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5,938자) · 1597년 8월 28일, 절영도에서 칠천량까지

칠천량

이순신 · 네오

1597년 8월 28일 (음력 7월 16일) 이날 이순신은 초계(합천 초계면)에 있었다. 저녁에 영암 송진면에 사는 사노 세남이 서생포에서 벌거벗은 몸으로 왔다. 그 까닭을 물으니 7월 초닷새에 우후가 탄 배의 격군으로 칠천량에 대었다가 초엿새에 옥포(거제 옥포동)에 들어가고 초이레 동트기 전에 말곶을 지나 다대포(부산 사하구)에 이르니 왜선 여덟 척이 머물러 있어 여러 배가 곧장 들이치자 왜인이 다 뭍에 내리고 빈 배가 걸려 있어 우리 수군이 끌어내 불을 지르고 그대로 부산 절영도(부산 영도) 바깥 바다로 향했다고 했다.

원균은 절영도 앞바다에 있었다.

초아흐레, 대마도 쪽에서 건너온 배가 바다를 덮었다. 천 척이라고 했다. 수평선 가까이 돛이 겹겹이 서서, 바다 끝이 톱날처럼 들쭉날쭉해 보였다. 그는 그 수를 세지 않았다. 세는 일은 제 몫이 아니라고 여겼고, 그의 몫은 나가는 것이었다. 조정이 나가라고 했다. 앞사람은 나가지 않아서 옥에 갔으니, 같은 죄를 지지 않으려면 나가야 했다. 그래서 여기까지 왔다. 다섯 해 전 앞사람이 대선 둘을 깨뜨린 그 절영도였다.

동풍이 불었다. 파도가 뱃전을 넘어 널빤지 틈으로 스며들었고, 배가 기울 때마다 격군들 발밑에서 짠물이 이쪽저쪽으로 쏠렸다. 갑판의 사부들은 활을 등에 붙인 채 뱃전을 붙들었는데, 물을 먹은 활시위가 늘어져 손가락에 감겼다. 노가 물을 잡지 못하고 허공을 저었다. 다섯 해 동안 노를 저어 온 손이 노 자루를 붙들고 떨었다. 추워서가 아니었다.

뱃사람들이 노를 붙든 채 수군거렸다. 물마루를 벌써 넘었다, 대마도가 코앞이다, 뱃길을 잘못 들었으니 살 도리가 없다. 천만 수병이 적 하나 못 잡고 제 발로 죽을 땅에 들어왔으니 오늘 일은 누가 허물을 지느냐. 원균이 그 말을 듣고 배를 돌리라 했다. 돌린 배는 역류에 걸려 나아가지 않았다. 한산도에서부터 종일 쉬지 못하고 저어 온 팔들이 거슬러 오는 물을 밀었고, 물은 밀리지 않았다. 노 자루에 감아 둔 헝겊이 손바닥에서 터진 물집에 젖어 검게 변해 갔다.

왜선은 맞서지 않았다. 다가가면 흩어지고, 쫓으면 더 멀리 흩어졌다. 가까워질 듯하던 돛이 물마루 너머로 사라지면, 사라진 자리 옆에서 다른 돛이 떠올랐다. 종일 쫓았지만 한 척도 잡지 못했다. 해가 기울 무렵 뱃머리를 돌리는데 바람이 배들을 옆으로 밀었고, 일곱 척이 무리에서 떨어져 서생포(울산 울주군 서생면) 쪽으로 떠내려갔다. 그 가운데 우후의 배가 있었고, 그 배의 노 자리에 세남이 있었다. 서생포에 닿아 뭍에 내리는 사이에 거의 다 죽었다. 세남 혼자 숲으로 들어가 무릎으로 기어서 살아남았다.

원균은 일곱이 떨어져 나간 것만 알았다. 몇 사람이 탔는지, 어디에 닿았는지는 묻지 않았다. 그는 배들이 사라진 쪽을 한 번 건너다보고는 고개를 돌렸다. 남은 배를 돌려 가덕(부산 강서구 가덕도)으로 향했다.

*

가덕에서 물을 길었다.

