩어졌다. 산이 아무리 험해도 버틸 사람이 없으면 성은 빈 돌담에 지나지 않는다. 애통할 만하다고 썼고, 초고에는 그 말을 두 번 썼다.

*

9월 25일 (8월 15일) 비 오다 늦게 갬. 열선루 위에 나가 앉았다. 선전관 박천봉이 유지를 가지고 왔다. 곧 받았다는 글을 써서 봉했다. 보성 군기를 점검하여 말 네 마리에 나누어 실었다.

유지가 왔다.

열선루(보성 보성읍)는 신선이 늘어선 다락이라는 이름이었다. 비가 늦게 갠 날이었다. 젖은 난간에서 물방울이 떨어지고 처마 끝이 번들거렸다. 거기 앉아 있는데 선전관 박천봉이 유지를 가지고 올라왔다. 8월 초이렛날 성첩한 유지였다. 무엇이 적혀 있었는지는 전서본에도 초고에도 남아 있지 않다. 나는 곧 받았다는 글을 써서 봉했다.

대신 초고에는 다른 줄이 있다. 지나치게 마셔 잠들지 못했다. 상복 입은 사람이 술을 과하게 마셨다고 제 손으로 쓴 것을, 전서본은 뺐다. 나는 빼지 않는다. 마셨고, 잠들지 못했다.

그 유지가 무엇이었는지 여기서 짐작하지 않는다. 조카가 전한 것은 조정이 수군이 적으니 뭍에서 싸우라 했다는 것인데, 그것이 이날 받은 유지였는지는 모른다. 그것이었다면 마실 만했다. 아직 열둘이 있다고 써 올린 사람에게 수군을 거두라는 글이 내려오면, 그 사람은 마시고 잠들지 못한다. 확실한 것은 그 밤 술이 있었다는 것 하나다. 누각 아래 풀숲에서 벌레 우는 소리가 새벽까지 그치지 않았다.

보성 군기를 점검해 말 네 마리에 나누어 실었다. 순천에서 얻은 말 셋에 하나가 늘었다. 짐을 얹는 동안 가장 어린 말이 무게를 못 이겨 앞발을 한 번 헛디뎠다.

*

9월 28일 (8월 18일) 맑음. 회령포(장흥 회진)에 갔다. 수사 배설이 물 멀미를 핑계로 나오지 않았다. 관사에서 잤다.

9월 29일 (8월 19일) 맑음. 여러 장수들이 교서에 숙배했다. 배설은 공손히 맞이하지 않았다. 그 업신여기고 오만한 태도를 말로 할 수 없다. 그 영리를 곤장 쳤다.

배를 보았다.

회령포는 장흥 남쪽 끝의 포구였다. 거기 배가 있었다. 조카의 행록은 열 척이라 하고 나는 장계에 열둘이라 썼다. 열이든 열둘이든 다섯 달 만에 보는 판옥선이었다. 다섯 해 전 여수에서 지은 배와 같은 배였지만, 어느 것이 여수에서 나간 배인지는 가려낼 수 없었다. 뱃전의 칠은 군데군데 벗겨졌고, 불에 그을린 자국이 검게 번진 널빤지도 있었다. 배들은 포구의 잔물결을 받아 천천히 기울었다가 돌아왔다. 나는 그것을 오래 보았다.

배설은 나오지 않았다. 물 멀미를 핑계로 댔다. 칠천량에서 배를 끌고 빠져나온 수사가 물 멀미를 한다니, 곁에 선 군관 하나가 헛기침으로 웃음을 삼켰다. 나는 관사에서 잤다.

이튿날 여러 장수가 교서에 숙배했다. 상복에서 일으킨다는 그 글 앞에 장수들이 차례로 엎드렸다. 배설은 공손히 맞이하지 않았다. 허리를 반쯤만 굽히고 눈은 딴 데를 보았다. 그 업신여기고 오만한 태도를 말로 할 수 없었다. 나는 배설 대신 그 영리를 곤장 쳤다. 배설을 치면 그 밑의 배들이 흔들릴 것이었다. 매는 영리의 등에 떨어졌지만, 그 소리는 배설이 다 들었다.

*

김억추를 불렀다.

새로 온 전라우수사였다. 만호 하나쯤 되는 사람을 좌의정 김응남이 두터운 정으로 함부로 임명해 보냈다고, 나는 뒤에 일기에 썼다. 그를 불러 흩어진 병선을 거두어 모으게 했다. 장수들에게는 나누어 맡겨 배를 거북선 모양으로 꾸미게 했다. 다섯 해 전 나대용과 함께 만든 거북선은 이제 없었다. 멀리서 등판을 덮은 배처럼 보이기만 해도 적의 눈에는 한 척이 더 있었다. 목수들이 널빤지를 켜는 톱질 소리가 포구에 종일 울렸다.

