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5,804자) · 1597년 9월 13일~18일, 구례에서 순천까지

상복에서 일으킨다

이순신 · 네오

1597년 9월 13일 (음력 8월 3일) 맑음. 이른 아침에 선전관 양호가 교유서를 가지고 들어왔다. 삼도통제사를 겸하라는 명이었다. 숙배한 뒤에 받았다는 서장을 써서 봉했다. 그날로 길을 떠났다. 곧장 두치(하동 두치진) 길로 갔다. 초경(밤 일곱 시에서 아홉 시 무렵)에 행보역에 이르러 말을 쉬었다. 삼경(밤 열한 시에서 새벽 한 시 무렵)에 길을 떠나 두치에 이르니 날이 새려 했다. 남해현령이 길을 잃고 강가 정자로 잘못 들어가서 말에서 내려 불러왔다. 쌍계동에 이르니 어지러운 돌이 삐죽삐죽하고 새로 온 비에 물이 불어 어렵게 건넜다. 석주관에 이르니 이원춘과 유해가 복병하고 있다가 나를 보고 적을 칠 일을 많이 말했다. 저물어 구례현에 이르니 온 고을이 쓸쓸했다. 성 북문 밖 지난번 주인집에 잤다. 주인은 이미 산골로 피했다고 했다. 손인필과 손응남이 곧 와서 보고 이른 감을 바쳤다.

교서가 왔다.

해가 산마루를 넘기 전에 말굽 소리가 마당으로 들어왔다. 선전관 양호가 교유서를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있었다. 누런 보자기를 풀자 새 종이와 먹 냄새가 훅 끼쳤다. 초고에는 뜻밖에 들어왔다고 썼다. 반은 참말이었고, 반은 임금의 글을 맞는 신하의 예였다.

읽었다. 왕이 이르노라, 아, 나라가 의지하여 보장으로 삼는 것은 오직 수군에 있는데 하늘이 재앙을 뉘우치지 않아 흉한 칼날이 다시 성하여 마침내 삼도의 큰 군사가 한 싸움 아래 다 없어졌다. 이 뒤로 바닷가 성읍을 누가 다시 막아 가리겠는가. 한산이 이미 무너졌으니 적이 무엇을 꺼리겠는가.

한산이 이미 무너졌다. 임금이 그 말을 교서에 넣게 했다. 나는 그 줄에서 한 번 눈을 멈추었다. 종이 가장자리를 쥔 손끝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 빳빳한 종이가 구겨지는 소리가 났다.

이어서 더 읽었다. 지난번 경의 직을 갈고 죄를 지고 종군하게 한 것은 또한 사람의 꾀가 좋지 못한 데서 나와 오늘의 패한 욕을 이르게 한 것이다. 오히려 무엇을 말하랴. 오히려 무엇을 말하랴.

임금은 같은 말을 두 번 썼다. 임금이 할 말이 없다는데 신하가 보탤 말은 더더욱 없었다. 나는 그 두 마디 위에 오래 머물지 않고 다음 줄로 눈을 옮겼다. 마당에서 양호가 타고 온 말이 긴 투레질을 했다.

이제 특별히 경을 상복에서 일으키고 흰 옷에서 뽑아 충청·전라·경상 삼도 수군통제사를 준다. 넉 달 된 어머니 상복이 그대로 내 몸에 걸려 있었다. 상복과 흰 옷은 한 벌이었는데, 임금은 그 한 벌을 두 번 불렀다. 거친 삼베 소매 끝이 교서 가장자리에 스쳐 사각거렸다.

*

숙배했다.

임금이 있는 북쪽을 향해 절하고 교서를 받았다. 무릎을 꿇을 때 마당 흙의 찬 기운이 삼베를 뚫고 올라왔다. 받았다는 서장을 써서 봉하자 양호가 그것을 품에 넣고 돌아갔다. 나는 그날로 떠났다. 더 기다릴 것이 없었다. 배설이 끌고 간 열두 척이 서쪽 어딘가에 떠 있었고, 통제사가 갈 곳은 배가 있는 데 하나뿐이었다.

