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6,505자) · 1597년 8월 30일~9월 10일, 초계에서 노량까지
어찌할 수 없다
이순신 · 네오
1597년 8월 30일 (음력 7월 18일) 맑음. 새벽에 이덕필과 변홍달이 와서 전했다. 열엿샛날 새벽에 수군이 크게 패하여 통제사 원균과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충청수사 최호와 여러 장수가 많이 해를 입었다고 했다. 통곡을 이기지 못했다. 얼마 있다가 원수가 와서 말했다. 일이 이미 이에 이르렀으니 어찌할 수 없다. 사시(오전 아홉 시에서 열한 시 무렵)까지 이야기했으나 계책을 정하지 못했다. 내가 바닷가로 가서 듣고 보고 정하겠다고 하니 원수가 기뻐했다.
새벽에 왔다.
창호지가 아직 검을 때 마당에서 말굽 소리가 났다. 말이 콧김을 뿜으며 발을 구르는 소리, 누가 안장에서 뛰어내리는 소리가 차례로 들리고 문이 열렸다. 원수가 보낸 이덕필과 변홍달이었다. 둘의 도포 자락은 밤이슬에 젖어 무릎 아래가 검게 늘어져 있었다. 새벽에 달려오는 소식이 좋은 소식이었던 적은 없다. 나는 그들이 입을 열기 전에 몸을 일으켜 앉았다.
열엿샛날 새벽에 수군이 크게 패했다. 통제사 원균과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충청수사 최호와 여러 장수가 많이 해를 입었다. 변홍달의 목소리가 이억기의 이름에서 한 번 갈라졌다.
통곡을 이기지 못했다. 그날 일기에는 그 말만 남기고, 무엇을 울었는지는 쓰지 않았다. 원균을 두고 운 것은 아니었다. 옥에 있던 나에게 우리는 죽을 데를 모른다고 편지를 보낸 이억기를 울었고, 최호를 울었다. 다섯 해 동안 나무를 베어 말리고 못을 치고 노를 깎아 물에 띄운 백 척이 넘는 배를 울었다. 그 배 밑창에서 노를 젓던 격군과 뱃전에서 활을 당기던 사부들, 이름도 수도 모르는 손들을 울었다. 방바닥을 짚은 손바닥으로 찬 기운이 올라왔는데, 나는 한참 동안 그 손을 떼지 못했다.
*
원수가 왔다.
얼마 뒤에 권율이 몸소 왔다. 백의종군하는 사람을 원수가 직접 찾아오는 법은 없었다. 그는 방에 들어서서 앉지도 않고 선 채로 말했다. 일이 이미 이에 이르렀으니 어찌할 수 없다.
정월에 한산도(통영 한산면)로 와서 조정의 명이라며 두 번이나 다그쳤던 사람이다. 원균을 곤장으로 쳐서 부산으로 내보낸 사람도 그였다. 그 입에서 어찌할 수 없다는 말이 나왔다. 수염 끝에 새벽 먼지가 허옇게 앉았고, 눈 밑은 밤을 새운 사람처럼 꺼져 있었다.
나는 원망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원망을 들어야 할 사람은 칠천량 물속에 가라앉았고, 누구를 원망해도 배는 한 척도 떠오르지 않았다.
둘이 마주 앉아 사시(오전 아홉 시에서 열한 시 무렵)까지 이야기했다. 계책은 끝내 정해지지 않았다. 배가 없으면 수군이 없고, 수군이 없으면 무엇을 정해도 허공에 대고 정하는 일이었다. 둘 다 그것을 알았기에 말은 자꾸 같은 자리를 맴돌았다. 그사이 햇빛이 문살을 타고 방바닥으로 조금씩 내려와 무릎께에 닿았다.
그래서 내가 말했다. 바닷가로 가겠다, 가서 듣고 보고 정하겠다. 여기 앉아 있으면 장계와 소문만 들어온다. 종이에 적힌 것으로는 물이 어느 쪽으로 흐르는지, 배가 몇 척 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내 눈으로 봐야 했다.
원수의 얼굴이 풀렸다. 자기가 정하지 못한 것을 누군가 들고 나가 준다는 얼굴이었다. 나는 그 얼굴을 오래 보지 않고 일어섰다.