종일 싸우고 쫓느라 배에 물이 떨어졌다. 격군들이 물통을 지고 뭍에 올랐다. 바위틈에서 새는 물은 차고 가늘어서, 한 통을 채우는 데 한참이 걸렸다. 목이 탄 사내들이 통을 대 놓고 손바닥으로 먼저 받아 마셨다. 그렇게 허리를 굽히고 있을 때, 숲에 숨어 있던 왜가 쏟아져 나왔다. 물통이 굴렀고 사람이 쓰러졌다. 엎어진 통에서 쏟아진 물이 자갈 틈으로 붉게 번졌다. 그날 그렇게 죽은 사람이 사백이라고 뒤에 누가 세었다. 원균은 세지 않았다. 배 위에서는 뭍의 비명이 바람에 끊겨 띄엄띄엄 들려왔다. 그는 물가에 남은 주검을 두고 배를 띄우라고 했다.

배 위로 도로 올라온 격군들은 빈 물통을 발치에 내려놓고 한동안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가덕에서 칠천량(거제 하청면 칠천도 앞)으로 갔다. 거제 북쪽의 좁은 물길이었고, 네 해 전 앞사람이 통선 하나를 잃고 이튿날 밤을 보낸 곳이기도 했다. 그 좁은 물에 백 척이 넘는 배를 대니 뱃전과 뱃전이 맞닿았다. 맞닿은 배는 돌 수도 물러설 수도 없다. 바람이 자고 물이 멎은 밤이었다. 격군들은 노 자리에 그대로 쓰러져 잠들었고, 갯벌에서 비린 냄새가 올라와 뱃바닥에 고였다. 배들이 서로 부딪치며 삐걱거리는 나무 소리만 좁은 물 위에 가득했다.

*

원균은 운주당을 생각했다.

넉 달 전에 그는 한산도(통영 한산면)의 그 집에 들어갔다. 앞사람이 계책을 짜던 집이었다. 류성룡은 뒤에 그가 거기 애첩을 들이고 울타리를 겹으로 둘러 안팎을 막았다고 적었다. 장수들은 그의 얼굴을 보기 어려웠다. 앞사람은 그 집에서 밤낮 장수들과 병사를 의논했고, 졸병이라도 군사 일로 할 말이 있으면 와서 고하게 했다. 원균은 그것을 다 바꾸었다. 앞사람이 부리던 사람은 물리쳤고, 다섯 해 전 자기가 달아나던 꼴을 다 본 이영남을 누구보다 미워했다. 그는 술을 마셨고, 마시지 않는 날이 드물었다. 겹울타리 안의 방에서는 먹 냄새 대신 식은 술 냄새가 났다.

군중에는 몰래 도는 말이 있었다. 적을 만나면 달아나는 수밖에 없다. 장수들은 서로 비웃으며 품하러 오지 않았고, 호령이 서지 않았다.

배설이 말렸었다. 부산은 물길이 멀고 적이 많으니 나가면 안 된다고. 원균은 듣지 않았다. 그러자 원수가 나가라며 통제사에게 곤장을 쳤다. 맞고 나서 그는 나갔다. 나가지 않으면 옥이고 나가면 바다였다. 그는 옥보다 바다를 골랐다. 매 맞은 자리가 아직 욱신거려, 그는 이 밤에도 앉지 못하고 뱃전에 기대 서 있었다. 그 셈이 맞았는지는 이 밤이 지나야 알 수 있었다.

그는 앞사람을 생각했다. 옥에서 나와 흰 옷을 입고 지금 초계에 있다는 사람. 그 사람이 다섯 해 동안 하지 않은 일을 그는 넉 달 만에 다 했다. 부산으로 나갔고, 돌아왔고, 좁은 물에 배를 댔다. 하지 않은 데는 까닭이 있었을 것이다. 곡식 구천구백열네 석을 두 번씩 세어 보던 사람이었다. 왜 두 번 세는지, 원균은 넉 달 전에 물었어야 했다.

*

밤중에 왜가 왔다.