곧장 두치 길로 들었다. 초경(밤 일곱 시에서 아홉 시 무렵)에 행보역에 닿아 말을 쉬게 했다. 말들이 여물통에 코를 박고 우물우물 씹는 소리가 어둠 속에서 한참 이어졌다. 삼경(밤 열한 시에서 새벽 한 시 무렵)에 다시 떠나 밤새 달렸고, 두치에 이르니 동쪽 하늘이 희끄무레해졌다. 병세가 구할 수 없다던 남해현령 박대남이 그새 몸을 추슬러 뒤따라오다가, 길을 잃고 강가 정자로 잘못 들어갔다. 내가 말에서 내려 그를 불러왔다. 통제사가 사람 하나를 직접 불러와야 할 만큼 곁에 사람이 적었다.

쌍계동(하동 화개면)은 어지러운 돌이 삐죽삐죽했다. 새로 온 비에 물이 불어 말 배까지 찼고, 말들이 디딜 곳을 찾느라 콧김을 뿜으며 머뭇거렸다. 건너는 데 한참이 걸렸다. 그 시간이 아까웠지만 일기에는 건넌 것만 남겼다.

석주관(구례 토지면)에서는 이원춘과 유해가 복병하고 있다가 나를 보고 적을 칠 일을 많이 말했다. 흰 옷일 때도 나는 이렇게 남의 말을 들었다. 달라진 것은 하나였다. 이제는 들은 것을 가지고 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할 것이 아직 없었다. 내게는 배가 없었다.

저물어 구례현에 이르니 온 고을이 쓸쓸했다. 두 달 전 흰 옷으로 지나며 묵었던 고을인데, 골목마다 개 짖는 소리 하나 나지 않았다. 성 북문 밖 지난번 주인집에 들었으나 주인은 이미 산골로 피해 가고 없었다. 손인필과 손응남이 곧 와서 이른 감을 바쳤다. 아직 떫은 기가 가시지 않은 감이었는데, 한 입 베어 무니 씨 둘레는 달았다. 일기에는 그 단맛 대신 누가 바쳤는지를 남겼다.

*

9월 14일 (8월 4일) 맑음. 압록강원에 이르러 말을 먹였다. 고산현감이 군인을 넘겨주는 일로 와서 수군 일을 많이 말했다. 낮에 곡성에 이르니 관사와 마을이 텅 비었다. 남해현령과 같이 잤다.

9월 15일 (8월 5일) 맑음. 옥과(곡성 옥과면) 땅에 이르니 피난하는 사람이 길에 가득 찼다. 말에서 내려 앉아 타일렀다. 고을에 들어갈 때 이기남 부자를 만났다. 정사준과 정사립이 나와 맞았다. 현감은 병을 핑계로 나오지 않았다. 잡아내어 죄를 주려 하니 와서 보았다.

피난하는 사람이 길에 가득 찼다.

순천과 낙안(순천 낙안면)에서 올라온 사람들이었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 부축하며 걸었다. 보따리를 인 아낙, 아이를 업고 소를 끄는 사내, 지팡이에 몸을 맡긴 늙은이가 한 길에 뒤엉켜 마른 먼지를 일으켰다. 초고에는 눈물이 나서 볼 수 없었다고 썼다. 전서본은 그 줄을 줄였지만, 그날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초고 쪽에 있다. 사람들이 나를 알아보고 부르며 울었다. 사또가 다시 오셨다, 우리가 살 길이 있다.

말에서 내려 길가에 앉아 타일렀다. 무엇이라고 타일렀는지는 남기지 않았다. 배가 열둘뿐인데 살 길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말 위에서 내려다보는 대신 그들과 같은 높이로 흙바닥에 앉았다. 한낮 볕에 달아오른 흙이 삼베 바짓가랑이를 통해 뜨겁게 배어 들었다. 내가 한 말은 잊었고, 앉았던 것만 기억한다.