*
송대립과 유황과 윤선각, 방응원과 현응진과 임영립, 이원룡과 이희남과 홍우공. 아홉이 나를 따랐다. 조카는 뒤에 행록에서 군관 아홉과 아병 여섯이라고 했다. 다섯 해 전 백 척이 넘는 배를 거느리던 사람이 말 탄 군관 아홉을 데리고 초계(합천 초계면)를 나섰다. 길이 좁아 한 줄로 서서 가는데, 고개를 돌리면 줄 끝이 금방 눈에 들어왔다. 그래도 아홉은 세면 셀 수 있는 수였다. 어머니와 비 오는 날에 쓰던 다행이라는 말을, 오랜만에 그 아홉에게 썼다.
삼가(합천 삼가면)에 이르니 새로 온 고을 원이 나와 맞았고, 한치겸이 찾아왔다. 그날 밤 나는 오랜만에 붓을 들어 하루 일을 차례로 적었다.
*
9월 1일 (7월 19일) 비가 계속 내림. 단성 동산산성에 올랐다. 그 형세를 보니 매우 험해 적이 엿볼 수 없었다. 단성에서 잤다.
산성에 올랐다.
비에 젖은 돌계단에는 이끼가 끼어 발이 자꾸 미끄러졌다. 한 손으로 바위 모서리를 짚고 한 손으로 젖은 옷자락을 걷어 쥐고 올랐는데, 상복 삼베가 물을 먹어 어깨를 짓눌렀다. 꼭대기에서 내려다보니 사방이 깎아지른 벼랑이었다. 적이 엿볼 수 없는 자리였다. 다섯 해 동안 물길만 읽던 눈에 산의 형세가 낯설게 들어왔다.
권율은 도내 산성을 고쳐 늙은이와 아이, 남자와 여자를 가리지 않고 산성 안으로 들였다. 바다가 무너지면 산에 기대 버틸 작정이었다. 그 셈이 맞을지는 그날 알 수 없었다. 성벽 돌 틈에서 빗물이 줄줄 새어 나와 발밑으로 흘렀다. 나는 험하다는 것만 일기에 남겼다.
*
9월 2일 (7월 20일) 종일 비가 내림. 고을 원이 와서 보았다. 낮에 진주 정개산성 아래 강가 정자에 이르렀다. 진주목사가 와서 보았다. 굴동 이희만의 집에서 잤다.
9월 3일 (7월 21일) 맑음. 일찍 떠나 곤양군에 이르니 군수 이천추가 있었다. 고을 백성이 농사에 힘써 이른 곡식을 거두기도 하고 보리밭을 갈기도 했다. 오후에 노량(남해 설천면과 하동 사이 물목)에 이르니 거제현령 안위와 영등포(거제 장목면 구영리)만호 조계종 등 열 몇 사람이 와서 통곡했다. 피해 나온 군사와 백성이 울부짖지 않는 이가 없었다. 경상수사는 달아나 피해 보이지 않았다. 우후 이의득이 와서 보았다. 패한 정상을 물으니 사람들이 다 울면서 대장이 적을 보고 먼저 달아난 탓이라고 했다. 거제 배 위에서 자며 거제현령과 사경(새벽 한 시에서 세 시 무렵)까지 이야기했다. 조금도 눈을 붙이지 못했다. 그 때문에 눈병이 났다.
노량에 이르렀다.
곤양(사천 곤양면)을 지날 때 들에서 사람들이 이른 곡식을 베고 있었다. 그 옆에서는 소가 쟁기를 끌며 보리밭을 갈았다. 바다가 무너진 것을 아직 모르는지, 알고도 밭은 갈아야 해서 가는지는 알 수 없었다. 흙 뒤집히는 냄새가 길까지 올라왔다. 나는 말을 세우지 않고 그 옆을 지나 노량으로 갔다.
계사년에 처음 그 이름을 일기에 올렸던 좁은 물목이었다. 거기 거제현령 안위의 배가 매여 있었다. 안위와 영등포만호 조계종, 그리고 열 몇 사람이 나를 보자 뱃전에서 내려와 통곡했다. 뒤에 서 있던 군사와 백성이 한꺼번에 울부짖었다. 옷이 찢긴 사람, 맨발인 사람, 팔에 피 밴 헝겊을 감은 사람이 뒤섞여 있었다.