장수들을 모아 약속했다. 우리는 함께 임금의 명을 받았으니 의리로 마땅히 함께 죽어야 한다. 일이 이미 여기 이르렀으니 한 번 죽음으로 나라에 갚는 것을 어찌 아끼겠는가. 오직 죽은 뒤에야 그친다. 이 말은 조카의 행록에 있다. 그날 내 일기에는 배설과 영리와 곤장만 있다. 같은 날이었다. 곤장이 먼저였고 함께 죽자는 말이 뒤였다. 장수들이 감동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고 조카는 썼다. 나는 곤장을 썼다. 둘 다 그날 있었던 일이다.

밤에 배 위에 누웠다. 열둘 가운데 한 척이었다. 뱃바닥이 물결을 따라 흔들렸다. 다섯 달 뭍에 있던 몸이 그 흔들림을 금세 알아보고 거기 맞추어 누웠다. 누운 채로 열둘을 세었다. 백이 넘을 때보다 훨씬 빨리 끝났다. 다행이라면 그것 하나가 다행이었다. 나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사료 · 8월 9일 낙안에서 오 리까지 나와 뵌 사람들, 병사가 창고에 불을 질러 백성이 흩어진 것, 관리와 백성이 눈물을 뿌린 것, 「늙은이들이 길가에 늘어서서 다투어 술병을 바치고 받지 않으니 울면서 억지로 권했다」, 조양창의 봉해 잠긴 곡식을 군관 넷이 지킨 것 ― 난중일기 정유년 8월 9일(전서본) · 8월 12일 장계 초를 잡은 것, 거제현령·발포만호가 명령을 들으러 와서 배설이 겁내는 정상을 전한 것 ― 난중일기 8월 12일. 「권세 있는 집에 아첨하여 감당 못 할 자리에 함부로 올라 나라 일을 크게 그르쳤다. 조정에 살피는 사람이 없다. 어찌하랴 어찌하랴」 ― 초고본 책6 8월 12일(전서본에는 없다) · 「조정이 수군이 너무 적어 막을 수 없다고 뭍에서 싸우라 명하니 공이 아뢰기를, 임진년부터 대여섯 해 동안 적이 감히 전라·충청으로 곧장 치고 들지 못한 것은 수군이 그 길을 막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신에게 전선이 아직 열둘 있습니다. … 전선이 비록 적으나 미천한 신이 죽지 않으면 적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 이분, 이충무공행록. 행록은 이 장계를 벽파진 뒤에 두었다. 이 작품은 8월 12일 「장계 초를 잡았다」와 8월 15일 유지에 붙였으나 그 유지의 내용은 일기에 없다 · 8월 13일 우후 이몽구를 본영 군기를 하나도 옮겨 싣지 않은 일로 곤장 여든, 정개산성·벽견산성이 저절로 무너진 것 ― 난중일기 8월 13일. 「가통가통」 ― 초고본 · 8월 15일 열선루에서 박천봉이 가져온 유지를 받고 보성 군기를 말 넷에 나누어 실은 것 ― 난중일기 8월 15일. 「8월 초이렛날 성첩한 유지」, 「지나치게 마셔 잠들지 못했다」 ― 초고본 책6(전서본에는 없다) · 8월 18일 회령포에서 배설이 물 멀미를 핑계로 나오지 않은 것, 19일 장수들이 교서에 숙배했으나 배설이 공손히 맞지 않아 그 영리를 곤장 친 것 ― 난중일기 8월 18~19일. 「회령포에 이르니 전선이 열 척뿐이었다. 김억추를 불러 병선을 거두어 모으게 하고 거북선 모양으로 꾸며 군세를 돕게 했다. 우리는 함께 임금의 명을 받았으니 의리로 마땅히 함께 죽어야 한다 … 오직 죽은 뒤에야 그친다」 ― 행록. 행록은 열 척, 장계는 열두 척이다 · 김억추를 「만호 하나쯤 되는 사람을 좌의정 김응남이 두터운 정으로 함부로 임명해 보냈다」 ― 난중일기 9월 8일 · 술병을 받은 손, 배설을 치지 않은 셈, 배 위의 밤은 지어냈다 · 이 회차는 이순신의 1인칭이다 · 양력 날짜 ― 한국천문연구원 음양력 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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