젊은이들이 아내와 아이에게 말했다. 우리 사또가 오셨다. 너희는 죽지 않는다. 천천히 찾아오너라. 나는 먼저 간다. 그러고는 지고 있던 짐을 내려놓고 내 말 뒤에 붙었다. 조카의 행록에 그 말이 있다. 그렇게 붙은 사람이 순천에서 예순이 되고 보성에서 백스물이 되었다. 초계를 나설 때 아홉이던 줄이 어느새 뒤를 돌아보아도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길어졌다.

옥과 현감은 병을 핑계로 나오지 않았다. 잡아내어 죄를 주려 하자 그제야 허겁지겁 와서 보았다. 얼굴에 병색이라고는 없었다. 나는 죄를 주지 않았다. 사람 하나가 아쉬운 때였다.

*

9월 17일 (8월 7일) 맑음. 일찍 떠나 곧장 순천으로 갔다. 길에서 선전관 원집을 만나 유지를 받았다. 병사의 군사가 다 무너져 돌아가는 것이 길에 잇달았다. 그래서 말 세 필과 활과 화살 약간을 빼앗아 왔다. 곡성 강가 정자에서 잤다.

병사의 군사가 무너져 돌아갔다.

전라병사 이복남의 군사가 길에 잇달아 돌아가고 있었다. 창을 거꾸로 멘 자, 투구를 벗어 옆구리에 낀 자가 고개를 숙이고 지나갔다. 그 가운데 말 탄 사람과 활 가진 사람이 섞여 있었다. 나는 말 세 필과 활과 화살 약간을 길에서 빼앗았다. 통제사가 되어 처음 내린 결정이 남의 군사에게서 말을 빼앗는 일이었다. 빼앗긴 사람들은 아무 말 없이 고삐를 넘겼다.

*

9월 18일 (8월 8일) 맑음. 새벽에 떠나 부유창에서 아침을 먹으려 하니 병사 이복남이 이미 불을 지르게 하여 재만 남았다. 보기에 참담했다. 광양현감 구덕령과 나주판관 원종의가 창고 밑에 있다가 내가 온다는 말을 듣고 급히 구치로 달아났다. 내가 곧 전령하니 한꺼번에 와서 보았다. 피해 다니는 것을 꾸짖었다. 순천에 이르니 성 안팎에 사람 자취가 쓸쓸했다. 중 혜희가 와서 뵈어 의장 첩지를 주었다. 관사와 창고 곡식과 군기 등이 그대로 옛날 같았다. 병사가 처리하지 않고 물러나 달아났다. 탄식할 만하다. 총통 등은 옮겨 묻었다. 장편전은 군관들이 나누어 가졌다. 머물러 잤다.

재만 남았다.

부유창(순천 주암면)에 이르니 병사가 적에게 넘기지 않으려고 불을 질러, 창고 자리에 재만 남아 있었다. 새벽 안개 속에서 아직 매캐한 냄새가 올라왔고, 발끝으로 재를 헤치자 밑에서 검게 탄 낟알이 우수수 쏟아졌다. 다섯 해 동안 곡식을 섬 단위로 세어 오던 사람이 그 앞에 섰다. 재는 셀 수가 없었다.

광양현감 구덕령과 나주판관 원종의가 창고 밑에 숨어 있다가 내가 온다는 말을 듣고 구치로 달아났다. 통제사가 온다는 말이 적보다 무서웠던 모양이다. 곧 전령을 보내니 둘이 한꺼번에 와서 보았다. 둘의 갓 끝에 창고 밑 거미줄이 걸려 있었다. 피해 다니는 것을 꾸짖었을 뿐 벌은 주지 않았다. 벌을 줄 만큼 사람이 넉넉하지 않았다.

순천에 이르니 성 안팎에 사람 자취가 쓸쓸했다. 빈집 문짝이 바람에 덜컹거렸다. 중 혜희가 와서 뵈었고, 나는 그에게 의장 첩지를 주었다. 싸울 사람이 없으면 절에서라도 데려와야 했다.