나는 울지 않았다. 새벽에 초계에서 한 번 울었으면 되었다. 우는 사람들 앞에서 나까지 울면 그들이 기댈 데가 없어진다. 나는 선 채로 그들의 울음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물 냄새에 탄내가 희미하게 섞여 왔는데, 어디서 나는 냄새인지 묻지 않았다.
경상수사 배설은 달아나 피해 보이지 않았다. 열두 척을 끌고 칠천량에서 빠져나온 사람이니 나를 볼 낯이 없었을 것이다. 나도 그를 찾지 않았다.
*
이의득이 왔다.
경상우수영(거제 오비)의 우후였다. 그에게 패한 정상을 물었다. 어떻게 졌는가. 사람들이 다 울면서 말했다. 대장이 적을 보고 먼저 달아난 탓이라고, 다 그렇게 말했다.
나는 그 말에 한마디도 보태지 않았다. 원균에 대해서라면 이제 내가 할 말이 없었다. 사람들의 말은 사람들의 말로 일기에 옮기고, 내 말은 한 줄도 얹지 않았다. 죽은 사람에게 지킬 수 있는 예가 그것 하나였다.
거제 배 위에서 잤다. 다섯 달 만에 올라 누운 배였다. 뱃바닥 널빤지가 물결을 받아 천천히 기울었다 돌아왔고, 그 흔들림이 등뼈를 타고 올라왔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그것을 알아보았다. 안위와 사경(새벽 한 시에서 세 시 무렵)까지 이야기했는데, 거의 다 배 이야기였다. 배설이 끌고 나온 배가 몇 척이냐고 묻자 안위가 열둘이라고 답했다. 백 척이 넘던 것이 열둘이 되어 있었다. 나는 그 수를 속으로 두 번 되뇌었다.
한숨도 눈을 붙이지 못했고, 그 탓에 눈병이 났다. 아침에는 눈꺼풀이 들러붙어 손가락으로 떼어 내야 했다. 따가운 눈으로 내다본 바다는 어제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밤사이 물이 두 번 들고 났다. 배가 있든 없든 물때는 제 시각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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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3일 (7월 22일) 맑음. 아침에 배설이 와서 보았다. 원균이 패망한 일을 많이 말했다. 늦게 남해현령 박대남이 있는 데 이르니 병세가 거의 구할 수 없었다. 오후에 곤양에 이르렀다. 기운이 편치 않아 잤다.
배설이 왔다.
어제는 보이지 않던 사람이 아침에 제 발로 와서 앉았다. 그는 원균이 패망한 일을 많이 말했다. 원균이 어떻게 나갔고 어떻게 배를 돌렸고 어떻게 배를 버렸는지 한참을 말하는 동안, 제 이야기는 몇 마디 섞이지 않았다. 나는 그가 자기 일을 몇 마디나 꺼내는지 속으로 세며 들었다.
배설을 나는 알았다. 을미년에 원균 대신 경상수사로 왔던 사람이다. 제 자랑이 많고 남을 업신여겨서, 누구에게도 마음을 낮춘 적이 없었다. 그런 사람이 한산도에서 내가 일하는 것을 보고는 밖에 나가 이 섬 안에서 호걸을 볼 줄은 몰랐다고 말하고 다녔다. 그 사람이 지금 내 앞에서 원균을 말하면서, 열두 척을 끌고 달아난 일도 그 열두 척이 남았다는 것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나는 안위에게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꺼낼 때가 아니어서 입을 다물었다.
늦게 남해현령 박대남이 누운 데로 갔다. 병세가 거의 구할 수 없었다. 방 안에는 약 달이는 냄새와 식은땀 냄새가 뒤엉켜 있었고, 그는 나를 알아보고도 손을 들어 올리지 못했다. 배가 죽었고, 사람도 하나씩 죽어 가고 있었다. 오후에 곤양에 닿았을 때는 나도 기운이 편치 않아 일찍 몸을 뉘었다.
*
9월 10일 (7월 29일) 비 오다 개다 함. 냇가에 나가 군사를 점검하고 말을 달리게 했다. 원수가 보낸 군사는 다 말이 없고 활과 화살도 없었다. 쓸모가 없었다. 탄식할 만하다.
군사를 점검했다.
