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5,746자) · 1597년 7월 18일~8월 27일, 초계 원수 진에서
초계
이순신 · 네오
1597년 7월 18일 (음력 6월 4일) 맑음. 일찍 떠났다. 떠날 때 고을 원이 문안 편지와 노자를 보내왔다. 합천 땅에 이르러 말을 쉬었다. 오 리쯤 가니 갈림길이 있었다. 한 길은 곧장 고을로 들어가고 한 길은 초계로 갔다. 강을 건너지 않고 십 리를 가니 원수의 진이 바라보였다. 문보의 집에 묵었다. 개현을 지나오는데 기암이 천 길이고 강물이 굽이쳐 흘렀다.
갈림길이 있었다.
아침 볕에 길 위의 흙이 하얗게 말라 있었다. 한 길은 합천 고을로 들어가고 한 길은 초계(합천 초계면)로 갔다. 나는 원수가 있는 초계 쪽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고를 것도 없는 갈림길이었다. 다섯 해 동안은 가는 길도 내가 정했는데, 오늘은 정해진 길이 먼저 있었고 나는 그 길을 따라갔다.
강을 건너지 않고 십 리를 가자 원수의 진이 바라보였다. 뭍의 진이었다. 다섯 해 만에 배 없는 진을 보았다. 돛대도 노도 없는 진은 땅에 납작하게 엎드려 있었고, 그 가벼움이 낯설었다.
문보의 집에 묵었다. 오는 길에 개현을 지났는데 기암이 천 길로 솟았고 그 아래로 강물이 굽이쳐 흘렀다. 바다는 물때를 따라 들고 나지만 강은 한쪽으로만 흐른다. 누런 흙빛 물이 바위 밑을 휘감아 가는 것을 나는 말 위에서 오래 보았다. 물살이 바위에 부딪는 소리는 파도 소리보다 낮고 고르게 이어졌다. 어영담이 살아 있었다면 이 강을 손바닥에 그리지 않았을 것이다. 한쪽으로만 가는 물은 그에게 물길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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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2일 (6월 8일) 맑음. 오후에 원수가 진에 이르렀다. 나는 곧 가서 보았다. 원수와 이야기를 오래 나누었다. 원수가 박성이 올린 상장의 초고를 보여 주었다. 박성이 원수가 일 처리를 소홀히 한 것을 많이 진술했다. 원수가 스스로 편치 않아 체찰사 앞에 글을 올렸다고 했다. 저물어 돌아왔다. 기운이 편치 않아 저녁을 거르었다.
원수가 왔다.
오후에 권율이 진에 이르렀고 나는 곧 가서 보았다. 지난겨울 한산도(통영 한산면)에 와서 조정의 명이라고 두 번 말한 사람이었다. 오래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날 일기에는 그 가운데 한 가지만 남겼다. 박성의 상장이었다.
박성이 상소를 올려 원수가 일을 소홀히 처리했다고 많이 진술했다. 원수는 그 초고를 내 앞에 펼쳐 보였다. 종이 가장자리가 손때로 거뭇했다. 여러 번 꺼내 읽은 종이였다. 원수는 스스로 편치 않아 체찰사에게 글을 올렸다고 했다. 제 흠을 적은 글을 흰 옷 앞에 내놓는 원수의 속을 나는 짐작할 수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헐뜯긴다는 말을, 원수는 입으로 하지 않고 종이로 했다. 위로가 되지는 않았다. 그래도 보여 준 것은 원수의 예였다.
저물어 돌아왔다. 기운이 편치 않아 저녁을 걸렀다. 상을 물리자 빈속에서 신물이 올라왔다. 붓을 다시 잡은 지 두 달 남짓이었고, 그동안 쓴 것을 셈해 보면 죽는다는 말이 둘, 눈물이 셋, 거른 저녁이 하나였다. 세는 버릇이 돌아온 것이 반가운지 나는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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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9일 (6월 26일) 맑음. 중군장 이덕필과 변홍달과 심준 등이 와서 보았다. 아산 종 평세가 들어왔다. 영연은 평안하고 각 집 위아래가 다 평안하다는 기별을 얻었다. 장삿날은 7월 27일과 8월 초나흘로 가려 잡았다고 했다. 그리움이 지극하다. 슬프고 애통한 것을 말로 할 수 있으랴.
평세가 왔다.
아산 종 평세가 영연에서 먼 길을 걸어왔다. 짚신 바닥이 닳아 발바닥 굳은살이 드러나 있었다. 영연은 평안하고 각 집 위아래가 다 평안하다고 했다. 빈소가 평안하다는 말은 관이 평안하다는 말이었고, 관은 늘 평안했다. 나는 들은 대로 평안하다고만 썼다.
장삿날은 7월 27일과 8월 초나흘 가운데서 가려 잡았다고 했다. 흰 옷은 아산에 갈 수 없었다. 고를 수 없는 사람 앞에 날 둘이 놓였다. 석 달을 가물어 농사가 이미 끝났다는 말도 평세가 했다. 전서본에는 빠지고 초고본에만 남은 말이다. 어머니를 묻을 땅이 말라 갈라져 있었다.