관사와 창고 곡식과 군기는 그대로 옛날 같았다. 병사는 그것을 처리하지 않고 물러나 달아났다. 일기에는 탄식할 만하다고 썼지만, 그가 손대지 않고 두고 간 것이 다행이었다. 불을 지른 부유창은 재가 되었고, 버려두고 간 순천에는 곡식이 남았다. 총통은 배가 없으면 끌고 다닐 수 없는 쇳덩이라 땅을 파고 옮겨 묻었다. 삽날이 젖은 흙을 파고들 때마다 쇠 비린내가 올라왔다. 장편전은 군관들이 나누어 등에 졌다. 배에서 쏘아야 할 화살을 배도 없이 짊어지고, 배가 있는 서쪽으로 가는 길이었다.

밤에 순천 관사에 누웠다. 다섯 해 전 이 고을에서 순천부사 권준이 나를 맞았다. 그가 지금 어디 있는지는 몰랐지만, 관사의 서까래와 기둥은 그때 그대로였다. 나는 상복을 입은 채 누워 가진 것을 하나씩 세었다. 말 셋, 활 약간, 군관 아홉, 따라온 사람 예순, 등에 진 화살. 총통은 땅에 묻었으니 뺐다. 열두 척은 아직 내 눈으로 보지 못했으니 넣지 않았다. 보지 않은 것은 세지 않는다. 다섯 해 동안 그렇게 해 왔고, 상복을 입고도 그 버릇은 그대로였다.

사료 · 8월 3일 이른 아침 선전관 양호가 삼도통제사를 겸하라는 교유서를 가지고 온 것, 숙배 뒤 서장을 봉하고 그날로 떠난 것, 두치·쌍계동·석주관(이원춘·유해의 복병)·구례(손인필·손응남의 이른 감) ― 난중일기 정유년 8월 3일(전서본). 「뜻밖에 들어왔다」 ― 초고본 책5 · 교서의 「나라가 의지하는 것은 오직 수군인데 삼도의 큰 군사가 한 싸움 아래 다 없어졌다」, 「한산이 이미 무너졌으니 적이 무엇을 꺼리겠는가」, 「지난번 경의 직을 갈고 죄를 지고 종군하게 한 것은 사람의 꾀가 좋지 못한 데서 나왔다. 오히려 무엇을 말하랴, 오히려 무엇을 말하랴」, 「이제 특별히 경을 상복에서 일으키고 흰 옷에서 뽑아 삼도수군통제사를 준다」 ― 이충무공전서 권1, 기복수삼도통제사교서 · 8월 4일 곡성이 텅 빈 것, 8월 5일 옥과 피난민을 「말에서 내려 앉아 타이른」 것과 현감을 잡아내려 하니 온 것 ― 난중일기 8월 4~5일. 「남녀가 부축하며 가는데 눈물이 나서 볼 수 없었다, 사또가 다시 오셨으니 우리는 살 길이 있다고 부르며 울었다」 ― 초고본 책6 8월 6일(초고본은 날짜가 하루 어긋난다) · 젊은이들이 「우리 사또가 오셨다, 너희는 죽지 않는다」 하고 따라와 순천에서 예순, 보성에서 백스물이 된 것 ― 이분, 이충무공행록 · 8월 7일 병사의 군사가 무너져 돌아가는 데서 말 세 필과 활을 빼앗은 것, 8월 8일 부유창의 재, 구덕령·원종의를 꾸짖은 것, 순천에서 중 혜희에게 의장 첩지를 주고 총통을 묻고 장편전을 군관들이 나누어 진 것 ― 난중일기 8월 7~8일 · 교서를 읽으며 한 생각, 감의 맛, 순천 관사의 밤은 지어냈다 · 이 회차는 이순신의 1인칭이다 · 양력 날짜 ― 한국천문연구원 음양력 변환. 정유년 8월 3일은 양력 9월 13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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