적은 웅천(창원 진해구 웅천동)에서 밤을 틈타 떴다. 도도 다카토라와 가토 요시아키가 누가 먼저 조선 배에 오르나를 다투며 빠른 배로 앞질러 왔다. 와키자카도 있었다. 다섯 해 전 한산도에서 지고 겨우 목숨만 건져 김해로 빠져나갔던 그가, 이번에는 큰 배를 타고 왔다.

어둠 속에서 배가 배에 부딪는 둔한 소리가 났다. 곧이어 갈고리가 뱃전에 걸리는 쇳소리가 뒤따랐다. 잠에서 깬 격군들은 처음에 누가 어디서 소리를 지르는지도 알지 못했다. 조선 배는 높아서 다섯 해 동안 저들이 오르지 못했다. 그러나 붙어 있는 배는 오를 수 있었다. 저들은 붙은 배에서 붙은 배로 건너며 칼을 휘둘렀다. 어둠에서 날아온 화살이 돛에 박히는 소리가 소나기 떨어지는 소리처럼 이어졌다.

원균은 뱃머리에 서 있었다. 누가 그의 소매를 잡아끌며 무어라 외쳤지만, 쇠붙이 부딪는 소리와 비명에 묻혀 한 마디도 들리지 않았다. 백 척이 넘는 배가 좁은 물 위에서 타올랐고, 불빛이 검은 물에 두 겹으로 흔들렸다. 송진 타는 냄새와 젖은 무명 타는 냄새가 섞여 바람도 없이 목구멍으로 밀려들었다. 평생 세지 않던 사람이 그 밤에 배를 세었다. 하나, 둘, 셋. 넷에서 그만두었다. 다섯 해 전 한산도에서 일흔세 척이 타는 것을 산 위에서 세다가 그만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그는 알지 못했다.

*

뭍으로 올랐다.

그는 배를 버렸다. 뱃전에서 뛰어내려 허리까지 차는 갯물을 헤치고 칠천도(거제 하청면) 기슭으로 올랐다. 갯벌이 발목을 붙잡아 한 걸음 뗄 때마다 신이 벗겨질 듯했고, 등 뒤에서는 타는 배의 열기가 목덜미에 닿았다. 통제사가 마지막으로 내린 명은 배를 버리라는 것이었다. 이억기가 뭍에 올랐는지, 최호가 올랐는지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뭍에는 시마즈가 군사 이천을 깔아 두고 있었다. 배를 버리고 올라오는 사람을 모조리 죽였다고 일본 쪽 기록은 적는다.

이억기는 배에서 물로 몸을 던졌다. 옥에 있던 앞사람에게 우리는 죽을 데를 모른다고 편지를 보냈던 그가, 죽을 데를 스스로 골랐다. 칠천량의 물이었다. 최호도 죽었다. 배설은 배 열두 척을 거느리고 달아났다. 그의 배들이 불빛 바깥의 어둠으로 노를 저어 빠져나갈 때, 뒤에서 부르는 소리를 돌아본 사람은 없었다. 그가 끌고 간 열두 척이 나중에 무엇이 될지, 그 밤에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원균이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는 남은 기록이 없다. 배를 버리고 달아나다 죽었다는 한 줄뿐이다. 누가 베었는지, 마지막에 무엇을 보았는지는 어디에도 없다. 그 마지막을 여기서 지어내지 않는다. 그는 세지 않는 사람이었고, 백 척이 넘는 배를 하룻밤에 잃은 뒤 그 수를 끝내 세지 못한 채 죽었다.

*

세남은 살았다.

서생포 숲에서 무릎으로 기어 나온 그는 옷을 다 잃은 몸으로 초계까지 걸었다. 산길의 모난 돌이 맨발을 찍었고, 밤이면 풀잎의 이슬이 벗은 등을 적셔 이가 딱딱 부딪쳤다. 발바닥이 갈라지고 무릎 가죽이 벗겨져 있었다. 마을 가까이 와서는 사람 눈을 피해 해가 진 뒤에야 길로 나섰다. 흰 옷 입은 사람 앞에 그가 섰다.