그리움이 지극하다. 슬프고 애통한 것을 말로 할 수 있으랴. 그날 밤 나는 이 말을 두 번 쓰고서야 붓을 놓았다. 두 번이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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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5일 (7월 3일) 맑음. 정읍 군사 이양과 최언환과 건손 세 사람이 심부름하러 왔다. 합천군수 오운이 와서 산성의 일을 많이 말했다. 오후에 원수 진에 갔더니 좌병사 군관이 항복한 왜 둘을 압송해 왔다. 청정이 거느린 자라고 했다.
가토의 사람 둘이 왔다.
오후에 원수 진에 갔더니 좌병사 군관이 항복한 왜 둘을 끌고 와 있었다. 청정, 곧 가토가 거느리던 자들이라고 했다. 둘 다 젊었다. 볕에 그을린 목덜미에 오랏줄 자국이 벌겋게 나 있었고, 땀에 전 옷에서 쉰내가 났다. 원수가 물었고 나는 묻지 않았다. 흰 옷은 옆에 서서 들었다. 무엇을 물었는지는 일기에 남기지 않았다.
정월에 요시라가 가리키겠다던 그 배를 타고 가토가 왔다. 그 가토의 사람이 지금 항복해 무릎을 꿇고 있었다. 항복하는 자가 나오면 그 진의 속사정이 보인다. 다섯 해 전 영등(거제 장목면 구영리)의 왜 하나가 항복해 왔을 때 나는 그 뜻을 일기에 적었다. 오늘도 같은 생각을 했으나 종이에 옮기지 않았다. 흰 옷의 생각은 종이로 가지 않았다.
정읍(전북 정읍) 군사 셋이 심부름하러 왔다. 수사가 되기 전 내가 현감으로 있던 고을의 군사들이었다. 흰 옷을 도우러 먼 길을 온 사람들이라 나는 그 도움을 받았다. 받는 것이 흰 옷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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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2일 (7월 10일) 맑음. 열과 변존서를 보내는 일로 앉아서 새벽을 기다렸다. 정을 스스로 억누를 수 없어 통곡하며 보냈다. 황 종사관이 와서 이야기를 한참 했다. 저녁에 홀로 빈 방에 앉으니 회포가 몹시 나빴다. 밤이 되도록 잠들지 못했다.
열을 보냈다.
둘째 아들 울의 이름은 열로 바꾸었다. 싹이 처음 나고 초목이 무성히 자란다는 뜻이다. 순천에서 그 글자를 고르며 자의가 매우 아름답다고 썼다. 그 아들을 어머니 빈소가 있는 아산(충남 아산)으로 보냈다. 장사를 지내야 했는데, 아버지는 흰 옷이라 갈 수 없어 아들이 대신 갔다.
밤새 앉아서 새벽을 기다렸다. 닭이 울기 전부터 마당에서 말에게 여물을 먹이는 소리가 났다. 콩 씹는 소리, 굴레의 쇠고리가 부딪는 소리, 변존서가 짐을 묶으며 새끼줄을 당기는 소리가 차례로 들렸다. 정을 억누를 수 없어 통곡하며 보냈다. 빈소에서 했던 통곡을 아들을 보내며 다시 했다. 아들은 그 빈소에 가서 또 통곡할 것이다. 아버지의 울음을 아들이 싸 들고 가서 빈소에 내려놓는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이 위로가 되지는 않았다.
황 종사관이 와서 한참 이야기했는데 무슨 이야기였는지는 남기지 않았다. 저녁에 홀로 빈 방에 앉았다. 열다섯 해 전 충청도 병영의 방이 떠올랐다. 옷과 이불밖에 없던 방이었다. 그때는 가진 것이 없어서 빈방이었고, 오늘은 아들이 떠나서 빈방이었다. 회포가 몹시 나빴다. 밤이 되도록 잠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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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6일 (7월 14일) 맑음. 황 종사관이 정인서를 보내 문안했다. 김해에서 적에게 붙은 사람 김억의 고목을 보여 주었다. 초이렛날 왜선 오백여 척이 부산에서 나오고 초아흐렛날 왜선 천 척이 세력을 합쳐 우리 수군과 절영도 앞바다에서 싸웠다고 했다.
고목이 왔다.
황 종사관이 정인서를 보내 문안하면서 고목 한 장을 보여 주었다. 김해 사람 김억, 적에게 붙은 사람이 써 보낸 종이였다. 접힌 자리가 닳아 보풀이 일었고 글씨는 급하게 흘려 쓴 글씨였다. 적에게 붙은 사람의 글을 믿을 수 있는가. 원균에게서 오는 말은 다 믿을 수 없다고 했던 나였다. 믿을지 말지 정하지 못한 채 읽었다.
초이렛날 왜선 오백여 척이 부산에서 나왔다. 초아흐렛날 천 척이 세력을 합쳐 우리 수군과 절영도(부산 영도) 앞바다에서 싸웠다.