원수가 보낸 군사를 냇가에 세웠다. 말도 없고 활도 없고 화살도 없었다. 전날 내린 비에 냇물이 불어 자갈 사이로 흙탕물이 소리 내며 흘렀고, 군사들은 젖은 짚신을 신은 채 그 가에 줄지어 섰다. 말을 달리게 하려 해도 탈 말이 모자랐다. 탄식할 만하다는 말을 그날 두 번이나 썼다.
그래도 사람은 있었다. 사람이 있는 것과 아무도 없는 것은 다르다. 다섯 해 전 여수에서 배를 지을 때도 먼저 있었던 것은 사람이었고, 사람이 있으면 나무를 베어 배를 짓고 대를 깎아 활을 만든다. 오래 걸릴 일이었다. 나는 냇가에 서서 그들의 얼굴을 끝에서 끝까지 천천히 훑었다.
밤에 품에서 편지를 꺼냈다.
이억기가 옥으로 보낸 편지였다. 여러 번 접었다 편 자리가 닳아 보풀이 일었고, 먹 글씨 몇 자는 땀에 번져 있었다. 우리는 죽을 데를 모른다. 초계에서는 차마 펴지 못한 것을 곤양에 와서야 폈다. 그는 칠천량(거제 하청면 칠천도 앞)에서 물에 몸을 던졌다고 했다. 자기는 정하는 사람이 아니라 지키는 사람이라고 하던 그가, 지킬 것을 다 잃었을 때 마지막 한 가지를 스스로 정했다.
편지를 도로 접어 품에 넣었다. 버릴 수 없었다. 그는 우리라고 썼다. 우리 가운데 하나는 죽을 데를 찾아갔고, 하나는 곤양의 어두운 방에 남았다. 열두 척이 어디 있는지는 알았지만, 그 배들을 어디로 끌고 가야 할지는 아직 몰랐다. 품 안의 종이가 숨 쉴 때마다 가슴에 닿아 바스락거렸고,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사료 · 7월 18일 새벽 이덕필과 변홍달이 「열엿샛날 새벽 수군이 크게 패하여 원균·이억기·최호와 여러 장수가 많이 해를 입었다」고 전한 것, 「통곡을 이기지 못했다」, 원수가 와서 「일이 이미 이에 이르렀으니 어찌할 수 없다」 한 것, 사시까지 계책을 정하지 못하다 「내가 바닷가로 가서 듣고 보고 정하겠다」 하니 원수가 기뻐한 것, 송대립 등 아홉과 떠나 삼가에 이른 것 ― 난중일기 정유년 7월 18일(전서본). 「군관 아홉과 아병 여섯」 ― 이분, 이충무공행록 · 7월 19일 단성 동산산성, 20일 진주 정개산성 아래 강가 정자 ― 난중일기 7월 19~20일. 권율이 도내 산성을 고쳐 늙은이와 아이와 남녀를 다 들여 지키게 한 것 ― 류성룡, 징비록 · 7월 21일 곤양 백성이 이른 곡식을 거두고 보리밭을 간 것, 노량에서 안위·조계종 등 열 몇 사람이 와서 통곡하고 군민이 울부짖은 것, 「경상수사는 달아나 피해 보이지 않았다」, 우후 이의득에게 패한 정상을 물으니 「대장이 적을 보고 먼저 달아난 탓」이라 한 것, 거제 배 위에서 사경까지 이야기하다 눈병이 난 것 ― 난중일기 7월 21일 · 7월 22일 배설이 와서 「원균이 패망한 일을 많이 말한」 것, 박대남의 병세 ― 난중일기 7월 22일. 배설이 을미년에 한산도에 와서 「이 섬 안에서 호걸을 볼 줄은 몰랐다」 한 것과 그 성품 ― 행록 · 7월 29일 냇가에서 군사를 점검하니 「원수가 보낸 군사는 다 말이 없고 활과 화살도 없어 쓸모가 없다. 탄식할 만하다」 ― 난중일기 7월 29일 · 이억기가 물에 몸을 던져 죽은 것 ― 징비록. 남은 배 열두 척 ― 행록(「지금 신의 전선이 아직 열둘 있습니다」)과 널리 알려진 사실. 안위가 그 수를 말했다는 것은 지어냈다 · 무엇을 울었는지, 원수의 얼굴, 아홉을 센 것, 이억기의 편지를 꺼낸 것은 지어냈다 · 이 회차는 이순신의 1인칭이다 · 양력 날짜 ― 한국천문연구원 음양력 변환. 정유년 7월은 29일까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