흰 옷이 까닭을 물었다. 세남은 초닷새부터 말했다. 초엿새의 옥포, 초이레 다대포의 여덟 척, 절영도 앞바다의 천 척, 떠내려간 일곱 척, 숲, 그리고 무릎. 말하는 동안 그의 턱이 자꾸 떨려 말끝이 부서졌다. 흰 옷은 끝까지 들었고, 그날 밤 일기에 지극히 놀랍다고 썼다. 그리고 한 줄을 더 보탰다. 우리나라가 믿는 것은 오직 수군인데 수군이 이와 같으니.

거기서 붓이 멈췄다. 이와 같으니, 그다음은 쓰지 않았다. 붓끝에 머금은 먹이 마르도록 그는 종이 위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흰 옷은 진에 있던 옷을 가져다 세남에게 입히고 밥을 먹였다. 우후의 배에서 노를 젓던 손이 밥그릇을 받쳐 들었다. 손바닥에는 노 자루 모양대로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뜨거운 그릇을 쥔 손가락이 한동안 떨리다가 멎었다. 흰 옷은 세남이 그릇을 비울 때까지 곁에 앉아 있었다.

사료 · 7월 16일 저녁 세남이 서생포에서 벌거벗고 와서 「초닷새 칠천량, 초엿새 옥포, 초이레 다대포에서 왜선 여덟 척을 태우고 절영도 바깥 바다로 향하다 대마도에서 건너온 천여 척을 만났는데 왜선이 흩어져 피해 잡지 못했고, 세남이 탄 배와 여섯 척이 배를 다루지 못해 서생포에 밀려 뭍에 내리다 거의 다 죽고 혼자 숲에 들어가 무릎으로 기어 살았다」고 한 것, 「우리나라가 믿는 것은 오직 수군인데 수군이 이와 같으니」 ― 난중일기 정유년 7월 16일(전서본) · 원균이 원수에게 곤장을 맞고 분을 품고 부산으로 나간 것, 뱃사람들이 「물마루를 지나 대마도가 가깝다, 오늘 일은 누가 허물을 지는가」 한 것, 배를 돌리다 전라우수영 배 일곱 척이 동해로 표류한 것 ― 조경남, 난중잡록 정유년 7월 16일(국역). 절영도의 바람과 파도, 「한산도에서 종일 노를 저어 쉬지 못한」 것, 가덕에서 물 긷다 죽은 사백, 칠천에 배를 댄 것, 이억기가 물에 몸을 던져 죽고 배설이 달아난 것 ― 류성룡, 징비록(정한위략이 인용). 징비록은 이 싸움을 8월 7일로 적으나 잘못이다 · 원균이 한산도 운주당에 애첩을 두고 겹울타리로 막은 것, 앞사람이 쓰던 사람을 물리치고 이영남을 미워한 것, 「적을 만나면 달아날 수밖에」 하고 군중이 수군거린 것, 이순신이 운주당에서 밤낮 장수들과 병사를 논한 것 ― 징비록. 행록은 「7월 16일 원균이 과연 패하고 이억기가 죽고 삼도 수군이 적에게 전멸했다」고만 적는다 · 도도 다카토라와 가토 요시아키가 빠른 배로 앞질러 첫 번째를 노리고 와키자카가 열여섯 척을 잡은 것, 시마즈가 뭍에 이천을 깔아 배를 버리고 오른 조선군을 다 죽인 것, 가토와 도도가 첫 번째를 두고 칼을 뽑을 뻔한 것 ― 협판가전기·정한위략. 일본 기록은 날짜를 7월 7일·15~16일 등으로 서로 다르게 적는다 · 「원균이 배를 버리고 달려가 죽었다」 ― 이충무공전서 권수 어제 비명(「元均走死」). 그 마지막을 지어내지 않았다 · 절영도의 바람과 떨리는 손, 원균이 운주당과 앞사람을 생각한 것, 세다가 그만둔 것, 세남에게 옷을 준 것은 지어냈다 · 원균의 장면은 3인칭, 세남의 장면은 이순신 쪽 3인칭이다 · 양력 날짜 ― 한국천문연구원 음양력 변환. 7월 16일은 양력 8월 28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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