우리 수군이라는 말이 목에 걸렸다. 다섯 해 동안 지은 백이 넘는 배가 절영도 앞바다에서 천 척과 맞섰다. 다섯 해 전 부산 앞바다로 쳐들어가 대선 둘을 깨뜨린 바로 그 물이었다. 어떻게 끝났는지는 고목에 없었다. 나는 비어 있는 그 대목을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원균이 나갔다. 조정이 나가라 했고, 앞사람이 나가지 않아 옥에 갔으니 그는 나갔다. 부르는 데로 가면 부른 사람이 기다린다는 것을 알아서 나는 나가지 않았다. 알고 안 나간 사람은 옥에 갔고, 모르고 나간 사람은 절영도 앞바다에 있었다. 그 끝을 짐작하는 사람은 흰 옷을 입고 초계에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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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7일 (7월 15일) 비 오다 개다 함. 이 중군 덕필이 왔다. 수군 스무여 척이 적에게 패했다고 들었다. 통분하고 통분하다.
스무여 척이 패했다.
비가 오다 개다 하는 날이었다. 처마 끝에 물방울이 매달렸다가 떨어지기를 되풀이했다. 원수의 중군 이덕필이 와서 들은 것을 전했다. 수군 스무여 척이 적에게 패했다. 다섯 해 동안 쓰지 않던 패라는 글자를 그날 썼다. 웅포(창원 진해구 웅천 앞 포구)에서 통선 하나가 뒤집힌 일은 쓴 적이 있어도, 스무 척이 넘게 진 일은 처음이었다. 백이 넘는 배 가운데 스무여 척이면 나머지는 어디 있는가. 고목에도 없었고 이덕필도 몰랐다.
통분하고 통분하다. 같은 말을 두 번 이어 썼다. 석 달 동안 붓끝에서 나온 말은 통곡이었는데 그날 통분이 돌아왔다. 다섯 해 전 웅포에서 쓴 통분은 적이 나오지 않아서였다. 오늘의 통분은 우리 배가 사라져서였다. 배가 사라지는 통분은 처음이었다.
빈 방에 앉아서 셌다. 백이 넘는 배에서 스무여 척을 빼면 몇이 남는지, 남은 배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수는 아무리 꼽아도 손가락 끝에서 흩어졌다.
내일은 또 종이가 올 것이다. 종이는 늘 왔다. 나는 뒷면까지 뒤집어 읽을 그 종이를 기다렸다. 다섯 해 동안 정하는 사람이었는데 초계에서는 기다리는 사람이었다. 기다리는 것도 지키는 것이라고 이억기는 말했다. 그 이억기가 지금 어디 있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아마 절영도 앞바다 어디쯤일 것이다. 우리는 죽을 데를 모른다고 그가 옥으로 보낸 편지를 나는 초계까지 품에 넣어 왔다. 몸의 온기에 눅눅해진 종이가 가슴께에서 만져졌다. 꺼내지 않았다. 꺼내 펴면 그 말이 빈 방에 나와 앉을 것 같았다. 아직은 아니었다.
사료 · 6월 4일 합천 갈림길에서 초계로 가 원수의 진을 바라보고 문보의 집에 묵은 것, 개현의 기암과 강물 ― 난중일기 정유년 6월 4일(전서본) · 6월 8일 원수가 진에 와서 박성이 「원수가 일 처리를 소홀히 했다」고 올린 상장의 초고를 보여 주고 체찰사에게 글을 올렸다고 한 것, 「기운이 편치 않아 저녁을 거르었다」 ― 난중일기 6월 8일 · 7월 3일 정읍 군사 셋이 온 것, 좌병사 군관이 가토가 거느리던 항복한 왜 둘을 압송해 온 것 ― 난중일기 7월 3일 · 6월 26일 아산 종 평세가 와서 「영연이 평안하고 장삿날은 7월 27일과 8월 초나흘로 가려 잡았다」고 한 것, 「그리움이 지극하다. 슬프고 애통한 것을 말로 할 수 있으랴」 ― 난중일기 6월 26일(전서본). 「세 달 가물어 농사가 끝났다」와 「비통가언」을 두 번 적은 것 ― 초고본 · 7월 10일 열과 변존서를 아산으로 보내려고 앉아 새벽을 기다리며 「정을 억누를 수 없어 통곡하며 보냈다」, 「저녁에 홀로 빈 방에 앉으니 회포가 몹시 나빴다」 ― 난중일기 7월 10일. 울의 이름을 열로 바꾼 것 ― 5월 3일 · 7월 14일 황 종사관이 보여 준 김억의 고목(초이레 왜선 오백여 척이 부산에서 나오고 초아흐레 천 척이 우리 수군과 절영도 앞바다에서 싸움), 15일 이덕필이 「수군 스무여 척이 패했다」고 전한 것과 「통분하고 통분하다」 ― 난중일기 7월 14~15일 · 강과 바다의 셈, 빈방의 비교, 이억기의 편지를 품에 지녔다는 것은 지어냈다 · 이 회차는 이순신의 1인칭이다 · 양력 날짜 ― 한국천문연구원 음양력 변환